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姬者
는 秦穆公之夫人
注+① 人下脫也字.니 晉獻公之女
요 太子申生之同母
注+② 【校注】 段校曰 “此書之例, 當作姒.”요 與惠公異母
라 賢而有義
라 獻公殺太子申生
하고 逐群公子
라 惠公號公子夷吾
니 奔梁
이라가 及獻公卒
하여 得因秦立
이라
始卽位에 穆姬使納群公子曰 公族者는 君之根本이라한대 惠公不用하고 又背秦賂라
晉饑하여 請粟於秦한대 秦與之러니 秦饑하여 請粟於晉한대 晉不與라
秦遂興兵與晉戰
하여 獲晉君以歸
라 秦穆公曰 掃除先人之廟
하라 寡人將以晉君見
注+③ 【集注】 史記秦本紀, 作繆公令於國, 齋宿, 吾將以晉君祠上帝.호리라
穆姬聞之
하고 乃與太子罃公子宏與
簡璧
注+① 與下脫女字.으로 注+② 【校正】 王引之案左傳衰絰與履薪爲二事, 此文合爲一, 殊不可解. 或衰絰在履薪之下, 衰絰以迎作一句, 後人誤倒其文也.以迎
이라 且告穆公曰 上天降災
注+③ 以下三十餘字, 左傳釋文及正義俱云 “古本無後人所加, 然此復有之, 未知出何書也.”注+④ 【校正】 引之案上天降災以下三十餘字, 俗本左傳, 卽據此增入.하여 使兩君匪以玉帛相見
하고 乃以興戎
이라 婢子娣姒
가 不能相敎
注+⑤ 娣姒猶弟姉也, 娣謂惠公, 姒穆姬自謂, 史記作妾兄弟不能相救.하여 以辱君命
이라 晉君朝以入
이면 婢子夕以死
하리니 惟君其圖之
注+⑥ 【校注】 左傳釋文及正義謂“自曰上天降災以下四十二字爲後人所加”, 史記亦無其文, 此傳有之, 蓋采自他書也.하소서
公懼하여 乃舍諸靈臺라 大夫請以入이어늘 公曰 獲晉君以功歸어늘 今以喪歸면 將焉用이리오하고 遂改館晉君하고 饋以七牢而遣之라
穆姬死
하고 穆姬之弟重耳入秦
이어늘 秦送之晉
하니 是爲晉文公
이라 太子罃思母之恩
하여 而送其舅氏也
에 作詩曰 我送舅氏
하여 曰至渭陽
注+① 【集注】 案毛詩序云 “渭陽, 康公念母也. 文公遭驪姬之難, 未反而秦姬卒. 穆公納文公, 康公時爲太子, 贈送文公于渭之陽, 念母之見也.” 與此傳同. 又云 “及其卽位, 思而作是詩.” 與此傳異.호라 何以贈之
오 路車乘黃
이로다
君子曰 慈母生孝子라하니라 詩云 敬愼威儀라야 維民之則이리라하니 穆姬之謂也라
목희穆姬는
진秦 목공穆公의 부인이니,
注+① ‘인人’ 아래에 ‘야也’자가 빠졌다. 진晉 헌공獻公의 딸이요,
태자太子 신생申生의
동복同腹 누님이요,
注+② 【교주校注】 단옥재段玉裁의 교주校注에 말하기를 “이 글의 규례로 볼 때 응당 ‘사姒’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혜공惠公의
이복異腹 누님이다. 〈
목희穆姬는〉
현숙賢淑하고
의기義氣가 있었다.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를
국외國外로 추방하였다. 혜공은
공자公子 이오夷吾라 불렸는데
양梁나라로 달아났다가 헌공이
졸卒하기에 이르러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본국本國으로 돌아와 즉위하였다.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목희는
국외國外로 추방하였던 여러
공자公子를 받아들여
진晉나라로 돌아오게 하기를 요구하여 말하기를 “
은 군주의 근본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혜공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또
도 저버렸다.
진秦나라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와 전쟁을 벌여
진晉나라의 군주인 혜공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진 목공이 말하기를 “
선인先人의
종묘宗廟를
소제掃除하라.
과인寡人이 장차
진晉나라 군주에게 나의 선조를 배알하게 하리라.”
注+③ 【집주集注】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목공繆公이 나라에 명령을 내리기를 ‘재숙齋宿하라. 내 진군晉君을 제물로 하여 상제上帝께 제사지낼 것이다.’라고 하였다.”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목희穆姬가 이 소식을 듣고
과 딸
간벽簡璧과 함께
注+① ‘여與’ 아래에 ‘여女’자가 빠졌다. 섶을 밟고
최질衰絰을 입고
注+② 【교정校正】 왕인지王引之가 상고해보건대, 이 글에서는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니,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혹 ‘최질衰絰’을 ‘이신履薪’의 아래에 두고 ‘쇠질이영衰絰以迎’을 1구句로 만들어야 하는데, 후인後人이 잘못 도치한 듯하다. 가서
목공穆公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목공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려
注+③ 이하以下 30여 자는 ≪춘추좌전석문春秋左傳釋文≫ 및 ≪춘추좌전정의春秋左傳正義≫에 모두 이르기를 “고본古本에는 후인後人이 추가한 바가 없으나 여기에는 다시 있으니, 어느 글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注+④ 【교정校正】 왕인지王引之가 상고해보건대, ‘상천강재上天降災’ 이하 30여 자는 속본俗本 ≪춘추좌씨전≫이니, 곧 이에 의거하여 보태 넣은 것이다. 으로 하여금
옥백玉帛을 주고받는
예禮로 만나게 못하고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비자婢子의 형제가 서로 가르치지 못하여
注+⑤ ‘제사娣姒’는 ‘제자弟姉’와 같으니, 제娣는 혜공惠公을 이르고 사姒는 목희穆姬가 스스로를 이른 것이다. ≪사기史記≫에는 ‘첩妾의 형제가 서로 구원하지 못하였다.’로 되어 있다.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진군晉君이 아침에 들어오면
비자婢子는 저녁에 죽을 것이니, 임금께서는 헤아려 주소서.”
注+⑥ 【교주校注】 ≪춘추좌전석문≫ 및 ≪춘추좌전정의≫에 ‘왈상천강재曰上天降災’로부터 이하 42자를 후인後人이 추가한 바라고 하였고, ≪사기≫에도 그 글이 없는데, 이 전傳에 있으니 아마 다른 글에서 채집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목공이 두려워하여 이에
혜공惠公을
에 안치하였다.
드디어
진군晉君을
객관客館에 옮겨 모시고
로 대접한 다음 돌려보냈다.
목희穆姬가 세상을 떠나고 목희의 아우
중이重耳가
진秦나라에 들어왔는데
진秦나라가 중이를
진晉나라로 들여보내니, 이가 바로
진晉 문공文公이다.
태자太子 앵罃이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여 그의 외삼촌을 전송하며 시를 짓기를
문공文公이
여희驪姬의
난難을 만나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진희秦姬가 죽었다. 그 후
목공穆公이 문공을 본국으로 들여보내니,
강공康公이 이때
태자太子가 되어 문공을
위수渭水 북쪽에서 전송하면서 어머니를 볼 수 없음을 생각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
전傳과 같다. 〈모시서〉에 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
전傳과 다르다. 무엇을 선물하는고,
노거路車와
승황乘黃이로다.”라고 하였다.
진목공희秦穆公姬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자애로운 어머니가
효자孝子를 낳는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목희穆姬를 두고 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