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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1)

열녀전보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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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魯黔婁妻
魯黔婁先生注+① 黔婁, 姓名也. 同時齊有黔敖, 蓋其族人. 文選張景陽雜詩注引皇甫謐高士傳曰 “黔婁先生者, 齊人也.” 是先生亦齊人, 此作魯或誤耳.之妻也 先生死 曾子與門人往弔之 其妻出戶어늘 曾子弔之注+② 禮婦人送迎不出門, 見兄弟不踰閾. 此出戶爲受弔也, 弔施於生者也. 太平御覽引有隱門而入, 立于堂下, 其妻出, 衣褐袍一十四字, 在曾子弔之句上, 爲今本所無.하고 上堂하여 見先生之尸在牖下注+③ 禮始死, 遷尸於北牖下也.하니 枕墼席注+④ 墼, 土堲未燒也. 槀當作稾. 其字從禾, 禾稈也.하고 縕袍不表注+⑤ 縕, 舊絮也. 袍, 衣之有著者也. 不表, 御覽引作無表.하고 覆以布被호되 足不盡斂하여 覆頭則足見하고 覆足則頭見이라
曾子曰 引其被則斂矣注+⑥ 斜與邪同. 妻曰 斜而有餘 不如正而不足也 先生以不斜之故 能至於此 生時不邪어늘 死而邪之 非先生意也
曾子不能應하고 遂哭之曰 嗟乎 先生之終也 何以爲諡리오 其妻曰 以康爲諡注+① 康, 樂也.注+② 【集注】 逸周書諡法 “康, 安也.”하소서
曾子曰 先生在時 食不充注+③ 文選注引作食不充虛.하고 衣不蓋形하며 死則足不斂注+④ 【校注】 首, 舊誤手, 今依太平御覽校改. 首足, 卽下云頭足也.하고 旁無酒肉이라 生不得其美하고 死不得其榮하니 何樂於此而諡爲康乎아하니
其妻曰 昔先生 君嘗欲授之政하여 以爲國相이어늘 辭而不爲하니 是有餘貴也 君嘗賜之粟三十鍾注+⑤ 鍾, 量器名也. 釜十爲鍾. 鍾, 六斛四斗也.이어늘 先生辭而不受하니 是有餘富也
彼先生者 甘天下之淡味하고 安天下之卑位하며 不戚戚於貧賤하고 不欣欣於富貴注+⑥ 【校正】 房案陶潛五柳先生傳贊引作黔婁之言.注+⑦ 【集注】 牟云 “陶潛五柳先生傳贊引作黔婁之言.” 梁云 “欣欣御覽作急急.” 道管案陶淵明集作汲汲.하며 求仁而得仁하고 求義而得義하니 其諡爲康 不亦宜乎 曾子曰 唯斯人也而有斯婦
君子謂黔婁妻爲樂貧行道라하니라 詩曰 彼美淑姬 可與寤言注+① 寤與晤同. 已見上.이로다하니 此之謂也
頌曰
黔婁旣死
妻獨主喪이로다
曾子弔焉하니
布衣褐注+① 衾字失韻, 蓋裳字之誤.이로다
安賤甘淡하고
不求豐注+注+③ 【校正】 王紹蘭案美當爲養, 字之誤也. 傳云 “甘天下之淡味, 安天下之卑位.” 故頌云 “安賤甘淡, 不求豐養也.” 傳又云 “先生在時, 食不充口, 衣不蓋形, 死則手足不斂, 旁無酒肉. 生不得其美, 死不得其榮, 何樂於此而諡爲康乎?” 美亦當爲養, 與形․榮․康爲韻.이로다
尸不揜蔽로되
猶諡曰康이로다


2-11 나라 의 아내
나라 검루黔婁 선생先生注+검루黔婁는 성명이다. 동시대에 나라에 검오黔敖가 있었으니, 아마 그 족인族人인 듯하다. ≪문선文選의 〈잡시雜詩의 ≪고사전高士傳≫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검루黔婁 선생先生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선생 또한 제나라 사람이니, 여기에 ‘’로 되어 있는 것은 오자인 듯하다. 아내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증자曾子문인門人들과 함께 가서 조문하였다. 그 아내가 문호門戶에서 나오자 증자가 조문을 하고注+부인婦人전송餞送하거나 영접迎接할 때 문을 나가지 않고, 형제兄弟를 만나 볼 때에도 문지방을 넘지 않는다. 여기에서 를 나간 것은 조문을 받기 위해서이니, 조문은 살아있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조용히 으로 들어가 아래에 서면 그 아내가 나와 갈포褐袍를 입는다.[은문이입隱門而入 입우당하立于堂下 기처출其妻出 의갈포衣褐袍]’라는 14글자가 ‘증자曾子가 조문하였다.[증자조지曾子弔之]’라는 구절 위에 있는데, 금본今本에는 없다. 에 올라가 창문 아래에 누워 있는 선생의 시신을 보니,注+ 벽돌을 베개로 삼고 볏짚으로 자리를 깔았으며注+은 아직 굽지 않은 흙벽돌이다. ‘’는 응당 ‘’가 되어야 한다. 그 글자는 를 따르니, 볏짚이다. 注+은 묵은 솜이다. 는 옷에 솜을 둔 것이다. 부표不表는 ≪태평어람≫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무표無表’로 되어 있다. 삼베 이불로 덮었는데 머리와 발을 다 감싸지 못해서 머리를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나왔다.
증자가 말하기를 “삼베 이불을 비스듬히 당겨 덮으면 감쌀 수 있겠습니다.”注+⑥ ‘’는 ‘’와 같다.라고 하니, 검루 선생의 아내가 말하기를 “삼베 이불을 비스듬히 덮어 남음이 있는 것이 바르게 덮어 부족한 것만 못합니다. 선생은 일생의 행위가 사곡邪曲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데에 이른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사곡하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뒤에 사곡하게 한다면 선생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증자曾子가 응답을 하지 못하고, 드디어 하며 말하기를 “슬프다! 선생께서 돌아가심이여, 무엇으로 시호를 해야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으로 시호를 삼으십시오.”注+은 즐거움이다.注+② 【집주集注시법諡法에 “은 편안함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음식은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注+③ ≪문선文選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식부충허食不充虛’로 되어 있다. 의복은 몸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머리와 발을 다 감싸드리지 못하고注+④ 【교주校注】 ‘’는 구본舊本에 ‘’로 잘못되어 있었는데, 금본今本에는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따라 교정하였다. 수족首足은 바로 아래에 이른 ‘두족頭足’이다. 곁에는 술과 고기의 제물祭物도 없습니다. 살아서는 좋은 것을 갖지 못하고 죽어서는 영화를 보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시호를 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그 아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선생이 살아계실 때 임금이 일찍이 선생에게 정사를 맡겨 국상國相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사양하고 맡지 않았으니 이는 충분히 고귀高貴한 것이고, 임금께서 일찍이 곡식 30을 하사하였는데注+양기量器의 이름이다. 10가 1이다. 1은 6 4이다. 선생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니 이는 충분히 부유富裕한 것입니다.
저 선생은 천하의 담백한 맛을 달게 여기고 천하의 낮은 지위를 편안히 여기며 빈천貧賤에 걱정하지 않고 부귀富貴에 기뻐하지 않으며注+⑥ 【교정校正모방牟房이 상고해보건대, 注+⑦ 【집주集注모방牟房이 이르기를 “도잠陶潛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검루黔婁의 말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양단梁端이 이르기를 “‘흔흔欣欣’은 ≪태평어람≫에 ‘급급急急’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내(소도관蕭道管)가 상고해보건대, ≪도연명집陶淵明集≫에는 ‘급급汲汲’으로 되어 있다. 를 구하여 를 얻었으니, 그 시호를 이라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그 사람에 그 부인이로다.”라고 하였다.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검루黔婁의 아내는 가난을 즐기고 를 행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注+와 같다. 이미 위에 보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노검부처魯黔婁妻노검부처魯黔婁妻
은 다음과 같다.
검루黔婁가 이미 세상을 떠나자
아내가 홀로 을 치렀도다
증자曾子가 조문을 갔더니
거친 삼베옷으로 덮어 놓았도다注+① ‘’자는 이 맞지 않으니, 아마 ‘’자의 오자인 듯하다.
빈천함을 편안히 여기고 담백함을 달게 여기며
자신을 후하게 봉양함을 추구하지 않았도다注+② ‘’자는 이 맞지 않다.注+③ 【교정校正이 상고해보건대, ‘’는 응당 ‘’이 되어야 하니, 글자의 오류이다. 에 이르기를 “천하의 담백한 맛을 달게 여기고 천하의 낮은 지위를 편안히 여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에 이르기를 “빈천함을 편안히 여기고 담백함을 달게 여기며, 자신을 후하게 봉양함을 추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에 또 이르기를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음식은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의복은 몸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손발을 다 감싸드리지 못하고 곁에는 술과 고기의 제물祭物도 없습니다. 살아서는 좋은 것을 갖지 못하고 죽어서는 영화를 보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시호를 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는 또한 응당 ‘’이 되어야 하니, 이 된다.
시신을 덮어 가리지 못하였지만
오히려 시호를 이라 하였도다


역주
역주1 黔婁 : 春秋時代의 著名한 隱士이다. 혹 戰國時代의 은사라고도 한다. 魯 恭公이 맞이하여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고, 齊나라에서도 卿으로 임명하려 하였는데 모두 사양하였으며, 齊 威王이 스승으로 삼아 극진히 존경하였다고 한다.
역주2 張景陽 : 景陽은 西晉의 문인 張協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어 형인 載와 아우인 亢과 함께 ‘三張’으로 불리었다. 벼슬은 河間內史에 이르렀다. 저서에 ≪張景陽集≫이 있다.
역주3 皇甫謐 : 215~282. 後漢의 太尉 皇甫嵩의 증손으로, 자는 士安, 자호는 玄晏이다. 여러 전적과 諸子百家書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평생 벼슬하지 않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晉 武帝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제자인 摯虞, 張軌, 牛綜, 席純 등은 모두 晉나라의 名臣이 되었다. 저서에 ≪帝王世紀≫, ≪年曆≫, ≪高士傳≫, ≪逸士傳≫, ≪玄晏春秋≫, ≪鬼谷子注≫, ≪針灸甲乙經≫ 등이 있다.
역주4 禮에……놓는다 : ≪周禮注疏≫ 권30 〈夏 司馬 射人掌〉에는 “처음에 북쪽 창 아래에서 죽으면 시신을 남쪽 창 아래로 옮긴다.[始死於北牖下 遷尸於南牖下]”라고 하였으니, 王照圓의 注와 다르다.
역주5 묵은……못하였고 : ≪禮記≫ 〈喪大記〉에 말하기를 “袍에는 반드시 겉에 입는 다른 옷이 있어서 袍만 홑겹으로 입지 않고 上衣에는 반드시 下裳이 있으니, 이를 한 벌이라고 이른다.[袍必有表 不襌 衣必有裳 謂之稱]”라고 하였다.
역주6 (槀)[稾] : 저본에는 ‘槀’로 되어 있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稾’로 바로잡았다.
역주7 (手)[首] : 저본에는 ‘手’로 되어 있으나, ≪列女傳校注≫와 ≪列女傳集注≫에 의거하여 ‘首’로 바로잡았다.
역주8 : ≪列女傳校注≫에는 ‘邪’로 되어 있다. 아래도 같다.
역주9 逸周書 : 周 成王 때 周公이 攝政하여 천하가 태평해지자, 중국의 諸侯들과 중국 밖의 사방 나라와 부족에서 周나라에 朝會하러 오고 貢物을 바친 일을 기술한 책이다.
역주10 陶潛의……있다 : 〈五柳先生傳〉의 贊에 “黔婁가 말하기를 ‘貧賤에 걱정하지 않고 富貴에 汲汲해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말을 미루어 지극히 한다면 이 사람과 같은 무리일 것이다.[黔婁有言 不戚戚於貧賤 不汲汲於富貴 極其言 玆若人之徒乎]”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五柳先生을 가리킨다.(≪陶淵明集≫ 권5)
역주11 仁을……얻고 : ≪論語≫ 〈述而〉에 “子貢이 들어가서 ‘伯夷와 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는 ‘옛날의 현인이시다.’ 하셨다. ‘후회하였습니까?’ 하고 묻자, ‘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다시 어찌 후회하였겠는가.’라고 대답하셨다.[子貢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古之賢人也 曰怨乎 曰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하였다.
역주12 : ≪列女傳校注≫와 ≪列女傳集注≫에는 ‘虛’로 되어 있다.
역주13 (口)[虛] : 저본에는 ‘口’로 되어 있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虛’로 바로잡았다.
역주14 (手)[首] : 저본에는 ‘手’로 되어 있으나, ≪列女傳校注≫에 의거하여 ‘首’로 바로잡았다.
역주15 저……있도다 : ≪詩經≫ 〈東門之池〉에 보인다.
역주16 王紹蘭 : 淸나라 학자로, 자는 畹馨, 호는 南陔 또는 思維居士이다. 저서에 ≪儀禮圖≫, ≪周人禮說≫, ≪周人經說≫, ≪說文集注≫, ≪讀書雜記≫ 등이 있다.
역주17 (衾)[裳] : 저본에는 ‘衾’으로 되어 있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裳’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8 (美)[養] : 저본에는 ‘美’로 되어 있으나, 王紹蘭의 校正에 의거하여 ‘養’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9 不求豐美……美字失韻 : 원 표제어는 “不求豐美 補注 美字失韻”으로, 원문 ‘不求豐美’에 대한 王照圓의 補注 ‘美字失韻’(원주 ②)에 대한 校正임을 의미한다.

열녀전보주(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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