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向列女傳八卷은 古有曹大家綦母邃虞貞節三家注러니 今皆不傳이요 世所傳明黃省曾列女傳本及明繪圖本은 皆無注하고 傳寫溷淆하여 浸失其舊하니 此福山王婉佺安人補注所爲作也라
往歲에 瑞辰以年家子弟로 問學於郝蘭皐先生한대 先生方爲爾雅疏라가 每寫數頁이면 輒以見示하니 往復討論에 心獲良多요 檮昧所及을 過蒙採錄이라
旣乃出安人所著列女傳補注相示라 受而讀之하니 其立論則原本禮經하고 其詁義則讀應爾雅하며 考譌正謬는 必廣證乎群書하고 訂異參同은 亦兼綜夫衆說이라
博而不蕪하고 精而不鑿하니 洵足傳子政之家法하고 紹惠姬之懿範已라
顧鄙陋之見이 有與補注相發明者하니 如魯漆室女傳에 其家倩吾兄行追之라하니 補注에 倩은 借也라
今按琴操컨대 作請吾兄追之라 請倩은 形相似하니 倩卽請之譌耳라
陳國辨女傳에 引詩墓門有楳하니 有鴞萃止로다하니 補注云 楳當作棘이라하고 據楚辭繁鳥萃棘爲證이라
今案玉篇컨대 古文某作槑라 槑棘은 形相似하니 棘蓋譌作槑라 因之毛詩作梅하고 又作楳耳라
有爲補注所未及者하니 如有虞二妃傳의 選于林木은 路史引作遜于林木하고 棄母姜嫄傳의 性明而仁은 路史注引作性敷而仁이라하니 此異字也라
陳寡孝婦傳頌에 妣將嫁之나 終不從母라하니 妣當爲比及三年之比요 非考妣延年之妣니 此誤字也라
路史啓母后趫注云 趫는 列女傳作嬌라하니 今啓母塗山傳에 竝無后嬌之文하니 此逸文也라
又有與補注之說로 小有異同者하니 如契母簡狄傳에 與其妹娣로 浴于元邱之水라하니 補注分妹與娣爲二하고 據史記三人行浴爲證이라
今按呂覽音初篇云 有娀氏有二佚女라하고 鴻烈墜形云 有娀在不周之北하니 長女簡翟이요 少女建疵라하여 皆謂姉妹二人이라하니 則知史記三人은 實二人之譌요 而妹娣不得分爲二矣라
又據路史注引列女傳姉妹浴于元邱之水컨대 則知今本與其妹娣는 實字形之誤耳라
啓母塗山傳에 辛壬癸甲이라하니 補注謂旣生啓하고 方四日而遂去라하니 與書言娶四日而去不同이라
據傳旣生啓三字가 在辛壬癸甲上也어늘 今按呂覽說文컨대 皆言江淮俗에 以辛壬癸甲爲嫁娶之日이라하고 路史注引列女傳에도 亦云娶四日而往治水한대 啓旣生하여 呱呱가 是矣라
又傳頌에 辛壬癸甲에 禹往敷土로 實承維配帝禹言之하니 則知列女傳도 亦謂禹娶四日而去라
古本에 旣生啓三字가 乃在辛壬癸甲禹去而治水之下어늘 今誤移于辛壬癸甲上耳라
至傳引詩文義與毛不同하얀 補注悉訂爲魯詩하니 以劉向爲楚元王交元孫일새니라 元王嘗與申公同受詩于浮邱伯宜하여 世傳魯學也라
其論肇于王伯厚한대 而朱彝尊經義考와 范家相三家詩拾遺가 悉本之하고 近臧氏庸도 亦主其說이라
但考傳所引詩
컨대 康王
晏起
하니 關雎
은 與漢書杜欽傳同
하고 先君之思
하여 以畜寡人
은 與坊記引詩鄭注爲定姜送婦同
하니 一則師古以爲魯詩
라하고 一則釋文以爲魯詩
라하니 可顯證爲魯詩說耳
라
其以式微로 爲黎莊夫人作이라하고 碩人으로 爲莊姜傅母作이라하고 大車로 爲息夫人作은 經傳無徵하니 不能確指爲魯詩之學이라
若以柏舟
로 爲衛宣夫人詩
는 與李黃集解
注+① 毛詩李黃集解四十一卷. 係集李樗黃𢣤兩家之說, 不著編錄姓氏.引韓詩合
이라 芣苢
로 爲傷夫有惡疾
이라하고 汝墳
으로 爲家貧親老
하여 仕于亂世
는 與韓詩章句合
이라
行露
로 爲夫不備禮
하야 女不肯往
이라하고 載馳
로 爲許穆夫人始欲與齊
하여 以爲國援
은 與韓詩外傳合
注+② 韓詩外傳, 高子問于孟子曰 “夫嫁娶, 非己所自親也, 衛女, 何以得編于詩也.” 衛女, 卽許穆夫人. 嫁娶非己所自親, 正以其自欲與齊爲疑也.이라
渭陽으로 爲秦太子瑩送晉文公은 與後漢書注引韓詩合하고 行葦로 爲公劉詩는 與趙長君吳越春秋合이라 長君嘗從杜撫受韓詩하니 蓋亦韓詩說也라
劉向所引韓詩實多
하니 似不得謂其悉本魯詩也
注+① 或謂韓魯詩多同, 晉唐以後, 韓存魯亡. 故所引多韓詩, 不知其實魯詩也. 但劉向本傳, 竝無傳授魯詩之說, 世傳魯詩, 特後人以前證後之詞, 不若據所引詩證之爲確. 王曼卿學士疑劉向嘗治韓詩, 與鄙說互有詳略.라 凡玆數義
가 知無裨于鉅觀
이나 聊取證于往訓
하여 敢以質之蘭臯先生及安人
하니 庶幾無負芻蕘之詢云爾
라
유향劉向의 ≪
열녀전列女傳≫ 8
권卷은 옛적에
조대고曹大家․
기모수綦母邃․
우정절虞貞節 삼가三家의
주注가 있었는데 지금 모두 전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는
명明나라
의
열녀전본列女傳本 및
명明나라의
회도본繪圖本은 모두
주注가 없고
전사傳寫 과정에서 뒤섞여 점점 그
구본舊本의 모습을 잃었으니, 이것이
복산福山 왕완전王婉佺 안인安人이 ≪
열녀전보주列女傳補注≫를 지은 까닭이다.
지난해에 내(
)가
의
자제子弟로써
학란고郝蘭皐 선생先生에게 배움을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막 ≪
이아소爾雅疏≫를 저술하다가 몇 장을 쓸 때마다 나에게 보여주었다. 토론을 주고받으면서 마음에 얻은 것이 실로 많았고 우매한 내가 언급한 것을 과분하게 채록해주셨다.
이윽고 선생께서
안인安人이 지은 ≪열녀전보주≫를 꺼내어 보여주기에 받아서 읽어보니, 그
입론立論은
예경禮經에 근본을 두었고 그
훈의訓義는
에 부합하게 독해하였으며, 오류를 상고하고 바로잡음은 반드시 여러 서책에서 널리 증명하고
이동異同을 정정하고 참고함은 여러
설說을 종합하였다.
광대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정밀하면서도 천착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자정子政(유향)의 가법家法을 전할 만하고 혜희惠姬(반소班昭)의 아름다운 의범儀範을 이을 만하다.
돌아보건대, 비루한 나의 견해가 왕안인王安人의 보주補注와 서로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 있다. 예컨대 〈노칠실녀전魯漆室女傳〉에 “그 집에서 우리 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좇아가도록 하였다.[기가천오형행추지其家倩吾兄行追之]”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 “‘천倩’은 빌린다[차借]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를 살펴보건대, ‘
청오형추지請吾兄追之’로 되어 있다. ‘
청請’과 ‘
천倩’은
자형字形이 서로 비슷하니, ‘
천倩’은 곧 ‘
청請’의 오류이다.
〈
진국변녀전陳國辨女傳〉에 ≪시경≫의 ‘
묘문墓門에 매화나무가 있으니, 올빼미가 모여 앉았도다.[
묘문유매墓門有楳 유효췌지有鴞萃止]’라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보주補注에 “‘
매楳’는 응당
극棘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고,
에 의거하여 증거를 삼았다.
지금 ≪옥편玉篇≫을 살펴보건대, 고문古文에는 ‘모某’가 ‘매槑’로 되어 있다. ‘매槑’와 ‘극棘’은 자형이 서로 비슷하니, ‘극棘’이 아마 잘못되어 ‘매槑’로 된 듯하다. 이로 인해 ≪모시毛詩≫에 ‘매梅’로도 되어 있고, 또 ‘매楳’로도 되어 있을 뿐이다.
보주補注에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컨대 〈
유우이비전有虞二妃傳〉의 ‘
임목林木에 들여보냈다.[
선우림목選于林木]’는 구절은
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
손우림목遜于林木’으로 되어 있고, 〈
기모강원전棄母姜嫄傳〉의 ‘성품이
총명聰明하고
인애仁愛하다.[
성명이인性明而仁]’는 구절은 ≪노사≫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성부이인性敷而仁]’로 되어 있으니, 이는
이자異字이다.
〈진과효부전陳寡孝婦傳〉의 송頌에 “친정어머니가 장차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다오.[비장가지妣將嫁之 종부종모終不從母]”라고 하였는데, ‘비妣’는 응당 ‘삼년에 이르렀다.[비급삼년比及三年]’고 할 때의 ‘비比’가 되어야지 ‘고비考妣가 수명을 늘린다.[고비연년考妣延年]’의 ‘비妣’가 아니니, 이는 오자誤字이다.
≪노사≫의 계啓의 어머니인 후교后趫에 대한 주注에 이르기를 “‘교趫’는 ≪열녀전≫에 ‘교嬌’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계모도산전啓母塗山傳〉에 모두 ‘후교后嬌’라는 글자가 없으니, 이는 일문逸文이다.
또 보주補注의 설說과 조금 이동異同이 있는 것이 있다. 예컨대 〈설모간적전契母簡狄傳〉에 “간적簡狄이 여동생과 함께 원구元邱의 물에서 목욕하고 있었다.[여기매제與其妹娣 욕우원구지수浴于元邱之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는 매妹와 제娣를 둘로 나누고,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의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다.[삼인행욕三人行浴]’는 구절에 의거하여 증명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
음초편音初篇〉에 이르기를 “
유융씨有娀氏에게는 2명의
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
추형편墜形篇〉에 이르기를 “
유융有娀은
부주산不周山의 북쪽에 있는데,
장녀長女는
간적簡翟이고
소녀少女는
건자建疵이다.”라고 하여 모두 자매 두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사기≫ 〈은본기〉의 ‘3인’은 실로 ‘2인’의 오류이고
매妹와
제娣를 둘로 나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노사路史≫ 주注에서 인용한 ≪열녀전≫의 ‘자매가 원구元邱의 물에서 목욕하였다.[자매욕우원구지수姉妹浴于元邱之水]’라는 구절에 의거해보건대, 금본今本의 ‘여기매제與其妹娣’는 실로 자형字形이 비슷해서 생긴 오자임을 알 수 있다.
〈계모도산전啓母塗山傳〉에 “신일辛日 임일壬日 계일癸日 갑일甲日을 지났다.[신임계갑辛壬癸甲]”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는 “〈우禹가〉 계啓를 낳고 나서 겨우 4일 만에 마침내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기생계旣生啓 방사일이수거方四日而遂去]”라고 하였으니, ≪서경書經≫에서 ‘〈도산씨塗山氏에게〉 장가든 지 4일 만에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취사일이거娶四日而去]’라고 한 말과 같지 않다.
〈계모도산전〉에 의거하면 ‘
기생계旣生啓’ 3자가 ‘
신임계갑辛壬癸甲’의 위에 있는데, 지금 ≪
여람呂覽≫과
를 살펴보건대, 모두 ‘
강회江淮 지방의 풍속에
신일辛日․
임일壬日․
계일癸日․
갑일甲日을 시집가고 장가드는 날로 삼는다.’고 하였고, ≪노사≫
주注에서 인용한 ≪열녀전≫에도 “장가든 지 4일 만에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는데,
계啓가 이미 태어나 응애응애 울었다.[
취사일이거치수娶四日而去治水 계기생啓旣生 고고呱呱]”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계모도산전〉의 송頌에 ‘신일辛日․임일壬日․계일癸日․갑일甲日 4일을 지남에 우禹가 가서 토지를 분별하였도다.[신임계갑辛壬癸甲 우왕부토禹往敷土]’라는 구절을 실로 ‘우임금의 배필이 되었다.[유배제우維配帝禹]’에 이어 말하였으니, ≪열녀전≫ 역시 “우禹가 장가든 지 겨우 4일 만에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우취사일이거禹娶四日而去]”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본古本에 ‘기생계旣生啓’ 3자가 곧 ‘신임계갑辛壬癸甲 우거이치수禹去而治水’의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 착오로 ‘신임계갑辛壬癸甲’의 위로 옮겨진 것일 뿐이다.
≪열녀전≫에 인용한
시詩의
문의文義가 ≪
모시毛詩≫와 같지 않은 경우에
보주補注에서는 모두 ≪
노시魯詩≫의
설說이라고
정정訂正하였으니, 이는
유향劉向이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의
원손元孫이 되기 때문이다.
초원왕楚元王은 일찍이
과 함께
부구백浮邱伯 의宜에게
시詩를 배워
노학魯學을 대대로 전수하였다.
이러한 의론은
에게 시작되었는데,
와
의 ≪
삼가시습유三家詩拾遺≫가 모두 여기에 근본하였고, 근래에
장용臧庸 또한 그
설說을 주장하였다.
다만 ≪열녀전≫에 인용한
시詩를 상고하건대, ‘
의 부인이 늦게 나오자
시인詩人이
시를 지어 미리 일러주었다.[
주지강왕부인안기周之康王夫人晏起 관저예견關雎豫見]’라고 한 것은
‘
선군先君의 깊은 은덕을 생각하여, 나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도다.[
선군지사先君之思 이축과인以畜寡人]’라고 한 것은 ≪예기≫ 〈
방기坊記〉에 인용된 이 시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注에 ‘정강이 며느리를 전송하였다.[
정강송부定姜送婦]’라고 한 것과 같으니, 하나는
가 ≪노시≫라고 하였고 하나는 ≪
경전석문經典釋文≫에 ≪노시≫라고 하였으니, ≪노시≫의
설說임을 뚜렷이 증명할 수 있다.
보주補注에서 〈식미式微〉를 여黎 장공莊公의 부인夫人이 지은 시라고 하고, 〈석인碩人〉을 장강莊姜의 부모傅母가 지은 시라고 하고, 〈대차大車〉를 식부인息夫人이 지은 시라고 한 것은 경전經傳에서 징험할 수 없으니, ≪노시魯詩≫의 학문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할 수 없다.
〈
백주柏舟〉를
위衛 선공宣公 부인夫人의 시라고 한 경우는
이李․
황黃의 ≪
집해集解≫에
注+① 이李․황黃의 ≪모시집해毛詩集解≫ 41권卷이다. 와 황훈黃𢣤의 설說을 이어 모아놓고 편록編錄한 이의 성씨姓氏를 드러내지 않았다. 인용한 ≪
한시韓詩≫와 합치한다. 〈
부이芣苢〉를 남편에게
악질惡疾이 있는 것을
상심傷心한 시라고 하고, 〈
여분汝墳〉을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난세亂世에 벼슬한 것을 읊은 시라고 한 것은 ≪
한시장구韓詩章句≫와 합치한다.
〈
행로行露〉를 남자가
예禮를 갖추지 않아 여자가 시집가려 하지 않은 것을 읊은 시라고 하고, 〈
재치載馳〉를
허적許 목공穆公의
부인夫人이 처음에
제齊나라에 시집가서 나라의
원조援助를 삼고자 한 것을 읊은 시라고 한 것은
과 합치한다.
注+② ≪한시외전韓詩外傳≫에 고자高子가 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魏 의공懿公의 딸은 어찌 ≪시경≫에 올라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위衛 의공懿公의 딸은 바로 허적許 목공穆公의 부인이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 제齊나라에 시집가려 한 것을 의심한 것이다.
〈
위양渭陽〉을
진秦나라
태자太子 형瑩이
진晉 문공文公을 전송한 시라고 한 것은 ≪
후한서後漢書≫
주注에 인용한 ≪한시≫와 합치하고, 〈
행위行葦〉를
공류公劉의 시라고 한 것은
의 ≪
오월춘추吳越春秋≫와 합치한다.
장군長君이 일찍이
에게서 ≪한시≫를 배웠으니, 이 또한 ≪한시≫의
설說인 듯하다.
유향劉向이 인용한 ≪
한시韓詩≫가 실로 많으니, 모두 ≪
노시魯詩≫에 근본하였다고 이를 수는 없을 듯하다.
注+① 혹자가 이르기를 “≪한시≫와 ≪노시≫가 대부분 같았는데 진晉․당唐 이후로 ≪한시≫는 보존되고 ≪노시≫는 망실되었다. 그러므로 인용한 바가 ≪한시≫가 많으나, 그것이 실제로 ≪노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서漢書≫ 〈유향전劉向傳〉에 ≪노시≫를 전수받았다는 설說이 전혀 없고, 세상에 전하는 ≪노시≫는 다만 후인들이 전대의 일로써 후대의 일을 증거로 삼는 말 뿐이니, 인용한 시에 의거하여 증거로 삼는 것이 보다 확실하다. 왕만경王曼卿(왕인지王引之) 학사學士는 유향이 일찍이 ≪한시≫를 전공하였다고 의심하였으니, 나의 설說과 서로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가 있다. 무릇 이 몇 가지 뜻이 전체 내용을 살펴보는 데 별로 보탬이 없는 줄은 알지만 애오라지 옛
훈고訓詁에서 증거를 수집하여 감히
난고蘭臯 선생先生 및
안인安人에게 질정하니, 부디 변변찮은 나의 의견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가경嘉慶 17년(1812) 3월 보름에 동성桐城 마서신馬瑞辰은 삼가 서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