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王不禮焉
이어늘 周桓公言於王曰
하니 善鄭以勸來者
라도 온 況不禮焉
이리잇가
君子之論事에 必使事爲吾用이요 而不使吾爲事所用이라
古今之事에 所當論者不勝其多也어늘 苟見事之難者면 亦從而謂之難하고 見事之易者면 亦從而謂之易하며 甚者反遷就吾說하야 以就其事면 豈非爲事所用乎아
所貴乎立論者는 蓋欲發未明之理요 非徒議已見之迹也라
若止論已見之迹이면 是猶言火之熱 言水之寒 言鹽之鹹 言梅之酸이라
惟君子之立論에 信己而不信人하고 信心而不信目이라
見在此之事면 則得在彼之理하고 見在前之事면 則得在後之理하니 衆人徒知是事나 而君子獨知事外之理焉이라
春秋之初에 鄭之事周에 其叛服不一하니 人之論者亦不一이라
衆人之說은 不過以王不禮之爲非하니 此左氏之所已言也라
君子論之면 則以爲王綱旣墜하니 傲固招禍요 卑亦納侮라
是知威王之失이 不專在於不禮鄭伯이요 而在於不能振王綱이라
衆人之說은 不過以畀虢公之政하니 此左氏之所已言也라
君子論之면 則以爲王者之於諸侯에 有畏之之迹則驕하고 無畏之之迹則服이라
在平王世
에 將用虢公而不敢用
하고 反與鄭交質
注+隱二年하니 鄭知周畏之
라
故於將用虢公之初에 凌犯王室하고 蹂踐麥禾하야 略無所憚하고 在威王世에 將用虢公而卽用之하고 未嘗猶豫하니 鄭伯知周不畏之라
故於旣用虢公之後에 奉承王命하야 朝會征討를 初不敢違하니 是知周鄭交惡가 不在於用虢公이요 而在於畏鄭이라
衆人之說은 不過謂有錫田之名而無錫田之實이라하니 此左氏之所已言也라
君子論之면 則以爲蘇忿生旣叛하니 其田非周之所有어늘 與之以虛名하니 固足以起鄭之怨이라
然蘇忿生者는 王室之卿士이니 蘇忿生之田은 王室之田이라
叛臣盜據王之土地어늘 王不能自取하고 反假他人以取之하니 安得不取輕於鄭乎아
威王奪鄭伯政하고 率諸侯伐鄭이라가 反爲所敗하니라
衆人之說은 不過謂不當奪鄭伯之政이라하니 此左氏之所已言也라
君子論之면 則以爲鄭伯之政은 在所當奪이나 特威王不能正其名耳라
當
之時
하야 以廢祀而討之
면 其名豈不正乎
며 當鄭伯
之時
하야 以專地而討之
면 其名豈不正乎
아
使於是時討之
면 其名正
하고 其義順
하야 鄭將覆亡之不
矣
리라
威王當其時而不能討하고 遷延數年이라가 乃無故而奪其政하고 伐其國하니 宜鄭之不服也라
是知威王之致敗는 不在於奪鄭伯政이요 而在於奪之非其時라
君子論之면 則以爲鄭伯未勝則使祝聃射王하니 其事甚悖하고 旣勝則使祭足勞王하니 其辭甚恭이라
其前之悖는 蓋出於眞情하니 欲以取一時之勝이요 其後之恭은 蓋出於矯情하니 欲以避天下之責이라
雖杜預亦信以爲志在苟免而不悟하니 是鄭伯不惟能欺當時라 其遺姦餘詐가 猶能欺千餘年之杜預하니 可謂險矣로다
盜賊以盜賊自處는 其情猶可恕어니와 盜賊以君子自處는 其情尤可誅니 是知論鄭伯者는 不當信其苟免之言이요 而當疾其詐爲苟免之言이라
大抵論事之體는 與敍事之體不同하니 敍事者는 載其實하고 論事者는 推其理니라
彼方冊之所載에 旣序其事之實矣어늘 論者又從而述其事하고 曾不能推事外之理면 是與序事者無以異也니 非所謂論事也라
是吾之論은 反待彼之事而立이어니와 而彼之事는 不待吾之論而明也라
苟論資於事면 是論反爲事之累也니 尙何以操筆爲哉아
傳
노魯 은공隱公 6년, 정백鄭伯이 주周나라에 갔으니, 비로소 주周 환왕桓王께 조현朝見한 것이다.
환왕이 그를 예우하지 않자, 주周 환공桓公이 환왕께 말하기를 “우리 주나라가 동천東遷할 때에 진晉나라와 정鄭나라에 의지하였으니, 정나라를 잘 대우해서 오지 않는 제후들을 권장하더라도 오히려 오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예우하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정나라는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군자君子가 일을 논함에는 반드시 일이 나의 쓰임이 되게 하고 내가 일의 쓰임이 되게 하지 않는다.
고금古今의 일 중에 논해야 할 일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려운 일을 보면 따라서 어렵다고 하고 쉬운 일을 보면 따라서 쉽다고 하며, 심한 경우 나의 논리를 바꾸어 그 일에 맞춘다면 이것이 어찌 일의 쓰임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논리論理를 세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아마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치를 드러내 밝히고자 하고, 이미 드러난 자취만을 논의論議할 뿐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드러난 자취만을 논할 뿐이라면 이는 불을 뜨겁다고 하고, 물을 차갑다고 하고, 소금을 짜다고 하고, 매실을 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천하의 사람이 다 아는 일이니, 어찌 나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는가?
군자가 논리를 세움에는 자신의 관점觀點을 믿고 남의 관점을 믿지 않으며, 심중心中의 생각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일을 이용하고 일에 이용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에 있는 일을 보면 저기에 있는 이치를 알고, 앞에 있는 일을 보면 뒤에 있는 이치를 알 수 있으니, 사람들은 이 일만 알 뿐이지만 군자는 유독 일 밖의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초기에 정鄭나라가 주周나라를 섬길 때 배반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의 논평 또한 각각 같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일에 따라 논리를 세웠을 뿐이고, 일 밖의 이치를 안 사람은 드물었다.
정백鄭伯이 주왕周王을 조현朝見할 때 환왕桓王이 예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논설은 왕王이 예우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데 불과하였으니, 이는 좌씨左氏가 이미 말한 바이다.
군자君子가 논하였다면 “왕실의 기강이 이미 실추되었으니, 주왕周王이 오만하면 진실로 화를 부르고, 몸을 낮추어도 모욕을 받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왕夷王이
당堂을 내려가
제후諸侯를
접견接見하여 예를 행한 것이 비록
겸비謙卑하였으나
주周나라는 더욱 쇠약해졌고
注+《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보인다.,
양왕襄王이
진晉 문공文公의 부름을 받아들여 예를 행한 것이 비록 겸비하였으나
진晉나라는 더욱 참람하였으니
注+희공僖公 28년에 보인다.,
이로써 환왕桓王의 잘못이 정백鄭伯을 예우하지 않은 데 있지 않고 왕실의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한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일 밖의 이치로 좌씨左氏가 말하지 않은 바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논설은 괵공虢公에게 정권을 주려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데 불과했으니, 이는 좌씨左氏가 이미 말한 바이다.
군자君子가 논하였다면 “왕자王者가 제후諸侯를 두려워하는 흔적이 있으면 제후는 교만해지고, 두려워하는 흔적이 없으면 제후는 복종한다.
평왕平王이
왕위王位에 있을 때 괵공을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등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정鄭나라와 인질을 교환하였으니
注+은공隱公 2년에 보인다.,
정백鄭伯은
주왕周王이 자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괵공을 등용한 초기에 정백이 왕실王室을 능멸하여 조금도 기탄忌憚하지 않고 주나라의 보리와 벼를 유린하였고, 환왕桓王이 왕위에 있을 때 괵공을 등용하고자 하여 즉시 등용하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니, 정백은 주왕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괵공을 등용한 뒤에 정백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조회하고 정토征討하는 일을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주나라와 정나라가 서로 미워한 것은 괵공을 등용한 데 있지 않고 정나라를 두려워한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일 밖의 이치로 좌씨가 말하지 않은 바이다.
환왕桓王이 정백鄭伯에게 소분생蘇忿生의 토지土地를 주었다가 이로 인해 정鄭나라를 잃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논설은 “토지를 주었다는 허명虛名만 있고 토지를 준 실상이 없다.”고 하는 데 불과하였으니, 이는 좌씨左氏가 이미 말한 바이다.
군자가 논하였다면 “소분생이 이미 배반하였으니 그 토지는 주周나라의 소유가 아닌데도 허명으로 주었으니, 진실로 정鄭나라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소분생은 왕실의 경사卿士이니 소분생의 토지는 왕실의 토지이다.
반란을 일으킨 신하가 왕의 토지를 강점强占하였는데도 왕은 스스로 회수하지 못하고 도리어 타인의 힘을 빌려 회수하려 하였으니, 어찌 정나라에게 경시輕視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정나라가 주周나라를 배반한 것이 전적으로 주나라를 원망하는 데 있지 않고 주나라를 경시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일 밖의 이치로 좌씨가 말하지 않은 바이다.
환왕桓王이 정백鄭伯의 정권을 빼앗고 제후를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토벌하였다가 도리어 패배를 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논설은 “정백의 정권을 빼앗은 것이 부당하였다.”라고 하는 데 불과했으니, 이는 좌씨左氏가 이미 말한 바이다.
군자가 논하였다면 “정백의 정권은 당연히 빼앗아야 할 바였으나, 단지 환왕이 정당한 명분으로 빼앗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정백이 멋대로 태산泰山의 제사를 폐지하였을 때에 제사를 폐지한 것을 죄목罪目으로 삼아 토벌하였다면 그 명분名分이 어찌 바르지 않았겠으며, 정백鄭伯이 팽지祊地에 옥벽玉璧을 얹어 허전許田과 바꾸었을 때에 땅을 마음대로 바꾼 것을 죄목으로 삼아 토벌하였다면 그 명분이 어찌 바르지 않았겠는가?
가령 이때에 토벌하였다면 그 명분이 바르고 도의道義에 부합하여 정나라는 멸망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환왕은 이때에 토벌하지 못하고 몇 해를 끌다가 까닭 없이 그 정권을 빼앗고 그 나라를 토벌하였으니, 정나라가 복종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이로써 환왕이 실패失敗에 이른 것은 정백의 정권을 빼앗은 데 있지 않고 제때에 빼앗지 않은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일 밖의 이치로 좌씨가 말하지 않은 바이다.
정백鄭伯이 환왕桓王의 군대를 패배시킨 뒤에 군대를 거두어 추격을 멈추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논설은 “정백이 구차하게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구제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한 데 불과하였으니, 이는 좌씨左氏가 이미 말한 바이다.
군자가 논하였다면 “정백이 승전勝戰하기 전에는 축담祝聃에게 왕王을 쏘게 하였으니 그 일(행위)이 매우 패란悖亂하였고, 승전한 뒤에는 채족祭足을 보내어 왕王을 위로하게 하였으니 그 언사言辭가 매우 공손하였다.
그가 승전하기 전에 패란했던 것은 진정眞情에서 나온 것으로 아마 한때의 승리를 취하고자해서였을 것이고, 그가 승전한 뒤에 공손했던 것은 가식假飾에서 나온 것으로 아마 천하의 질책을 피하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비록 두예杜預도 ‘정백의 뜻이 화란을 면하는 데 있었다.’고 믿고서 그 간계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정백이 당시 사람들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간사姦詐한 행위가 오히려 천여 년 뒤의 두예까지 능히 속인 것이니, 그 마음씨가 참으로 음험하다 하겠다.
도적이 도적으로 자처하는 것은 그 정상이 오히려 용서할 만하지만, 도적이 군자君子로 자처하는 것은 그 정상이 더욱 질책할 만하니, 이로써 정백을 논하는 자들은 ‘구차하게 화란을 면하고자 하였다.’는 정백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되고, 그가 ‘구차하게 화란을 면하고자 하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미워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는 일 밖의 이치로 좌씨가 말하지 않은 바이다.
대체로 논사문論事文의 체제는 서사문敍事文의 체제와 같지 않으니, 서사문은 사실을 기재하고, 논사문은 사리事理를 추구推究해 밝힌다.
저 전적典籍에 실린 기록에 이미 그 사실을 서술하였는데, 논사자論事者가 또 뒤따라 그 사실만을 서술하고 일 밖의 이치를 조금도 추구해 밝히지 않는다면, 이는 서사문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른바 ‘논사문’이 아니다.
더구나 전적에 이미 〈그 일을〉 서술하였으니, 내가 다시 쓸데없는 말로 서술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렇다면 비록 나의 논문을 없애더라도 그 일에 어찌 손익損益이 되겠는가?
나의 논문은 도리어 저 일로 인하여 성립되지만, 저 사리事理는 나의 논문論文으로 인하여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논사論事를 잘하는 사람은 논리論理를 주主로 삼고 사실事實을 종從으로 삼으며, 논사論事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事實을 주主로 삼고 논리를 종從으로 삼는다.
논사論事를 잘하는 사람은 일을 논문論文에 이용하고, 논사論事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논문을 일을 서술하는 데 이용한다.
만약 논문을 일을 서술하는 데 이용한다면 이런 논문은 도리어 일에 해가 되니, 무엇 때문에 붓을 잡고 논문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