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孝平王后者
는 安漢公太傅大司馬王莾之女
요 孝平皇帝之后也
라 爲人婉
有節行
注+① 外戚傳淑字作瘱, 音於計切, 亦通作瘱. 瘱, 訓靜也. 或作嫕, 其音同耳. 故文選注兩引之, 一女史箴注引漢書作“婉嫕有節操”, 又引曹大家注“婉, 柔和. 嫕, 深邃也.” 一洞簫賦注引曹大家注曰 “瘱, 深邃也, 音翳.” 是瘱嫕字通, 故兩存之. 今本作淑, 或後人妄改其文, 宜据漢書選注, 還曹本之舊焉.이라 平帝即位
에 后年九歳
라
莾秉政
하여 欲
依霍光故事
하여 以女配帝
注+② 外戚傳無只字. 不知何字之誤. 衍.하여 設詐以成其禮
하여 諷皇太后遣長樂少府
注+③ 【校注】 夏侯藩.宗正
注+④ 【校注】 劉宏.尚書令
注+⑤ 【校注】 平晏.納采
하고 太師
注+⑥ 【校注】 孔光.大司徒
注+⑦ 【校注】 馬宮.大司空
注+⑧ 【校注】 甄豐.以下四十
人皮弁素積
注+⑨ 外戚傳作四十九人, 此脫九字耳. 皮弁, 以鹿皮爲冠也. 素積, 素裳也.而告宗廟
라
明年春
에 遣
司徒[大]司空
注+⑩ 外戚傳趨作騶, 疑此本作趣, 趣騶音近字通耳. 詩曰 “蹶維趣馬.”左右将軍
注+⑪ 【校注】 皆當有大字.奉乗輿法駕
하여 迎皇后于安漢公第
라 [大]司徒授璽綬
하고 登車稱警蹕
하고 時自上林延壽門
으로 入未央前殿
이라
群臣就位行禮畢
에 大赦天下
하고 賜公卿下至趨宰執事
하되 皆有差
注+⑫ 【校注】 孫建․甄邯.라
后立歳餘에 平帝崩하고 後數年에 莾簒漢位하니 后年十八이라 自劉氏廢로 常稱疾不朝會호니
莾敬惮哀傷
하여 意欲嫁之
하여 令立國將軍孫建世子
將醫往問疾
注+① 外戚傳豫作襐飾二字, 此豫卽襐字之誤, 又脫飾字耳. 襐, 服飾也. 急就篇云 “襐飾, 刻畫無等雙.”이라
后大怒
하여 笞鞭
旁侍御
注+② 【校注】 漢書旁上有其字.하고 因
疾
하여 不肯起
注+③ 外戚傳廢疾作發病.하니 莾遂不敢強也
라 及漢兵誅莾
하고 燔燒未央
하여 后曰 何面目以見漢家
오하고 自投火中而死
라
君子謂平后體自然貞淑之行하여 不爲存亡改意하니 可謂節行不虧汚者矣로다
詩曰 髧彼兩髦가 實惟我儀니 之死矢靡他라하니 此之謂也라
한漢나라
효평왕후孝平王后는
안한공安漢公 태부太傅 대사마大司馬 의 딸이요,
의
황후皇后이다. 사람됨이
온화溫和하고
진중鎭重하며
절조節操와
품행品行이 있었다.
注+①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에는 ‘숙淑’자가 ‘예瘱’로 되어 있는데, 독음은 어於․계計의 반절反切이니, 또한 예瘱라고 통용하여 쓰기도 한다. 예瘱는 정숙靜肅하다는 뜻이다. 혹 ‘예嫕’로 쓰기도 하니, 독음은 같다. 그러므로 ≪문선文選≫ 주注에 두 번 인용하였는데, 첫째는 〈여사잠女史箴〉의 주注에 인용된 ≪한서≫에 ‘완예유절조婉瘱有節操’로 되어 있는데 다시 조대가曹大家의 주注를 인용하여 ‘완婉는 온화함이고, 예嫕는 진중함이다.’라고 하였으며, 둘째는 〈퉁소부洞簫賦〉의 주注에 조대가曹大家의 주注를 인용하여 “예瘱는 진중함이고, 독음은 예翳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예瘱’자와 ‘예嫕’자가 통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 모두 그대로 둔 것이다. 금본今本에 ‘숙淑’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마 후인後人이 마음대로 그 글을 고친 듯하니, 의당 ≪한서≫와 ≪문선≫ 주注에 의거하여 조본曹本의 옛 글자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평제平帝가 즉위하였을 때에 황후는 나이가 아홉이었다.
왕망이 정권을 잡고서
를 따라서 딸을
황제皇帝의 배필로 삼고자 하였다.
注+② ≪한서≫ 〈외척전〉에는 ‘지只’자가 없다. 어떤 자의 오자誤字인지 알지 못하겠다. 연자衍字이다. 이에
황태후皇太后에게 넌지시 고하여
注+③ 【교주校注】 하후번夏侯藩이다.․
注+④ 【교주校注】 유굉劉宏이다.․
注+⑤ 【교주校注】 평안平晏이다.을 보내어
납채納采하게 하고,
태사太師注+⑥ 【교주校注】 공광孔光이다.․
대사도大司徒注+⑦ 【교주校注】 마궁馬宮이다.․
대사공大司空注+⑧ 【교주校注】 견풍甄豐이다. 이하以下 49인이 사슴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쓰고 흰 비단으로 만든 하의를 입고
注+⑨ ≪한서≫ 〈외척전〉에는 ‘사십구인四十九人’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구九’자가 빠졌다. 피변皮弁은 사슴 가죽으로 관冠을 만든 것이다. 소적素積은 흰 비단으로 만든 하의下衣이다. 종묘宗廟에 고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대사도․대사공
注+⑩ ≪한서≫ 〈외척전〉에는 ‘추趨’가 ‘추騶’로 되어 있으니, 아마 은 촉趣와 추騶가 독음이 비슷하고 글자가 통용되기 때문인 듯하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좌장군左將軍․
우장군右将軍을
注+⑪ 【교주校注】 〈‘사도司徒와 사공司空의 위에는’〉 모두 응당 ‘대大’자가 있어야 한다. 보내어
를 받들어 안한공의 집에서
황후皇后를 맞이하게 하였다. 대사도가 옥새의 인끈을 황후에게 건네고 수레에 올라
을 하고 시간에 맞추어
과
연수문延壽門을 거쳐
의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여러 신하가 각자의 자리에 나아와
예禮를 마치자
천하天下에
대사면大赦免을 내리고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와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상을 내리되 모두 차등을 두었다.
注+⑫ 【교주校注】 손건孫建과 진감甄邯이다.효평왕후孝平王后
황후皇后가 된 지 한 해 남짓 만에 평제平帝가 붕어崩御하고, 몇 년이 지난 뒤에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였는데, 당시 황후의 나이 18세였다. 유씨劉氏의 한漢 왕조王朝가 망한 뒤로부터 황후는 항상 병을 핑계로 조회朝會에 나가지 않았다.
왕망은, 황후가 경외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여
개가改嫁시키고자
로 하여금 옷을 잘 차려 입고 의원을 데리고 황후에게 가서 문병하게 하였다.
注+①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에는 ‘예豫’가 ‘상식襐飾’ 2자로 되어 있으니, 여기의 ‘예豫’는 바로 ‘상襐’자의 오자이고, 또 ‘식飾’자가 빠졌다. ‘상襐’은 의복의 꾸밈이다. 에 이르기를 “상식襐飾은 꾸민 것이 짝할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크게 노하여 곁에 있던
시종侍從을 매질하고
注+② 【교주校注】 ≪한서≫ 〈외척전〉에는 ‘방旁’ 위에 ‘기其’자가 있다. 인하여 병이 나서 일어나려 하지 않으니,
注+③ ≪한서≫ 〈외척전〉에는 ‘폐질廢疾’이 ‘발병發病’으로 되어 있다. 왕망이 드디어 감히 강요하지 못하였다. 한나라 병사들이 왕망을 주살하고
미앙궁未央宮을 불태우기에 이르러 황후가 말하기를 “무슨
면목面目으로 한나라
황실皇室을 보리오.”라고 하고, 스스로 불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효평황후孝平皇后는 자연스럽고 정숙貞淑한 행실을 체득하여 한실漢室의 존망存亡으로 인하여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니, 절조節操와 덕행德行이 이지러지거나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