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隱五年
이라 四月
에 鄭人侵衛牧
하야 以報東門之役
하니 衛人以燕師
鄭
하다
傳
【左傳】隱九年이라 北戎侵鄭하니 鄭伯禦之할새 患戎師曰 彼徒我車니 懼其侵軼我也라
公子突曰 使勇而無剛者
로 嘗寇而速去之
하고 하소서
先者見獲이면 必務進이요 進而遇覆이면 必速奔하리이다
祝聃逐之하야 衷戎師하고 前後擊之하야 盡殪하니 戎師大奔하다
傳
【左傳】桓九年
이라 巴子使
告于楚
하야 請與鄧爲好
하니 楚子使道朔將巴客以聘於鄧
하다
傳
秦人過析타가 隈入而係輿人하야 以圍商密하고 昏而傅焉하야
宵에 坎血加書하고 僞與子儀子邊盟者하니 商密人懼曰 秦取析矣라
傳
【左傳】成十六年이라 鄭子罕伐宋하니 宋將鉏樂懼敗諸汋陂하고 退하야 舍於夫渠하야 不儆이어늘 鄭人覆之하야 敗諸汋陵하고 獲將鉏樂懼하니
傳
【左傳】成十七年
이라 舒庸人以楚師之敗也
로 道吳人圍巢
하야 伐駕
하고 圍釐虺
하고 遂恃吳而不設備
어늘 公子槖師襲舒庸
하야 滅之
하다
傳
【左傳】襄二十五年이라 吳子諸樊伐楚하야 以報舟師之役하다
門于巢어늘 巢牛臣曰 吳王勇而輕하니 若啓之면 將親門하리라
我獲射之면 必殪리니 是君也死면 疆其少安하리라 從之하다
○ 襄二十四年 吳人〈爲楚舟師之役故로〉 召舒鳩人하니 〈舒鳩人〉叛楚하다
楚子師于荒浦
하야 使沈尹壽與師
犂讓之
한대 舒鳩子敬逆二子
하야 而告無之
하고 且請受盟
하다
彼告不叛하고 且請受盟이어늘 而又伐之면 伐無罪也니 姑歸息民하야 以待其卒하소서
卒而不貳면 吾又何求릿가 若猶叛我면 無辭有庸이리다 〈乃還하다〉
二十五年秋薳子馮卒하니 屈建爲令尹하고 〈屈蕩爲莫敖하다〉 舒鳩人卒叛이어늘 子木伐之하야 遂滅舒鳩하니
冬에 楚子以滅舒鳩賞子木한대 辭曰 先大夫蔿子之功也라하니 以與蔿掩하다
傳
【左傳】昭十二年
이라 晉荀吳僞會齊師
하야 假道於鮮虞
하야 遂入昔陽
하다
傳
【左傳】昭十七年이라 秋晉侯使屠蒯如周하야 請有事於雒與三塗하다
九月丁卯에 晉荀吳帥師涉自棘津하야 使祭史先用牲于雒하다
陸渾人弗知하니 師從之하야 庚午에 遂滅陸渾하고 數之以其貳於楚也하다 陸渾子奔楚하고 其衆奔甘鹿하니라
傳
【左傳】昭十七年이라 吳伐楚할새 〈陽匃爲令尹하야
且楚故에 司馬令龜하니 我請改卜이라하고 令曰 魴也以其屬死之어든 楚師繼之하야 尙大克之하노라 吉하다〉
戰于長岸에 〈子魚先死하니 楚師繼之하야〉 大敗吳師하고 獲其乘舟餘皇하다
使隨人與後至者守之
호되 環而塹之
하야 及泉
하고 하다
使
者三人潛伏於舟側
하고 曰 我呼餘皇
이어든 則對
하라
傳
【左傳】昭二十三年이라 吳人伐州來한대 楚薳越帥師及諸侯之師奔命救州來하니 吳人禦諸鍾離하다
胡沈之君幼而狂하고 陳大夫齧壯而頑하고 頓與許蔡疾楚政하며 楚令尹死하야 其師熸이라 帥賤多寵하야 政令不壹하며
同役而不同心
하며 帥賤而不能整
하야 無大威命
하니 楚可敗也
라
若分師하야 先以犯胡沈與陳이면 必先奔이요 三國敗면 諸侯之師乃搖心矣리라 諸侯乖亂이면 楚必大奔하리니
請先者去備薄威하고 後者敦陳整旅하라 吳子從之하다
戊辰晦에〉 戰于鷄父할새 吳子以罪人三千先犯胡沈與陳하니 三國爭之하다
吳爲三軍하야 以繫於後하되 中軍從王하고 光帥右하고 掩餘帥左하다
舍胡沈之囚하야 使奔許與蔡頓曰 吾君死矣라하고 師譟而從之하다
傳
【左傳】定十四年
이라 吳伐越
하니 越子
禦之
하야 陳于檇李
하다
使罪人三行
으로 屬劒於頸
하고 而辭曰 二
有治
에 臣奸旗鼓
하야 不敏於君之行前
하니
不敢逃刑
이라 敢歸死
하노라하고 遂自
니 師屬之目
이어늘 越子因而伐之
하야 大敗之
하다
還타가 卒於陘하니 夫差使人立於庭하야 苟出入에 必謂己曰 夫差아
而忘越王之殺而父乎아하면 則對曰 唯라 不敢忘이라하다
傳
【左傳】哀十七年이라 三月에 越子伐吳하니 吳子禦之笠澤하야 夾水而陳하다
越子爲左右句卒하야 使夜或左或右하야 鼓譟而進하니 吳師分以禦之어늘
越子以三軍潛涉하야 當吳中軍而鼓之하니 吳師大亂이어늘
難者曰 果如是인댄 則兵者乃小人之所長이요 而君子之所短也라
君臣相詐則其國危하고 父子相詐則其家敗하며 兄弟相詐則其親離하고 朋友相詐則其交疎하고 商賈相詐則其業廢로되 至于用兵하야는 小詐則小勝하고 大詐則大勝이라
小人長于詐라 故其用兵亦長하고 君子短于詐라 故其用兵亦短이라
是數子者가 苟以君子長者之道 處之면 安能成其功乎아
故儒家之小人은 兵家之君子也요 兵家之君子는 儒家之小人也라 彼區區忠信誠慤이 何足稱于孫吳之門哉리오
吾應之曰 吾姑言其理耳
어늘 今子擧前古之事 以攻之
하니 以子之事
로 證吾之理
면 益
兵非君子莫能用也
리라
春秋諸子가 所以能收一日之功은 特以小人而遇小人耳ᄅ새라
若君子遇之면 雖鄭楚秦晉十餘國之衆 爲一軍하고 合曼伯子突十餘人之知 爲一將이라도 吾知談笑麾之綽綽乎有餘裕矣라
世未有誠而輕者
注+誠則不輕動하니 敵雖欲誘之
라도 烏得而誘之
며 世未有誠而貪者
하니 敵雖欲餌之
注+貪乃爲敵所餌라도 烏得而餌之
며 世未有誠而擾者
注+誠則安靜不擾하니 敵雖欲亂之
注+擾乃爲敵所亂라도 烏得而亂之
리오
用是誠以撫御
면 則衆皆不疑
注+以誠撫御士卒 則人人孚信리니 非反間之所能惑也
注+敵人雖行反間 自無可乘之隙요 用是誠以備禦
면 則衆皆不怠
注+以誠備禦外患 則事事詳密리니 非詭謀之所能誤也
注+敵人雖設詭謀 自無可施之術라
彼向之所以取勝者
注+總論春秋之時善於用兵以取勝者는 因其輕而入焉
이요 因其貪而入焉
이며 因其擾而入焉
이요 因其疑而入焉
이며 因其怠而入焉
注+不誠則有此五患 故爲敵人所勝이니라
一誠旣立
이면 五患皆除
注+用一誠而除五患하야 兕無所投其角
하고 兵無所投其刄
하며 曼伯子突之徒無所投其詐矣
리라
縱使盡號召自古之知兵者
하야 環而攻之
注+假設合聚古人善用兵者 環而攻我하고 聚而譟之
하야 雖極其詐計至于百
이라도 君子待之一於誠而已矣
요 又極其詐計至于千
이라도 君子待之亦一於誠而已矣
요 又極其詐計至于萬
注+彼之用計 雖不可勝窮이라도 君子待之
一於誠而已矣
注+兵只用一誠 彼自不能勝我니 彼之詐 極其萬而不足
注+詐雖多而無用 故云不足이요 我之誠 守其一而有餘
注+誠雖約而易守 故云有餘하니 彼常勞而我常佚
注+詐故勞 誠故逸이요 彼常動而我常靜
注+詐故動 誠故靜이라
以佚制勞
注+以我之逸 制彼之勞하고 以靜制動
注+以我之靜 制彼之動이 豈非天下常勝之道乎
注+一誠之效 如此아
然則論天下之善用兵者
는 不得不歸之君子
니 用兵之善者
는 固無出於君子矣
注+君子常勝 故善用兵로다
然
而勒景鐘
注+此是結尾 轉發新意 蓋上文之論 雖云正大 亦近迂闊 須要此反難 方是文字 此處設疑云 自古以戰勝 而紀攻於帝籍勒名於景鍾者 大率多形餘之人 黥 涅額也 髡 削髮也者
에 黥髠盜販
이 相望于史
하고 而宋襄
注+見僖二十二年注+本傳之流
가 每以仁義爲天下笑
注+宋襄公與楚人戰 不重傷 不禽二毛 不鼓不成列 而反爲楚人所敗 成安君陳餘 儒者 常稱義兵 不用詐謀 而反爲韓信所擒 然則小人之詐勝 而君子之誠敗矣는 抑又何也
注+設問而下文答오
蓋盡小人之術者
라야 方無愧於小人之名
注+答云 盡小人之術 方是眞小人이요 盡君子之道者
라야 方無愧於君子之名
注+盡君子之道 方是眞君子 不然則僞而已이라
世之所謂小人은 已極其術하야 稱小人之名者也요 世之所謂君子는 未得其道하야 託君子之名者也라
以僞君子對眞小人
注+如楚人韓信 皆眞小人 而宋襄陳餘 以僞君子對之하야 持一日之誠
으로 而欲破百年之詐
注+一日之誠 僞君子也 百年之詐 眞小人也하니 安得而不敗哉
注+其取敗也 固宜리오
擧斧以伐木
에 苟不能仆焉
이면 謂斧之鈍則可
어니와 謂木勝斧則不可也
요 酌水以沃火
에 苟不能息焉
注+息 滅也이면 謂水之微則可
注+水至少 火至多 故不能滅어니와 謂火勝水則不可也
注+非火能勝水也라
安得以宋襄輩
로 遂疑君子之短於兵哉
注+宋襄陳餘之誠 猶一杯之水 楚人韓信之詐 猶車薪之火 引此爲喩 極新得到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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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공隱公 5년, 4월에 정인鄭人이 위衛나라 목牧에 침입侵入하여 동문東門의 전쟁을 보복하니, 위인衛人이 연燕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공격攻擊하였다.
정나라 채족祭足‧원번原繁‧설가洩駕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연군燕軍의 전면을 공격하는 한편, 만백曼伯‧자원子元을 시켜 군사를 은밀히 이동하여 그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연인은 앞에 있는 정나라의 삼군만을 두려워할 뿐, 배후背後의 제인制人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豫測도 하지 못하였다.
6월에 정나라의 두 공자公子가 제인을 거느리고서 연군을 북제北制에서 패배시켰다.
“의외意外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지휘指揮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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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공隱公 9년, 북융北戎이 정鄭나라를 침공하니 정백鄭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할 때 북융의 군대를 근심하여,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거병車兵이니 저들이 뒤에서 갑자기 우리를 침공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公子 돌突이 말하기를 “용감하되 강剛한 의지가 없는 전사戰士를 시켜 적敵을 시험해보고는 속히 후퇴하게 하시고, 군君께서는 세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고서 적敵을 기다리소서.
북융의 군대는 경솔하여 질서가 정연整然하지 않고 탐욕스러워 서로 친목親睦하지 않으므로, 승리해도 전공戰功을 서로 사양하지 않고 패전해도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전면에 있는 자가 노획虜獲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전진前進할 것이고, 전진하다가 복병伏兵을 만나면 반드시 신속히 도망갈 것입니다.
후면後面의 융병戎兵이 구원하지 않는다면 융병은 후속부대後屬部隊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통쾌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정백이 그의 건의를 따랐다.
〈과연 공자 돌의 말처럼〉 전진하던 융병이 복병을 만나자 도망갔다.
축담祝聃(鄭나라 대부大夫)이 추격追擊하여 융병을 가운데 두고서 전후에서 공격攻擊하여 모두 죽이니, 〈후방後方에 있던〉 융병도 모두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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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공桓公 9년, 파자巴子가 한복韓服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등鄧나라와 우호友好를 맺도록 주선해주기를 요청하게 하니, 초자楚子가 도삭道朔(초나라 대부大夫)을 시켜 파객巴客(韓服)을 데리고 등나라를 빙문聘問하게 하였다.
그런데 등나라 남쪽 변방의 우인鄾人이 그 일행을 공격하여 폐백幣帛을 탈취奪取하고 도삭道朔과 파巴의 행인行人을 살해하였다.
초자가 등나라에 위장薳章을 보내어 문책하니 등인鄧人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楚나라가 투렴鬪廉을 시켜 초사楚師와 파사巴師를 거느리고 가서 우鄾를 포위하게 하였다.
등나라의 양생養甥‧담생聃甥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우鄾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파사를 세 차례 추격하니 초사가 승리할 수가 없었다.
투렴이 초사를 파사 사이에 횡렬橫列로 배치排置하고서 등사鄧師와 교전交戰하다가 패전敗戰을 가장假裝하여 도망하니, 등사가 파사를 배후背後에 두고 초사를 추격하였다.
그러자 〈초사가 발길을 돌려〉 파사와 협공挾攻하니 등사가 대패大敗하고 우인鄾人도 밤에 모두 흩어져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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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공僖公 25년,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약鄀나라를 토벌하였다.
〈진인秦人은 초병楚兵을 피해 대로大路를 버리고〉 석析으로 길을 잡아 통과通過하다가 후미진 물굽이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결박結縛해 끌고 가서 상밀商密을 포위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성하城下로 가까이 다가갔다.
밤이 되자 구덩이를 파고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고는 맹서盟書를 희생 위에 올려놓고서 자의子儀‧자변子邊과 결맹結盟하는 것처럼 위장僞裝하니, 상밀인商密人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진군이 이미 석析을 취하였다.
수인戍人이 우리를 배반背叛하였다.”라고 하고, 진군秦軍에 투항投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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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成公 16년, 정鄭나라 자한子罕이 송宋나라를 토벌討伐하니, 송나라 장서將鉏와 악구樂懼가 작피汋陂에서 정군鄭軍을 패배敗北시키고서 퇴각退却해 부거夫渠에 주둔駐屯하여 방비防備를 설치設置하지 않으니, 정인鄭人이 복병伏兵으로 습격襲擊해 작릉汋陵에서 송군宋軍을 패배시키고서 장서와 악구를 사로잡았다.
이는 송군宋軍이 승리勝利를 믿고 〈방비防備를 설치設置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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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成公 17년, 서용인舒庸人이 초군楚軍이 패전敗戰한 기회를 이용해 오인吳人을 인도引導해 소읍巢邑을 포위하고, 가읍駕邑을 토벌討伐하고 이읍釐邑과 훼읍虺邑을 포위하고는 드디어 오吳나라를 믿고 방비防備를 설치設置하지 않으니, 초楚나라 공자公子 탁사槖師가 서용舒庸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초楚나라가 오吳나라를 패배시키고 서구舒鳩를 멸망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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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공襄公 25년, 오자吳子 제번諸樊이 초楚나라를 토벌討伐하여 지난번 초나라 수군水軍이 쳐들어왔던 전쟁戰爭을 보복報復하였다.
오군吳軍이 소읍巢邑의 성문城門을 공격하자, 소우신巢牛臣이 말하기를 “오왕吳王은 용감勇敢하나 경솔輕率하니 만약 우리가 성문을 연다면 오왕은 친히 성문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내가 그 틈을 타 활을 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이 오군吳君이 죽으면 우리의 변경邊境이 조금 안정安定될 것이다.”라고 하니, 초인楚人이 그의 말을 따랐다.
과연 오자가 성문 안으로 쳐들어오자, 우신이 낮은 담 뒤에 숨어 활을 쏘니, 오자가 그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양공襄公 24년에 오인이 〈초나라가 수군으로 쳐들어왔던 일로 인해〉 서구인舒鳩人을 부르니 〈서구인이〉 초나라를 배반하였다.
초자楚子가 황포荒浦에 군대를 주둔駐屯시키고서 침윤沈尹 수壽와 사기리師祁犂를 보내어 서구舒鳩를 꾸짖자, 서구자舒鳩子가 두 사람을 경건히 맞이하여 배반한 일이 없다고 고告하고 또 맹약盟約을 받아들이겠다고 청請하였다.
두 사람이 복명復命하자 초楚 강왕康王은 서구를 치고자 하였다.
저들이 배반하지 않았다고 고告하고 또 맹약을 받아들이겠다고 청하는데, 저들을 친다면 이는 죄罪 없는 나라를 치는 것이니, 우선 귀국歸國하여 백성들을 휴식休息시키면서 그 결과結果[卒]를 기다리소서.
끝내 저들이 두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만, 만약 저들이 배반한다면 저들은 변명辨明할 말이 없어 우리가 공功을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초자는 이에 환군還軍하였다.〉
25년 가을에 위자빙薳子馮이 죽으니 굴건屈建이 영윤令尹이 되고 〈굴탕屈蕩이 막오莫敖가 되었다.〉 서구인이 마침내 초나라를 배반하자 영윤令尹 자목子木이 토벌討伐하여 서구를 멸하였다.
겨울에 초자가 서구를 격멸擊滅한 공功으로 자목子木에게 서구를 상賞으로 주자, 자목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선대부先大夫 위자蔿子(薳子馮)의 공功입니다.”라고 하니, 〈초자는 서구를 위자蔿子의 아들〉 위엄蔿掩에게 상賞으로 주었다.
傳
소공昭公 12년, 진晉나라 순오荀吳가 제군齊軍과 만나기 위해 가는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선우鮮虞에게 길을 빌려 드디어 석양昔陽으로 쳐들어갔다.
가을 8월 임오일壬午日에 비肥나라를 격멸擊滅하고서 비자肥子 면고緜臯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傳
소공昭公 17년, 가을에 진후晉侯가 도괴屠蒯를 주周나라에 보내어 낙수雒水와 삼도산三塗山에 제사祭祀 지낼 수 있도록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였다.
장홍萇弘이 유자劉子에게 말하기를 “객客의 용모容貌가 사나우니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 아니라, 아마도 육혼陸渾의 융인戎人을 치기 위함인 듯합니다.
육혼씨陸渾氏가 초楚나라와 매우 화목和睦하니, 반드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군君(劉子)께서는 대비對備하소서.”라고 하니, 유자는 이에 융인에 대한 방비防備를 강화强化하도록 경계警戒하였다.
9월 정묘일丁卯日에 진晉나라 순오荀吳가 군대를 거느리고 극진棘津에서 도하渡河한 뒤에 제사祭史(제사를 주관하는 관원官員)를 보내어 먼저 희생犧牲을 잡아 낙수雒水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도 육혼인陸渾人은 〈진인晉人이 자기들을 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진군晉軍은 그 뒤를 따라가서 경오일庚午日에 드디어 육혼을 격멸擊滅하고서 초나라에 붙어 진나라를 배반背叛한 죄罪를 꾸짖으니, 육혼자陸渾子는 초나라로 도망가고 그 무리들은 감록甘鹿으로 도망갔다.
오吳나라가 초군楚軍을 패배시키고서 여황餘皇을 탈취奪取하다
傳
소공昭公 17년, 오吳나라가 초楚나라를 토벌討伐하니, 〈이때 양개陽匃가 영윤令尹이었다.
영전迎戰하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 점占을 치니 그 점조占兆가 불길不吉하였다.
사마司馬 자어子魚가 말하기를 “우리가 상류에 있는데 불길할 까닭이 뭐 있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 초나라의 구례舊例[故]에는 사마司馬가 거북에게 명하였으니, 내가 다시 점을 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고서, 거북에게 명하기를 “내가 나의 사병私兵[其屬]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다가 죽거든 초군楚軍이 그 뒤를 이어 진격하여 대승大勝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서 점을 치니 점조가 길하였다.〉
장안長岸에서 교전하다가 〈자어子魚가 먼저 전사하니 초군이 그 뒤를 이어 진격하여〉 오군吳軍을 대패大敗시키고서 오吳나라의 승선乘船 여황餘皇을 노획鹵獲하였다.
수인隨人과 뒤따라온 군사에게 여황을 지키되, 그 주위에 참호를 깊이 파서 지하수地下水[泉]가 솟는 데에 이르게 하고, 그 참호의 출입구出入口[隧]에 숯을 채우고서 포진하여 명을 기다리게 하였다.
오吳나라 공자公子 광光이 그 군중軍衆에게 청하기를 “선왕先王의 승주乘舟를 잃은 것이 어찌 나의 죄일 뿐이겠는가?
그러니 그대들의 힘을 빌려 승주를 탈취하여 죽음을 면하기를 청하노라.”고 하니 군중이 허락하였다.
그러자 공자 광은 수염이 긴 세 사람을 보내어 배 곁에 잠복해 있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여황아’라고 부르거든 너희들은 즉시 대답하라.”고 하였다.
오군吳軍이 밤에 그들을 따라가서 ‘여황아’라고 세 번 부르니 세 사람이 번갈아 대답하였다.
초인楚人이 소리가 난 곳으로 가서 세 사람을 모두 죽였다.
초군楚軍이 크게 혼란하니 오인吳人이 초군을 대패大敗시키고서 여황을 탈취해 돌아갔다.
오吳나라가 호胡‧심沈‧진陳 삼국三國을 패배시키다
傳
소공昭公 23년, 오인吳人이 주래州來를 침공侵攻하자, 초楚나라 위월薳越이 초왕楚王의 명命을 받고 군대를 거느리고서 제후諸侯의 군대와 함께 주래州來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달려가니, 오인이 이들을 종리鍾離에서 막았다.
이때 자하子瑕가 죽으니 초군楚軍은 사기士氣가 떨어졌다.
〈오吳나라 공자公子 광光이 말하기를 “초나라를 따르는 제후諸侯가 많으나 모두 소국小國들입니다.
내 듣건대 ‘일을 하는 데 있어 위엄威嚴이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면 비록 적은 병력兵力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成功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호胡나라와 심沈나라의 임금은 나이가 어려 조급躁急[狂]하고, 진陳나라 대부大夫 설齧은 장년壯年이지만 어리석고, 돈頓나라‧허許나라‧채蔡나라는 초나라의 정치政治를 미워하고, 초나라는 영윤令尹이 죽어서 그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고, 초군의 장수將帥는 지위地位가 비천卑賤하고 초군 중에는 총신寵臣이 많아서 정령政令(軍令)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일곱 나라가 함께 출전出戰하였으나 그 마음이 같지 않고, 장수가 비천해 군대를 정돈整頓하지 못하여 크게 위명威命이 없으니 초나라를 패배敗北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군대를 나누어 먼저 호군胡軍‧심군沈軍‧진군陳軍을 치면 저들은 반드시 먼저 도망갈 것이고, 이 세 나라 군대가 패주敗走하면 제후군諸侯軍은 마음이 흔들릴 것이고, 제후군이 혼란混亂하면 초군은 반드시 대패大敗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발부대先發部隊는 방비防備를 철거撤去해 군위軍威를 줄이고, 후속부대後續部隊는 군진軍陣을 감독監督[敦]하여 군대를 정돈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오자吳子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믐날 무신일戊辰日에〉 계보鷄父에서 교전交戰할 때 오자가 죄인罪人 3천 명을 보내어 먼저 호胡‧심沈과 진陳나라 군대를 치게 하니, 세 나라 군대가 이들을 잡으려고 서로 다투었다.
이때 오吳나라는 3군軍을 편성編成하여 죄인의 뒤에 붙였는데, 중군中軍은 오왕吳王을 따르고, 광光이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엄여掩餘가 좌군左軍을 거느렸다.
오나라의 죄인들이 혹은 도망가기도 하고 혹은 정지停止하기도 하니 세 나라 군중軍中이 혼란混亂하였다.
오군吳軍이 공격攻擊하니 세 나라 군대가 패배敗北하였다.
호胡‧심沈의 임금과 진陳나라 대부大夫를 포로로 잡았다.
오군이 호胡‧심沈의 포로捕虜를 석방釋放해 허許‧채蔡‧돈頓의 진영陣營으로 보내며 “우리 임금님이 죽었다.”라고 하게 하고서 오군이 고함을 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세 나라 군대가 도망가니 초군楚軍이 대패大敗해 달아났다.
傳
정공定公 14년, 오吳나라가 월越나라를 침벌侵伐하니, 월자越子 구천句踐은 오군吳軍을 방어防禦하기 위하여 취리檇李에 진陣을 쳤다.
구천은 오군의 군용軍容이 엄정嚴整한 것을 근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勇士(死士)들을 보내어 두 차례나 오군을 생포生捕해 오게 하였으되, 오군이 동요動搖하지 않으니,
구천은 또 죄인罪人 삼행三行으로 하여금 검劍을 목에 대고서 오군 앞으로 가서 “두 나라 임금께서 작전作戰하시는데, 우리들은 군령軍令을 범하여 임금님의 행진行陣 앞에서 민첩하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형벌刑罰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죽겠습니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하니, 오군이 이를 괴상히 여겨 주목注目하자, 월자는 그 틈을 이용해 공벌攻伐하여 오군을 대패시켰다.
영고부靈姑浮(越나라 대부)가 창으로 합려闔廬를 치니 합려는 엄지발가락에 상처를 입어 〈신발을 잃으니,〉 영고부가 합려의 한쪽 신발을 취取하였다.
합려는 돌아가다가 형陘에서 졸卒하였으니, 부차夫差는 사람을 궁정宮庭에 세워놓고서 자기가 들고날 때에 반드시 자기에게 “부차야!
너는 월왕越王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일을 잊었느냐?”고 말하게 하고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부차는 “예,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한 지 3년 만에 월越나라에 원수를 갚았다.
傳
애공哀公 17년, 3월에 월자越子가 오吳나라를 토벌하니 오자吳子가 입택笠澤에세 월군越軍을 방어防禦하면서 강江을 끼고 진陣을 쳤다.
월자는 좌우左右의 구졸句卒를 편성編成하여 밤에 혹은 좌구졸左句卒 혹은 우구졸右句卒을 보내어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진격進擊하게 하니, 오군吳軍이 군대를 나누어 방어防禦하였다.
월자는 〈이 틈을 이용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몰래 강을 건너 오나라 중군中軍에 당도하여 북을 치니, 오군吳軍이 크게 혼란하였다.
용병用兵은 군자君子의 장기이고, 소인小人의 장기가 아니다.
이것은 이치의 필연인데도 세상에는 그런 줄을 아는 자가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일찍이 이 이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더니,
용병用兵을 담론하는 인사가 화를 내며 힐난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군자를 무엇 때문에 군자라고 명칭하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성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또 “소인은 무엇 때문에 소인이라 명칭하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속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과연 이와 같다면 용병은 바로 소인의 장기이고 군자의 장기가 아니다.
만사에 모두 속임을 천하게 여기지만 오직 용병에서만은 속임을 귀하게 여긴다.
군신君臣이 서로 속이면 그 나라가 위태롭고, 부자父子가 서로 속이면 집안이 망하고, 형제兄弟가 서로 속이면 친한 정이 떨어지고, 친구親舊가 서로 속이면 관계가 소원해지고, 장사꾼이 서로 속이면 사업이 망하지만, 용병에 있어서는 작게 속이면 작게 이기고, 크게 속이면 크게 이긴다.
소인은 속임이 장기이기 때문에 그의 용병 또한 뛰어나고, 군자는 속임이 장기가 아니기 때문에 용병 또한 뛰어나지 못하다.
만백曼伯 이하 몇몇 사람들이 승리를 거둔 방법은 같지 않으나 속임수를 쓴 것은 같았다.
이 몇몇 사람들이 만약 군자君子와 장자長者의 도道로 대처하였다면 어찌 그 공功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유가儒家의 소인은 병가兵家의 군자이고 병가의 군자는 유가의 소인이니, 저 보잘것없는 충신忠信과 성실誠實이 어찌 손자孫子나 오기吳起의 문하에서 칭송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우선 그 이치를 말한 것일 뿐인데 지금 그대는 전고前古의 일을 들어 나를 공박하니, 그대가 들어 말한 일로써 내가 말한 이치를 증험한다면, 군자가 아니면 용병을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춘추시대에 여러 장수들이 일시의 전공戰功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소인小人으로서 소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만약 군자君子를 만났다면 비록 정鄭‧초楚‧진秦‧진晉 등 십여 국의 군사들을 모아 하나의 군대로 삼고, 만백曼伯‧자돌子突 등 10여 인의 지혜를 합쳐 한 장수에게 몰아주었더라도, 나는 군자가 여유작작하게 담소하며 지휘하였을 것을 안다.
내가 큰소리를 치며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이치의 필연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군자君子는
용병用兵에 있어
성심誠心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
注+이 한 편篇의 주의主意이다..
세상에는 성심을 다하면서 경솔한 자는 있지 않으니
注+성실하면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적이 비록 유인하고자 한들 어찌 유인할 수 있으며
注+탐욕을 부리면 적의 미끼에 걸린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성심을 다하면서 탐욕스러운 자는 있지 않으니
注+성실하면 안정되고 어지럽지 않다는 말이다. 적이 비록 미끼로 유인하고자 한들 어찌 유인할 수 있으며
注+어지러우면 적에게 교란당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성심을 다하면서 요란한 자는 있지 않으니 적이 비록 교란시키고자 한들 어찌 교란시킬 수 있겠는가?
이 성심을 가지고서 군대를 위무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注+성심으로 사졸士卒을 어루만지면 사람마다 모두 진심으로 믿는다는 말이다.반간反間이 현혹시킬 수 없고
注+적군敵軍이 비록 반간反間을 보내더라도 틈을 탈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이 성심을 가지고서 방비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태만하지 않을 것이니
注+성실로 외환外患을 방비하여 막는다면 일마다 자세하고 정밀해진다는 말이다. 속임수가 그르칠 수 없을 것이다
注+적군이 비록 속임수를 쓰려 해도 속임수를 시행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저들이 전에 승리를 거둔 것은
注+춘추시대에 용병用兵을 잘하여 승리를 거둔 자들을 총론總論한 것이다. 적이 경솔한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고, 탐욕스러운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며, 요란한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고, 의심하는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며, 태만한 틈을 이용해 쳐들어갔기 때문이다
注+성실하지 않으면 이 다섯 가지의 환난이 있으므로 적군이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하나의
성誠이 확립되면 다섯 가지
환해患害가 모두 제거되어
注+하나의 성심誠心만을 써서 다섯 가지 환해患害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코뿔소가 그 뿔을 쓸 곳이 없고, 병사가 그 칼날을 찌를 곳이 없으며,
만백曼伯‧
자돌子突의 무리가 그 속임수를 쓸 곳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예로부터
병법兵法을 안다고 하는 자들을 다 불러서 나의
성城을 포위하여 공격하게 하고
注+고인古人 중에 용병을 잘했던 자를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하게 한다는 것을 가정해 말한 것이다.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게 하여 백 가지 속임수를 쓰게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한결같이
성誠에 마음을 다하여 대처할 뿐이며, 또 천 가지 속임수를 쓰게 하더라도 군자는 역시 한결같이
성誠에 마음을 다하여 대처할 뿐이며, 또 만 가지 속임수를 쓰게 하더라도
注+‘저들의 계책이 비록 무궁하더라도’의 뜻이다. 군자는 역시 한결같이
성誠에 마음을 다하여 대처할 뿐이니
注+용병에 다만 하나의 성심만을 쓸 뿐인데도 적군이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저들은 만 가지 속임수를 다 써도 승리할 수 없고
注+속임수가 비록 많아도 쓸데가 없다. 그러므로 〈승리하기에〉 부족하다고 한 것이다., 나는 하나의
성誠만을 지켜도 넉넉하니
注+성심은 비록 간략하지만 지키기가 쉽다. 그러므로 넉넉하다고 한 것이다., 저들은 항상 수고롭고 나는 항상 편안하며
注+속임수를 쓰기 때문에 수고롭고, 성심을 지키기 때문에 편안하다는 말이다. 저들은 항상 움직이고 나는 항상 고요하다
注+속임수를 쓰기 때문에 움직이고, 성심을 지키기 때문에 고요하다는 말이다..
편안한 군대로써 수고로운 군대를 제압하고
注+아군의 편안함으로 적군의 수고로움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고요히 지낸 군대로써 움직이는 군대를 제압하는 것이
注+아군의 고요함으로 적군의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어찌 천하에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注+하나의 성誠의 효과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천하에서 가장 용병을 잘하는 자를 논한다면 군자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용병을 잘하는 자로는 본래 군자보다 뛰어난 자가 없다
注+군자는 항상 승리하기 때문에 용병을 잘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예부터
공功이
제적帝籍에 기록되고
경종景鍾에 새겨진
注+이는 글의 결미結尾에 문장을 전환하여 신의新意를 일으킨 것이다. 대체로 상문上文의 논의가 비록 공명정대公明正大하다고 할 수 있으나 오활한 데에 가까우니, 모름지기 이렇게 반증하여야 바야흐로 문장이 문장다워진다. 〈이러므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여 ‘예로부터 전쟁에 승리하여 제적帝籍에 공적이 기록되고 경종景鐘에 이름이 새겨진 자들이 대부분 형벌을 받았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경黥은 이마에 검은 물을 들이는 것이고, 곤髡은 머리를 깎는 것이다. 자들 중에 이미
자자형刺字刑이나
체발형剃髮刑을 받고 도적이거나 장사치였던 자가
사책史冊에 수없이 기록되었고,
송宋 양공襄公과
注+희공僖公 22년에 보인다.진여陳餘의
注+《사기史記》 〈진여열전陳餘列傳〉에 보인다. 무리가 매번
인의仁義로 인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注+송宋 양공襄公은 초楚나라와 싸울 때에 부상당한 적에게 거듭 상처를 입히지 않았고 노인을 사로잡지 않았으며 적이 전열戰列을 이루기 전에 진격하지 않았다가 도리어 초나라에 패배당하였고,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유자儒者로서 항상 의병義兵이라 칭하고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가 도리어 한신韓信에게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소인小人의 속임수가 승리한 것이고 군자君子의 성심이 패전한 것이다. 또 어째서인가?
注+의문을 제기하고 아랫글에 답하였다.
대체로
소인小人의 술수를 다한 자라야 소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고
注+소인小人의 술수를 다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진짜 소인이라고 답한 것이다.,
군자君子의
도道를 다한 자라야 군자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다
注+군자君子의 도를 다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진짜 군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 군자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른바 소인은 이미 소인의 술수를 다하여 소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자이고, 세상에서 이른바 군자는 군자의 도는 얻지 못하고 군자라는 이름만 가탁假託한 자이다.
가짜 군자로서 진짜 소인을 상대하여
注+초인楚人과 한신韓信 같은 진짜 소인小人을 송宋 양공襄公과 진여陳餘 같은 가짜 군자君子가 상대하였다는 말이다. 하루 동안 지킨 성심을 가지고 백 년 동안 쌓은 속임수를 깨뜨리고자 하였으니
注+하루 동안 성심을 지킨 것은 가짜 군자君子이고, 백 년 동안 속임수를 쌓은 것은 진짜 소인小人이다., 어찌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注+그들이 패배를 취한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벨 때에 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면
注+식息은 ‘불끄다’의 뜻이다. 도끼가 무디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나무가 도끼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한 잔의 물로 불을 끌 때에 불이 꺼지지 않으면
注+물은 매우 적고 불이 난 곳은 매우 넓으므로 불을 끌 수 없는 것이다. 물의 양이 적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불이 물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注+불이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송宋 양공襄公의 무리로 인하여 드디어
군자君子가
용병用兵에 서툴다고 의심해서야 되겠는가?
注+송宋 양공襄公과 진여陳餘의 성심誠心은 한 잔의 물과 같고, 초인楚人과 한신韓信의 속임수는 한 수레의 섶에 붙은 불과 같다. 이것을 인용하여 비유하였으니 매우 참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