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列女傳八篇은 劉向所序也라 向爲漢成帝光祿大夫라 當趙后姊娣嬖寵時하여 奏此書以諷宮中하니 其文美刺詩書已來女德善惡이 繫於家國治亂之效者라
故有母儀賢明仁智貞愼節義辯通孼嬖等篇하고 而各頌其義圖其狀하여 總爲卒篇하니 傳如太史公記하고 頌如詩之四言한대 而圖爲屛風云이라
然世所行班氏注向書는 乃分傳每篇上下하고 幷頌爲十五卷하니 其十二傳은 無頌하고 三傳은 其同時人하고 五傳은 其後人이어늘 而通題曰向撰이라하고 題其頌曰向子歆撰이라하니 與漢史不合이라 故崇文總目에 以陳嬰母等十六傳으로 爲後人所附라
予以頌考之컨대 每篇皆十五傳耳니 則凡無頌者는 宜皆非向所奏書니 不特自陳嬰母爲斷也라
頌有齊倉公女等하니 亦漢時人이요 而秦已上女史見於他書어늘 而此顧不錄者猶衆하니 亦不特周郊婦等四人而已라 頌云畫之屛風이라하야늘 而史有頌圖가 在八篇中이라
今直祕閣呂縉叔과 集賢校理蘇子容과 象山令林次中이 各言嘗見母儀賢明四卷於江南人家한대 其畫爲古佩服하고 而各題其頌像側이라
然崇文及三君北遊諸藏書家에 皆無此本하니 不知其傳果向之頌圖歟아 抑後好事者據其頌하여 取古佩服而圖之歟아 莫得而考已라
余讀向書에 每愛其文嘉其志하여 而惜其所序散亡脫繆於千歲之間이라 幸存而完者가 此一書耳어늘 復爲他手竄疑於其眞이라
故幷錄其目而以頌證之하여 刪爲八篇하여 號古列女傳이라하니 蓋凡以列女名書者는 皆祖之劉氏故云이라
餘二十傳은 其文亦奧雅可喜하니 非魏晉諸史所能作也라 故又自周郊婦로 至東漢梁嫕等히 以時次之하여 別爲一篇하고 號續列女傳이라
余友介甫嘗謔余曰 子政述諸狂女而成書하여 証其君하니 迂哉라 其所學也여 子何區區喜治之邪아
余以謂先王之俗旣熄에 學士大夫가 誦詩書修仁義하여 進取當路之功이 有卓犖顯赫하여 若不可攀者로되 試窮其迹컨대 其不槪於聖人多矣라 然聖人之道도 亦未嘗廢狂狷也어든 況女子哉아
且其所立이 其惡者는 固足以垂家國之戒요 狂者는 雖未中禮義나 而壹志於善하여 行成於房闥하니
使其皆遭先王之俗하여 追琢其質而充其美하여 自家形國하면 則雖列於賢妃治臣하여 著之詩書라도 可也라
余是以閔其不幸이나 而與向之擧於其君은 固有直諒多聞之益也라 竊明而存之하여 以告後世면 君子何尤焉이리오
≪고열녀전古列女傳≫ 8편篇은 유향劉向이 서술한 것이다. 유향은 한漢 성제成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있었는데, 조후趙后(조비연趙飛燕) 자매가 성제에게 총애를 받을 때에 이 책을 상주하여 궁중宮中을 풍자하였다. 그 글은 ≪시경詩經≫과 ≪상서尙書≫ 이래로 국가國家의 치란治亂의 결과와 관계되는 여덕女德의 선악善惡을 칭찬하고 풍자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의母儀〉, 〈현명賢明〉, 〈인지仁智〉, 〈정신貞愼〉, 〈절의節義〉, 〈변통辯通〉, 〈얼폐孼嬖〉 등의 편을 두었으며, 각각 그 의의를 송頌으로 읊고,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총괄하여 맨 끝 편篇을 삼았다. 전傳은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와 같고 송頌은 ≪시경詩經≫의 사언시四言詩와 같은데 그림으로 그려서 병풍屛風을 삼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유행하는 유향의 ≪열녀전≫에
주注를 단
반씨班氏(
반소班昭)의 책은 곧
전傳의 매 편을 상하로 나누고
송頌을 합하여 15권으로 만든 것이다. 그중 12
전傳은
송頌이 없고 3
전傳은 유향과 동시대 사람이고 5
전傳은 유향보다 후대의 사람인데 통틀어 ‘유향이 지었다.’고 적고 그
송頌은 ‘유향의 아들
유흠劉歆이 지었다.’고 적었으니,
한대漢代의 역사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
숭문총목崇文總目≫에
등 16
전傳을
후인後人이 붙인 것이라 하였다.
내가 송頌으로 상고해보건대, 매 편은 모두 15전傳일 뿐이고 보면 무릇 송頌이 없는 것은 의당 모두 유향이 상주한 책이 아닐 것이니, 〈진영지모〉로 단정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다.
송頌에
등이 있는데 또한
한漢나라 때 사람이고,
진秦나라 이전의
여사女史가 다른 책에 보이는데 이 책에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많으니, 또한
등 네 사람뿐만이 아니다.
송頌에 이르기를 “병풍에 그림을 그렸다”고 하였는데
사서史書에는 〈
송도頌圖〉가 ≪열녀전≫ 8편 가운데 들어 있다.
지금
직비각直祕閣 과
집현교리集賢校理 소자용蘇子容과
상산령象山令 임차중林次中이 각각 말하기를 “일찍이 〈
모의母儀〉 〈
현명賢明〉 4권을
강남江南의
인가人家에서 보았는데, 그 그림은 옛날의
패옥佩玉과
복식服式 차림의 여인이었고 각각 그
송頌을
도상圖像 곁에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숭문총목崇文總目≫ 및 이 세 사람이 북방에서 유력遊歷한 여러 장서가藏書家에 모두 이 본本이 없으니, 알지 못하겠다. 그 전傳이 과연 유향의 〈송도頌圖〉인가? 아니면 후일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자가 그 송頌에 의거해서 옛날 패옥과 복식 차림의 여인을 취하여 그린 것인가? 상고할 수 없다.
내가 유향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글을 사랑하고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그가 서술한 것이 천년 사이에 산실散失되고 탈루脫漏된 것을 애석히 여겼다. 다행이 남아 완전한 것으로는 이 ≪열녀전≫ 한 책뿐인데 다시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고쳐지고 그 진위 여부를 의심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제목을 아울러 기록하고 송頌으로 증명하여 8편篇으로 산정算定해서 만들어 ≪고열녀전古列女傳≫이라 명명하였으니, 열녀列女로 명명한 모든 책은 모두 유향을 비조鼻祖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나머지 20전傳은 그 글이 또한 심오하고 전아하여 좋아할 만하니, 위진魏晉의 제사諸史가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또 〈주교부인周郊婦人〉으로부터 〈동한양예東漢梁嫕〉 등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차례를 정하여 별도로 1편篇을 만들고 〈속렬녀전續列女傳〉이라 명명하였다.
나의 벗
가 일찍이 나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
자정子政(
유향劉向의 자)이 여러
광녀狂女를 서술하여 책을 이루어 그 임금에게 간하였으니, 자정이 학문하는 바가 오활한데 그대가 어찌 구구하게 기뻐하여 이 책을 편찬하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선왕先王의 풍속이 없어진 뒤에
학사學士와
대부大夫가
시서詩書를 외고
인의仁義를 닦아서
요로要路에 나아가 이룬 공이 탁월하고 찬란하여 보통 사람이 따를 수 없을 듯한 점이 있으나, 한 번 그 자취를 궁구해보건대
성인聖人과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더구나 여자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또 유향이 입전立傳한 여인들 중에 그 악자惡者는 진실로 집안과 나라의 경계가 되기에 충분하고 광자狂者는 비록 예의에 맞지는 않으나 한결같이 선善에 뜻을 두어 행실을 규방에서 이루었다.
그들이 모두 선왕先王의 풍속을 만나서 그 자질을 잘 다듬고 그 아름다움을 채워서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드러나게 하였다면 현덕賢德한 후비后妃와 치세治世의 신하들 사이에 나란히 서서 시서詩書에 기록되는 것도 가능하였다.
내가 이 때문에 그들의 불행을 가엾게 여기나 유향이 쓴 ≪열녀전≫에 포함되어 임금에게 올려졌으니 진실로 그 임금에게
의 유익함은 있는 것이다. 삼가 밝혀 보전하여 후세에 고한다면 군자가 어찌 허물하겠는가.
가우嘉祐 8년(1063) 9월 28일에
장락長樂 는 서술하고 아울러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