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揚子法言(1)

양자법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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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법언(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8. 或曰 이어늘 玄何以作 注+述而不作 玄何以作:咸曰 “揚子著太玄經, 所謂玄者一也. 天地陰陽參比, 一生三, 取其三數, 故有三方. 三生九, 故有九州. 九生二十七, 故有二十七部. 二十七生八十一, 故有八十一家. 遂爲八十一首, 故有二百四十三表, 七百二十九贊. 每二贊, 一日七百二十九贊, 而當周天之度. 一歲之紀節候‧鍾律‧星斗‧五行咸著焉. 今或人以爲孔子述而不作, 疑太玄不當作, 故問之.” ○祕曰 “孔子述而不作, 太玄何以作.” 曰 其事則述이요 其書則作 注+述而不作……其書則作:言昔老彭, 好述古事, 孔子比之, 但述而不作. 今太玄, 非古事, 乃自成一家之書, 故作之也. 或曰 “孔子述事者有矣, 然何嘗作書乎.” ○咸曰 “當孔子之世, 周室下衰, 詩書淆亂, 禮樂崩壞, 先王之制, 無一而正者. 故孔子區區於道, 以述古事. 刪詩書定禮樂, 約史記而修春秋, 復與諸侯門人, 更議典制, 然後各得其所. 故明道立敎, 盡在是矣. 何須更作書哉. 故所以述而不作者, 蓋此也, 非不當作之也. 當子雲之時則不然, 六經皆更聖人之所定, 漢興已久, 稍爲諸儒討正, 故無古事可述. 而屈身莽朝, 自非作書著成一家, 則何以明其道哉.” ○祕曰 “以爲經莫大於易, 故作太玄. 自子辰申子, 冠之以甲分二十七章爲一會, 八十一章爲一統, 從子至辰, 自辰至申, 自申至子, 凡四千六百一十七歲爲一元, 與相應. 亦有焉, 此其事則述也, 作二百四十三表‧七百二十九贊十一篇, 此其書則作也.” ○光曰 “仁義先王之事也, 方州部家, 揚子所作也. 言揚子所作太玄之書, 其所述者, 亦先聖人之道耳.”이니라


혹자가 말하였다. “공자도 옛것을 전술傳述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 않았는데, 선생은 어찌하여 《태현경》을 창작하였습니까?”注+송함宋咸이 말하였다. “양자揚子가 《태현경太玄經》을 지었으니 이른바 은 1이다. 천지天地음양陰陽참비參比하여 1이 3을 낳으니 3의 를 취하였기 때문에 3이 있고, 3이 9를 낳기 때문에 9가 있고, 9가 27을 낳기 때문에 27가 있고, 27이 81을 낳기 때문에 81가 있다. 마침내 81를 지었기 때문에 243와 729이 있다. 매번 2인데, 하루가 729이어서 주천周天도수度數(365)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1년의 절후節候종률鍾律(황종률黃鍾律)과 북두성北斗星오행五行이 모두 드러난다. 지금 혹자는 공자孔子도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였을 뿐 창작하지 않았는데,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창작해서는 안 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오비吳祕가 말하였다. “공자孔子도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였을 뿐 창작하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태현경》을 창작하였느냐는 말이다.” 양자揚子가 말하였다. “〈《태현경》은〉 그 일(내용)은 〈《역경》을〉 전술한 것이고, 그 글(체례體例)은 창작한 것이다.”注+옛날에 노팽老彭이 옛일을 전술傳述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자신을 그에게 견주면서 다만 전술傳述하기만 할 뿐 창작創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태현경》은 옛일을 전술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가一家의 책을 이루었으므로 창작한 것이라는 말이다. 혹자는 “공자孔子가 일을 전술한 경우는 있지만 어찌 창작한 적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송함宋咸이 말하였다. “공자孔子의 세대를 당하여 나라 왕실王室이 낮아지고 쇠퇴하여 시서詩書가 뒤섞여 어지럽고 예악禮樂이 무너져서 선왕先王의 제도가 하나도 바른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에 연연하여 옛일을 전술하였다. 그리하여 시서詩書산삭刪削하고 예악禮樂을 정하며, 노나라 역사책을 요약하여 《춘추春秋》를 편수하고, 다시 제후諸侯문인門人과 더불어 다시 전장典章제도制度를 의논한 연후에야 각각 제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도를 밝히고 가르침을 세우는 것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어찌 다시 창작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니, 마땅히 창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양자운揚子雲의 시대를 당해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육경六經이 모두 성인聖人의 산정을 거쳤으나, 나라가 일어난 지 이미 오래되어 점점 제유諸儒들에 의해 토의하고 정정되었기 때문에 옛일 중에 전술할 만한 것이 없었고, 자신이 몸을 굽혀 왕망王莽의 조정을 섬겼으니, 스스로 책을 저술하여 일가를 이루지 않으면 무엇으로 자기의 도를 밝힐 수 있었겠는가.” ○오비吳祕가 말하였다. “경은 《주역》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태현경太玄經》을 지은 것이다. 에서 에 이르고, 에서 에 이르고, 에서 에 이르는데, 앞에 을 놓아서 27을 나누어 1라 하고 81을 1이라 하였다. 에서 에 이르고, 에서 에 이르고, 에서 에 이르기까지 무릇 4617를 1이라 하여 태초력泰初曆과 서로 응하였고, 또한 전욱력顓頊曆이 있으니 이것이 ‘기사즉술其事則述’이요, 243 729 11편을 지었으니 이것이 ‘기서즉작其書則作’이다.” ○사마광司馬光이 말하였다. “인의仁義선왕先王의 일이고, 삼방三方구주九州이십칠부二十七部팔십일가八十一家양자揚子가 창작한 것이다. 양자揚子가 창작한 것은 《태현경太玄經》이고, 전술한 것은 또한 옛 성인聖人일 뿐이라는 말이다.”


역주
역주1 述而不作 : 《論語》 〈述而〉에 보인다. 述은 옛것을 傳述하는 것이고, 作은 처음으로 創作하는 것이다.
역주2 泰初歷 : 漢 武帝가 太初 1년(B.C.104)부터 실시한 曆法으로 鄧平이 처음 만들었으며, 태초력의 1朔望月은 29와 81분의 43일, 1回歸年은 365와 1539분의 385일이다. 《史記》 〈曆書〉와 《漢書》 〈律曆志〉에 의하면 한나라 초기 이래로 답습해 오던 秦나라의 顓頊曆을 司馬遷과 落下閎 등이 주도하여 태초력으로 改曆하였다고 한다. 개력의 주요 내용은 10월을 歲首로 하던 것을 正月로 바꾼 것, 冬至를 11월로 고정시킨 것, 中氣가 있는 달을 閏月로 채택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태초력은 한나라 말에 劉歆이 이를 다시 보수하여 三統曆이라고 하였으며, 85년 후한의 개력 때까지 188년 동안 쓰였다.
역주3 顓頊歷 : 중국 古六曆의 하나로 秦나라 때에 만들어졌는데 구체적인 제작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秦나라 통일 후에 사용되었다. 漢나라는 秦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기원전 104년 漢 武帝 때 태초력을 사용하기 전까지 이 전욱력을 사용하였다. 1回歸年은 365와 4분의 1이고, 1朔望月은 29와 940분의 449일이며, 19년에 7개의 윤월을 두고, 建亥月(夏曆의 10월)을 세수로 삼았으며, 立春을 1년 節氣의 기점으로 계산하였다.

양자법언(1) 책은 2019.06.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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