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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1)

열녀전보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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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秦穆公姬
穆姬者 秦穆公之夫人注+① 人下脫也字. 晉獻公之女 太子申生之同母注+② 【校注】 段校曰 “此書之例, 當作姒.” 與惠公異母 賢而有義 獻公殺太子申生하고 逐群公子 惠公號公子夷吾 奔梁이라가 及獻公卒하여 得因秦立이라
始卽位 穆姬使納群公子曰 公族者 君之根本이라한대 惠公不用하고 又背秦賂
晉饑하여 請粟於秦한대 秦與之러니 秦饑하여 請粟於晉한대 晉不與
秦遂興兵與晉戰하여 獲晉君以歸 秦穆公曰 掃除先人之廟하라 寡人將以晉君見注+③ 【集注】 史記秦本紀, 作繆公令於國, 齋宿, 吾將以晉君祠上帝.호리라
穆姬聞之하고 乃與太子罃公子宏與簡璧注+① 與下脫女字.으로 注+② 【校正】 王引之案左傳衰絰與履薪爲二事, 此文合爲一, 殊不可解. 或衰絰在履薪之下, 衰絰以迎作一句, 後人誤倒其文也.以迎이라 且告穆公曰 上天降災注+③ 以下三十餘字, 左傳釋文及正義俱云 “古本無後人所加, 然此復有之, 未知出何書也.”注+④ 【校正】 引之案上天降災以下三十餘字, 俗本左傳, 卽據此增入.하여 使兩君匪以玉帛相見하고 乃以興戎이라 婢子娣姒 不能相敎注+⑤ 娣姒猶弟姉也, 娣謂惠公, 姒穆姬自謂, 史記作妾兄弟不能相救.하여 以辱君命이라 晉君朝以入이면 婢子夕以死하리니 惟君其圖之注+⑥ 【校注】 左傳釋文及正義謂“自曰上天降災以下四十二字爲後人所加”, 史記亦無其文, 此傳有之, 蓋采自他書也.하소서
公懼하여 乃舍諸靈臺 大夫請以入이어늘 公曰 獲晉君以功歸어늘 今以喪歸 將焉用이리오하고 遂改館晉君하고 饋以七牢而遣之
穆姬死하고 穆姬之弟重耳入秦이어늘 秦送之晉하니 是爲晉文公이라 太子罃思母之恩하여 而送其舅氏也 作詩曰 我送舅氏하여 曰至渭陽注+① 【集注】 案毛詩序云 “渭陽, 康公念母也. 文公遭驪姬之難, 未反而秦姬卒. 穆公納文公, 康公時爲太子, 贈送文公于渭之陽, 念母之見也.” 與此傳同. 又云 “及其卽位, 思而作是詩.” 與此傳異.호라 何以贈之 路車乘黃이로다
君子曰 慈母生孝子라하니라 詩云 敬愼威儀라야 維民之則이리라하니 穆姬之謂也
頌曰
秦穆夫人
晉惠之姉로다
秦執晉君하니
夫人流涕로다
痛不能救하여
乃將赴死하니
穆公義之하여
遂釋其弟로다


2-4 목공穆公의 부인 공희公姬
목희穆姬 목공穆公의 부인이니,注+① ‘’ 아래에 ‘’자가 빠졌다. 헌공獻公의 딸이요, 태자太子 신생申生동복同腹 누님이요,注+② 【교주校注단옥재段玉裁교주校注에 말하기를 “이 글의 규례로 볼 때 응당 ‘’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혜공惠公이복異腹 누님이다. 〈목희穆姬는〉 현숙賢淑하고 의기義氣가 있었다.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국외國外로 추방하였다. 혜공은 공자公子 이오夷吾라 불렸는데 나라로 달아났다가 헌공이 하기에 이르러 나라의 도움을 받아 본국本國으로 돌아와 즉위하였다.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목희는 국외國外로 추방하였던 여러 공자公子를 받아들여 나라로 돌아오게 하기를 요구하여 말하기를 “은 군주의 근본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혜공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또 도 저버렸다.
나라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나라와 전쟁을 벌여 나라의 군주인 혜공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진 목공이 말하기를 “선인先人종묘宗廟소제掃除하라. 과인寡人이 장차 나라 군주에게 나의 선조를 배알하게 하리라.”注+③ 【집주集注】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목공繆公이 나라에 명령을 내리기를 ‘재숙齋宿하라. 내 진군晉君을 제물로 하여 상제上帝께 제사지낼 것이다.’라고 하였다.”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목희穆姬가 이 소식을 듣고 과 딸 간벽簡璧과 함께注+① ‘’ 아래에 ‘’자가 빠졌다. 섶을 밟고 최질衰絰을 입고注+② 【교정校正왕인지王引之가 상고해보건대, 이 글에서는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니,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혹 ‘최질衰絰’을 ‘이신履薪’의 아래에 두고 ‘쇠질이영衰絰以迎’을 1로 만들어야 하는데, 후인後人이 잘못 도치한 듯하다. 가서 목공穆公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목공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려注+이하以下 30여 자는 ≪춘추좌전석문春秋左傳釋文≫ 및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에 모두 이르기를 “고본古本에는 후인後人이 추가한 바가 없으나 여기에는 다시 있으니, 어느 글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注+④ 【교정校正왕인지王引之가 상고해보건대, ‘상천강재上天降災’ 이하 30여 자는 속본俗本 ≪춘추좌씨전≫이니, 곧 이에 의거하여 보태 넣은 것이다. 으로 하여금 옥백玉帛을 주고받는 로 만나게 못하고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비자婢子의 형제가 서로 가르치지 못하여注+⑤ ‘제사娣姒’는 ‘제자弟姉’와 같으니, 혜공惠公을 이르고 목희穆姬가 스스로를 이른 것이다. ≪사기史記≫에는 ‘의 형제가 서로 구원하지 못하였다.’로 되어 있다.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진군晉君이 아침에 들어오면 비자婢子는 저녁에 죽을 것이니, 임금께서는 헤아려 주소서.”注+⑥ 【교주校注】 ≪춘추좌전석문≫ 및 ≪춘추좌전정의≫에 ‘왈상천강재曰上天降災’로부터 이하 42자를 후인後人이 추가한 바라고 하였고, ≪사기≫에도 그 글이 없는데, 이 에 있으니 아마 다른 글에서 채집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목희穆姬가 세상을 떠나고 목희의 아우 중이重耳나라에 들어왔는데 나라가 중이를 나라로 들여보내니, 이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태자太子 이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외삼촌을 전송하며 시를 짓기를
“내 외삼촌을 전송하여, 위양渭陽에 이르노라.注+① 【집주集注】 상고해보건대, 〈모시서毛詩序〉에 이르기를
문공文公여희驪姬을 만나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진희秦姬가 죽었다. 그 후 목공穆公이 문공을 본국으로 들여보내니, 강공康公이 이때 태자太子가 되어 문공을 위수渭水 북쪽에서 전송하면서 어머니를 볼 수 없음을 생각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 과 같다. 〈모시서〉에 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 과 다르다. 무엇을 선물하는고, 노거路車승황乘黃이로다.”라고 하였다.
진목공희秦穆公姬진목공희秦穆公姬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자애로운 어머니가 효자孝子를 낳는다.”라고 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목희穆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은 다음과 같다.
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은
나라 혜공惠公의 누님이로다
나라가 진군晉君을 잡아가니
부인夫人이 눈물을 흘렸도다
구하지 못함을 애통해하여
이에 장차 죽으려 하니
목공이 이를 의롭게 여겨
드디어 그 아우를 풀어주었도다


역주
역주1 여러 公子 : 晉나라 獻公은 9명의 아들을 두었다.
역주2 公族 : 諸侯의 同姓 자손이다. ≪春秋左氏傳≫ 宣公 2년 조에 “당초 麗姬가 患亂을 일으켰을 적에 群公子를 기르지 않겠다고 盟誓하였으므로 이때부터 晉나라에는 公族이 없었다. 그러다가 成公이 卽位한 뒤에 卿의 適子에게 官職을 주고 土地까지 주어 公族大夫로 삼고, 또 卿의 餘子에게 官職을 주어 餘子로 삼고, 卿의 庶子에게 官職을 주어 公行으로 삼으니, 晉나라에 이때부터 公族․餘子․公行이 있게 되었다.[初 麗姬之亂 詛無畜群公子 自是晉無公族 及成公卽位 乃宦卿之適子而爲之田 以爲公族 又宦其餘子 亦爲餘子 其庶子爲公行 晉於是有公族餘子公行]”라고 하였다.
역주3 秦나라에……약속 : 公子 夷吾가 자신이 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晉나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를 때 秦나라에 토지를 바칠 것을 약속한 것을 말한다. ≪國語≫ 〈晉語 2 里克弑奚齊而秦立惠公〉에 의하면 公子 夷吾가 公子 縶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진실로 나를 도와주신다면, 天命을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망명객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나라에 들어가게만 된다면 宗廟를 소제하고 社稷을 안정시킬 뿐이지 망명객이 어찌 국토까지 소유하려 들겠습니까? 임금께서도 실로 自國의 郡縣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우선 黃河 너머에 늘어서 있는 다섯 城을 들여놓겠습니다.[君苟輔我 蔑天命矣 吾必遂矣 亡人苟入 掃除宗廟 定社稷 亡人何國之與有 君實有郡縣 且入河外列城五]”라고 하였고, ≪春秋左氏傳≫ 僖公 15년 조에 “晉侯는 中大夫들에게 賂物을 주기로 허락해 놓고는 임금이 된 뒤에는 모두 背信하였고, 秦伯에게 河外의 다섯 城을 賂物로 주되 동쪽으로는 虢나라의 경계까지 전부와 남쪽으로는 華山까지와 河內의 解梁城까지 주겠다고 허락해 놓고는 들어와 임금이 된 뒤에는 주지 않았다.[晉侯許賂中大夫 旣而皆背之 賂秦伯以河外列城五 東盡虢略 南及華山 內及解梁城 旣而不與]”라고 하였다.
역주4 晉나라가……않았다 : ≪春秋左氏傳≫ 僖公 15년 조에 “晉나라에 饑饉이 들었을 때 秦나라는 양곡을 보내주었는데, 秦나라에 饑饉이 들자 晉나라는 糧穀 보내는 것을 막았다.[晉饑 秦輸之粟 秦饑 晉閉之糴]”라고 하였다.
역주5 [也] : 저본에는 ‘也’가 없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6 (姉)[姒] : 저본에는 ‘姉’로 되어 있으나, ≪列女傳校注≫에 의거하여 ‘姒’로 바로잡았다.
역주7 太子……宏 : 罃은 秦 康公의 이름으로, 秦 穆公과 穆姬의 아들이고, 晉 文公의 外甥이다. ‘宏’은 ‘弘’으로도 쓴다.
역주8 春秋左氏傳에……삼았는데 : ≪春秋左氏傳≫ 僖公 15년 조에 “穆姬는 晉侯가 잡혀 온다는 말을 듣고 太子 甇․弘과 딸 簡璧을 데리고 臺로 올라가 섶을 밟고서, 使者에게 免(문)하고 衰絰을 입고 가서 秦伯을 맞이하였다.[穆姬聞晉侯將至 以大子罃弘與女簡璧登臺而履薪焉 使以免服衰絰逆]”라고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역주9 두……임금 : 秦 穆公과 晉 惠公을 말한다.
역주10 靈臺 : 京兆 鄠縣에 있는 周나라의 古臺로, 임금의 遊觀이나 天象을 살피기 위한 臺이다.
역주11 大夫들이……돌려보냈다 : ≪春秋左氏傳≫ 僖公 15년에 “大夫들이 데리고 들어가기를 청하거늘, 穆公이 말하기를 ‘晉侯를 잡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큰 收穫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인데, 데리고 돌아간 뒤에 喪이 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대부들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또 晉人들이 슬픔과 근심으로 나를 감동시키고 天地가 그 약속을 지키라고 나에게 요구하니, 晉나라 사람들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여움을 加重시키는 것이요, 내가 내 말을 저버리면 천지를 배반하는 것이다. 晉나라 사람들의 분노를 가중시키면 감당하기 어렵고 천지를 배반하면 상서롭지 못하니, 반드시 晉君을 돌려보낼 것이다.[大夫請以入 公曰 獲晉侯 以厚歸也 旣而喪歸 焉用之 大夫其何有焉 且晉人慼憂以重我 天地以要我 不圖晉憂 重其怒也 我食吾言 背天地也 重怒 難任 背天 不祥 必歸晉君]’라고 하였다.” 하였다.
역주12 七牢 : 성대한 음식을 말한다. 牢는 古代에 제사에 사용하는 犧牲인데 소․양․돼지 세 가지 犧牲을 온전히 갖춘 것이 1牢이다.
역주13 [女] : 저본에는 ‘女’가 없으나, 王照圓의 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4 (衰絰履薪)[履薪 衰絰] : 저본에는 ‘衰絰履薪’으로 되어 있으나, 王引之의 校正에 의거하여 ‘履薪衰絰’로 바로잡았다.
역주15 내……乘黃이로다 : ≪詩經≫ 〈秦風 渭陽〉에 보인다. 路車는 제후가 타는 수레이고 乘黃은 황색의 네 필 말이다.
역주16 渭陽은……詩이다 : ≪詩經≫ 〈秦風 渭陽 序〉에는 이 구절 뒤에 ‘康公의 어머니, 즉 秦姬는 晉 獻公의 딸이었는데[康公之母 晉獻公之女]’라는 구절이 더 있다.
역주17 康公이……것이다 : ≪詩經≫ 〈秦風 渭陽 序〉에는 이 구절 앞에 ‘내 舅氏를 보니 어머니가 생존해 계신 듯하다 하였다.[我見舅氏 如母存焉]’라는 구절이 더 있다.
역주18 (下)[不] : ≪列女傳集注≫의 注에는 ‘下’로 되어 있으나, ≪詩經≫ 〈秦風 渭陽 序〉에 의거하여 ‘不’로 바로잡았다.
역주19 威儀를……되리라 : ≪詩經≫ 〈大雅 抑〉과 〈魯頌 泮水〉에 보인다.

열녀전보주(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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