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고사전高士傳≫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검루黔婁선생先生은 제齊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선생 또한 제나라 사람이니, 여기에 ‘노魯’로 되어 있는 것은 오자인 듯하다. 아내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증자曾子가 문인門人들과 함께 가서 조문하였다. 그 아내가 문호門戶에서 나오자 증자가 조문을 하고注+② 예禮에 부인婦人은 전송餞送하거나 영접迎接할 때 문을 나가지 않고, 형제兄弟를 만나 볼 때에도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 여기에서 호戶를 나간 것은 조문을 받기 위해서이니, 조문은 살아있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조용히 문門으로 들어가 당堂 아래에 서면 그 아내가 나와 갈포褐袍를 입는다.[은문이입隱門而入입우당하立于堂下기처출其妻出의갈포衣褐袍]’라는 14글자가 ‘증자曾子가 조문하였다.[증자조지曾子弔之]’라는 구절 위에 있는데, 금본今本에는 없다.당堂에 올라가 창문 아래에 누워 있는 선생의 시신을 보니,注+③
注+⑤ 온縕은 묵은 솜이다. 포袍는 옷에 솜을 둔 것이다. 부표不表는 ≪태평어람≫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무표無表’로 되어 있다. 삼베 이불로 덮었는데 머리와 발을 다 감싸지 못해서 머리를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나왔다.
증자가 말하기를 “삼베 이불을 비스듬히 당겨 덮으면 감쌀 수 있겠습니다.”注+⑥ ‘사斜’는 ‘사邪’와 같다.라고 하니, 검루 선생의 아내가 말하기를 “삼베 이불을 비스듬히 덮어 남음이 있는 것이 바르게 덮어 부족한 것만 못합니다. 선생은 일생의 행위가 사곡邪曲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데에 이른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사곡하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뒤에 사곡하게 한다면 선생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증자曾子가 응답을 하지 못하고, 드디어 곡哭하며 말하기를 “슬프다! 선생께서 돌아가심이여, 무엇으로 시호를 해야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강康으로 시호를 삼으십시오.”注+① 강康은 즐거움이다.注+② 【집주集注】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음식은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注+③ ≪문선文選≫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식부충허食不充虛’로 되어 있다. 의복은 몸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머리와 발을 다 감싸드리지 못하고注+④ 【교주校注】 ‘수首’는 구본舊本에 ‘수手’로 잘못되어 있었는데, 금본今本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따라 교정하였다. 수족首足은 바로 아래에 이른 ‘두족頭足’이다. 곁에는 술과 고기의 제물祭物도 없습니다. 살아서는 좋은 것을 갖지 못하고 죽어서는 영화를 보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선생이 살아계실 때 임금이 일찍이 선생에게 정사를 맡겨 국상國相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사양하고 맡지 않았으니 이는 충분히 고귀高貴한 것이고, 임금께서 일찍이 곡식 30종鍾을 하사하였는데注+⑤ 종鍾은 양기量器의 이름이다. 10부釜가 1종鍾이다. 1종鍾은 6곡斛 4두斗이다. 선생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이는 충분히 부유富裕한 것입니다.
저 선생은 천하의 담백한 맛을 달게 여기고 천하의 낮은 지위를 편안히 여기며 빈천貧賤에 걱정하지 않고 부귀富貴에 기뻐하지 않으며注+⑥ 【교정校正】 모방牟房이 상고해보건대,
注+⑦ 【집주集注】 모방牟房이 이르기를 “도잠陶潛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찬贊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검루黔婁의 말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양단梁端이 이르기를 “‘흔흔欣欣’은 ≪태평어람≫에 ‘급급急急’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내(소도관蕭道管)가 상고해보건대, ≪도연명집陶淵明集≫에는 ‘급급汲汲’으로 되어 있다.
이 상고해보건대, ‘미美’는 응당 ‘양養’이 되어야 하니, 글자의 오류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천하의 담백한 맛을 달게 여기고 천하의 낮은 지위를 편안히 여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송頌에 이르기를 “빈천함을 편안히 여기고 담백함을 달게 여기며, 자신을 후하게 봉양함을 추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전傳에 또 이르기를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음식은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의복은 몸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손발을 다 감싸드리지 못하고 곁에는 술과 고기의 제물祭物도 없습니다. 살아서는 좋은 것을 갖지 못하고 죽어서는 영화를 보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美’는 또한 응당 ‘양養’이 되어야 하니, 형形․영榮․강康과 운韻이 된다.
시신을 덮어 가리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도다
역주
역주1黔婁 :
春秋時代의 著名한 隱士이다. 혹 戰國時代의 은사라고도 한다. 魯 恭公이 맞이하여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고, 齊나라에서도 卿으로 임명하려 하였는데 모두 사양하였으며, 齊 威王이 스승으로 삼아 극진히 존경하였다고 한다.
역주2張景陽 :
景陽은 西晉의 문인 張協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어 형인 載와 아우인 亢과 함께 ‘三張’으로 불리었다. 벼슬은 河間內史에 이르렀다. 저서에 ≪張景陽集≫이 있다.
역주3皇甫謐 :
215~282. 後漢의 太尉 皇甫嵩의 증손으로, 자는 士安, 자호는 玄晏이다. 여러 전적과 諸子百家書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평생 벼슬하지 않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晉 武帝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제자인 摯虞, 張軌, 牛綜, 席純 등은 모두 晉나라의 名臣이 되었다. 저서에 ≪帝王世紀≫, ≪年曆≫, ≪高士傳≫, ≪逸士傳≫, ≪玄晏春秋≫, ≪鬼谷子注≫, ≪針灸甲乙經≫ 등이 있다.
역주4禮에……놓는다 :
≪周禮注疏≫ 권30 〈夏 司馬 射人掌〉에는 “처음에 북쪽 창 아래에서 죽으면 시신을 남쪽 창 아래로 옮긴다.[始死於北牖下 遷尸於南牖下]”라고 하였으니, 王照圓의 注와 다르다.
역주5묵은……못하였고 :
≪禮記≫ 〈喪大記〉에 말하기를 “袍에는 반드시 겉에 입는 다른 옷이 있어서 袍만 홑겹으로 입지 않고 上衣에는 반드시 下裳이 있으니, 이를 한 벌이라고 이른다.[袍必有表 不襌 衣必有裳 謂之稱]”라고 하였다.
역주6(槀)[稾] :
저본에는 ‘槀’로 되어 있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稾’로 바로잡았다.
역주7(手)[首] :
저본에는 ‘手’로 되어 있으나, ≪列女傳校注≫와 ≪列女傳集注≫에 의거하여 ‘首’로 바로잡았다.
역주9逸周書 :
周 成王 때 周公이 攝政하여 천하가 태평해지자, 중국의 諸侯들과 중국 밖의 사방 나라와 부족에서 周나라에 朝會하러 오고 貢物을 바친 일을 기술한 책이다.
역주10陶潛의……있다 :
〈五柳先生傳〉의 贊에 “黔婁가 말하기를 ‘貧賤에 걱정하지 않고 富貴에 汲汲해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말을 미루어 지극히 한다면 이 사람과 같은 무리일 것이다.[黔婁有言 不戚戚於貧賤 不汲汲於富貴 極其言 玆若人之徒乎]”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五柳先生을 가리킨다.(≪陶淵明集≫ 권5)
역주11仁을……얻고 :
≪論語≫ 〈述而〉에 “子貢이 들어가서 ‘伯夷와 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는 ‘옛날의 현인이시다.’ 하셨다. ‘후회하였습니까?’ 하고 묻자, ‘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다시 어찌 후회하였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子貢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古之賢人也 曰怨乎 曰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