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僖二十八年
이라 四月
에 晉侯夢與楚子
에 하다
是以懼
하다 子犯曰 吉
이니이다 我得天
하고 리이다 楚師敗績
하다
傳
[左傳]宣三年
이라 冬
에 鄭穆公卒
하다 初
에 鄭文公有賤妾曰
이라 夢天使與己蘭曰 余爲
니 余
는 而祖也
라
旣而文公見之
하고 與之蘭而御之
한대 辭曰 妾不才
로 幸而有子
라도 將不信
하리니 잇가
公曰 諾
다 生穆公
에 名之曰蘭
이라하다 穆公有疾曰 蘭死
면 吾其死乎
ㄴ저 吾所以生也
라 하다
傳
[左傳]宣十五年
이라 秋
에 秦桓公伐晉
하야 次于
하다 壬午
에 魏顆敗秦師
하야 獲杜回
하니 秦之力人也
라
初
에 魏武子有嬖妾
하니 無子
라 有疾
에 命顆曰 必嫁是
하라하더니 疾病則曰 必以爲殉
하라하다
及輔氏之役에 顆見老人結草以亢杜回러니 杜回躓而顚이라 故獲之하다
夜夢之曰 余
는 所嫁婦人之父也
라 爾用先人之治命
일새 余是以報
호라
傳
邴夏曰 射其御者
하소서 君子也
니이다 公曰
라하고
射其左하야 越于車下하고 射其右하야 斃于車中하다
傳
[左傳]成五年이라 原屛放趙嬰於齊하다 嬰曰 我在라 故欒氏不作하니 我亡이면 吾二昆其憂哉ㄴ저
嬰夢天使謂己호대 祭余면 余福女하리라 使問諸士貞伯한대
貞伯曰 不識也라하고 旣而告其人曰 神은 福仁而禍淫이어늘 淫而無罰은 福也라 祭其得亡乎ㄴ저 祭之之明日而亡하다
15-02-07 晉侯夢大厲 夢疾爲二豎子 小臣夢負公登天
傳
[左傳]成十年이라 晉侯夢에 大厲가 被髮及地하고 搏膺而踊曰 殺余孫하니 不義로다
라하고 壞大門及寢門而入
이어늘 公懼
하야 入于室
하니 又壞戶
하다
公疾病
하야 求醫于秦
하니 하다 未至
에 公夢疾爲二豎子曰 彼
는 良醫也
라 懼傷我
하니 焉逃之
오
在肓之上膏之下
하야 하고 達之不及
하고 藥不至焉
하니 로이다 公曰 良醫也
라하고 厚爲之禮而歸之
하다
하야 使
獻麥
하고 하야 召桑田巫
하야 示而殺之
하다
將食
에 하야 하다 小臣有晨夢負公以登天
이러니 及日中
하야 負晉侯出諸厠
하다 하다
傳
[左傳]成十六年
이라 夢射月中之
하고 退入於泥
하다 占之
하니 曰
요 니 必楚王也
라
傳
[左傳]成十七年
이라 初
에 聲伯夢涉
에 하고 하다
러니 還自鄭
에 壬申
에 至于貍脤而占之曰 余恐死
라 故不敢占也
러니
傳
[左傳] 襄十八年
이라 하다 夢與厲公訟
하야 弗勝
하다
公以戈擊之
하니 首隊於前
이어늘 跪而戴之
하야 奉以走
라가 하다
他日
에 見諸道
하야 이라 巫曰
必死
어니와 이리라 獻子許諾
하다
傳
問其行
이어늘 告之故
한대 哭而送之
하다 適齊
하야 하야 生孟丙仲壬
하다
對曰
라 魯人召之
하니 不告而歸
하다 에 所宿庚宗之婦人
이 獻以雉
어늘
召而見之하니 則所夢也라 未問其名하고 號之曰牛야하니 曰 唯라 皆召其徒하야 使視之하고 遂使爲豎하다 云云
傳
[左傳]昭七年
이라 楚子成章華之臺
하야 하니 大宰薳啓彊來召公
하다
하다 梓愼曰 君不果行
이리이다 襄公之適楚也
에 夢周公祖而行
이어니와
하소서 子服惠伯曰 行
하소서 先君未嘗適楚
라 故周公祖以道之
하고
襄公適楚矣라 而祖以道하니 君不行이면 何之릿가 三月에 公如楚하다
傳
[左傳]昭七年이라 鄭子産聘于晉이러니 晉侯有疾하다
韓宣子逆客
하야 曰 寡君寢疾
이 於今三月矣
라 호되 有加而無瘳
라
今夢黃熊入於寢門하니 其何厲鬼也오 對曰 以君之明으로 子爲大政하니 其何厲之有리오
한대 其神化爲黃熊
하야 以入于羽淵
이러니 實爲
ㄹ새 三代祀之
니라
傳
[左傳]昭七年이라 衛襄公夫人姜氏無子하고 嬖人婤姶生孟縶하다
史朝亦夢康叔謂己호되 余將命而子苟與孔烝鉏之曾孫圉相元하리라 史朝見成子하고 告之夢하니 夢協이라 故立靈公하다
傳
[左傳]昭十一年
이라 泉丘人有女
러니 夢以其帷幕孟氏之廟
하고 遂奔僖子
하니 하다
反自祲祥
하야 宿於薳氏
하야 生懿子及南宮敬叔於泉丘人
하다 其僚無子
하니 하다
傳
[左傳] 昭十七年
이라 九月丁卯
에 晉
吳帥師涉自
하야 使祭史先用牲于雒
하다
하야 遂滅陸渾
하다 宣子夢文公攜荀吳而授之陸渾
이라 하다
傳
[左傳]昭二十五年
이라 이러니 夢
卽位於廟
에 하다
에 召六卿
하야 公曰 寡人不佞
하야 하야 以爲二三子憂
하니 寡人之罪也
라
仲幾對曰 君若以社稷之故
로 이면 群臣弗敢知
어니와
若夫宋國之法
과 라면 先君有命矣
니 群臣以死守之
요 弗敢失隊
니이다
臣之失職
이면 常刑不赦
라 이니이다 宋公遂行
하다 己亥
에 卒于曲棘
하다
傳
[左傳]哀七年
이라 初
에 曹人或夢衆君子立于社宮
하야 而謀亡曹
어늘 하다
而求之
하니 曹無之
하다 曰 我死
에 爾聞公孫強爲政
이어든 必去之
하라
及曹伯陽卽位하야 好田弋하다 曹鄙人公孫強好弋하여 獲白雁獻之하다 有寵하야 使爲司城以聽政하니 夢者之子乃行하다
傳
[左傳]哀十七年
이라 에 하야 被髮北面而譟曰 登此昆吾之虛
하니 로다
余爲渾良夫
니 하리라 公親筮之
하니 胥彌
占之曰 不害
라하다
而
하다 衛侯
하니 其繇曰
尾
하니 衡流而方羊
이로다
大國
이 滅之
하니 將亡
하리라 闔門塞竇
하고 乃自後踰
하리라 冬十月
에 하야 入其郛
하다
傳
咮加於南門하고 尾加於桐門하다 曰 余夢美하니 必立하리라 大尹奉啓以奔楚하다 乃立得하다
形神相接而夢者를 世歸之想이요 形神不接而夢者를 世歸之因이라
因之說曰 因羊而念馬
하고 因馬而念車
하고 因車而念盖
라 固有牧羊而夢
者矣
니
是雖非今日之想이나 實因於前日之想也라 故因與想一說也라
信如是說이면 無想則無因이요 無因則無夢이니 擧天下之夢이라도 不出於想而已矣라
鳴呼
라 하고 萬理皆備於心
하니 豈以想而有
며 豈以不想而無哉
리오
耳之所聞者有限也나 然天下之聲皆具於吾耳之中하니 非可以聞不聞限也라 目之所見者有限也나
然天下之色皆具於吾目之中하니 非可以見不見限也라 心之所想者有限也나
上天下澤과 內華外夷와 往古來今히 其鉅其細와 其晦其明이 皆與吾心同流而無間하야
或感於志氣하고 或動於四體하고 或發於夢寐하야 層見錯出이 軸運機旋하니 豈待想而後有因하고 待因而後有夢耶아
苟必謂因想而後有夢이면 則是未想之前에 胷中本無是物이요 因想而後有是物也며
未想之前에 胷中本無是理요 因想而後有是理也라 抑不知心猶地而想特其一塵耳요 心猶海而想特其一漚耳라
以想爲心이면 何異指塵爲地하고 指漚爲海乎아 是其爲論이 淺狹潰亂하야 猶未離乎夢中語어늘 反欲證他人之夢하니 甚矣라 其惑也여
歷擧左氏所載之夢컨대 自晉文公至於宋得히 無慮於數十이니 名之以想可也요 名之以因亦可也어니와
至於叔孫穆子夢童牛之貌於牛未至之前하고 曹人夢公孫強之名於強未生之前이니 是果出於想乎며 果出於因乎아
以有窮之說로 而欲盡無窮之理하고 以有外之見으로 而欲測無外之心이면 難矣哉라
嗚呼라 理本無窮이어늘 而人自窮之하고 心本無外어늘 而人自外之라
故左氏之所謂夢은 出於所因所思之外蓋無幾요 其餘未有不局於區區念慮之間者也라
持樂廣之論以揆之
注+持樂廣之論以揆之:면 固已十中其八九矣
라 然醫不至於神
이면 治常疾則精
이나 治非常之疾則疏
하고
論不至於極이면 談常夢則合이나 談非常之夢則敗라 魯襄公之夢周公은 固子服惠伯之所能辨也나
傳
僖公 28년, 4월에 晉侯가 꿈에 楚子와 手搏하는데 楚子가 晉 文公을 넘어뜨려 놓고 몸 위에 엎드려 腦를 파먹었다.
이 꿈 때문에 文公이 두려워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吉夢입니다. 우리는 누워서 하늘을 향하였으니 하늘의 도움을 얻을 徵兆이고, 楚子는 地面을 향해 엎드렸으니 임금님께 伏罪할 징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장차 저들을 柔順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楚軍이 大敗하였다.
楚나라 子玉의 꿈에 河神이 瓊弁과 玉纓을 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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僖公 28년, 당초에 楚나라 子玉이 스스로 瓊弁과 玉纓을 만들어 아직 사용하지 않았는데,
戰爭에 앞서 꿈에 河神이 子玉에게 “그것을 나에게 달라. 나는 너에게 孟諸의 麋를 주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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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公 3년, 겨울에 鄭 穆公이 卒하였다. 당초 鄭 文公에게 燕姞이라는 賤妾이 있었는데, 꿈에 天使가 그에게 蘭을 주며 “나는 伯鯈이니, 나는 너의 祖上이다.
이 蘭으로 너의 아들을 만들어줄 것이니, 蘭은 國中의 꽃 중에 香氣가 가장 뛰어나므로 사람들이 그를 蘭처럼 친애하고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文公이 燕姞을 보고서 그에게 蘭을 주며 侍寢하게 하자, 燕姞이 말하기를 “妾이 才能이 없는 몸으로 다행히 姙娠하더라도 〈사람들은 임금님의 아이로〉 믿지 않을 것이니, 감히 이 蘭을 徵據로 삼아도 좋겠습니까?”라고 하니,
文公이 좋다고 승낙하였다. 뒤에 穆公이 태어나자 이름을 ‘蘭’이라고 하였다. 鄭 穆公이 병이 나자 말하기를 “蘭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다.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 蘭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자가 실수로〉 蘭을 베어내자, 穆公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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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公 15년, 가을에 秦 桓公이 晉나라를 討伐하기 위해 輔氏에 駐屯하였다. 壬午日에 魏顆가 秦軍을 敗北시키고서 杜回를 사로잡았으니, 杜回는 秦나라의 力士이다.
과거에 魏武子에게 자식이 없는 嬖妾이 하나 있었는데, 魏武子가 처음 病이 들었을 때는 魏顆에게 命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사람을 반드시 改嫁시켜라.”라고 하더니, 병이 위독해지자 “반드시 이 사람을 殉葬시켜라.”라고 하였다.
魏武子가 죽은 뒤에 魏顆는 그 여자를 개가시키며 “병이 위독하면 정신이 혼란하니, 나는 아버지의 정신이 맑을 때 하신 命을 따르려는 것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輔氏에서 戰爭할 때 魏顆는 어떤 한 老人이 풀을 묶어 杜回의 길을 막는 것을 보았는데, 杜回가 그 맺어놓은 풀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에 杜回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날 밤 꿈에 〈그 老人이 魏顆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개가시킨 婦人의 아비이다. 그대가 先人의 治命(정신이 맑을 때 내린 命)을 따랐기 때문에 내가 이로써 보답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傳
成公 2년, 韓厥의 꿈에 그 아비 子輿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일 出戰할 때 車左나 車右의 자리를 피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韓厥은 가운데에 서서 수레를 몰며 齊侯를 추격하였다.
邴夏가 齊侯에게 말하기를 “저 뒤쫓는 수레의 御者를 쏘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는 君子입니다.”라고 하니, 齊侯가 말하기를 “그를 君子라고 하면서 쏘라는 것은 禮가 아니다.”라고 하고서,
그 車左를 쏘아 수레 밑으로 떨어뜨리고, 그 車右를 쏘아 수레 안에서 죽게 하였다.
傳
成公 5년, 原(趙同)과 屛(趙括)이 趙嬰을 齊나라로 추방하려 하자, 趙嬰이 말하기를 “내가 있기 때문에 欒氏가 亂을 일으키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도망간다면 우리 두 兄께 아마도 憂患이 있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에게는 각각 잘해내는 일과 잘해내지 못하는 일이 있으니, 나를 赦免[舍]한다 해서 무슨 害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原과 屛은 들어주지 않았다.
趙嬰의 꿈에 하늘이 使者를 보내어 趙嬰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祭祀를 지내라. 그러면 나는 너에게 福을 주겠다.”고 하였다. 趙嬰이 士貞伯에게 사람을 보내어 꿈에 대해 물으니,
貞伯은 “모르겠다.”고 하고서, 한참 있다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神은 仁慈한 사람에게 福을 내리고 淫亂한 사람에게 禍를 내리는 것인데, 淫亂한 짓을 하고도 罰(禍)을 받지 않는 것은 福이다. 제사를 지낸다면 아마 추방[亡]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趙嬰은 제사를 지낸 이튿날 추방당하였다.
晉侯의 꿈에 큰 厲鬼가 보이다, 晉侯의 꿈에 病이 두 더벅머리 아이가 되다, 小臣이 꿈에 景公을 업고 하늘로 올라가다
傳
成公 10년, 晉侯의 꿈에 큰 厲鬼가 머리는 풀어 헤쳐 땅에 끌리고, 가슴을 치고 뛰면서 말하기를 “네가 나의 손자를 죽였으니, 義理를 모르는 놈이다.
내가 〈너에게 復讐할 것을〉 上帝께 請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大門과 寢門을 부수고 들어오자, 景公은 겁이 나서 內室로 들어가니 또 內室의 門을 부수었다.
景公이 꿈에서 깨어 桑田에 사는 무당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무당의 말도 꿈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景公이 “그 吉凶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무당은 “新麥(새로 생산된 보리)을 먹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景公이 과연 병이 위중해져서 秦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醫員을 보내주기를 요구하니, 秦伯은 醫員 緩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醫員이 도착하기 전에 景公이 꿈을 꾸니, 病이 두 더벅머리 아이[豎子]가 되어 〈한 아이가〉 말하기를 “저 의원은 良醫이니, 우리를 다치게 할까 두렵다. 어디로 도망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
한 아이가 말하기를 “肓의 위와 膏의 아래로 가서 있으면 우리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의원이 와서 진찰한 다음 景公에게 말하기를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病이 肓의 위와 膏의 아래에 있으므로 뜸으로도 다스릴 수 없고, 針[達]도 그곳까지 미치지 않고, 藥의 힘도 그곳까지 이르지 않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景公은 “참으로 良醫이다.”라고 하고서 후하게 禮遇하여 돌려보냈다.
6월 丙午日에 晉侯는 新麥을 먹고자 하여 甸人에게 보리를 바치게 하고 饋人에게 新麥으로 밥을 짓게 하고서, 桑田의 무당을 불러 〈新麥으로 만든 음식을〉 보이고는 그를 죽였다.
그리고서 막 그 밥을 먹으려 하는데 갑자기 배가 膨脹하여 변소에 갔다가 변소에 빠져 죽었다. 어떤 小臣이 새벽에 景公을 업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正午에 晉侯를 업고 변소에서 나왔다. 드디어 그를 殉葬시켰다.
傳
成公 16년, 呂錡가 달을 쏘아 맞히고 물러나 진창으로 들어간 꿈을 꾸고는 그 꿈의 吉凶을 점치니, 卜人이 말하기를 “姬姓은 해이고, 異姓은 달이니, 그 달은 楚王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활을 쏘아 맞히고 물러나다가 진창에 빠졌으니, 당신도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交戰할 때에 미쳐 呂錡가 楚王을 쏘아 눈을 맞혔다.
傳
成公 17년, 당초에 聲伯이 잠을 자다가 洹水를 건너는데, 어떤 사람이 聲伯에게 珠玉[瓊瑰]을 주자 그것을 먹고 聲伯이 눈물을 흘리니 그 눈물이 珠玉이 되어 품안에 가득히 쌓였다.
聲伯은 〈珠玉을 준 사람을〉 따라가며 “洹水를 건너는데 어떤 이가 나에게 珠玉을 주었네. 돌아갈 것이다. 돌아갈 것이다. 珠玉이 내 품에 가득하니.”라고 노래하는 꿈을 꾸었다.
〈聲伯은 꿈에서 깬 뒤에〉 겁이 나서 감히 점을 치지 못하였더니. 이번에 鄭나라 討伐에서 돌아올 때 壬申日에 貍脤에 이르러 점을 치게 하며 말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 두려워 감히 점을 묻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무리가 나를 따른 지 3년이나 되었으니, 害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한 날 저녁[莫]에 죽었다.
傳
襄公 18년, 中行獻子(荀偃)가 齊나라를 토벌하려 하였다. 꿈에, 先君 厲公과 訟事를 하여 勝訴하지 못하자,
厲公이 창으로 치니 머리가 잘려 앞에 떨어졌는데, 무릎을 꿇고 앉아 떨어진 머리를 집어 목 위에 얹고 두 손으로 붙들고서 달아나다가 梗陽의 무당 皐를 만났다.
後日에 길에서 그 무당을 만나 이야기하니 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금년에 大夫는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東方의 나라와 戰爭을 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獻子가 허락하였다.
傳
昭公 4년, 당초 穆子(叔孫豹)가 叔孫氏와 訣別하고 〈魯나라를 떠나 齊나라로 갈 때〉 庚宗에 미쳐 한 女人(婦人)을 만나, 그 여인에게 은밀히 밥을 짓게 하여 먹고 그 여인과 同寢하였다.
그 여인이 穆子에게 떠날 것이냐고 묻자, 〈穆子가 떠나야 할〉 緣由를 말해주니, 그 여인은 울면서 穆子를 보내주었다. 穆子는 齊나라로 가서 國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孟丙과 仲壬을 낳았다.
하루는 穆子의 꿈에 하늘이 자기를 내리누르니 버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얼굴은 검고 두 어깨는 앞으로 굽었으며, 눈은 깊고 입은 돼지주둥이 같았다.
큰소리로 그에게 “牛야! 나를 도와달라.”고 말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끝내 버틸 수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穆子는 從者들을 다 불러 세워놓고서 살펴보았으나, 꿈에서 본 자와 같이 생긴 자가 없었다.
〈穆子는 從者들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면서〉 “잘 기억해두라.”고 하였다. 宣伯이 말하기를 “魯나라는 우리 先子의 일로 인해 우리 宗族을 보존시키기 위해 반드시 너를 불러들일 것이니, 너를 부른다면 어찌하겠느냐?”고 묻자,
穆子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 지 오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魯人이 부르니, 穆子는 宣伯에게 告하지 않고 歸國하였다. 穆子가 卿이 된 뒤에 庚宗에서 동침했던 女人이 꿩을 바치자,
穆子가 아들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 여인은 “내 아들이 이미 자라서 꿩을 奉獻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으므로 나를 따라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穆子가 그 아이를 불러 보니, 바로 꿈에서 보았던 아이였다. 穆子는 그 이름도 묻지 않고 ‘牛야’라고 부르니 아이가 ‘예’라고 대답하였다. 從者들을 다 불러 그 아이를 보게 하고는 드디어 豎(小臣)로 삼았다. 운운.
傳
昭公 7년, 楚子가 章華臺를 완성하고서 諸侯들을 초청해 落成式을 거행하기를 원하자, 太宰 薳啓彊이 魯나라에 와서 昭公을 초청하였다.
昭公이 楚나라에 가려 할 때 襄公이 祖道祭를 지내는 꿈을 꾸었다. 梓愼이 말하기를 “임금님께선 과연 가시지 못할 것입니다. 襄公께서 楚나라에 가실 적에 周公이 祖道祭를 지내는 꿈을 꾸고서 가셨지만,
지금 襄公께서 실로 祖道祭를 지내는 꿈을 꾸셨으니, 임금님께선 가지 마소서.”라고 하자, 子服惠伯이 말하기를 “가소서. 先君(襄公)께선 楚나라에 가신 적이 없었기 때문에 周公께서 祖道祭를 지내어 길을 引導하셨고,
襄公께선 楚나라에 가신 적이 있기 때문에 祖道祭를 지내어 임금님을 인도하신 것이니, 楚나라에 가시지 않는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3월에 昭公이 楚나라에 갔다.
傳
昭公 7년, 鄭나라 子産이 晉나라에 聘問하였는데, 이때 晉侯가 병을 앓고 있었다.
韓宣子가 客(子産)을 맞이하면서 은밀히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병으로 자리에 누우신 지 지금 석 달이 되었습니다. 응당 祭祀 지낼 모든 山川에 달려가서 祈禱하였으나 병이 더하기만 하고 낫지 않았습니다.
오늘 임금님의 꿈에 黃熊이 寢室의 門으로 들어왔으니, 그것이 무슨 厲鬼(惡鬼)입니까?”라고 하니, 子産이 대답하기를 “晉君의 英名함으로 그대를 大政(正卿)으로 삼았으니, 어찌 厲鬼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帝堯가 鯀을 羽山에서 죽이자 그 鬼神이 黃熊으로 변하여 羽淵으로 들어갔는데, 이 神이 실로 夏郊가 되었으므로 三代가 모두 그 神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晉나라는 盟主가 되어, 혹시 그 神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韓子가 夏郊(鯀의 神)에 제사를 지내니 晉侯의 병에 차도가 있었다. 晉侯는 子産에게 莒나라에서 바친 方鼎 두 개를 下賜하였다.
傳
昭公 7년, 衛 襄公의 夫人 姜氏(宣姜)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嬖人 婤姶이 孟縶을 낳았다.
孔成子의 꿈에 康叔(衛나라의 始祖)이 孔成子에게 말하기를 “元(衛 靈公)을 임금으로 세우라. 내 羈의 孫子 圉와 〈史朝의 아들〉 史苟로 하여금 元을 섬기게 하겠다.”고
하였다. 史朝 역시 꿈에 康叔이 史朝에게 말하기를 “내 장차 너의 아들 苟와 孔烝鉏의 曾孫 圉에게 命하여 元을 섬기게 하겠다.”고 하였다. 史朝가 成子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니, 두 사람의 꿈이 같았다. 그러므로 〈孔成子가〉 靈公을 세웠다.
泉丘에 사는 어떤 女人이 자기의 帳幕으로 孟氏의 家廟를 덮는 꿈을 꾸다
傳
昭公 11년, 泉丘(魯나라 邑)에 사는 어떤 女人이 있었는데, 자기의 帳幕으로 孟氏의 家廟를 덮는 꿈을 꾸고서 드디어 孟僖子에게로 달려가니, 그 벗도 그를 따라갔다.
〈두 여인은 孟僖子와〉 淸丘의 社神 앞에서 맹약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우리를〉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孟僖子는 그 여인을 薳氏를 補助하는 妾이 되게 하였다.
孟僖子는 祲祥에서 돌아와서 薳氏의 처소에 묵으면서 泉丘人에게서 懿子와 南宮敬叔을 낳았다. 그 벗에게 아들이 없자 敬叔을 양육하게 하였다.
傳
昭公 17년, 9월 丁卯日에 晉나라 荀吳가 군대를 거느리고 棘津에서 渡河한 뒤에 祭史(祭祀를 주관하는 官員)를 보내어 먼저 犧牲을 잡아 雒水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도 陸渾人은 〈晉人이 자기들을 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晉軍은 그 뒤를 따라가서 드디어 陸渾을 擊滅하였다. 宣子는 文公이 荀吳의 손을 잡고서 그에게 陸渾을 주는 꿈을 꾸었다. 그러므로 穆子(荀吳)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陸渾을 치게 하고, 〈勝利하고 돌아온 뒤에〉 俘虜를 文公의 廟에 바쳤다.
傳
昭公 25년, 宋 元公이 魯 昭公을 위한 일로 晉나라에 가려 하였더니, 太子 欒이 宗廟에서 卽位式을 거행하는데 자기와 平公이 朝服을 입고 輔佐하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六卿을 불러놓고서 元公이 말하기를 “寡人이 변변치 못하여 父兄을 잘 섬기지 못해 여러분에게 근심을 끼쳤으니 이는 寡人의 罪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福[靈]을 힘입어 〈橫死를 당하지 않고〉 壽命으로 죽는다면 오직 楄柎만을 쓰고 屍身 밑에 까는 것들은 先君의 장례 때보다 모자라게 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仲幾가 대답하기를 “임금님께서 만약 국가의 일로 사사로이 昵宴을 줄이는 것이라면 群臣이 감히 알려 하지 않겠습니다만,
만약 宋나라의 法과 死生의 제도에 관계된 것이라면 先君의 命이 있으니 群臣은 죽음으로 지켜 감히 어길 수 없습니다.
臣 등이 직무를 소홀히 하면 법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신 등은 〈직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죽임을 당할 짓을 차마 할 수 없으니, 임금님의 命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 宋 元公은 드디어 길을 떠났다. 己亥日에 曲棘에서 卒하였다.
傳
哀公 7년, 당초에 曹나라의 어떤 사람이 꿈에 여러 君子들이 社宮에 서서 曹나라를 멸망시킬 일을 謀議하는데, 曹叔 振鐸이 公孫 強이 〈執政할 때를〉 기다리기를 청하자 여러 君子가 허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이튿날 公孫 強이란 자를 찾아보았으나 曹나라에는 그런 자가 없었다. 그러자 그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는 公孫 強이란 사람이 執政이 되었다는 말을 듣거든 반드시 이곳을 떠나라.”고 하였다.
曹伯 陽이 즉위함에 미쳐 사냥[田弋]을 좋아하였다. 曹나라 변방 사람 公孫 強이 주살로 새 잡기를 좋아하여 白雁을 잡아 曹伯 陽에게 바쳤다. 〈曹伯 陽은 公孫 強을〉 寵愛하여 司城으로 삼아 國政을 처리하게 하니, 꿈꾼 자의 아들이 곧 曹나라를 떠났다.
公孫 強이 曹伯에게 霸者가 되는 방법[說]을 말하자, 曹伯이 그 말을 따라 晉나라를 배반하고 宋나라를 침범하니, 宋人이 曹나라를 토벌하였다.
傳
哀公 17년, 衛侯가 北宮에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사람이 昆吾觀에 올라가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서 북쪽을 향해 큰소리로 “이 昆吾의 옛터에 올라보니 오이 넝쿨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네.
나는 바로 渾良夫이니 하늘에 無辜함을 부르짖겠노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衛 莊公이 이 꿈에 대해 친히 蓍草占을 쳤는데, 胥彌赦가 그 점을 풀이해 말하기를 “해롭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莊公이 그에게 邑을 주니 胥彌赦는 그 邑을 받지 않고 도망해 宋나라로 달아났다. 衛侯가 거북점을 치니, 그 占辭에 “물고기처럼 꼬리가 붉으니 흐르는 물살을 뚫고 정처 없이 헤매리라.
邊隣의 大國이 멸망시키려 하니 장차 망할 것이로다. 문을 닫고 구멍을 막고서 뒷담을 넘어 도망가리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晉나라가 다시 衛나라를 토벌하여 그 外郭까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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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公 26년, 宋得(宋 昭公)은, 啓(得의 아우)가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盧門(東門) 밖에서 잠을 자고, 자기는 까마귀가 되어 啓의 몸 위에 앉았는데,
부리는 南門에 걸치고 꼬리는 桐門(北門)에 걸친 꿈을 꾸고서, 말하기를 “내 꿈이 좋으니 반드시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尹은 啓를 모시고 楚나라로 出奔하였다. 이에 得을 임금으로 세웠다.
형상과 정신이 서로 접촉하여 꿈이 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想’이라 하고, 형상과 정신이 서로 접촉하지 않고도 꿈이 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因’이라 한다.
‘因’의 뜻은 “羊을 因하여 말[馬]을 생각하고, 말을 因하여 수레를 생각하고, 수레를 因하여 車盖를 생각한다.”는 따위이다. 본래 羊을 치는 〈가난한 집 자식이〉 鼓吹와 曲盖를 꿈꾸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비록 오늘의 생각이 아니지만 실은 전일의 생각에서 起因한 것이다. 그러므로 因과 想은 그 이치가 하나이다.
진실로 이 說과 같다면 想이 없으면 因이 없고 因이 없으면 꿈이 없으니, 온 천하 사람들의 꿈이 想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 천하의 온갖 사물이 모두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고, 온갖 이치가 모두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생각한다 해서 〈物과 理가〉 있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서 〈物과 理가〉 없겠는가?
귀가 들을 수 있는 것은 有限하다. 그러나 천하의 소리가 모두 내 귀 가운데 갖추어져 있으니, 듣거나 듣지 못함으로써 有限과 無限을 논할 것이 아니다.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有限하다.
그러나 천하의 색깔이 모두 내 눈 가운데 갖추어져 있으니 보거나 보지 못함으로써 유한과 무한을 논할 것이 아니다.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有限하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가 모두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써 유한과 무한을 논할 것이 아니다.
위로 하늘, 아래로 山澤, 안으로 中華, 밖으로 夷狄,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鉅細와 晦明이 모두 내 마음과 함께 흘러 일치해 조금의 간격도 없어서,
혹은 志氣에 감응하기도 하고 혹은 四體에 작동하기도 하며 혹은 夢寐에 드러나기도 하여, 끊임없이 거듭 나타나는 것이 마치 機軸이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想을 기다린 뒤에 因이 있고, 因을 기다린 뒤에 꿈이 있겠는가?
만약 반드시 생각함을 인한 뒤에 꿈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생각하기 전에는 가슴속에 본래 이 事物이 없다가 생각함을 인한 뒤에 이 사물이 있고,
생각하기 전에는 가슴속에 본래 이 이치가 없다가 생각함을 인한 뒤에 이 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마음은 땅과 같고 생각은 땅 위의 한 티끌일 뿐이며, 마음은 바다와 같고 생각은 물결의 한 거품일 뿐임을 모르고서 한 말이다.
생각을 마음이라 한다면 티끌을 가리켜 땅이라 하고, 거품을 가리켜 바다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은 그 논리가 천박하고 雜亂하여 잠꼬대 같은 말인데도 도리어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꿈을 증명하고자 하니, 미혹됨이 심하다.
≪春秋左氏傳≫에 실린 꿈에 대한 기록을 일일이 들면 晉 文公으로부터 宋得(宋 昭公)에 이르기까지 무려 수십 조에 달하니, ‘想’으로 명칭해도 괜찮고 ‘因’으로 명칭해도 괜찮다.
그러나 叔孫穆子가 꿈에서 어린 牛를 본 것이 牛가 이르기 이전이었고, 曹人이 꿈에서 公孫 強의 이름을 말한 것이 公孫 強이 출생하기 이전이니, 이것도 과연 想과 因에서 나온 것인가?
비록 樂廣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해도 내가 알기로는 그도 반드시 이런 도리를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유한한 말로 무한한 이치를 다 말하고자 하고, 유한[有外]한 견문으로 무한[無外]한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면 어려울 것이다.
아! 이치는 본래 다함이 없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다함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마음은 본래 밖이 없는데 사람들은 스스로 밖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左氏가 말한 ‘꿈’이란, 因과 思(想)의 밖에서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사람들의 자잘한 생각 사이에 국한된 것들이다.
樂廣의 말을 가지고 헤아려보면
注+일이 ≪晉書≫ 〈樂廣傳〉에 보인다. 본래 열에 이미 여덟아홉은 맞았다. 그러나
醫術이 신묘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보통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정교하지만 비상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정밀하지 못하며,
언론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평범한 꿈을 담론함에는 부합하지만 비상한 꿈을 담론함에는 적절치 않다. 魯 襄公이 꿈에 周公을 본 것은 본래 子服惠伯이 그 吉凶禍福을 판별한 바이지만,
가령 그에게 孔子께서 꿈에서 周公을 보신 것을 논하게 한다면 나는 그가 무슨 말로 대답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