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莊十二年
이라 하고 遇仇牧于門
하야 하고 遇大宰督于東宮之西
하야 又殺之
하고〉
〈冬 十月
에〉
及戴武宣穆莊之族
으로 以曹師伐之
하야 殺南宮牛于師
하고 殺子游于宋
하고 立
하다
猛獲奔衛
하고 南宮萬奔陳
할새 하다〉 宋人請猛獲于衛
한대 衛人欲勿與
어늘
曰 不可
하다 天下之惡一也
니 惡於宋而保於我
하면 保之何補
리오 得一夫而失一國
하고 라하니
衛人歸之
하다 亦請南宮萬于陳以賂
한대 陳人使婦人飮之酒
하고 而以犀革裹之
러니 比及宋
에 手足皆見
이라 하다
注
[主意]公孫述以「拘」而失馬援之心하고 宋閔公以「縱」而召宋萬之怨하니 皆無鼓舞豪傑之術故也라 善鼓舞豪傑者는 必有漢高祖而後可니라
末段引文武周公以至誠待將帥하야 議論愈高하니 「拘」「縱」二字는 是骨子니라
注+警蹕 天子出入之儀은 之待
也
注+隗囂據隴右 以馬援爲將軍 時公孫述僭位於蜀隗囂 使援往觀之 援與述同里相善 以爲旣至當握手歡如平生 而述盛陳陛衛 以延援入 援歸謂囂曰 子陽井底蛙耳 而妄自尊大 不如專意東方 ○此言公孫述以拘而失豪傑之心요 迎笑
는 光武之待馬援也
라
以述之肅
으로 反取井蛙之譏
하고 光武之嫚
으로 而援委心焉
注+建武四年 囂使援奉書洛陽 援至 引見 世祖岸幘迎笑曰 卿遨遊二帝間 今見卿 使人大慙 援謝曰 當今之世 非但君擇臣 臣亦擇君矣 臣與公孫述同縣 少相善 臣前至蜀 述陛戟而後進臣 臣今遠來 陛下何知非刺客姦人 而簡易若是 帝復笑曰 卿非刺客 顧說客耳 援曰 天下反覆 盜名字者不可勝數 今見陛下 恢廓大度 同符高祖 乃知帝王自有眞也 見東漢本傳하니 然則樸樕小禮
注+樸樕 小貌는 果非所以待豪傑耶
注+結上文意아
英雄豪悍之士
注+英雄 有智者 豪悍 有力者는 하야 注+此等人本不爲法度所拘하니 爲君者
도 亦當以度外待之
注+亦不可拘之以法度하야
注+崖岸者 江河之際 邊幅者 布帛之兩旁 破之削之 皆示不拘法度之意하고 拊背握手
하야 以結其情
注+示其親密之情하고 箕踞盛氣
하야 以折其驕
注+箕踞 謂踞坐如箕也 此以消其驕慢之氣하며
嘲誚謔浪
하야 以盡其歡
注+嘲誚 譏罵也 謔浪 戱語也 此以盡其歡悅之意하고 慷慨歌呼
하야 注+示其不相疑忌之心然後
에 足以
注+然後 豪傑肯爲效死이니
是非樂放肆也
라 待豪傑者法當如是也
注+以上是說得豪傑之法不在乎拘而出乎縱 然未曾說出此篇主意ㄹ새니라
南宮萬之勇
이 聞於諸侯
注+南宮姓 萬名 ○入本題로되 注+惟不拘以法度 故以戱言而靳侮之 詳見題는 豈非欲略去細謹
하야 自謂得待豪傑之法耶
注+推原閔公之心 必以萬爲豪傑之士 故其待之如此아
然終召萬之怨
하야 至於見弑
하니 何也
注+設疑問難 謂光武以放肆而得馬援之心 閔公以放肆而致宋萬之禍其故何也오 袒裼暴虎
注+袒裼 去衣也는 必
注+言有馮婦之力 然後可以袒裼而搏虎 馮婦事見孟子 虎以喩豪傑니 怯夫而試馮婦之術
注+怯夫以喩閔公 言閔公無駕馭豪傑之術 而效人之放肆이면 適足以劘虎牙耳
注+怯夫暴虎爲虎所食 猶閔公侮宋萬 爲萬所弑也 至此方見主意니라
古之嫚侮者
론 莫如漢高帝
注+引高帝嫚侮豪傑事爲證나 高帝之嫚侮
가 豈徒然哉
注+高帝自有駕馭豪傑之術 故能嫚侮리오 踞洗以挫黥布
하고 隨以王者之
注+隨何說九江王黥布歸漢 旣至 漢王方踞牀洗足 召布入見 布大怒 悔來 欲自殺 及出就舍 帳御飮食從官 皆如漢王居 布又大喜過望 出漢黥布傳하며
嫚罵以挫趙將
하고 隨以千戶之侯封
注+高祖令周昌選趙壯士可令將者 白見四人 上嫚罵曰 豎子能爲將乎 四人慙 皆伏地 封各千戶 以爲將 出本紀하니라 用不測之辱
注+如踞跣嫚罵之類하고 用不測之恩
注+如王者供帳千戶封侯之類하야
注+造語有工 言高帝之寵辱豪傑 猶炎暑之時 忽降霜雪 隆冬之際 忽震雷霆也하야 豪傑
하야 莫知端倪
注+使豪傑之士 由其術中而不能自知하니 此高帝所以能
也
注+此段發盡主意 言有此鼓舞之術 然後能嫚侮豪傑而無禍니라
無鼓舞豪傑之術
注+反說하고 則爲公孫述
注+失馬援之心이요 則爲宋閔公
注+致宋萬之弑 ○以拘縱二字 斷二事極當 應在結尾이니 何往而不敗哉
注+述以拘亡國 閔以縱殺身리오
噫
라 此不足論也
注+又轉上意요 若高帝鼓舞豪傑之術
이라야 其至矣乎
ㄴ저 曰未也
라 術必有時而窮
注+後抑하니라
高帝嫚侮之患
이 卒見於暮年
注+雖得豪傑之用 亦致諸將之爭 此高帝之術窮也하니 此所以厭拔劍擊柱之爭
하야 而俯就叔孫通之儀也
注+니라
高帝豈不欲早用叔孫通之儀哉
注+設問高帝初年 何不用此朝儀리오 彼見其所謂儀者
가 注+禮文非悉難行하야 決非武夫悍將所能堪
注+武夫悍將 樂於放肆 不能受此拘束이니
天下未定而遽行之
注+設使早用此儀면 必失豪傑之心
注+必如公孫述之於馬援이라 故寧蔑棄禮法而不顧
注+言帝所以盡去禮文而爲簡易하니 殊不知名敎之中
에 自有樂地
注+出晉樂廣傳 至此方斷以正意니라 豈叔孫輩所能測哉
注+叔孫通雖號儒者 亦未能知此理아
之詩
注+文武歌采薇以遣將帥 歌出車以勞還役 周公作東山以勞東征之士에 雨雪寒燠
注+如言雨雪載塗 歲亦莫止 春日遲遲之類과 草木禽獸
注+如言蜾之實 倉庚 伊威 蟰蛸之類와 僕馬衣裳
注+如言 僕夫況瘁 四牡業(二)[業] 制彼裳衣之類과 室家婚姻
注+如言靡室靡家親結其縭之類은 曲盡人情
注+曲盡將帥士卒人情이 昵昵如兒女語
注+視將帥如家人하니
文武周公之待將帥
에 開心見誠
이 蓋如此
注+此聖人待將帥之道以誠而不以術也요 初未嘗如陋儒之拘
注+未嘗如叔孫通之用朝儀며 亦不至如後世之縱也
注+亦未嘗如漢高帝之嫚罵光武之簡易也라
高帝明達
하야 最易告語
注+言高帝天資明達易爲進說어늘 惜乎
라 無以是詩曉之
注+但惜當時無人以文武周公之詩而曉喩之여
송宋나라 남궁장만南宮長萬이 송 민공宋 閔公을 시해弑害하다
傳
장공莊公 12년, 송만宋萬이 몽택蒙澤에서 송 민공宋 閔公을 시해弑害하였다. 그리고 돌아와 문에서 구목仇牧을 만나 쳐 죽이고 동궁東宮 서쪽에서 태재 독太宰 督을 만나 또 쳐 죽이고,
자유子游를 임금으로 세웠다. 그러자 여러 공자公子들은 소蕭로 도망가고, 공자 어열公子 御說은 박亳으로 도망하니, 남궁우南宮牛와 맹획猛獲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박읍亳邑을 포위하였다.
겨울 10월에 소蕭의 숙대심叔大心이 대공戴公‧무공武公‧선공宣公‧목공穆公‧장공莊公의 종족宗族들과 함께 조국曹國의 군대를 거느리고 송만宋萬을 공격하여, 남궁우南宮牛를 전장戰場에서 죽이고 공자 유公子 游를 송宋나라 도성都城에서 죽이고서 환공桓公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러자 맹획은 위衛나라로 도망가고 남궁만南宮萬은 진陳나라로 도망갔는데, 그는 도망갈 때 승거乘車에 그 어미를 태우고 하루 만에 진陳나라에 당도하였다. 송인宋人이 맹획을 돌려달라고 위衛나라에 요청하니 위인衛人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석기자石祈子가 말하기를 “요청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악행惡行을 미워하는 것은 천하의 어느 나라이고 똑같은데, 송宋나라에서 악행을 저지른 자를 우리나라가 보호保護한다면, 보호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 사람을 얻고 한 나라를 잃는 것이며, 악인惡人을 돕고 우호국友好國을 버리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위인衛人은 맹획을 송宋나라로 돌려보냈다. 송宋나라는 다시 진陳나라에 남궁만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며 뇌물을 보내니, 진인陳人이 부인婦人(여자)을 시켜 남궁만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이게 하고는 그를 무소 가죽으로 싸서 송宋나라로 보냈는데, 송宋나라에 당도할 때쯤에는 손발이 모두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송인宋人은 이들을 죽여 모두 젓을 담갔다.
注
공손술公孫述은 구근拘謹(예의에 얽매어 언행을 삼감)으로 인해 마원馬援의 마음을 잃었고, 송 민공宋 閔公은 방종으로 인해 송만宋萬의 원한을 불렀으니, 이는 모두 호걸豪傑을 고무鼓舞(격려해 환심을 삼)시키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능히 호걸을 고무시키려면 반드시 한 고조漢 高祖와 같은 재능이 있은 뒤에야 가능하다.
끝단락에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이 지성至誠으로 장수들을 대우한 것을 인용하여 의론이 더욱 고상하니, ‘구拘’와 ‘종縱’ 두 글자는 바로 이 글의 핵심이다.
대전大殿 뜰에 창을 든
시위무사侍衛武士를 세워놓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한 것은
注+경필警蹕은 천자天子가 출입할 때 행하는 의식이다. 공손술公孫述이
마원馬援을 맞이할 때와 보낼 때의 광경이고,
注+외효隗囂가 농서隴西 지역을 점거하고 마원馬援을 유덕장군緌徳將軍으로 삼았다. 이때 공손술公孫述이 황제를 참위僭位하고 외효를 부르니 외효가 마원을 사자使者로 보내어 그를 만나보게 하였다. 마원은 본래 공손술과 한 마을 사람으로 서로 사이가 좋았으므로 자기가 가면 손을 잡고 평소처럼 즐거워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공손술은 궁전 뜰에 호위무사를 세워놓고서 마원을 맞아 들였다. 마원은 돌아와서 외효에게 “자양子陽(공손술의 자字)은 우물 안 개구리일 뿐입니다. 함부로 잘난 체하니 동방東方(광무제光武帝)에 전념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공손술이 구근拘謹으로써 호걸의 마음을 잃었음을 말한 것이다. 간소한 차림으로 웃으면서 맞이한 것은
광무제光武帝가 마원을 접대할 때의 모습이다.
공손술의
엄숙嚴肅은 도리어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마원의 조롱을 받았고, 광무제의
간만簡慢은 끝내 마원으로 하여금 충성을 바치게 하였으니,
注+건무建武 4년에 외효隗囂가 마원馬援을 사신으로 보내어 낙양洛陽(광무제光武帝)에 편지를 올리게 하였다. 마원이 당도하자 접견할 때 세조世祖(광무제)는 두건을 쓰고 웃음으로 맞이하면서 “경卿이 두 황제(공손술과 자기) 사이를 왕래하니, 지금 경卿을 만나니 크게 부끄럽다.”라고 하였다.
마원이 감사를 표하고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임금이 신하를 선택할 뿐만 아니라 신하도 임금을 선택합니다. 신臣은 공손술과 동향同鄕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신이 전에 촉蜀에 갔을 때에 공손술은 뜰에 창을 든 무사武士를 세운 뒤에야 신을 진입進入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먼 곳에서 왔으니, 폐하陛下께서는 신이 자객刺客이나 간인姦人이 아닌 줄을 어찌 아시고서 이처럼 방비를 설치하지 않으신 것입니까?”라고 하자, 광무제는 다시 웃으며 “경은 자객이 아니라 세객說客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마원이 “천하에 세상을 뒤엎고 명자名字(황제皇帝의 명호名號)를 훔친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은데, 지금 폐하를 뵙건대 넓고 큰 도량이 고조高祖(유방劉邦)와 같으시니, 이제야 제왕帝王은 본래 진명眞命(하늘이 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보인다. 그렇다면 자잘하고 작은
예절禮節은
注+복속樸樕은 작은 모양이다. 과연
호걸豪傑을 대우하는 방법이 아니란 말인가?
注+윗글의 뜻을 맺은 것이다.
영웅英雄(
재지才智가 뛰어난 사람)과
호한豪悍(
호방豪放하고
용력勇力이 강한 사람)은
注+영웅英雄은 지혜가 있는 자이고, 호한豪悍은 용력勇力이 있는 자이다. 마음이 넓고 자유분방하여 법도에 구애되지 않으니,
注+이런 사람은 본래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임금도 법도를 무시하고 대우하여야 한다.
注+〈임금도〉 법도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엄숙한 태도와 점잖은 모습을 버리고
注+애안崖岸은 강하江河의 양안兩岸이고, 변폭邊幅은 포백布帛의 양단이다. 이것을 파기破棄하고 삭제削除한다는 것은 법도에 구애받지 않는 뜻을 보인 것이다. 그 등을 두드리고 그 손을 잡으면서 그와
교분交分을 맺고,
注+친밀한 정을 보인 것이다. 오만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 크게 노한 기색을 보여 그의 교만한 기세를 꺾기도 하고,
注+기거箕踞는 키처럼 길게 다리를 뻗고 앉는 것이니, 이는 상대의 교만한 기운을 꺾으려는 것이다.
비웃으며 욕하고 방탕하게 농담하여 그를 즐겁게 하기도 하고,
注+조초嘲誚는 비난하고 욕하는 것이며, 학랑謔浪은 농담하는 말이니, 이는 기쁘고 즐거워하는 뜻을 다하려는 것이다. 분개하며 노래를 불러 진심을 보이기도 한
注+서로 의심하고 꺼리지 않는 마음을 보인 것이다. 뒤에야, 그로 하여금 목숨 바쳐 나에게 충성하게 할 수 있다.
注+그런 뒤에야 호걸豪傑이 나에게 목숨을 바치려 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방자함을 즐겨서가 아니라
호걸豪傑을 대우하는 방법이 이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注+이상以上은 호걸豪傑을 설득하는 방법이 ‘구拘’에 있지 않고 ‘종縱’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아직 본편의 주의主意를 말한 것은 아니다.
남궁만南宮萬은 용맹하기로 제후에 소문난 사람이었으되,
注+남궁南宮은 성姓이고, 이름은 만萬이다. ○〈여기부터〉 본편의 일로 들어간다. 송 민공宋 閔公이
조롱嘲弄하며 모욕한 것은
注+법도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에 농담하고 조롱하며 모욕한 것이니, 본편의 제목題目 밑의 주注에 자세히 보인다. 어찌 작은 예절을 모두 버리는 것이
호걸豪傑을 대우하는 방법에 맞는다고 여겨서가 아니겠는가?
注+민공閔公의 마음을 추원推原(추구推究)해보면 민공은 틀림없이 송만宋萬을 호걸스러운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대우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남궁만의 원한을 불러
시해弑害되는 데 이른 것은 어째서인가?
注+광무제光武帝는 방사放肆로 마원馬援의 마음을 얻었고, 송 민공宋 閔公은 방사放肆로 송만宋萬의 화를 초래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의문문의 형식으로 반론한 것이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것은
注+단석袒裼은 옷을 벗는 것이다. 반드시
풍부馮婦인 뒤에야 가능하니,
注+풍부馮婦의 힘이 있은 뒤에야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풍부馮婦의 일은 ≪맹자孟子≫에 보인다. 호랑이는 호걸豪傑을 비유한 것이다. 겁 많은 사내가
풍부馮婦의 방법을 시험하고자 한다면
注+겁부怯夫는 송 민공宋 閔公을 비유한 것이다. 민공閔公은 호걸豪傑을 통제할 방법도 없으면서 남의 방사放赦함만을 본받았다는 말이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 뿐이다.
注+겁부怯夫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다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것이, 민공閔公이 송만宋萬을 모욕했다가 송만에게 시해당한 것과 같다. 이 문장에서야 주의主意가 드러났다.
옛날에 남을 경멸해 모욕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으로는
한 고제漢 高帝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注+고제高帝가 호걸豪傑을 경멸하고 모욕한 일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고제가 경멸해 모욕한 것이 어찌 이유가 없었겠는가?
注+고제高帝는 스스로 호걸豪傑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에 경멸하고 모욕하였다는 것이다. 걸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기면서
경포黥布를 접견하여 경포의 기세를 꺾고는 즉시
왕자王者의
공장供帳으로 대우하였고,
注+수하隨何가 구강왕 경포九江王 黥布를 설득하여 한漢나라로 귀순歸順하게 하였다. 경포가 오자, 한왕漢王은 침상寢牀에 걸터앉자 발을 씻으면서 경포를 불러 들어와 알현謁見하게 하니, 경포는 크게 노하여 귀순해 온 것을 후회하고서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관사館舍로 가서 보니 장막과 기용器用과 음식과 시종하는 관리가 모두 한왕漢王의 거처와 동일하였다. 그러자 경포는 또 기대 밖이라고 크게 기뻐하였다. ≪한서漢書≫ 〈경포전黥布傳〉에 나온다.
조趙나라
장수將帥들을 경멸해 꾸짖어 그들의 기세를 꺾고는 즉시
천호千戶의
후侯에
봉封하였다.
注+고조高祖가 주창周昌에게 명하여 조趙나라 장사壯士 중에 장수將帥가 될 만한 자를 선발하게 하니, 〈주창이 네 사람을 선발하고서 고조에게〉 이 네 사람을 불러보라고 아뢰었다. 고조가 〈이 네 사람을 만나볼 때〉 경멸해 꾸짖기를 “이런 풋내기가 어찌 장수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네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모두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이들에게 각각 천호千戶씩을 봉해주고서 장수로 삼았다. ≪한서 고제본기漢書 高帝本紀 하下≫ 예상 밖의 모욕을 주고는
注+걸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기게 하고, 〈장사壯士들을〉 경멸하고 모욕한 일을 이른다. 예상 밖의 은혜를 입힌 것이,
注+한왕漢王처럼 구강왕 경포九江王 黥布에게 공장供帳을 내리고, 〈장사壯士들을〉 천호千戶에 봉封한 것을 이른다.
마치 한창 무더운 여름철에 서리와 눈이 내리고,
곤충昆蟲이
동면冬眠하는 겨울철에 벼락이 치는 것과 같아,
注+조어력造語力이 뛰어나다. 고제高帝가 호걸豪傑을 총애하고 모욕하는 것이 무더운 여름에 갑자기 서리와 눈이 내리고, 엄동설한에 갑자기 번개와 벼락이 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호걸豪傑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여 그 속셈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注+호걸豪傑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자기의 술수에 떨어지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고제가 한 세상의 호걸을
고무鼓舞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注+이 단락은 주의主意를 다 말하였다. 이런 고무의 술책이 있은 뒤에야 호걸을 경멸하고 모욕하더라도 화가 없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호걸을 고무할
술책術策도 없으면서
注+반론反論하는 말이다. 구근拘謹하였다면
공손술公孫述이 되었을 것이고,
注+마원馬援의 마음을 잃었다는 말이다. 방종하였다면
송 민공宋 閔公이 되었을 것이니,
注+송만宋萬의 시해를 초래했다는 말이다. ○구拘‧종縱 두 자字로 두 사람의 일을 논단論斷한 것이 매우 합당하다. 이 말의 응대는 결미結尾에 있다. 어찌 가는 곳마다 실패하지 않았겠는가?
注+공손술公孫述이 ‘구拘’ 때문에 나라를 잃고, 송 민공宋 閔公이 ‘종縱’ 때문에 죽게 되었음을 이른다.
아! 이들(
송 민공宋 閔公과
공손술公孫述)은 논할 가치도 없고,
注+또 윗글의 뜻을 전환하였다. 호걸豪傑을
고무鼓舞한
술책術策이
고제高帝 같아야 지극하다 하겠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제의 술책이 때로 곤궁한 경우가 있었다.
注+〈이 문장은〉 문장 뒤에서 억제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고제가 남을 멸시하여 모욕한
후환後患이 마침내
만년晩年에 나타났으니,
注+비록 호걸豪傑을 등용하는 계책을 얻었다 하더라도 여러 장수들의 다툼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고제高帝의 수법이 궁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군들이 술에 취해 칼을 뽑아 궁전의 기둥을 치며 공을 다투는 것에 싫증이 나서,
숙손통叔孫通의
조의朝儀를 받아들이게 된 까닭이다.
注+한 고조漢 高祖가 황제皇帝가 된 초기에 진秦나라 때의 까다로운 의법儀法을 다 없애고 간단하게 법을 제정하였으므로, 신하들 중에 술에 취해 공을 다투면서 고함을 치고 칼을 뽑아 기둥을 치는 자까지 있었다. 숙손통叔孫通이 “노魯나라의 여러 유생儒生들과 신臣의 제자弟子를 불러 함께 조의朝儀를 정하겠습니다.”라 하였다.
고제인들 어찌 일찍부터 숙손통의 조의를 쓰고 싶지 않았으랴만,
注+고제高帝가 처음에 어찌 이런 조의朝儀를 쓰려 하지 않았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고제가 보기에 ‘
조의朝儀’란 것이 사람을 속박하고 까다롭고 좀스러워서,
注+모든 예법禮法이 행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결코
무장武將들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注+무장武將들은 방사放肆를 좋아하니 이런 구속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천하가 평정되기도 전에 서둘러 시행하면
注+‘가령 때 이르게 이런 이치를 쓴다면’의 뜻이다. 반드시 호걸들의 마음을 잃을 것으로 여겼다.
注+반드시 공손술公孫述이 마원馬援을 대우한 것과 같은 결과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호걸들의 마음을 잃기보다〉 차라리
예법禮法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은 것이니,
注+이것이 고제高帝가 예법禮法을 다 제거하고 간단하게 한 이유라는 말이다. 이는
명교名敎(명분을 중시하는
예교禮敎) 가운데 절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것이다.
注+≪진서晉書≫ 〈악광전樂廣傳〉에 나온다. 이 문장에 이르러 바야흐로 정의正意로 결단하였다. 어찌 숙손통 등이 헤아릴 수 있는 바였겠는가?
注+숙손통叔孫通이 비록 유자儒者로 불리는 자라 할지라도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
채미采薇〉‧〈
출거出車〉‧〈
동산東山〉
편篇의
시詩에
注+문왕文王‧무왕武王이 〈채미采薇〉를 노래하며 장수를 파견하였고, 〈출거出車〉를 노래하며 돌아온 군대를 위로하였으며, 주공周公이 〈동산東山〉을 지어 동정東征에서 돌아온 군대를 위로하였다. 비와 눈, 추위와 더위,
注+≪시경詩經≫ 〈출거出車〉의 “우설재도雨雪載塗(눈이 내려 질척거리네)”, 〈채미采薇〉의 “세역모지歲亦莫止(해가 저물리로다)”, 〈출거〉의 “춘일지지春日遲遲(봄날이 더디고 더디네)”라고 말하는 유와 같다. 풀과 나무, 새와 짐승,
注+≪시경詩經≫ 〈동산東山〉의 “과라지실蜾臝之實(하늘다리의 열매여)”, “창경우비倉庚于飛(꾀꼬리 날음이여)”의 창경倉庚, “이위재실伊威在室(쥐며느리가 방에 있으며)”의 이위伊威, “소소재호蠨蛸在戶(갈거미가 문에 있으며)의 소소蟰蛸”를 말하는 유와 같다. 마부馬夫와 말, 상의와 하의,
注+≪시경詩經≫ 〈출거出車〉의 “복부황췌僕夫况瘁(마부도 이에 파리하도다)”, 〈채미采薇〉의 “사모업업四牡業業(네 마리 수말이 건장하며)”, 〈동산東山〉의 “제피상의制彼裳衣(저 치마와 옷을 만들어)”라고 말하는 유와 같다. 실가室家와
혼인婚姻에 대한 말은
注+≪시경詩經≫ 〈채미采薇〉의 “미실미가靡室靡家(방에 있지 못하고 집에 있지 못함이)”, 〈동산東山〉의 “친결기리親結其縭(어머니가 그 손수건을 매어주니)”라고 말하는 유와 같다. 사람의 감정을 자세히 표현한 것이
注+장수將帥와 사졸士卒의 감정을 자세히 표현했다는 말이다. 마치
여아女兒의 말같이 친절하니,
注+장수將帥 대하기를 집안 식구처럼 했다는 말이다.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이
장수將帥들을 대우함에 있어 마음을 열고 정성을 보인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고,
注+이는 성인聖人이 장수將帥들을 성심으로 대하고 권모술수를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애당초 고루한
유생儒生(
숙손통叔孫通)처럼 예의에 구속되지도 않았고,
注+일찍이 숙손통叔孫通처럼 조의朝儀를 쓴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또 후세 사람(
한 고조漢 高祖)처럼 방종에 이르지도 않았다.
注+또한 일찍이 한 고제漢 高帝처럼 거만하게 욕하거나, 광무제光武帝처럼 간이簡易하게 대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고제高帝는 사리에 밝고 통달하여
간언諫言을 올리기가 가장 쉬웠는데,
注+고제高帝는 타고난 자질이 사리에 밝고 통달하여 간언諫言을 올리기가 쉽다는 말이다. 애석하게도 이
시詩를 인용해 깨우친 사람이 없었다.
注+다만 당시에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시를 가지고 깨우쳐준 사람이 없었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