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 僖三十三年
이라 初
에 하야 敬
하야 相待如賓
하고 與之歸
하야 言諸文公曰
敬
은 德之聚也
니 能敬必有德
이니이다 德以治民
이니 君請用之
하소서 臣聞之
하니 하고 는 라하니이다
反自箕
하야 하고 以再命命先茅之縣賞胥臣曰
라하고 하고 하니라
人之觀은 隨所遇而變하나니 過朝廷則觀政하고 過障戍則觀備하며 過營壘則觀兵하고 過廛市則觀貨하니 所觀未嘗不隨所遇也라
惟因所遇而觀
이라 故將求士者
는 必之庠焉․序焉․校焉․塾焉
이라 捨庠序校塾而適野
면 則所見畎畝而已矣
요 稼穡而已矣
요 農夫而已矣
니 於此而求士
는 是猶求魚於山
이요 獸於海
니 果何從而得之哉
리오
彼臼季出使而得冀缺於耕饁之間하니 其亦異於人之觀矣로다
臼季는 文公之近臣也니 居則華屋이요 出則雕軒이라 方其奉君命而使에 佩玉長裾가 光麗溢目하고 麾幢旌節이 貴震一時라
使他人居之면 則意必滿하고 氣必揚이라 下視農夫霑體塗足之勞하야 將顰蹙嘔噦而不肯觀矣리라 況東阡西陌이 不知其幾畝也며 前耘後耕이 不知其幾人也며 婦饁子餉이 不知其幾家也라
棼棼闐闐하야 往來如織하니 何以辨其孰肅․孰慢․孰莊․孰肆․孰敬․孰怠耶아
臼季於道路駐足之頃에 驟拔冀缺於千鎛萬笠之間하야 擧之於君하야 列之於卿大夫之間하니라
迄爲名臣히 不負所擧하니라 吾不知臼季且何術以觀之也라
盖嘗聞之
컨대 昔之在公卿之位者
는 未嘗不以求士爲首務
라 之所思者
도 士也
요 暮之所思者
도 士也
며 在朝․退朝․出疆․入疆
에 未嘗須臾忘士
라하니라
思之旣深
이라 故雖田野之間
과 莽蒼之外
의 寸長片善
이라도 未有不投吾之意而動吾之目者
면 非數數然求見之也
라
鑑은 以照物爲職하니 吾明旣徹이면 則物自入其照하고 公卿은 以求士爲職하니 吾誠旣立이면 則士自入其求라
如使本無求士之誠이면 則雖左顧右盼하며 見一人而問之하고 又見一人而質之하야 體煩目眩하고 精耗神竭이라도 而所謂眞賢實能者未必不失之交臂之間矣리라
觀茅容之避雨者
에 未有知容之賢者也
로되 而郭泰獨知之者
는 非泰之觀
이 異於衆人
이라 泰求士之心
이 異於衆人也
注+觀茅容之避雨者……異於衆人也:後漢茅容 耕於野時 與等輩避雨樹下 衆皆夷踞相對 容獨危坐愈恭 林宗行見而奇其異 遂與共言 因勸令學 卒以成德ㄹ새니라
過冀缺之耕饁者에 未有知缺之敬者也로되 而臼季獨知之者는 非季之見이 異於衆人이라 季求士之心이 異於衆人也ㄹ새니라
苟所觀者以目而不以心이면 則見避雨而偶不箕踞者콘 遽謂之茅容이라하고 見耕饁而偶不嫚侮者콘 遽謂之冀缺이리니 可邪아
吾嘗攷臼季冀缺之事하고 而知古今風俗之變이 有大不同者焉하노라 古者公卿有不遇之歎하고 而布衣無不遇之歎이러니 後世布衣有不遇之歎이나 而公卿無不遇之歎이라
古者公卿以求士爲己責이라 故常以不遇賢者爲憂하고 至於布衣하야는 外無責하고 內無憂하니 囂囂然何往而不遇哉리오
故臼季惟恐不遇冀缺
이나 而冀缺
恐不遇臼季也
라 後世之公卿以得位爲遇
하고 後世之布衣以無位爲不遇
라하야 下求之愈急
하고 上應之愈緩
하야 而風俗日以薄矣
니 非自拔於汚俗之中
이면 殆未足與論遇不遇之眞在也
라
傳
희공僖公 33년,
당초當初에
구계臼季가
사신使臣이 되어
기冀를 지날 때에, 밭에서 김을 매는
기결冀缺(
극결郤缺)에게 그 아내가 밥을 내어다가 먹이는데, 공경하여 서로 손님 대하듯이 하는 것을 보고서, 그를 데리고 돌아와
진晉 문공文公에게 말하였다.
부부가 서로를 손님 대하듯이 공경하다[夫婦如賓]
“공경은 덕德이 모여 〈겉으로 드러난 것이니,〉 능히 공경한다면 반드시 덕德이 있을 것입니다. 덕德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군君께서는 그를 등용하소서. 신이 듣건대 ‘문을 나서면 손님을 대하듯이 하고 일을 처리함에는 제사를 받들 듯이 하는 것이 인仁의 법칙法則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공文公이 말하였다. “그 아비에게 죄罪가 있는데 그를 등용할 수 있는가?” 구계臼季가 대답하였다. “순舜이 죄인罪人을 처벌할 때에 곤鯀을 추방하였으나 인재人材를 천거할 때는 그 아들 우禹를 기용하였으며, 관경중管敬仲(관중管仲)은 제齊 환공桓公의 적賊이었는데도 실로 환공桓公을 도와서 패업覇業을 이루었습니다.
〈강고康誥〉에 ‘아비가 자애慈愛하지 않고, 자식이 공경하지 않으며, 형이 우애友愛하지 않고, 아우가 공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벌罰이〉 서로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봉葑을 캐고 비菲를 캐는 사람은 뿌리가 나쁘다 하여 좋은 순까지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군君께서는 그의 장점만을 취하소서.” 문공文公은 그를 하군대부下軍大夫로 삼았다.
기箕에서 돌아와서 진晉 양공襄公은 삼명三命으로 선저거先且居를 임명하여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재명再命으로 〈서신胥臣(구계臼季)을〉 선모先茅의 현縣으로 임명하고서 서신胥臣에게 상으로 주며 말하기를 “극결郤缺을 천거한 것이 그대의 공이다.”라 하고, 일명一命으로 극결郤缺을 임명하여 경卿(하경下卿)으로 삼고서 다시 기冀를 주었다.
사람이 〈사물을〉 관찰함에는 만나는 환경에 따라 〈관찰하는 대상이〉 바뀐다. 조정朝廷을 지날 때는 정치의 득실得失을 관찰하게 되고, 국경수비지역을 지날 때는 방비의 허실虛實을 관찰하게 되며, 군영軍營을 지날 때는 군대의 기강紀綱을 관찰하게 되고, 시전市廛을 지날 때에는 화물의 다소를 관찰하게 되니, 관찰하는 대상이 만나는 환경에 따라 바뀌지 않을 적이 없다.
만나는 환경에 따라 다르게 관찰하기 때문에 인재[사士]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상庠이나 서序나 교校나 숙塾 등 학교學校로 가서 찾는다. 상庠․서序․교校․숙塾을 버리고 교야郊野로 가면 보이는 것은 논밭뿐이고 농작물뿐이고 농부뿐이다. 이곳에서 인재를 찾는 것은 산에 가서 물고기를 찾고 바다에 가서 짐승을 찾는 것과 같으니 과연 어디에서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저 구계臼季는 출사出使하는 길에 밭을 가는 〈기결冀缺에게 그 아내가〉 점심밥을 먹이는 것을 보고서 기결冀缺을 발탁하였으니, 그 또한 다른 사람들이 관찰하는 것과 달랐다.
구계臼季는 진晉 문공文公의 친근한 신하이니, 주거하는 곳은 화려한 집이고 출입할 때는 화려한 수레를 탄다. 그가 임금의 명을 받들고 출사出使할 때에는 긴 옷자락에 찬 패옥佩玉의 화려한 광채가 눈에 부시고, 의장儀仗과 정절旌節이 뒤따르니 존귀한 지위가 한때에 진동한다.
가령 다른 사람이 이런 지위에 있게 된다면 반드시 마음에 만족하여 의기양양할 것이다. 그래서 농부가 몸이 땀에 젖고 발이 흙투성이가 되는 수고를 얕잡아보고 장차 얼굴을 찡그리고 구역질을 하며 보려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동서東西로 난 소로小路 사이의 전지田地가 몇 묘畝인지 알 수 없고, 전후로 김매고 밭가는 사람이 몇인지 알 수 없으며, 아내와 아들이 점심밥을 나르는 집이 몇 집인지 알 수 없다.
이 거리를 메운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니, 그중에 누가 엄숙하고 누가 거만하며, 누가 장중하고 누가 방자하며, 누가 경건하고 누가 나태한지를 어찌 변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구계臼季는 길을 가다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에 많은 농부들 사이에서 단번에 기결冀缺을 알아보고서 발탁해 임금께 천거하여 경대부卿大夫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기결은〉 국가의 명신名臣이 되는 데 이르도록 자기를 천거한 구계臼季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구계臼季가 무슨 방법으로 〈기결冀缺을〉 관찰하였는지 모르겠다.
일찍이 듣건대, 이전에 공경公卿의 지위에 있던 이들은 인재[사士] 구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생각하는 것도 인재이고, 저녁에 생각하는 것도 인재였으며, 조정에 있거나 조정에서 물러나거나, 외국으로 출사出使하거나 국내로 돌아올 적에 어느 때이고 잠시도 인재를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인재 구하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미 깊기 때문에 비록 전야田野 사이와 교야郊野 밖의 작은 장점과 미세한 선행善行이라도 나의 마음에 맞고 나의 눈을 끄는 점이 있으면 나는 일일이 찾아가서 만나보기를 구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의 마음이 인재를 구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인재가 저절로 내 마음에 나타난다.
거울은 사물을 비추는 것이 본직本職이니 나(거울)의 밝음이 이미 청철淸徹하다면 사물이 저절로 비추는 속으로 들어오고, 공경公卿은 인재 구하는 것이 본직이니 나(공경)의 성의가 이미 확립되었으면 인재가 스스로 내가 구하는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만약 본래 인재를 구하는 성의가 없다면 비록 좌우를 돌아보며 한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또 한 사람을 만나면 질문하여, 몸이 번거롭고 눈이 어지러우며 정신이 소모되고 힘이 고갈되도록 〈찾아도〉 이른바 참으로 현능賢能한 자를 팔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지나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모용茅容이 비를 피하는 것을 본 자 중에 모용이
현자賢者임을 알아본 자가 없었는데,
곽태郭泰만이 홀로 알아보았으니, 이는 곽태가 관찰한 것이 사람들과 달라서가 아니라 곽태가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注+後漢의 茅容이 들에서 밭을 갈 때 〈갑자기 비가 내려〉 同年輩들과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리를 뻗고서 서로 마주앉았지만, 모용은 홀로 단정히 앉아 더욱 공손하였다. 林宗(郭泰)이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서 그 남다름을 기특하게 여겨, 드디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서 학문을 하도록 권하였는데, 〈학문을 하여〉 마침내 德을 이루었다.
밭을 가는 〈기결冀缺에게 그 아내가〉 점심밥을 내어다가 먹이는 곳을 지날 때에 기결冀缺이 공경하는 것을 알아본 자가 없었는데 구계臼季만이 홀로 알아보았으니, 이는 구계臼季가 관찰한 것이 사람들과 달라서가 아니라 구계臼季가 인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만약 눈으로만 관찰하고 마음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비를 피하면서 우연히 다리를 뻗고 앉지 않은 사람을 보면 대뜸 그를 모용이라 할 것이고, 밭을 가는 〈남편에게 아내가〉 점심밥을 내어다가 먹이면서 우연히 서로 무시하지 않는 것을 보면 대뜸 그를 기결冀缺이라고 할 것이니, 어찌 옳을 일이겠는가?
내 일찍이 구계臼季과 기결冀缺의 일을 상고해보고서 고금古今 풍속風俗의 변천이 크게 같지 않음을 알았다. 옛날에는 공경公卿에게 불우不遇(인재를 만나지 못함)의 탄식이 있고 포의布衣에게 불우의 탄식이 없더니, 후세後世에는 포의布衣에게 불우의 탄식이 있고 공경公卿에게 불우의 탄식이 없다.
옛날에는 공경公卿들이 인재를 구하는 것을 자기들의 책무로 여겼기 때문에 항상 현자賢者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였지만, 포의布衣로 말하면 밖으로는 책무가 없고 안으로는 근심이 없었으니, 만족하여 욕심이 없는 채로 어디를 간들 불우하였겠는가?
그러므로 구계臼季는 오직 기결冀缺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나 기결冀缺은 구계臼季를 만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세의 공경公卿은 벼슬을 얻는 것을 ‘우遇’라 여기고 후세의 포의布衣는 벼슬이 없는 것을 ‘불우不遇’라 여겨서, 하위下位에 있는 자들은 구하기를 더욱 서두르고, 상위上位에 있는 자들은 반응하기를 더욱 늦추어 풍속이 날로 투박해지니, 만약 더러운 풍속 속에서 초탈한 사람이 아니면 아마도 우遇와 불우不遇의 진실한 도리를 더불어 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