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 僖二十三年
이라 晉重耳奔秦
하다 他日
에 公享之
할새 子犯曰
니 請使衰從
하소서
傳
[左傳]文三年
이라 公如晉
하야 及晉侯盟
하다 晉侯享公
할새 하니
曰
하니 敢不愼儀
릿가 君貺之以大禮
하니 何樂如之
잇가
傳
[左傳]文四年
이라 衛寗武子來聘
하다 公與之宴
에 하니 不辭
하고 又不答賦
하다
하야 而獻其功
이면 王於是乎賜之彤弓一
과 彤矢百
과 玈弓矢千
하야 이니이다
傳
[左傳]文七年이라 先蔑之使也에 荀林父止之曰 夫人太子猶在어늘 而外求君은 此必不行이니 子以疾辭가 若何오
不然
이면 하리라 어늘 何必子
오 同官爲寮
라 吾嘗同寮
하니 敢不盡心乎
아 弗聽
하다
이로되 又弗聽
하다 及亡
에 荀伯盡送其帑及器用財賄於秦曰 爲同寮故也
라하다
傳
[左傳]成九年
이라 伯姬歸于宋
하다 夏
에 하고 復命
하니 公享之
하다 하니
傳
[左傳]襄八年
이라 晉范宣子來聘
하야 하고 告將用師于鄭
하다
宣子曰
에 我先君文公獻功于衡雍
하고 受彤弓于襄王
하야 하니라
傳
[左傳]襄十四年
이라 諸侯之大夫從晉侯伐秦
하야 하고 使六卿帥諸侯之師以進
하다
어늘 叔向見叔孫穆子
한대 이어늘 叔向退而具舟
하다 魯人莒人先濟
하다
傳
[左傳]襄十六年
이라 晉平公
이 卽位
하야 與諸侯宴于溫
할새 使諸大夫舞曰
하라
傳
[左傳]襄十六年
이라 冬
에 穆叔如晉聘
하고 한대 晉人曰 以寡君之未
와 일새라
不然이면 不敢忘이리라 穆叔曰 以齊人之朝夕釋憾於敝邑之地라 是以大請이라
傳
[左傳]襄十九年
이라 季武子如晉拜師
하니 晉侯享之
하다 이러니 한대
季武子興
하야 再拜稽首曰 小國之仰大國也
가 如百穀之仰膏雨焉
하니 若常膏之
면 其天下輯睦
하리니 豈惟敝邑
이리오하고 하다
傳
[左傳]襄二十六年
이라 하니 士弱氏
하다 秋七月
에 하다
하니 國景子相齊侯
하야 하고 子展相鄭伯
하야 한대
國子使晏平仲私於叔向曰 晉君宣其明德於諸侯
하야 일새 所以爲盟主也
어늘
傳
[左傳]襄二十七年
이라 齊慶封來聘
하다 叔孫與食
에 不敬
이어늘 하다
傳
[左傳]襄二十七年
이라 할새 子展伯有子西子産子太叔
하다
한대 趙孟曰
라 한대 趙孟曰 善哉
라 여 吾有望矣
로다
한대 趙孟曰
이리오 若保是言也
면 欲辭福祿
인들 得乎
아
傳
卒享
에 文子告叔向曰 伯有將爲戮矣
리라 詩以言志
어늘 하니 其能久乎
아 이리라
印氏其次也
니 하니라 하고 하니 後亡
이 不亦可乎
아
傳
[左傳]襄二十七年
이라 하니 晉侯享之
하다 將出
에 한대
叔向曰 薳氏之有後於楚國也
가 宜哉
로다 하니 子蕩將知政矣
리라
傳
[左傳]襄二十八年
이라 叔孫穆子食慶封
에 하니 穆子不說
하야 한대 하다
傳
事畢
에 趙孟謂叔向曰
니 오 對曰 王弱
하고 令尹強
하니 ㄴ저 不終
하리라
趙孟曰 何故
오 對曰
는 니 不義而強
은 其斃必速
이라
傳
[左傳]昭元年
이라 夏四月
에 하니 鄭伯兼享之
하다
穆叔曰
하니 子其從之
하라 子皮曰
아 穆叔曰
니 又何不敢
이리오
하니 하고 私於子産曰
라한대 乃用一獻
하야 하다
하고 라하고 飮酒樂
하다 趙孟出曰 吾不復此矣
리라
傳
[左傳]昭二年
이라 春
에 하다 公享之
할새 하니 하다
旣享
에 宴于季氏
할새 有嘉樹焉
하니 한대 武子曰
하야 以無忘角弓
가하고
傳
[左傳]昭三年
이라 十月
에 鄭伯如楚
에 子産相
하다 하다
傳
[左傳]昭十六年
이라 晉韓起聘于鄭
하다 할새 宣子曰 二三君子請皆賦
하노라 起亦以知鄭志
로라
傳
[左傳]昭十七年이라 小邾穆公來朝하니 公與之燕하다
傳
러니 退而告人曰 今玆君與叔孫其皆死乎
ㄴ저 吾聞之
컨대 而
는 皆喪心也
라
注
[主意]謂詩出於人心之天機
니 非可以
訓詁而求
라 此人心之全經也
니 春秋君臣
은 因事賦詩
하고 斷章取義
라
以神遇而不以言求니 可謂善用詩者矣로다 此篇發明有理趣하니 盖深得詩中之意者인저
至理之所在
는 可以心遇
나 而不可以力求
注+至理之所在……而不可以力求:起語甚有理趣 一篇主意在此라 斷編遺簡
注+斷編遺簡:古人不全之書은 呻吟諷誦
注+呻吟諷誦:讀其書者이라도 越宿已有遺
注+越宿已有遺忘:或有經宿而忘之者 盖口雖誦其文 而心無得於味也이나
至於塗歌里詠
注+至於塗歌里詠:如今歌曲之類이 偶入吾耳
注+偶入吾耳:偶然聞之면 則雖終身而不忘
注+則雖終身而不忘:有終身記之不忘者 入心故也이라 天下之理
는 固眩於求而眞於遇也
注+天下之理 固眩於求而眞於遇也:句法佳 眩 惑也 此釋可以心遇而不可以力求之意 殘篇斷簡 以喩諸經 塗歌里詠 以喩詩也라
理有觸於吾心
注+理有觸於吾心:發明遇字之意이요 無意而相遭
며 無約而相會
注+無意而相遭 無約而相會:理與心 自然相遇 遭與會 皆體遇字라 油然自生
하야 雖吾
라도 不能以語人
注+油然自生……不能以語人:自得故也이니 況可以力求乎
注+況可以力求乎:應起語아
一渉於求
면 雖有見
이라도 非其正矣
注+一渉於求……非其正矣:求則所得非眞라 日用飮食之間
에 無非至理
注+日用飮食之間 無非至理:終身由之而不知之나
惟吾迫而求之
注+惟吾迫而求之:發明不可力求之意면 則隨得而隨失
注+則隨得而隨失:非眞有者이라 硏精極思
注+硏精極思:求之愈力하야 日入於鑿
注+日入於鑿:反穿鑿以害道이면
曾不知是理交發於吾前
하야 而吾自不遇
注+曾不知是理交發於吾前 而吾自不遇:心不與理相遇하니 是非不用力之罪也
라 乃用力之罪也
注+是非不用力之罪也 乃用力之罪也:以力求 故不遇라
天下之學者
는 皆知不用力之害
注+天下之學者 皆知不用力之害:如나 而不知用力之害
注+而不知用力之害:爲其求也니
苟知力之不足恃
하야 盡黜其力
注+苟知力之不足恃 盡黜其力:設使有能如此하야 而至於無所用力之地
注+而至於無所用力之地:此之妙면 則幾矣
注+盡黜其力……則幾矣:則庶幾眞有所得也 然能如此者 乃學問之極功 聖神之能事 非特庶幾而已 幾字下得未穩 ○愚按 此冐頭雖說得玄妙 却不能無病 聖人盖不以用力爲非也 盖聖之力 夷恵伊尹可以能 而智之巧 非孔子之集大成 不可能也 盡黜其力 而至於無所用力之地 此語亦過當리라
二帝三王之書
注+二帝三王之書:二帝 謂虞書 三王 謂夏商周之書와 犧文孔子之易
注+犧文孔子之易:伏羲始畫八卦 因而重之 爲六十四卦 文王作卦下彖辭 孔子作彖傳二卷 象辭二卷 係辭二卷 幷文言說卦序卦雜卦 是爲十翼과 禮之儀章
注+禮之儀章:周公作儀禮及禮記 所謂經禮三百 曲禮三千是也과 樂之節奏
注+樂之節奏:樂書 今不復傳 如樂記之類 亦其緖餘也와 春秋之褒貶
注+春秋之褒貶:孔子 因魯史作春秋 加之筆削은 皆所以形天下之理者也
注+皆所以形天下之理者也:形字下得好 理本無形 非言可盡 特假諸經 以形容之라
天下之人
은 不以理視經
하고 而以經視經
注+天下之人……而以經視經:此下譏義例訓詁之破碎聖經하니 刳剔離析
하고 彫
疏鑿之變多
하야 而天下無全經矣
注+刳剔離析……而天下無全經矣:刳剔離析 義例之弊也 彫疏鑿 訓詁之弊也라
聖人有憂焉
注+聖人有憂焉:憂天下無全經하야 汎觀天壤之間
하니 鳥嗚於春
하고 蟲鳴於
注+汎觀天壤之間……蟲鳴於秋:韓文云 以鳥鳴春 以雷鳴夏 以虫鳴秋 以風鳴冬에 而匹夫匹婦懽愉勞佚
과 悲怒舒慘
注+而匹夫匹婦懽愉勞佚 悲怒舒慘:此人情之變이
動於天機
注+動於天機:猶虫鳥之自鳴 謂 皆天機之動不能已者也하야 不能已
하야 而自泄其鳴於詩謡歌詠之間
注+不能已 而自泄其鳴於詩謡歌詠之間:此詩之所以作이라 於是釋然喜曰
注+於是釋然喜曰:喜字 與前憂字 相呼喚 天理之未鑿者
가 尙有此存
注+天理之未鑿者 尙有此存:出於自然 故不也이로다
是固匹夫匹婦胷中之全經也
注+是固匹夫匹婦胷中之全經也:與前天下無全經相應로되 遽取而列諸書易禮樂春秋之間
하야 幷數而謂之六經
注+遽取而列諸書易禮樂春秋之間 幷數而謂之六經:前說五經 今增詩而爲六이라
羈臣賤妾之辭
注+羈臣賤妾之辭:羈 旅也 如式微是羈臣之辭 小星是賤妾之辭가 與堯舜禹湯文武之格言大訓
注+與堯舜禹湯文武之格言大訓:五經 不止此六聖人之言 姑述其大槩耳竝列
하야 而無所輕重
注+竝列 而無所輕重:詩於是與五經竝傳이라
聖人之意
注+聖人之意:取詩爲經之意는 盖將擧匹夫匹婦胷中之全經
하야 以救天下破裂不全之經
注+盖將擧匹夫匹婦胷中之全經 以救天下破裂不全之經:此句關鎻 前兩段意 極是緊蜜 五經爲義例訓詁之所破碎 故曰 破裂不全하야
使學者知所謂詩者
는 本發乎閭巷草野之間
하야 衝口而發
하고 擧筆而成
하니 非可格以義例
어나 而局以訓詁也
注+使學者知所謂詩者……而局以訓詁也:義例 謂條類 訓詁 謂注釋 以其出於人心之自然 故不假如此라
義例訓詁之學
은 而盡廢
라 是學旣廢
하니 則無硏索擾雜之私以累其意
라
一吟一諷
注+一吟一諷:可以吟詠 可以諷誦에 聲轉機回
注+聲轉機回:因彼詩可回天機하야 虛徐容與
注+虛徐容與:辭不迫切하야 至理自遇
注+至理自遇:不待力求 而心與理遇하니 片言有味
하야 而五經皆冰釋矣
注+片言有味 而五經皆冰釋矣:經雖異 而至理則同 果於詩中得其眞味 則五經之理 皆渙然如春冰之消釋라
是聖人欲以詩之平易而救五經之支離也
注+是聖人欲以詩之平易(이)而救五經之支離也:平易 謂胷中全經 支離 謂破裂不全니 孰知後世反以五經之支離而變詩之平易乎
注+孰知後世反以五經之支離而變詩之平易乎:此句包結尾意 謂後世又以義例訓詁而破碎之아
盖嘗觀春秋之時
하니 列國朝聘
에 皆賦詩以相命
注+盖嘗觀春秋之時……皆賦詩以相命:入本題事이라 詩因於事
注+詩因於事:偶然因事賦詩요 不遷事而就詩
注+不遷事而就詩:不遷今事以就古人之詩며 事寓於詩
注+事寓於詩:以事寓意於詩요 不遷詩而就事
注+不遷詩而就事:不遷古詩以就今日之事라
意傳於肯綮毫釐之中
注+意傳於肯綮毫釐之中:荘子養生主篇 庖丁爲文恵君解牛曰 始臣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甞見全牛也 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窽 因其固然 技經肯䋜之未甞 而況大軱乎하야 跡異於牝牡
黃之外
注+跡異於牝牡(元)[驪]黃之外:列子說符篇 有九方臯者 請見之 穆公使求馬 三月而反報曰 得之矣 穆公曰 何馬也 對曰 牝而黃 使人往取之 牡而驪 穆公不說 召伯樂曰 子所使求馬者 色物牝牡 尙不能知 又何馬之能知也 伯樂曰 是乃所以千萬臣而無數者也 若臯之所觀 天機也 馬至果天下馬也라 斷章取義
注+斷章取義:春秋之賦詩者 斷截章句 取其意義 以寓一時之興趣 故無遷就之弊 猶庖丁之解牛 九方臯之相馬 得天機之妙也하니 可以神遇
요 而不可以言求
注+可以神遇 而不可以言求:應起語主意라
區區陋儒之義例訓詁
는 至是皆敗
注+區區陋儒之義例訓詁 至是皆敗:深得詩之旨趣 故義例訓詁 可以一掃而除矣하니 春秋之時
에 善用詩盖如此
注+春秋之時 善用詩盖如此:深取之라
當是時하야 先王之經浸墜于地하고 易降於卜筮하며 禮墜於僭하고 樂流於淫하며 史病於舛이라
雖多聞諸侯如左史倚相者
라도 亦不過以誦說
爲能
이나 獨賦詩尙未入於陋儒之學
이라
是先王之敎
에 未經踐躪巋然獨全者
는 惟風雅頌而止耳
라 此孔子所以旣論之六經
하고 라
火于秦
注+火于秦:秦始皇焚滅經術 ○此下言後世反以五經之支離 而變詩之平易하고 雜於漢
注+雜於漢:漢儒雜以專門章句之學하며 別之以齊魯
注+別之以齊魯:仲尼旣沒 詩分爲四 申公爲魯詩 轅固爲齊詩 燕韓生爲韓詩 毛公爲毛詩 今行於世하고 汨之以讖緯
注+汨之以讖緯:漢五經 皆有緯書雜言圖讖之事하며 亂之以五際
注+亂之以五際: 引詩內傳曰 卯酉午也 陰陽際會之歲也하고
狹之以專門
注+狹之以專門:專門之學 傳者各守其師之說하야 銖銖而析之
注+銖銖而析之:黃鍾之龠 容千二百黍 重十二銖 二十四銖爲兩하고 寸寸而較之
注+寸寸而較之:黃鍾之長九寸 十分爲寸 ○此一句言支離之弊하니 豈復有詩
注+豈復有詩:詩分 胷中之全經 復爲義例訓詁之所支離 雖謂之無詩可也아 噫
라 安得春秋賦詩之說語之
注+噫 安得春秋賦詩之說語之:或可以救支離之弊리오
傳
僖公 23년, 晉나라 重耳가 秦으로 도망하였다. 後日에 秦 穆公이 重耳를 酒宴에 초대하였다. 子犯이 말하기를 “나는 말솜씨가 趙衰만 못하니 趙衰를 데리고 가소서.”라고 하였다.
〈宴會 중에〉 公子가 〈河水〉를 읊으니 穆公이 〈六月〉을 읊었다. 그러자 趙衰가 말하였다. “重耳는 拜賜하소서.”
公子가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고서 머리를 조아리니 穆公이 한 계단을 내려가 사양하였다. 趙衰가 말하였다. “秦君께서 天子를 輔佐하는 일을 들어[稱] 重耳에게 命하시니 重耳가 감히 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晉侯가 연회를 열어 魯 文公을 대접할 때, 晉侯와 文公이 시를 읊다
傳
文公 3년, 文公이 晉나라에 가서 晉侯와 結盟하였다. 晉侯가 연회를 열어 文公을 대접할 때 〈菁菁者莪〉를 읊으니,
莊叔이 文公에게 뜰 아래로 내려가서 拜謝하게 하며 말하였다. “小國이 大國의 명을 받았으니 감히 禮儀를 삼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晉君께서 大禮로 접대해주시니 이런 즐거움이 다시 어디 있습니까?
小國의 즐거움은 大國의 은혜입니다.” 晉侯가 뜰에 내려가 사양하고서 함께 올라와서 拜禮를 이루었다. 文公이 〈嘉樂〉을 읊었다.
傳
文公 4년, 衛나라 寗武子가 와서 聘問하였다. 文公이 宴會를 열어 그를 접대할 때 〈湛露〉와 〈彤弓〉을 읊으니, 寗武子는 謝禮도 하지 않고, 또 答賦하지도 않았다.
文公이 行人을 보내어 사사로이 그 이유를 묻게 하니 그가 대답하였다. “신은 樂工들이 연습으로 그 曲을 연주하는 줄 알았습니다. 옛날에 諸侯가 正月에 王께 朝見하면 王이 연회를 열어 함께 즐기는데,
이때에 〈湛露〉를 읊어 天子는 太陽에 해당하고 諸侯는 命에 복종한다는 뜻을 표현합니다.
諸侯가 王이 痛恨해하는 상대를 대적하여 功을 바치면 왕이 이에 彤弓 하나, 彤矢 1백, 검은 弓矢 1천 개를 下賜하여 功을 보답하는 宴會임을 밝힙니다.
지금 陪臣은 옛 우호를 계승하기 위해 왔는데 君께서 이러한 宴會를 열어주시니 어찌 감히 大禮를 犯하여 스스로 罪를 취하겠습니까?”
傳
文公 7년, 先蔑이 〈公子 雍을 맞이하는〉 使臣으로 〈秦나라에〉 갈 적에 荀林父가 말리며 말하기를 “夫人과 太子가 그대로 있는데 밖에서 임금을 구해 오는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으니[不行] 그대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禍가 미칠 것이다. 다른 사람을 卿의 代理로 보내도 되는데 무엇 때문에 꼭 그대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 同官을 僚라 하는데 우리는 同僚였으니 감히 마음을 다해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荀林父가 또 그를 위해 〈板〉 詩의 제3章을 읊었으나 또 듣지 않았다. 그가 亡命하자 荀伯(荀林父)은 그의 妻子와 器用‧財物을 모두 秦나라에 보내주며 말하기를 “同僚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鄭伯이 宴會를 열어 魯 文公을 접대할 때, 子家와 季文子가 시를 읊다
傳
文公 13년, 鄭伯이 棐에서 文公과 회합하여 또 晉나라와의 화평을 주선해주기를 청하니 文公은 두 나라 모두 晉나라와 화평을 맺도록 도와주었다.
鄭伯이 棐에서 宴會를 열어 文公을 접대할 때 子家가 〈鴻鴈〉을 읊으니, 季文子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도 이런 근심에서 면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하고서 季文子는 〈四月〉을 읊었다.
子家가 〈載馳〉의 4章을 읊으니 文子가 〈采薇〉의 4章을 읊었다. 鄭伯이 拜謝하니 文公이 答拜하였다.
魯 成公이 宴會를 열어 季文子를 대접할 때, 季文子와 穆姜이 시를 읊다
傳
成公 9년, 伯姬가 宋나라로 시집갔다. 여름에 季文子가 宋나라에 가서 致女하고 돌아와 復命하니, 成公이 宴會를 열어 그를 대접하였다. 〈宴會 자리에서〉 季文子가 〈韓奕〉의 제5章을 읊으니,
穆姜이 방에서 나와 再拜하며 말하기를 “大夫는 욕보셨소. 先君을 잊지 않는 〈그 忠誠이〉 嗣君에 미치고, 이 未亡人에게까지 뻗어 미쳤으니, 先君께서도 오히려 大夫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을 것이오.
감히 大夫께서 거듭 수고한 것에 拜謝하오.”라고 하고서, 또 〈綠衣〉의 卒章을 읊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傳
襄公 8년, 晉나라 范宣子가 와서 聘問하고서 또 지난번 魯 襄公이 晉나라에 朝見한 것에 대해 拜謝하고, 이어 鄭나라에 用兵(토벌)하려 한다는 것을 告하였다.
襄公이 燕享할 때 范宣子가 〈摽有梅〉를 읊거늘 季武子가 말하기를 “누가 감히 命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지금 草木에 비유하면 寡君은 晉君에 있어 晉君의 臭味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命을 받들 것이니 어찌 시기의 遲速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季武子가 〈角弓〉을 읊었다. 賓(范宣子)이 물러가려 할 때 季武子가 〈彤弓〉을 읊으니,
范宣子가 말하기를 “城濮의 戰爭에서 〈승리하고서〉 우리 先君 文公께서 衡雍으로 가서 戰功(戰利品)을 바치고 周 襄王께 彤弓을 받아 子孫에게 전할 寶藏(家寶)으로 삼았습니다.
나 范匄는 先君 守官의 後孫이니 어찌 감히 그대의 命을 받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君子는 宣子가 禮를 알았다고 하였다.
傳
襄公 14년, 諸侯의 大夫가 晉侯를 따라 秦나라를 토벌하였다. 晉侯는 國境에서 기다리고 六卿에게 諸侯軍을 거느리고 전진하게 하였다.
涇水에 이르러 諸侯軍이 강을 건너려 하지 않자, 叔向이 叔孫穆子를 찾아가 만나니 穆子가 〈匏有苦葉〉을 읊었다. 그러자 叔向은 물러나와 배[舟]를 준비하였다. 魯人과 莒人이 먼저 강을 건넜다.
傳
襄公 16년, 晉 平公이 즉위하여 諸侯들과 溫에서 宴會할 때 大夫들에게 춤을 추게 하며 말하기를 “詩를 노래하되 반드시 춤의 동작과 調和되게 부르라.”고 하였다.
齊나라 高厚의 詩가 맞지 않으니, 荀偃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諸侯 중에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大夫들로 하여금 高厚와 結盟하게 하자, 高厚가 도망해 齊나라로 돌아갔다.
傳
襄公 16년, 겨울에 穆叔(叔孫豹)이 晉나라에 가서 聘問하고, 또 齊나라가 魯나라를 侵攻할 것을 말하자, 晉人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아직 禘祭를 지내지 못하셨고, 백성들이 아직 휴식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出兵해 貴國을 도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貴國의 患亂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穆叔이 말하였다. “齊人이 아침저녁으로 우리나라 땅을 侵攻하여 怨恨을 풀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정중히 청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의 위급한 상황은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으므로 백성들이 목을 늘여 서쪽을 바라보며 ‘晉나라가 거의 우리를 救援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만약 執事가 한가할 때에 미쳐 〈우리나라를 구원한다면〉 아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中行獻子를 만나 〈圻父〉를 읊자, 獻子가 말하기를 “나는 내 죄를 아니, 감히 執事를 따라 함께 社稷(魯나라)의 어려움을 救恤하지 않아 魯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范宣子를 만나 〈鴻鴈〉의 卒章을 읊으니, 范宣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으니 어찌 감히 魯나라를 안정시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晉侯가 宴會를 열어 접대할 때 季武子가 시를 읊다
傳
襄公 19년, 季武子가 晉나라에 가서 〈魯나라를 위해〉 出兵해준 것에 대해 拜謝하니, 晉侯가 宴會를 열어 접대하였다. 이때 范宣子가 國政을 담당하였는데 〈黍苗〉를 읊자,
季武子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小國이 大國에게 기대하는 것이 百穀이 단비를 기대하는 것과 같으니, 만약 항상 단비와 같은 恩澤을 내려주신다면 天下가 和睦할 것이니 어찌 우리나라뿐이겠습니까?”라고 하고서 〈六月〉을 읊었다.
傳
襄公 26년, 衛侯가 晉나라에 가니, 晉人이 그를 잡아 士弱氏의 집에 가두었다. 가을 7월에 齊侯와 鄭伯이 衛侯를 돕기 위해 晉나라에 갔다.
晉侯가 宴會를 열어 두 임금을 함께 접대할 때 晉侯가 〈嘉樂〉을 읊으니, 齊侯의 相禮 國景子가 〈蓼蕭〉를 읊고, 鄭伯의 相禮 子展이 〈緇衣〉를 읊었다.
그러자 叔向이 晉侯에게 命[告]하여 두 임금에게 拜謝하게 하고서 말하기를 “寡君은 감히 齊君께서 우리 先君의 宗廟를 편안하게 하신 것에 대해 拜謝하고, 鄭君께서 두마음을 품지 않는 것에 대해 拜謝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國子가 晏平仲을 보내어 叔向에게 사사로이 “晉君께서 밝은 德行을 諸侯에게 宣揚하여 患難을 救恤하고 결점을 보완하며 잘못을 바로잡고 煩亂을 다스려주셨기 때문에 盟主가 되신 것인데,
지금 臣下를 위해 임금을 잡았으니 어째서입니까?”라고 말하게 하였다. 叔向이 이 말을 趙文子에게 고하자, 趙文子가 이를 晉侯에게 고하니, 晉侯는 衛侯의 罪狀을 말해주면서 叔向을 시켜 두 임금에게 고하게 하였다.
그러자 國子가 〈轡之柔矣〉를 읊고 子展이 〈將仲子兮〉를 읊으니, 晉侯는 衛侯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叔向이 말하기를 “鄭 穆公의 후손 일곱 家門 중에서 罕氏가 최후에 망할 것이다. 子展은 몸가짐은 儉素하고 마음 씀이 專一하다.”라고 하였다.
慶封은 〈叔孫이〉 詩를 읊은 〈이유를 알지 못하다〉
傳
襄公 27년, 齊나라 慶封이 와서 聘問하였다. 叔孫이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慶封이 恭敬하지 않자, 叔孫이 〈相鼠〉를 읊었는데도 慶封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傳
襄公 27년, 鄭伯이 垂隴에서 宴會를 열어 趙孟(武)을 접대할 때 子展‧伯有‧子西‧子産‧子太叔과 두 子石이 鄭伯을 侍從하였다.
趙孟이 말하기를 “일곱 분이 임금님을 시종하여 나를 榮光[寵]스럽게 하니 모두 詩를 읊어 임금님이 내리신 이 연회를 잘 마치기 바랍니다. 나 또한 詩를 듣고서 일곱 분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展이 〈草蟲〉을 읊자, 趙孟이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그대는 참으로〉 백성의 主人이 될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칭찬을〉 받을 만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伯有가 〈鶉之賁賁〉을 읊자, 趙孟이 “잠자리의 말은 문지방을 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郊野이겠습니까? 使臣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子西가 〈黍苗〉의 4章을 읊자, 趙孟이 “우리 임금께서 계시니 내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産이 〈隰桑〉을 읊자, 趙孟이 “나는 그 卒章만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太叔이 〈
野有蔓草〉를 읊자,
趙孟이 “그대의 은혜입니다.”라고 하였다.
印段이 〈
蟋蟀〉을 읊자,
趙孟이 “훌륭합니다. 집안을 보존할 주인이니, 내 기대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蟋蟀
公孫 段이 〈桑扈〉를 읊자, 趙孟이 “사람을 사귐에 있어 傲慢하지 않으니 福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말을 잘 지킨다면 福祿을 사양하고자 한들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傳
宴會를 마친 뒤에 文子(趙孟)가 叔向에게 말하기를 “伯有는 장차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詩는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인데, 그의 뜻은 임금을 誣陷하고 공공연히 怨望하는 데 있고, 또 이 시로써 賓客을 光榮스럽게 하였으니 어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幸運이 있은 뒤에야 죽지 않고 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叔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너무 傲慢[侈]하니 이른바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바로 저 사람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文子가 말하기를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여러 代를 전할 主人이지만 그중에 子展이 가장 뒤에 망할 사람이니 윗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낮추기를 잊지 않습니다.
印氏가 그 다음으로 오래갈 사람이니 안락을 즐기되 職務를 廢棄[荒]하지 않습니다. 안락으로 백성들을 安定시키고 과도하게 백성을 부리지 않으니 남보다 뒤에 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傳
襄公 27년, 楚나라 薳罷가 晉나라에 가서 結盟에 참가하니 晉侯가 宴會를 열어 그를 접대하였다. 연회를 마치고 나오려 할 때 薳罷가 〈旣醉〉를 읊자,
叔向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薳氏의 後孫이 楚나라에서 대대로 祿位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임금의 命을 받고 나와서 민첩하게 응대하기를 잊지 않았으니 子蕩(薳罷)은 장차 政權을 잡게 될 것이다.
민첩함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반드시 백성을 잘 養育할 수 있으니 정권이 어디로 가겠는가?”
傳
襄公 28년, 叔孫穆子가 慶封에게 음식을 접대하는데 慶封이 祭(고수레)하는 음식을 멀리 흩으니 穆子는 불쾌하여 樂工을 시켜 그를 위해 〈茅鴟〉를 朗誦하게 하였으나, 慶封은 〈작년에도 〈相鼠〉가 자기를 諷刺하는 것인 줄을 모르더니〉 이번에도 자기를 풍자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傳
昭公 원년, 令尹(圍)이 宴會를 열어 趙孟을 접대할 때 令尹이 〈大明〉의 首章을 읊으니, 趙孟이 〈小宛〉의 제2章을 읊었다.
宴會를 마친 뒤에 趙孟이 叔向에게 “令尹은 스스로 자신의 德이 王이 될 만하다고 여기니, 앞으로 어찌 되겠는가?”라고 묻자, 叔向이 “楚王은 弱하고 令尹은 強하니 아마도 令尹이 楚王이 될 것입니다. 〈비록 王이 된다 하더라도〉 그 結果가 좋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趙孟이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叔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強者로서 弱者를 이기고서 편안히 여기는 것은 強하기만 하고 의롭지 못한 것이니, 의롭지 못하면서 강한 자는 그 멸망이 반드시 빠른 것입니다.”
傳
昭公 원년, 여름 4월에 趙孟‧叔孫豹‧曹나라 大夫가 鄭나라로 들어가니, 鄭伯이 宴會를 열어 이들을 함께 접대하기로 하였다.
子皮가 趙孟에게 가서 宴會日을 告知[戒]하였는데, 고지하는 의식이 끝나자 趙孟이 〈瓠葉〉을 읊었다. 子皮는 드디어 穆叔에게 가서 宴會日을 고지하고서 趙孟이 〈瓠葉〉을 읊은 것을 말하자,
穆叔이 말하기를 “趙孟은 一獻의 禮를 원하니 그대는 그 뜻을 따르시오.”라고 하였다. 子皮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穆叔이 말하기를 “그분이 원하는 바인데 어찌 감히 할 수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宴會日에 미쳐 鄭나라는 五獻의 籩豆를 幕下에 준비하였다. 趙孟은 五獻의 禮를 사양하고서 子産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冢宰에게 〈一獻의 禮를 거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一獻의 禮를 사용하여 趙孟을 主賓으로 삼았다.
享禮(禮物을 올리는 禮)를 마치고 宴禮(宴會)를 거행하였는데, 穆叔이 〈鵲巢〉를 읊으니, 趙孟이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穆叔이 또 〈采蘩〉을 읊고서 말하기를 “小國은 蘩菜와 같지만 大國이 아껴 쓰신다면 어찌 大國의 命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皮가 〈野有死麕〉의 卒章을 읊으니, 趙孟이 〈常棣〉를 읊고서 말하기를 “우리 兄弟 나라들이 친밀하게 지내며 안정을 추구한다면 삽살개도 짖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穆叔‧子皮 및 曹나라 大夫가 일어나 절하고, 외뿔소의 뿔로 만든 술잔을 들고서 말하기를 “우리 小國들은 당신의 도움을 힘입어 禍難(楚나라의 責罰)에서 면한 줄을 압니다.”라고 하고서, 술을 마시며 즐겼다. 趙孟이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다시 이런 즐거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傳
昭公 2년, 봄에 晉侯가 韓宣子를 보내어 魯나라에 와서 聘問하였다. 昭公이 宴會를 열어 그를 접대할 때 季武子가 〈緜〉의 卒章을 읊으니, 韓宣子가 〈角弓〉을 읊었다.
季武子가 일어나 절하며 “감히 그대가 우리나라를 兄弟의 의리로 대해준 것[彌縫]에 대해 拜謝합니다. 우리 임금님께서는 기대하고 계십니다.”라고 하고서, 季武子가 〈節南山〉의 卒章을 읊었다.
宴會를 마친 뒤에 季氏의 집에서 酒宴을 베풀었는데, 季氏의 집에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韓宣子가 그 나무를 칭찬하자, 季武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감히 이 나무를 잘 가꾸어 〈角弓〉의 뜻을 기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드디어 〈甘棠〉을 읊으니, 韓宣子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召公의 경지에 미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傳
昭公 3년, 10월에 鄭伯이 楚나라에 갈 때 子産이 相으로 수행하였다. 楚子가 宴會를 열어 鄭伯을 접대할 때 〈吉日〉을 읊었다.
宴會를 마친 뒤에 子産이 사냥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니, 楚王은 鄭伯과 함께 江南의 雲夢에서 사냥하였다.
傳
昭公 16년, 晉나라 韓起가 鄭나라에 빙문을 갔다. 鄭나라 六卿이 郊外에서 宣子를 餞送할 때 宣子가 말하기를 “여러 君子께서는 모두 詩 한 수씩 읊기를 청합니다. 나 또한 詩를 듣고서 鄭나라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子齹가 〈野有蔓草〉를 읊자, 宣子는 “孺子가 훌륭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子産이 〈鄭風〉의 〈羔裘〉를 읊자, 宣子는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太叔이 〈褰裳〉을 읊자, 宣子는 “내가 지금 이곳에 와 있으니 어찌 감히 그대에게 다른 사람에게 가는 勞苦를 끼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太叔이 拜謝하니, 宣子는 “훌륭합니다. 그대가 〈變心을 警戒한〉 이 詩를 말한 것이여! 이 詩를 읊어 〈나를 깨우치지〉 않았다면 어찌 두 나라가 끝까지 〈友好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遊가 〈風雨〉를 읊고, 子旗가 〈有女同車〉를 읊고, 子柳가 〈蘀兮〉를 읊으니,
宣子는 기뻐하며 “鄭나라는 강성해질 希望이 있습니다. 여러 君子께서 임금의 命을 받고 나와 나를 餞送하면서 읊은 詩가 鄭나라의 詩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모두 親愛와 友好를 표현한 詩였습니다.
여러 君子께서는 子孫이 여러 세대 동안 大夫의 직위를 누릴 것이니 鄭나라는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傳
昭公 17년, 小邾國의 穆公이 와서 朝見하니 昭公이 잔치를 열어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때 季平子가 〈采菽〉을 읊으니 穆公은 〈菁菁者莪〉를 읊었다. 昭子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才能이 없다면 어찌 나라를 오래도록 소유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傳
昭公 25년, 宋公이 宴會를 열어 昭子를 접대할 때 〈新宮〉을 읊으니 昭子는 〈車舝〉을 읊었다.
이튿날 宴會할 때 술을 마시고 즐거워서 宋公이 昭子를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고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때 樂祁가 〈宴會의 진행을〉 도왔는데, 물러나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宋君과 叔孫이 모두 죽을 것이다. 내 듣건대 ‘즐거울 때 슬퍼하고 슬플 때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常心을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마음의 精爽(정신)을 魂魄이라 하는데 魂魄이 떠났으니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注
이 글에서 말하였다. “詩는 人心의 天機에서 나왔으니 義例나 訓詁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詩는 마음속에 있는 온전한 經典이니 春秋의 君臣들은 일로 인하여 시를 읊고 구절을 끊어 의미를 취하였다.
이는 신묘한 마음이 통해서 이치를 만난 것이지 말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니 詩를 사용하기를 잘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詩에 이치가 있음을 밝혔으니 〈작자는〉 아마도 詩 안의 뜻을 깊이 터득한 자일 것이다.
지극한 이치를 간직한 곳은 마음으로 만날 수는 있으나 힘으로 구할 수는 없다.
注+시작하는 말이 매우 이치가 있으니, 이 한 편의 主意가 여기에 있다. 잘려진 채 남겨진
簡編에 적힌 글은
注+온전하게 전해지지 못한 古人의 책을 이른다. 애써 읊조리고 외우더라도
注+古人의 책을 읽는 것이다. 자고 나면 이미 잊어버리나,
注+혹 하룻밤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입으로는 그 글을 외우나 마음으로 그 맛을 터득함이 없기 때문이다.
길거리나 마을에서 불리는 노래가
注+지금의 歌曲의 종류와 같다는 말이다. 우연히 내 귀에 들어오게 되면
注+우연히 듣는다는 말이다. 종신토록 잊히지 않는다.
注+종신토록 기억하여 잊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천하의 이치는 본래 구하는 데서 현혹되고 만나는 데서 참되게 된다.
注+문장수법이 좋다. 眩은 미혹됨이다. 이는 ‘마음으로 만날 수 있으나 힘으로 구할 수는 없다.’는 뜻을 푼 것이다. 잘라져 나가 잔존된 簡編으로 여러 경전을 비유하였고, 길거리와 마을에서 불리는 노래로 詩를 비유한 것이다.
이치는 내 마음에 닿는 것이 있는 것이지,
注+‘만나다[遇]’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의도해서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며 약속해서 서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
注+이치와 마음은 저절로 서로 만나는 것이니, ‘遭’와 ‘會’는 모두 ‘遇’자를 반영한 것이다. 성대하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어서, 비록 내가 한 것이라도 남에게 말해줄 수 없으니
注+자득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힘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注+첫머리의 말에 호응한다.
한번 구함을 겪게 되면 비록 보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바르지 않다.
注+구한다면 얻는 것이 참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에 지극한 이치 아님이 없으나,
注+종신토록 행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직 내가 절박해서 힘으로 구하면,
注+힘으로 구할 수 없는 뜻을 밝힌 것이다. 얻었다가도 잃어버리게 된다.
注+참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注+구하기를 더욱 힘쓴다는 말이다. 나날이 천착함에 빠지면,
注+도리어 천착하여 道를 해친다는 말이다.
일찍이 이 이치가 내 앞에 교차하여 일어나는 줄 몰라서 내 스스로 그것과 만나지 못하니,
注+마음이 이치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힘을 쓰지 못하는 잘못이 아니라 힘을 쓰는 잘못이다.
注+힘으로 구하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천하의 배우는 자들은 모두 힘을 쓰지 않는 해로움은 알지만,
注+冉求가 힘이 부족하다고 여겨 스스로 미리 한계를 긋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힘을 쓰는 해로움은 모른다.
注+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힘을 씀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됨을 알아서
注+‘가령 이와 같을 수 있다면’의 뜻이다. 힘쓰는 것을 다 제거해 힘을 씀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注+이는 ‘생각하지 않고도 알고, 힘쓰지 않고도 道에 맞는’ 신묘함을 이른다. 거의 〈마음으로 이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注+이렇게 되면 거의 진정으로 터득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곧 學問의 지극한 공효이며 聖神의 能事이니 ‘庶幾’일 뿐만이 아니다. ‘幾’자의 쓰임이 온당치 못하다. ○나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이 글의 첫머리의 말이 비록 玄妙한 말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병폐가 없을 수 없다. 孔子는 ‘하루라도 仁에 힘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나는 힘이 부족한 자는 보지 못했다.’라고 했으니, 聖人은 힘을 쓰는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孟子는 ‘지혜를 비유하자면 솜씨 좋음이고, 聖人을 비유하자면 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인의 힘은 伯夷‧柳下惠‧伊尹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혜의 솜씨 좋음은 集大成한 孔子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힘쓰는 것을 다 제거해 힘을 씀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이 말은 정도가 지나치다.”
二帝‧
三王의 ≪
書經≫과
注+二帝는 ≪書經≫의 〈虞書〉를 이르고, 三王은 ≪書經≫의 〈夏書〉‧〈商書〉‧〈周書〉를 이른다. 伏羲氏‧
文王‧
孔子의 ≪
易經≫과
注+伏羲氏가 비로소 八卦를 긋고 이것을 중첩하여 64괘를 만드니, 文王은 卦 아래에 〈彖辭〉를 지었고, 孔子는 〈彖傳〉 2권‧〈象辭〉 2권‧〈繫辭〉 2권과 아울러 〈文言〉‧〈說卦〉‧〈序卦〉‧〈雜卦〉를 지었으니 이것이 十翼이다. ≪
禮經≫에 기록된
儀禮 및
典章과
注+周公은 ≪儀禮≫와 ≪禮記≫를 지었으니, 이른바 ‘經禮가 3백 조항이고 曲禮가 3천 조항이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
樂經≫의
節奏와
注+樂書는 오늘날 더 이상 전해지지 않으나, ≪禮記≫ 〈樂記〉와 같은 종류가 그 나머지이다. ≪
春秋≫의 포폄은
注+孔子는 魯나라 史書에 의거해 ≪春秋≫를 지음에 加筆과 減削을 더했다. 모두 천하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注+‘形’자의 표현이 좋다. 이치는 본래 형체가 없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만 여러 경전을 빌려 형용한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은 이치로
經典을 보지 않고 경전으로 경전을 보았으니,
注+이 이하의 글은 義例와 訓詁가 성인의 經典을 파쇄하였음을 비난한 것이다. 도려내고 쪼개어 분석하며 새기고 쌓아 소통하고 천착하는 등의 변질이 많아 천하에 온전한 경전이 없게 되었다.
注+‘刳剔離析’은 義例의 폐단이고, ‘彫繢疏鑿’은 訓詁의 폐단이다.
聖人이 이 점을 걱정하여
注+천하에 온전한 경전이 없음을 근심한 것이다. 널리 하늘과 땅 사이를 관찰해보니, 새가 봄에 울고, 벌레가 가을에 욺에
注+韓愈의 〈送孟東野序〉에 “새로써 봄에 울고, 우레로써 여름에 울며, 벌레로써 가을에 울고, 바람으로써 겨울에 운다.”라고 하였다. 匹夫匹婦가 기뻐하고 위로받으며 편안해짐과 슬프고 노엽고 참담함이,
注+이것은 心情의 변화이다.
天機에서 움직여
注+벌레와 새가 스스로 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張子厚가 나귀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과 〈程顥가〉 ‘나의 意思(仁心)와 똑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 모두 天機가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막을 수 없어서 저절로 시를 읊고 노래 부르는 사이에 그 소리가 새어나왔다.
注+이는 詩가 지어진 이유이다. 이에 근심이 풀려 기뻐하며 말하기를
注+‘喜’자는 앞글의 ‘憂’자와 서로 호응한다. “아직 천착되지 않은
天理가 오히려 여기에 존재하고 있구나!”
注+천지의 자연에서 나오기 때문에 천착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본래
匹夫匹婦의 가슴속에 있는 온전한 경전인데,
注+앞글의 ‘천하에 온전한 경전이 없다.’와 서로 호응한다. 갑자기 이를 가져다가 ≪
書經≫‧≪
易經≫‧≪
禮經≫‧≪
樂經≫‧≪
春秋≫의 사이에 열거하여 함께 세어서 이를 ‘
六經’이라고 하였다.
注+앞글에서 말한 五經에 지금 ≪詩經≫을 더하여 六經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그네나 천첩의 말이
注+羈는 나그네이다. 예컨대 ≪詩經≫ 〈邶風 式微〉편은 나그네에 대한 가사이고, ≪詩經≫ 〈召南 小星〉은 賤妾에 대한 가사이다. 堯‧
舜‧
禹‧
湯‧
文‧
武의 바른 말씀 및 큰 교훈과
注+五經은 이 여섯 성인의 말씀에 대하여 우선 그 대강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나란히 열거되어
輕重의 차이가 없게 되었다.
注+이에 ≪詩經≫이 五經과 아울러 전해졌다는 말이다.
聖人의 뜻은
注+≪詩經≫을 경전으로 삼은 뜻을 이른다. 장차
匹夫匹婦의 가슴속에 보존된 온전한 경전을 들어 천하의 파열되어 온전치 못한 경전을 구제해서,
注+이 구절이 이 글의 관건이다. 앞 두 단락의 뜻이 매우 긴밀하니, 五經은 義例와 訓詁에 의해 파쇄되었기 때문에 파열되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학자들에게 이른바
詩라는 것은 본래 시골마을이나 초야의 민간에서 나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발설하고 붓을 들어 이루어졌으니
義例로 바로잡거나
訓詁로 국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注+義例는 종류에 따른 조항을 이르고, 訓詁는 注釋을 이른다. 〈≪詩經≫은〉 마음이 저절로 그러한 데서 나왔기 때문에 義例나 訓詁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義例學과 訓詁學은 詩에 이르러 다 폐지되었다. 이런 종류의 학풍이 폐지되고 나니, 어지럽게 섞어서 연구하고 탐색하는 사사로움으로 그 뜻을 구속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하여 한 번 시를 읊조리고
諷諫하는 가운데
注+읊어 노래할 수 있고, 諷諫하여 외울 수 있다는 말이다. 聲調가 바뀌고
天氣가 돌아서
注+≪詩經≫으로 인하여 天機를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여유롭고 한가하면서도
注+가사가 박절하지 않다는 말이다. 지극한 이치를 저절로 만나니,
注+힘써 구하지 않아도 마음이 이치와 만난다는 말이다. 한 조각 말에도 맛이 있어
五經의 뜻이 모두 얼음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注+경전의 종류는 다르나 지극한 이치는 같으니, 과연 ≪詩經≫ 안에서 참된 의미를 터득한다면 五經의 이치가 모두 봄 얼음처럼 풀릴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聖人이
詩의 평이함으로
五經의 지리함을 구제하려는 것이니,
注+平易는 가슴속의 온전한 경전을 이르고, 支離는 파열되어 온전하지 못함을 이른다. 후세에 도리어
五經의 지리함으로
詩의 평이함을 바꿀 줄 누가 알았겠는가?
注+이 구절은 結尾의 뜻을 포괄하니, 後世 사람들은 또 義例와 訓詁로 ≪詩經≫을 파쇄했음을 이른다.
대체로
春秋時代를 관찰해보니
列國이
朝聘할 때에 모두
詩를 읊어 서로
命하였다.
注+〈여기부터〉 본편의 일로 들어간다. 詩는 일로 인한 것이지
注+우연히 일로 인하여 시를 읊었다는 말이다. 일을 떠나
詩에 나아간 것이 아니고,
注+지금의 일을 떠나 고인의 詩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을
詩에 부친 것이지
注+일로 인해 뜻을 시에 부쳤다는 말이다. 詩를 떠나 일에 나아간 것이 아니다.
注+고인의 시를 떠나 오늘의 일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근육과 힘줄의 사이처럼 미세한 틈새에서 의미를 전하여
注+≪荘子≫ 〈養生主〉篇에 나온다. 庖丁이 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고 말하였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묘한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래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이므로 經絡과 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밖으로 암말인지 수말인지 검은지 누른지의 형적이 달라지는 것처럼,
注+≪列子≫ 〈說符〉篇에 나온다. 〈말을 잘 보는 伯樂이 秦 穆公에게〉 九方臯라는 자가 있으니 만나줄 것을 청하였다. 秦 穆公이 그에게 명마를 구해 오게 하였는데 석 달 만에 돌아와서 아뢰었다. “〈명마를〉 구했습니다.” 목공이 물었다. “어떤 말이냐?” 답하였다. “누런 암말입니다.” 목공이 사람을 보내어 말을 몰고 오게 하였는데, 검은 수말이었다. 목공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백락을 불러 말하였다. “그대가 말을 구해 오게 한 자는 누른지 검은지, 수말인지 암말인지도 모르니, 어떻게 말을 알아보겠는가?” 백락이 말하였다. “이자는 저보다 천 배 만 배 뛰어나 그 재주를 헤아릴 수 없는 자입니다. 九方臯는 天機만 볼 뿐입니다.” 말이 도착하였는데 과연 천하의 좋은 말이었다. 구절을 끊어 의미를 취하니,
注+춘추시대에 시를 읊은 자들은 章句를 끊어 뜻을 취해서 한때의 흥취를 부쳤다. 그러므로 遷就의 폐단이 없어 庖丁이 소를 해체하고 九方臯가 말을 보는 것과 같아서 天機의 신묘함을 얻었다. 신묘한 마음으로 이치를 만날 수 있지 말로 찾을 수는 없다.
注+첫머리의 主意에 호응한다.
보잘것없는 누추한 유자들의
義例와
訓詁는 이 점에서 모두 실패한 것이니,
注+詩의 旨趣를 깊이 터득했기 때문에 義例와 訓詁를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
詩를 잘 사용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注+〈이와 같은 이들을 작자가〉 깊이 허용한 말이다.
당시에 先王의 법도는 점점 땅에 추락하였고, 易은 卜筮에 빠졌으며, 禮는 참람한 데로 떨어졌고, 樂은 음란한 데로 흘렀으며, 史는 순리를 어기는 데서 잘못되었다.
비록 제후들에게 見聞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左史인 倚相 같은 이도 三墳‧五典‧八索‧九丘를 외우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 데 불과했으나, 詩를 읊는 것만은 아직도 누추한 유자들의 학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先王의 가르침 중에 유린되지 않아 우뚝 홀로 온전한 것은 오직 風‧雅‧頌일 뿐이다. 이는 孔子가 이미 六經을 논하고 또 〈伯魚가〉 뜰을 지날 때 詩를 먼저 물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秦나라에서 불태워지고,
注+秦 始皇은 경전의 학술을 불태워 없앴다. ○이 이하의 글은 후세에서는 도리어 五經의 지리함으로 詩의 평이함을 변질시켰음을 말하였다. 漢나라에서 뒤섞였으며,
注+漢나라 儒者들은 章句의 학문을 전공하여 ≪詩≫를 뒤섞었다는 말이다. 齊詩와
魯詩로 갈라지고,
注+仲尼가 죽은 뒤에 ≪詩≫는 넷으로 갈라졌다. 申公은 ≪魯詩≫를 지었고, 轅固는 ≪齊詩≫를 지었으며, 燕나라의 韓生(韓嬰)은 ≪韓詩≫를 지었고, 毛公(毛亨‧毛萇)은 ≪毛詩≫를 지어서 오늘날 세상에 유행한다. 讖緯說에 빠지고,
注+漢나라의 五經 해석에는 모두 緯書‧雜言‧圖讖의 일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五際로 어지럽게 되었으며,
注+≪前漢書≫ 〈翼奉傳〉에 “≪詩≫에는 五際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注에 ≪韓詩內傳≫을 인용하여 “〈五除는〉 卯‧酉‧午‧戌‧亥이니 陰陽이 만나는 해이다.”라고 하였다.
專門으로 편협해져서,
注+專門의 배움은 전수받은 자가 각각 자기 스승의 학설만을 지키는 것을 이른다. 자디잘게 쪼개고,
注+黃鍾의 대통에는 1,200개의 기장알이 담기는데, 무게는 12銖이다. 24銖를 1兩이라 한다. 마디마디 따졌으니,
注+黃鍾의 길이는 9寸이다. 10分을 1寸이라 한다. ○이 구절은 지리함의 폐단을 말하였다. 어찌 다시
詩가 있을 수 있겠는가?
注+≪詩≫가 분석되어 가슴속의 온전한 경전이 다시 義例와 訓詁에 의해 지리하게 되었으니, 비록 ≪詩≫가 없다고 해도 옳다는 말이다. 아! 어떻게 하면 춘추시대에
詩를 읊던 의미를 말할 수 있을까?
注+‘혹시 지리함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까.’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