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馮昭儀者
는 孝元帝之昭儀
요 右将軍光祿勲馮奉世之女也
라 元帝二年
에 昭儀以選入後宫
하여 始爲長使
라가 數月爲美人
注+① 美人․長史․婕妤, 皆婦官名. 元帝加昭儀.하여 生男
하니 是爲中山孝王
이라 美人爲婕妤
라
建昭中에 上幸虎圈鬪獸할새 後宫皆従이러니 熊逸出圈하여 攀檻欲上殿하니
左右貴人傅昭儀
皆驚走
어늘 而馮婕妤直
當熊而立
注+① 昭儀下脫等字, 當熊上脫前字.한대 左右格殺熊
이라
天子問婕妤
호되 人情皆驚懼
어늘 何故當熊
고 對曰 妾聞猛獸得人而止
라하니 妾恐
至御坐
注+① 【校注】 漢書至上有熊字.라 故以身當之
라 元帝嗟嘆
하고 以此敬重焉
이라 傅昭儀等皆慙
이라
明年
에 王封
注+② 中山, 當作信都. 此時封信都王, 至河平中, 乃徙封中山, 見外戚傳.에 乃立婕妤爲昭儀
하여 随王之國
이라 號中山太后
注+③ 【校注】 漢書馮倢伃男立爲信都王, 尊倢伃爲昭儀. 元帝崩, 河平中, 隨王之國. 此傳有脫誤.라
君子謂昭儀勇而慕義로다 詩云 公之媚子가 從公于狩로다하고 論語曰 見義不爲가 無勇也라하니 昭儀兼之矣로다
한漢나라
풍소의馮昭儀는
의
소의昭儀요
의 딸이다.
원제元帝 2년에 풍소의가
후궁後宫으로 뽑혀 들어가 처음에
장사長使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미인美人이 되어
注+① 미인美人과 장사長史와 첩여婕妤는 모두 부관婦官의 명칭이다. 원제元帝가 소의昭儀에게 더해준 것이다.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이 되었는지라
미인美人에서
첩여婕妤가 되었다.
연간(B.C. 38~B.C. 34)에
원제元帝가 호랑이 우리에서 짐승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러 행차할 적에
후궁後宫들이 모두 따라 갔다. 그런데 곰이 우리를 뛰쳐나와 난간을 타고 전각 위로 오르려고 하였다.
좌우의
귀인貴人들과
등은 모두 놀라 달아났지만
풍첩여馮婕妤는 곧장 나아가 곰을 가로막아 섰다.
注+① ‘소의昭儀’ 아래에 ‘등等’자가 빠졌고, ‘당웅當熊’ 위에 ‘전前’자가 빠졌다. 이에 좌우의 호위하던 병사들이 곰을 때려서 죽였다.
천자天子가
첩여婕妤에게 묻기를 “사람들은 모두 놀라 두려워하였는데 무슨 연고로 곰을 가로막아 섰는가?”라고 하니, 첩여가 대답하기를 “
첩妾이 들으니
맹수猛獸는 한 사람을 잡으면 멈추어 선다고 하였습니다. 첩은 곰이
어좌御坐에 이를까 두려웠습니다.
注+① 【교주校注】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에는 ‘지至’ 위에 ‘웅熊’자가 있다. 그러므로 첩의 몸으로 가로막아 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감탄하고 이 일 때문에 첩여를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부소의傅昭儀 등은 모두 부끄러워하였다.
이듬해 아들이
신도왕信都王에 봉해지자
注+② ‘중산中山’은 응당 ‘신도信都’가 되어야 한다. 이 당시에 신도왕信都王에 봉해졌다가 연간(B.C. 28~B.C. 25)에 이르러서야 중산왕中山王에 옮겨 봉해졌다. ≪한서≫ 〈외척전〉에 보인다. 원제가 첩여를 세워
소의昭儀로 삼아 신도왕을 따라
봉국封國으로 가도록 하였다. 후에
중산태후中山太后라고 호칭하였다.
注+③ 【교주校注】 ≪한서≫ 〈외척전〉에 “풍첩여馮倢伃의 아들이 신도왕信都王에 책립되자 첩여倢伃를 높여 소의昭儀로 삼았다. 원제元帝가 붕어崩御하자, 신도태후信都太后가 되었다. 하평河平 연간에 왕을 따라 봉국封國으로 갔다. 후에 중산中山으로 옮겼다.”라고 하였다. 이 전傳에는 탈자脫字나 오자誤字가 있다.한풍소의漢馮昭儀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
풍소의馮昭儀는 용감하면서도
의義를 숭상하였도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고, ≪
논어論語≫에 말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풍소의馮昭儀는 이 두 가지를 겸하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