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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1)

열녀전보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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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楚於陵妻
於陵子終之妻也注+① 楚, 蓋齊字之誤. 古之於陵, 今長山縣濟南所屬, 有於陵仲子墓. 子終, 史記集解引作子仲, 戰國策亦爾. 仲․終音同, 古字通也. 楚王聞於陵子終賢하고 欲以爲相하여 使使者持金百鎰하여 往聘迎之한대 於陵子終曰 僕有箕帚之妾하니 請入與計之호리이다
卽入하여 謂其妻曰 楚王欲以我爲相하여 遣使者持金來하니 今日爲相하면 明日結駟連騎하고 食方丈於前하리니 可乎
妻曰 夫子織屨以爲食하고 與物無治也注+① 韓詩外傳無非字, 又作北郭先生事.하며 左琴右書하니 樂亦在其中矣
夫結駟連騎라도 所安不過容膝이요 食方丈於前이라도 甘不過一肉注+② 韓詩外傳甘上有所字.이어늘
今以容膝之安 一肉之味 而懷楚國之憂注+③ 【集注】 外傳懷作殉. 其可乎 亂世多害하니 妾恐先生之不保命也라하노이다
於是子終出謝使者而不許也注+④ 【集注】 自楚王至此, 皆見外傳.하고 遂相與逃하여 而爲人灌園이라
君子謂於陵妻爲有德行이라하니라 詩云 愔愔良人注+① 此亦魯詩, 毛詩作厭厭.이여 秩秩德音이라하니 此之謂也
頌曰
於陵處楚
王使聘焉이로다
入與妻謀하니
懼世亂煩이로다
進往遇害리니
不若身安이로다
左琴右書하고
爲人灌園이로다


2-15 나라 의 아내
나라 오릉자종於陵子終의 아내이다.注+① ‘’는 아마 ‘’자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옛날의 오릉於陵은 지금의 장산현長山縣 제남濟南에 속하니, 오릉중자於陵仲子의 묘소가 있다. ‘자종子終’은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 ‘자중子仲’으로 되어 있고, ≪전국책戰國策≫ 또한 그러하다. 은 독음이 같으니, 고자古字에 통용하였다. 나라 왕이 오릉자종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재상으로 삼고자 하여 사자使者에게 100을 가지고 가서 초빙해오도록 하였다. 오릉자종이 말하기를 “저에게 키질하고 비질하는 아내가 있으니, 청컨대 방에 들어가 상의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나라 왕이 나를 재상으로 삼고자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을 가지고 왔소. 오늘 재상이 되면 내일 4필 말이 끄는 높은 수레가 늘어서고, 진수성찬이 앞에 가득할 것이니, 좋지 않겠소.”라고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은 신발을 만들어 양식을 마련하고 외물外物과 상관하지 않으며注+북곽선생北郭先生의 일로 되어 있다. 왼쪽에는 거문고가 있고 오른쪽에는 서책이 있으니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4필 말이 끄는 높은 수레가 늘어서더라도 편안한 바는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공간에 불과하고, 진수성찬이 앞에 가득하더라도 달게 먹는 바는 한 점 고기에 불과합니다.注+② ≪한시외전≫에는 ‘’ 위에 ‘’자가 있다.
그런데 지금 무릎을 용납할 정도의 편안함과 한 점 고기의 맛을 위해서 나라의 근심을 품어야 하는데注+③ 【집주集注】 ≪한시외전≫에는 ‘’가 ‘’으로 되어 있다. 어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난세亂世에는 화란이 많으니, 은 선생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오릉자종於陵子終이 방에서 나와서 사자使者에게 사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注+④ 【집주集注】 ‘초왕楚王’으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한시외전≫에 보인다. 드디어 아내와 함께 도망하여 남의 정원에 물을 대는 일을 하였다.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오릉於陵의 아내는 덕행德行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점잖고 점잖은 양인良人이여,注+① 이 또한 ≪노시魯詩≫이니, ≪모시毛詩≫에는 〈‘음음愔愔’이〉 ‘염염厭厭’으로 되어 있다. 덕음德音이 질서정연하도다.”
라고 하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은 다음과 같다.
오릉於陵나라에 거처할 적에
왕이 사자使者 보내 초빙하였도다
들어가 아내와 상의하니
세상이 혼란함을 두려워하였도다
나아가면 해를 만날 것이니
몸이 편안함만 같지 못하도다
왼쪽에는 거문고 오른쪽에는 서책을 두고
남의 정원에 물대는 일을 하였도다
초어릉처楚於陵妻초어릉처楚於陵妻


역주
역주1 於陵子終 : 於陵은 지명으로, 지금의 山東省 長陽 남쪽에 있다. 子終은 戰國時代의 隱士로 田仲, 陳仲, 子仲 등으로 불린다. ≪孟子≫ 〈滕文公 下〉와 皇甫謐의 ≪高士傳≫에 의거하면, 陳仲子는 자는 子終이고 齊나라 사람으로, 兄 戴가 蓋 땅에서 받는 祿俸이 萬鍾이었는데 형의 녹봉을 不義한 녹봉으로 여기고 형의 집을 不義한 집으로 여겨 곧 齊나라를 떠나 楚나라로 가서 於陵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역주2 (楚)[齊] : 저본에는 ‘楚’로 되어 있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齊’로 바로잡았다.
역주3 韓詩外傳에는……없고 : ≪한시외전≫ 권9 23장에는 부인이 “당신이 신발을 만들어 양식을 마련하여 비록 죽을 먹고 낡은 신발을 신고 살지만 조금도 마음 울적한 근심이 없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外物과 상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婦人曰 夫子以織屨爲食 食粥毚履 無怵惕之憂者何哉 與物無治也]”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역주4 (非) : 저본에는 ‘非’가 있으나, ≪韓詩外傳≫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5 [所] : 저본에는 ‘所’가 없으나, ≪韓詩外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6 점잖고……질서정연하도다 : ≪詩經≫ 〈秦風 小戎〉에 보인다.

열녀전보주(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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