於陵子終之妻也
注+① 楚, 蓋齊字之誤. 古之於陵, 今長山縣濟南所屬, 有於陵仲子墓. 子終, 史記集解引作子仲, 戰國策亦爾. 仲․終音同, 古字通也.라 楚王聞於陵子終賢
하고 欲以爲相
하여 使使者持金百鎰
하여 往聘迎之
한대 於陵子終曰 僕有箕帚之妾
하니 請入與計之
호리이다
卽入하여 謂其妻曰 楚王欲以我爲相하여 遣使者持金來하니 今日爲相하면 明日結駟連騎하고 食方丈於前하리니 可乎아
妻曰 夫子織屨以爲食
하고 與物無治也
注+① 韓詩外傳無非字, 又作北郭先生事.하며 左琴右書
하니 樂亦在其中矣
라
夫結駟連騎
라도 所安不過容膝
이요 食方丈於前
이라도 甘不過一肉
注+② 韓詩外傳甘上有所字.이어늘
今以容膝之安
과 一肉之味
로 而懷楚國之憂
注+③ 【集注】 外傳懷作殉.니 其可乎
아 亂世多害
하니 妾恐先生之不保命也
라하노이다
於是子終出謝使者而不許也
注+④ 【集注】 自楚王至此, 皆見外傳.하고 遂相與逃
하여 而爲人灌園
이라
君子謂於陵妻爲有德行
이라하니라 詩云 愔愔良人
注+① 此亦魯詩, 毛詩作厭厭.이여 秩秩德音
이라하니 此之謂也
라
제齊나라
오릉자종於陵子終의 아내이다.
注+① ‘초楚’는 아마 ‘제齊’자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옛날의 오릉於陵은 지금의 장산현長山縣 제남濟南에 속하니, 오릉중자於陵仲子의 묘소가 있다. ‘자종子終’은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 ‘자중子仲’으로 되어 있고, ≪전국책戰國策≫ 또한 그러하다. 중仲과 종終은 독음이 같으니, 고자古字에 통용하였다. 초楚나라 왕이 오릉자종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재상으로 삼고자 하여
사자使者에게
금金 100
일鎰을 가지고 가서 초빙해오도록 하였다. 오릉자종이 말하기를 “저에게 키질하고 비질하는 아내가 있으니, 청컨대 방에 들어가 상의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초楚나라 왕이 나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금金을 가지고 왔소. 오늘 재상이 되면 내일 4필 말이 끄는 높은 수레가 늘어서고, 진수성찬이 앞에 가득할 것이니, 좋지 않겠소.”라고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은 신발을 만들어 양식을 마련하고
외물外物과 상관하지 않으며
注+① 또 북곽선생北郭先生의 일로 되어 있다. 왼쪽에는 거문고가 있고 오른쪽에는 서책이 있으니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4필 말이 끄는 높은 수레가 늘어서더라도 편안한 바는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공간에 불과하고, 진수성찬이 앞에 가득하더라도 달게 먹는 바는 한 점 고기에 불과합니다.
注+② ≪한시외전≫에는 ‘감甘’ 위에 ‘소所’자가 있다.
그런데 지금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편안함과 한 점 고기의 맛을 위해서
초楚나라의 근심을 품어야 하는데
注+③ 【집주集注】 ≪한시외전≫에는 ‘회懷’가 ‘순殉’으로 되어 있다. 어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난세亂世에는 화란이 많으니,
첩妾은 선생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릉자종於陵子終이 방에서 나와서
사자使者에게 사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注+④ 【집주集注】 ‘초왕楚王’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한시외전≫에 보인다. 드디어 아내와 함께 도망하여 남의 정원에 물을 대는 일을 하였다.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
오릉於陵의 아내는
덕행德行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남의 정원에 물대는 일을 하였도다
초어릉처楚於陵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