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姜者
는 王季之母
요 有呂氏之女
注+① 北堂書抄引女下有也字, 此脫.注+② 【集注】 梁云 “台舊誤呂, 從史記集解․類聚后妃部․御覽皇親部校改. 台與邰同.” 道管案呂亦姜姓.라 太王娶以爲妃
注+③ 後漢書注引此下有賢而有色四字.하여 生太伯仲雍王季
라 貞順率導
하여 靡有過失
注+④ 後漢書注引作化導三子, 皆成賢德. 史記正義引作率導諸子, 至于成童, 靡有過失.이라 太王謀事
注+⑤ 後漢書注引作太王有事, 必諮謀焉.遷徙
에 必與太姜
注+⑥ 【集注】 王云 “後漢書注引作太王有事, 必諮謀焉.” 梁云 “史記正義引有色而貞順, 率導諸子, 至於成童, 靡有過失. 太王謀事, 必於太姜, 遷徙必與. 後漢書崔琦傳注․類聚․御覽引賢而有色, 化導三子, 皆成賢德, 類聚下又有詩曰爰及姜女聿來胥宇此之謂也十四字.”이라
太任者
는 文王之母
요 摯任氏中女也
라 王季娶爲妃
라 太任之性
이 端一誠莊
注+① 後漢書注引一作懿, 史記正義引作壹, 此作一非.하여 惟德之行
이러니
及其有娠
注+② 後漢書注及史記正義, 俱引娠作身.하여 目不視惡色
하며 耳不聽淫聲
注+③ 【校注】 後漢書注․太平御覽人事部一作惡聲.하며 口不出敖言
注+④ 【校注】 太平御覽作放言, 大戴禮保傅篇注․太平御覽人事部一作惡言.하여 能以胎敎
注+⑤ 【集注】 大戴禮保傅 “胎敎之道, 書之玉版, 藏之金匱.”러니 溲於豕牢
注+⑥ 【校注】 國語韋昭注云 “溲, 便也. 豕牢, 厠也.”라가
而生文王
이라 文王生而明聖
하여 太任敎之以一而識百
이러니 注+⑦ 【校注】 四字舊脫, 從太平御覽校補. 司馬溫公家範, 文王生而明聖, 卒爲周宗, 本此.
古者
에 婦人妊子
에 寢不側
하며 坐不邊
注+① 【校注】 大戴禮․賈子胎敎篇作差.하며 立不蹕
注+② 邊, 垂也. 蹕, 跛也.注+③ 【校注】 賈子作跛.하며 不食邪味
注+④ 【校注】 一本作食不.하며 割不正
이어든 不食
하며 席不正
이어든 不坐
하며 目不視
邪色
하며 耳不聽于淫聲
注+⑤ 【校注】 大戴禮注․溫公家範․朱子小學立敎篇引皆無兩於字.하며 夜則令瞽誦詩
하며 道正事
하더니라
如此면 則生子에 形容端正하며 才德必過人矣리라 故妊子之時에 必愼所感이니 感於善則善하고 感於惡則惡이라
人生而肖萬物者
는 皆其母感於物
이라 故形音肖之
라 文王母可謂知肖化矣
注+⑥ 【集注】 說文 “肖, 骨肉相似也. 不似其先, 故曰不肖也.”로다
太姒者
注+① 後漢書注引者下有文王之妃四字, 此脫.는 武王之母
니 禹後有莘姒氏之女
注+② 史記正義引女下有也字, 此脫. 又有在郃之陽․在渭之涘二句.라 仁而明道
러니 文王嘉之
하여 親迎于渭
할새 造舟爲梁
이라 及入
하여 太姒思媚太姜太任
하여 旦夕勤勞
하여 以進婦道
注+③ 進, 猶盡也.라
太姒號曰文母
하니 文王治外
하고 文母治內
라 太姒生十男
注+④ 十男之次管叔敍周公下, 與孟子及史記世家不合. 又成叔武․霍叔處, 此復互易其名, 疑誤.하니 長伯邑考
요 次武王發
이요 次周公旦
이요 次管叔鮮
이요 次蔡叔度
요 次曹叔振鐸
이요 次霍叔武
요 次成叔處
요 次康叔封
이요 次聃季載
注+⑤ 【集注】 梁云 “白虎通義姓名章引詩傳, 霍叔武․成叔處互易, 聃作南, 其餘序次, 與此同, 蓋本魯詩說. 史記管蔡世家, 成叔名武第七, 霍叔名處第八. 案成․霍之名, 當從史記. 漢書人表同.” 道管案漢書自同史記, 此傳實本詩傳, 蓋兩說也. 左傳郕居霍前, 而管․蔡․郕․霍皆居前, 亦不盡可據.라
太姒敎誨十子
에 自少及長
히 未嘗見邪僻之事
注+⑥ 【集注】 史記正義引此句, 下有言常以正道持之也八字.러니 及其長
하여 文王繼而敎之
하여 卒成武王周公之德
注+⑦ 【校注】 明刻本, 此下多二百二十六字, 後人羼入.이라
君子謂太姒仁明而有德이라하니라 詩曰 大邦有子하니 俔天之妹로다 文定厥祥하시고 親迎于渭하사 造舟爲梁하시니 不顯其光가하고
又曰 太姒嗣徽音하시니 則百斯男이삿다하니 此之謂也라
세 어머니는 태강太姜과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이다.
태강太姜은
의 어머니이고,
의 딸이다.
注+① ≪북당서초北堂書鈔≫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여女’ 아래에 ‘야也’자가 있는데, 여기에는 빠졌다.注+② 【집주集注】 내가 상고해보건대, ‘여呂’ 또한 강성姜姓이다. 이 태강에게 장가들어
비妃를 삼아
注+③ ≪후한서後漢書≫ 〈최기전崔琦傳〉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이 아래에 ‘현명하면서도 아름다웠다.[현이유색賢而有色]’는 4자가 있다. 과
왕계王季를 낳았다. 태강은 사람됨이
정정貞靜하고
화순和順하였으며 자식들을 솔선해서 훈도하여 과실이 없게 하였다.
注+④ ≪후한서≫ 〈최기전〉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세 아들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모두 현덕賢德을 이루게 하였다.[화도삼자化導三子 개성현덕皆成賢德]’로 되어 있다. ≪사기정의史記正義≫ 〈주본기周本紀〉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아들들을 솔선해서 훈도하여 성동成童에 이르러 과실이 없게 하였다.[솔도제자率導諸子 지우성동至于成童 미유과실靡有過失]’로 되어 있다. 태왕이 일을 계획하거나
注+⑤ ≪후한서≫ 〈최기전〉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태왕太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태강太姜에게〉 방책을 물었다.[태왕유사太王有事 필자모언必諮謀焉]’로 되어 있다. 부족을 거느리고 사는 곳을 옮길 때에 반드시 태강과 상의하였다.
注+⑥ 【집주集注】 왕조원王照圓이 이르기를 “≪후한서≫ 〈최기전〉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태왕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태강에게〉 방책을 물었다.’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양단梁端이 이르기를 “≪사기정의≫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아름다우면서도 정정貞靜하고 화순和順하며 아들들을 솔선하여 훈도해서 성동成童에 이르러 과실이 없게 하였다. 태왕은 일을 계획할 때에 반드시 태강과 상의하였고 부족을 거느리고 사는 곳을 옮길 때에 반드시 태강과 함께 하였다.’라고 하였다. ≪후한서≫ 〈최기전〉의 주注와 ≪예문유취≫와 ≪태평어람≫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현명하면서도 아름다웠으며 세 아들을 교화하고 훈도하여 모두 현덕賢德을 이루었다.’라고 하였고, ≪예문유취≫에는 이 아래에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시왈詩曰 원급강녀爰及姜女 율래서우聿來胥宇 차지위야此之謂也]’라는 14자가 있다.”라고 하였다.태왕비태강太王妃太姜
군자가 이르기를 “태강太姜은 덕교德敎를 널리 펼쳤다.”라고 하였다.
태임太任은
문왕文王의 어머니이고,
의 둘째 딸이다.
왕계王季가 태임에게 장가들어
비妃를 삼았다. 태임의 성품이 단정하고 한결같으며 성실하고 장중하여
注+① ≪후한서後漢書≫ 〈최기전崔琦傳〉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일一’이 ‘의懿’로 되어 있고, ≪사기정의史記正義≫ 〈주본기周本紀〉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일壹’로 되어 있으니, 여기에 ‘일一’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이다. 오직
덕德을 행하였다.
문왕을 잉태하기에 이르러
注+② ≪후한서≫ 〈최기전〉의 주注 및 ≪사기정의≫ 〈주본기〉에는 모두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 ‘신娠’이 ‘신身’으로 되어 있다. 눈으로는 나쁜 색깔을 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注+③ 【교주校注】 〈‘음성淫聲’은〉 ≪후한서≫ 〈최기전〉 주注와 ≪태평어람太平御覽≫ 〈인사부人事部 1〉에는 ‘악성惡聲’으로 되어 있다.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내지 않아
注+④ 【교주校注】 〈‘오언敖言’은〉 ≪태평어람≫ 〈황친부皇親部〉에는 ‘방언放言’으로 되어 있고, 〈보부편保傅篇〉의 주注와 ≪태평어람≫ 〈인사부 1〉에는 ‘악언惡言’으로 되어 있다. 태교胎敎를 잘하더니
注+⑤ 【집주集注】 ≪대대례≫ 〈보부〉에 “태교胎敎의 도리는 옥판玉版에 적고 금궤金匱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다. 측간에서 소변을 보다가
注+⑥ 【교주校注】 주注에 이르기를 “수溲는 소변이고, 시뢰豕牢는 측간이다.”라고 하였다. 문왕을 낳았다.
문왕은 태어나면서
총명聰明하고
현성賢聖하여 태임이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더니 마침내
주周나라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注+⑦ 【교주校注】 4자는 구본舊本에 빠졌는데, ≪태평어람≫을 따라 교감 보충하였다. 에 ‘문왕文王은 태어나면서 총명聰明하고 현성賢聖하여 마침내 주周나라의 조종祖宗이 되었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근본한 것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태임太任이 태교를 잘하였다.”라고 하였다.
옛날에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였을 적에 잠잘 때에는 옆으로 눕지 않으며, 앉을 때에는 모로 앉지 않으며,
注+① 【교주校注】 〈‘변邊’은〉 ≪대대례大戴禮≫와 〈태교편胎敎篇〉에는 ‘차差’로 되어 있다. 설 때에는 한 쪽 발로 서지 않았다.
注+② ‘변邊’은 가장자리라는 뜻이고, ‘필蹕’은 한쪽 발로 선다는 뜻이다.注+③ 【교주校注】 〈‘필蹕’은〉 ≪가자≫에는 ‘파跛’로 되어 있다. 부정한 맛을 먹지 않으며,
注+④ 【교주校注】 〈‘불식不食’은〉 어떤 본에는 ‘식부食不’로 되어 있다. 고기를 썬 것이 바르지 않거든 먹지 않으며, 자리가 바르지 않거든 앉지 않으며, 눈으로는 부정한 색을 보지 않으며, 귀로는 부정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注+⑤ 【교주校注】 ≪대대례≫ 주注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가범家範≫과 주자朱子의 ≪소학小學≫ 〈입교편立敎篇〉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모두 두 ‘어於’자가 없다. 밤이면
악사樂師인 봉사로 하여금
시詩를 외우며 바른 일을 말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 아이를 낳음에 용모가 단정하며, 재덕才德이 필시 보통사람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에 반드시 감화되는 바를 삼가야 하니, 선善에 감화되면 선하게 되고 악惡에 감화되면 악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남에 만물을 닮는 것은 모두 그 어머니가 만물에 감화되는 것이 〈태아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습과 음성이 만물을 닮게 되는 것이다.
문왕文王의 어머니는 태교로 태아가 닮아서 변화되는 도리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注+⑥ 【집주集注】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초肖는 골육骨肉이 서로 비슷한 것이다. 그 선조와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불초不肖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사太姒는
注+① ≪후한서後漢書≫ 〈최기전崔琦傳〉 주注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자者’ 아래에 ‘문왕의 비[문왕지비文王之妃]’라는 4자가 있는데, 여기에는 빠졌다. 문왕文王의
비妃요
무왕武王의 어머니이니,
우禹임금의 후예인
유신有莘 사씨姒氏의 딸이다.
注+② ≪사기정의史記正義≫ 〈관채세가管蔡世家〉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여女’ 아래에 ‘야也’자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빠졌다. 또 라는 두 구가 있다. 어질고 도리에 밝았는데 문왕이 이를 아름답게 여겨
위수渭水 가에서
친영親迎할 적에 배를 나란히 대어 다리를 만들었다. 태사가 그 집안에 들어오기에 이르러 시할머니
태강太姜과 시어머니
태임太任을 사랑하여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힘써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注+③ ‘진進’은 다함과 같다.
태사는 〈
문덕文德을 갖춘 어머니라는 뜻에서〉
문모文母라 불렸으니, 문왕은 밖을 다스리고
문모文母는 안을 다스렸다. 태사는 열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注+④ 또 성숙成叔 무武와 곽숙霍叔 처處는 여기에 다시 그 이름을 서로 바꾸었으니, 잘못된 듯하다. 장남은
백읍伯邑 고考요, 다음은
무왕武王 발發이요, 다음은
주공周公 단旦이요, 다음은
관숙管叔 선鮮이요, 다음은
채숙蔡叔 탁度요, 다음은
조숙曹叔 진탁振鐸이요, 다음은
곽숙霍叔 무武요, 다음은
성숙成叔 처處요, 다음은
강숙康叔 봉封이요, 다음은
담계聃季 재載이다.
注+⑤ 【집주集注】 양단梁端이 이르기를 “ 〈성명장姓名章〉에 ≪시전詩傳≫을 인용하되 곽숙霍叔 무武와 성숙成叔 처處의 서차序次를 바꾸었고, ‘담聃’은 ‘남南’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서차는 이 전傳과 같으니, 아마 ≪노시魯詩≫의 설說에 근본한 듯하다. ≪사기≫ 〈관채세가〉에는 성숙成叔의 이름은 무武이며 일곱째이고, 곽숙霍叔의 이름은 처處이며 여덟째로 되어 있다. 상고해보건대, 성숙成叔과 곽숙霍叔의 이름은 응당 ≪사기≫를 따라야 한다. ≪한서漢書≫ 〈고금인표古今人表〉에도 같다.”라고 하였다. 내(소도관蕭道管)가 상고해보건대, ≪한서≫는 자연 ≪사기≫와 같고, 이 전傳은 실로 ≪시전≫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두 가지 설說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성숙郕叔이 곽숙霍叔의 앞에 있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과 성숙郕叔과 곽숙霍叔이 모두 조숙曹叔의 앞에 있으니, 또한 다 근거로 삼을 만하지는 않다.
태사가 열 아들을 가르칠 적에 어려서부터 장성하기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사벽邪僻한 일을 본 적이 없었다.
注+⑥ 【집주集注】 ≪사기정의≫ 〈관채세가〉에 이 구절을 인용한 곳 아래에는 ‘말할 때 항상 정도를 견지하였다.[언상이정도지지야言常以正道持之也]’라는 8자가 있다. 아들들이 장성하기에 이르러서는 문왕이 이어 가르쳐서 마침내 무왕과 주공의
덕德을 성취시켰다.
注+⑦ 【교주校注】 명明나라의 각본刻本에는 이 아래에 226자가 더 많으니, 후인들이 뒤섞어 넣은 것이다.
군자가 이르기를 “
태사太姒는 인자하고 현명하며 덕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