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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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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晉文公秦穆公賦詩
13-06-01 晉文公秦穆公賦詩
[左傳] 僖二十三年이라 晉重耳奔秦하다 他日 公享之할새 子犯曰 請使衰從하소서
한대 하다 趙衰曰 하소서
13-06-02 晉侯享公賦詩
[左傳]文三年이라 公如晉하야 及晉侯盟하다 晉侯享公할새 하니
하니 敢不愼儀릿가 君貺之以大禮하니 何樂如之잇가
抑小國之樂 大國之惠也니이다 하고 하다 하다
13-06-03 寗武子來聘 公賦詩
[左傳]文四年이라 衛寗武子來聘하다 公與之宴 하니 不辭하고 又不答賦하다
하니 對曰 니이다 昔諸侯이면 王宴樂之
하야 而獻其功이면 王於是乎賜之彤弓一 彤矢百 玈弓矢千하야 이니이다
13-06-04 荀林父賦詩
[左傳]文七年이라 先蔑之使也 荀林父止之曰 夫人太子猶在어늘 而外求君 此必不行이니 子以疾辭 若何
不然이면 하리라 어늘 何必子 同官爲寮 吾嘗同寮하니 敢不盡心乎 弗聽하다
이로되 又弗聽하다 及亡 荀伯盡送其帑及器用財賄於秦曰 爲同寮故也라하다
13-06-05 鄭伯宴公賦詩
13-06-06 公享季文子賦詩
[左傳]成九年이라 伯姬歸于宋하다 하고 復命하니 公享之하다 하니
13-06-07 公享范宣子賦詩
[左傳]襄八年이라 晉范宣子來聘하야 하고 告將用師于鄭하다
이니 리오하고 하다 賓將出 한대
宣子曰 我先君文公獻功于衡雍하고 受彤弓于襄王하야 하니라
13-06-08 叔孫穆子賦詩
[左傳]襄十四年이라 諸侯之大夫從晉侯伐秦하야 하고 使六卿帥諸侯之師以進하다
어늘 叔向見叔孫穆子한대 이어늘 叔向退而具舟하다 魯人莒人先濟하다
13-06-09 高厚賦詩
[左傳]襄十六年이라 晉平公 卽位하야 與諸侯宴于溫할새 使諸大夫舞曰 하라
13-06-10 穆叔賦詩
[左傳]襄十六年이라 穆叔如晉聘하고 한대 晉人曰 以寡君之未 일새라
不然이면 不敢忘이리라 穆叔曰 以齊人之朝夕釋憾於敝邑之地 是以大請이라
敝邑之急 朝不及夕일새 引領西望曰 ㄴ저 리라
見范宣子하고 한대 宣子曰 匄在此하니
13-06-11 公享季武子賦詩
[左傳]襄十九年이라 季武子如晉拜師하니 晉侯享之하다 이러니 한대
季武子興하야 再拜稽首曰 小國之仰大國也 如百穀之仰膏雨焉하니 若常膏之 其天下輯睦하리니 豈惟敝邑이리오하고 하다
13-06-12 晉侯鄭伯賦詩
[左傳]襄二十六年이라 하니 士弱氏하다 秋七月 하다
하니 國景子相齊侯하야 하고 子展相鄭伯하야 한대
國子使晏平仲私於叔向曰 晉君宣其明德於諸侯하야 일새 所以爲盟主也어늘
叔向告趙文子한대 文子以告晉侯하니 하다
하고 하니 晉侯乃許歸衛侯하다
13-06-13 慶封賦詩
[左傳]襄二十七年이라 齊慶封來聘하다 叔孫與食 不敬이어늘 하다
13-06-14 鄭七子賦詩
[左傳]襄二十七年이라 할새 子展伯有子西子産子太叔하다
한대 趙孟曰 한대 趙孟曰 善哉 吾有望矣로다
한대 趙孟曰 이리오 若保是言也 欲辭福祿인들 得乎
卒享 文子告叔向曰 伯有將爲戮矣리라 詩以言志어늘 하니 其能久乎 이리라
叔向曰 然하다 하니 로다
文子曰 子展其後亡者也 하니라
印氏其次也 하니라 하고 하니 後亡 不亦可乎
13-06-15 薳罷賦詩
[左傳]襄二十七年이라 하니 晉侯享之하다 將出 한대
叔向曰 薳氏之有後於楚國也 宜哉로다 하니 子蕩將知政矣리라
敏以事君이면 必能養民이니 이리오
13-06-16 穆叔食慶封誦詩
[左傳]襄二十八年이라 叔孫穆子食慶封 하니 穆子不說하야 한대 하다
13-06-17 令尹趙孟賦詩
[左傳]昭元年이라 令尹享趙孟할새 하니 하다
事畢 趙孟謂叔向曰 對曰 王弱하고 令尹強하니 ㄴ저 不終하리라
趙孟曰 何故 對曰 不義而強 其斃必速이라
13-06-18 穆叔子皮賦詩
[左傳]昭元年이라 夏四月 하니 鄭伯兼享之하다
이러니 하다 子皮遂戒穆叔하고 且告之한대
穆叔曰 하니 子其從之하라 子皮曰 穆叔曰 又何不敢이리오
하니 하고 私於子産曰 라한대 乃用一獻하야 하다
禮終乃宴할새 하니 趙孟曰 라하다
하고 라하고 飮酒樂하다 趙孟出曰 吾不復此矣리라
13-06-19 季武子韓宣子賦詩
[左傳]昭二年이라 하다 公享之할새 하니 하다
季武子拜曰 하노라 寡君有望矣라하고 하다
旣享 宴于季氏할새 有嘉樹焉하니 한대 武子曰 하야 以無忘角弓가하고
하니 宣子曰 起不堪也 無以及召公이라하다
13-06-20 楚子賦詩
[左傳]昭三年이라 十月 鄭伯如楚 子産相하다 하다
旣享 子産乃具田備하다 하다
13-06-21 鄭六卿賦詩
[左傳]昭十六年이라 晉韓起聘于鄭하다 할새 宣子曰 二三君子請皆賦하노라 起亦以知鄭志로라
한대 宣子曰 善哉 로다 한대 宣子曰
13-06-22 小邾穆公季平子賦詩
[左傳]昭十七年이라 小邾穆公來朝하니 公與之燕하다
하니 하다 昭子曰 이면 其能久乎
13-06-23 宋公賦詩
[左傳]昭二十五年이라 宋公享昭子 하니 하다
明日宴 飮酒樂하야 하고 語相泣也하다
러니 退而告人曰 今玆君與叔孫其皆死乎ㄴ저 吾聞之컨대 皆喪心也
이라 魂魄去之하니 何以能矣리오
[主意]謂詩出於人心之天機 非可以訓詁而求 此人心之全經也 春秋君臣 因事賦詩하고 斷章取義
以神遇而不以言求 可謂善用詩者矣로다 此篇發明有理趣하니 盖深得詩中之意者인저
至理之所在 可以心遇 而不可以力求注+至理之所在……而不可以力求:起語甚有理趣 一篇主意在此 斷編遺簡注+斷編遺簡:古人不全之書 呻吟諷誦注+呻吟諷誦:讀其書者이라도 越宿已有遺注+越宿已有遺忘:或有經宿而忘之者 盖口雖誦其文 而心無得於味也이나
至於塗歌里詠注+至於塗歌里詠:如今歌曲之類 偶入吾耳注+偶入吾耳:偶然聞之 則雖終身而不忘注+則雖終身而不忘:有終身記之不忘者 入心故也이라 天下之理 固眩於求而眞於遇也注+天下之理 固眩於求而眞於遇也:句法佳 眩 惑也 此釋可以心遇而不可以力求之意 殘篇斷簡 以喩諸經 塗歌里詠 以喩詩也
理有觸於吾心注+理有觸於吾心:發明遇字之意이요 無意而相遭 無約而相會注+無意而相遭 無約而相會:理與心 自然相遇 遭與會 皆體遇字 油然自生하야 雖吾라도 不能以語人注+油然自生……不能以語人:自得故也이니 況可以力求乎注+況可以力求乎:應起語
一渉於求 雖有見이라도 非其正矣注+一渉於求……非其正矣:求則所得非眞 日用飮食之間 無非至理注+日用飮食之間 無非至理:終身由之而不知之
惟吾迫而求之注+惟吾迫而求之:發明不可力求之意 則隨得而隨失注+則隨得而隨失:非眞有者이라 硏精極思注+硏精極思:求之愈力하야 日入於鑿注+日入於鑿:反穿鑿以害道이면
曾不知是理交發於吾前하야 而吾自不遇注+曾不知是理交發於吾前 而吾自不遇:心不與理相遇하니 是非不用力之罪也 乃用力之罪也注+是非不用力之罪也 乃用力之罪也:以力求 故不遇
天下之學者 皆知不用力之害注+天下之學者 皆知不用力之害:如 而不知用力之害注+而不知用力之害:爲其求也
苟知力之不足恃하야 盡黜其力注+苟知力之不足恃 盡黜其力:設使有能如此하야 而至於無所用力之地注+而至於無所用力之地:此之妙 則幾矣注+盡黜其力……則幾矣:則庶幾眞有所得也 然能如此者 乃學問之極功 聖神之能事 非特庶幾而已 幾字下得未穩 ○愚按 此冐頭雖說得玄妙 却不能無病 聖人盖不以用力爲非也 盖聖之力 夷恵伊尹可以能 而智之巧 非孔子之集大成 不可能也 盡黜其力 而至於無所用力之地 此語亦過當리라
二帝三王之書注+二帝三王之書:二帝 謂虞書 三王 謂夏商周之書 犧文孔子之易注+犧文孔子之易:伏羲始畫八卦 因而重之 爲六十四卦 文王作卦下彖辭 孔子作彖傳二卷 象辭二卷 係辭二卷 幷文言說卦序卦雜卦 是爲十翼 禮之儀章注+禮之儀章:周公作儀禮及禮記 所謂經禮三百 曲禮三千是也 樂之節奏注+樂之節奏:樂書 今不復傳 如樂記之類 亦其緖餘也 春秋之褒貶注+春秋之褒貶:孔子 因魯史作春秋 加之筆削 皆所以形天下之理者也注+皆所以形天下之理者也:形字下得好 理本無形 非言可盡 特假諸經 以形容之
天下之人 不以理視經하고 而以經視經注+天下之人……而以經視經:此下譏義例訓詁之破碎聖經하니 刳剔離析하고疏鑿之變多하야 而天下無全經矣注+刳剔離析……而天下無全經矣:刳剔離析 義例之弊也 彫疏鑿 訓詁之弊也
聖人有憂焉注+聖人有憂焉:憂天下無全經하야 汎觀天壤之間하니 鳥嗚於春하고 蟲鳴於注+汎觀天壤之間……蟲鳴於秋:韓文云 以鳥鳴春 以雷鳴夏 以虫鳴秋 以風鳴冬 而匹夫匹婦懽愉勞佚 悲怒舒慘注+而匹夫匹婦懽愉勞佚 悲怒舒慘:此人情之變
動於天機注+動於天機:猶虫鳥之自鳴 皆天機之動不能已者也하야 不能已하야 而自泄其鳴於詩謡歌詠之間注+不能已 而自泄其鳴於詩謡歌詠之間:此詩之所以作이라 於是釋然喜曰注+於是釋然喜曰:喜字 與前憂字 相呼喚 天理之未鑿者 尙有此存注+天理之未鑿者 尙有此存:出於自然 故不이로다
是固匹夫匹婦胷中之全經也注+是固匹夫匹婦胷中之全經也:與前天下無全經相應로되 遽取而列諸書易禮樂春秋之間하야 幷數而謂之六經注+遽取而列諸書易禮樂春秋之間 幷數而謂之六經:前說五經 今增詩而爲六이라
羈臣賤妾之辭注+羈臣賤妾之辭:羈 旅也 如式微是羈臣之辭 小星是賤妾之辭 與堯舜禹湯文武之格言大訓注+與堯舜禹湯文武之格言大訓:五經 不止此六聖人之言 姑述其大槩耳竝列하야 而無所輕重注+竝列 而無所輕重:詩於是與五經竝傳이라
聖人之意注+聖人之意:取詩爲經之意 盖將擧匹夫匹婦胷中之全經하야 以救天下破裂不全之經注+盖將擧匹夫匹婦胷中之全經 以救天下破裂不全之經:此句關鎻 前兩段意 極是緊蜜 五經爲義例訓詁之所破碎 故曰 破裂不全하야
使學者知所謂詩者 本發乎閭巷草野之間하야 衝口而發하고 擧筆而成하니 非可格以義例어나 而局以訓詁也注+使學者知所謂詩者……而局以訓詁也:義例 謂條類 訓詁 謂注釋 以其出於人心之自然 故不假如此
義例訓詁之學 而盡廢 是學旣廢하니 則無硏索擾雜之私以累其意
一吟一諷注+一吟一諷:可以吟詠 可以諷誦 聲轉機回注+聲轉機回:因彼詩可回天機하야 虛徐容與注+虛徐容與:辭不迫切하야 至理自遇注+至理自遇:不待力求 而心與理遇하니 片言有味하야 而五經皆冰釋矣注+片言有味 而五經皆冰釋矣:經雖異 而至理則同 果於詩中得其眞味 則五經之理 皆渙然如春冰之消釋
是聖人欲以詩之平易而救五經之支離也注+是聖人欲以詩之平易(이)而救五經之支離也:平易 謂胷中全經 支離 謂破裂不全 孰知後世反以五經之支離而變詩之平易乎注+孰知後世反以五經之支離而變詩之平易乎:此句包結尾意 謂後世又以義例訓詁而破碎之
盖嘗觀春秋之時하니 列國朝聘 皆賦詩以相命注+盖嘗觀春秋之時……皆賦詩以相命:入本題事이라 詩因於事注+詩因於事:偶然因事賦詩 不遷事而就詩注+不遷事而就詩:不遷今事以就古人之詩 事寓於詩注+事寓於詩:以事寓意於詩 不遷詩而就事注+不遷詩而就事:不遷古詩以就今日之事
意傳於肯綮毫釐之中注+意傳於肯綮毫釐之中:荘子養生主篇 庖丁爲文恵君解牛曰 始臣解牛之時 所見無非牛者 三年之後 未甞見全牛也 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窽 因其固然 技經肯䋜之未甞 而況大軱乎하야 跡異於牝牡黃之外注+跡異於牝牡(元)[驪]黃之外:列子說符篇 有九方臯者 請見之 穆公使求馬 三月而反報曰 得之矣 穆公曰 何馬也 對曰 牝而黃 使人往取之 牡而驪 穆公不說 召伯樂曰 子所使求馬者 色物牝牡 尙不能知 又何馬之能知也 伯樂曰 是乃所以千萬臣而無數者也 若臯之所觀 天機也 馬至果天下馬也 斷章取義注+斷章取義:春秋之賦詩者 斷截章句 取其意義 以寓一時之興趣 故無遷就之弊 猶庖丁之解牛 九方臯之相馬 得天機之妙也하니 可以神遇 而不可以言求注+可以神遇 而不可以言求:應起語主意
區區陋儒之義例訓詁 至是皆敗注+區區陋儒之義例訓詁 至是皆敗:深得詩之旨趣 故義例訓詁 可以一掃而除矣하니 春秋之時 善用詩盖如此注+春秋之時 善用詩盖如此:深取之
當是時하야 先王之經浸墜于地하고 易降於卜筮하며 禮墜於僭하고 樂流於淫하며 史病於舛이라
雖多聞諸侯如左史倚相者라도 亦不過以誦說爲能이나 獨賦詩尙未入於陋儒之學이라
是先王之敎 未經踐躪巋然獨全者 惟風雅頌而止耳 此孔子所以旣論之六經하고
火于秦注+火于秦:秦始皇焚滅經術 ○此下言後世反以五經之支離 而變詩之平易하고 雜於漢注+雜於漢:漢儒雜以專門章句之學하며 別之以齊魯注+別之以齊魯:仲尼旣沒 詩分爲四 申公爲魯詩 轅固爲齊詩 燕韓生爲韓詩 毛公爲毛詩 今行於世하고 汨之以讖緯注+汨之以讖緯:漢五經 皆有緯書雜言圖讖之事하며 亂之以五際注+亂之以五際: 引詩內傳曰 卯酉午也 陰陽際會之歲也하고
狹之以專門注+狹之以專門:專門之學 傳者各守其師之說하야 銖銖而析之注+銖銖而析之:黃鍾之龠 容千二百黍 重十二銖 二十四銖爲兩하고 寸寸而較之注+寸寸而較之:黃鍾之長九寸 十分爲寸 ○此一句言支離之弊하니 豈復有詩注+豈復有詩:詩分 胷中之全經 復爲義例訓詁之所支離 雖謂之無詩可也 安得春秋賦詩之說語之注+噫 安得春秋賦詩之說語之:或可以救支離之弊리오


文公 穆公이 시를 읊다
文公 穆公이 시를 읊다
僖公 23년, 나라 重耳으로 도망하였다. 後日 穆公重耳酒宴에 초대하였다. 子犯이 말하기를 “나는 말솜씨가 趙衰만 못하니 趙衰를 데리고 가소서.”라고 하였다.
宴會 중에〉 公子가 〈河水〉를 읊으니 穆公이 〈六月〉을 읊었다. 그러자 趙衰가 말하였다. “重耳拜賜하소서.”
公子가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고서 머리를 조아리니 穆公이 한 계단을 내려가 사양하였다. 趙衰가 말하였다. “秦君께서 天子輔佐하는 일을 들어[] 重耳에게 하시니 重耳가 감히 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晉侯가 연회를 열어 文公을 대접할 때, 晉侯文公이 시를 읊다
文公 3년, 文公나라에 가서 晉侯結盟하였다. 晉侯가 연회를 열어 文公을 대접할 때 〈菁菁者莪〉를 읊으니,
莊叔文公에게 뜰 아래로 내려가서 拜謝하게 하며 말하였다. “小國大國의 명을 받았으니 감히 禮儀를 삼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晉君께서 大禮로 접대해주시니 이런 즐거움이 다시 어디 있습니까?
小國의 즐거움은 大國의 은혜입니다.” 晉侯가 뜰에 내려가 사양하고서 함께 올라와서 拜禮를 이루었다. 文公이 〈嘉樂〉을 읊었다.
寗武子가 와서 聘問하니 文公이 시를 읊다
文公 4년, 나라 寗武子가 와서 聘問하였다. 文公宴會를 열어 그를 접대할 때 〈湛露〉와 〈彤弓〉을 읊으니, 寗武子謝禮도 하지 않고, 또 答賦하지도 않았다.
文公行人을 보내어 사사로이 그 이유를 묻게 하니 그가 대답하였다. “신은 樂工들이 연습으로 그 을 연주하는 줄 알았습니다. 옛날에 諸侯正月朝見하면 이 연회를 열어 함께 즐기는데,
이때에 〈湛露〉를 읊어 天子太陽에 해당하고 諸侯에 복종한다는 뜻을 표현합니다.
諸侯痛恨해하는 상대를 대적하여 을 바치면 왕이 이에 彤弓 하나, 彤矢 1백, 검은 弓矢 1천 개를 下賜하여 을 보답하는 宴會임을 밝힙니다.
지금 陪臣은 옛 우호를 계승하기 위해 왔는데 께서 이러한 宴會를 열어주시니 어찌 감히 大禮하여 스스로 를 취하겠습니까?”
荀林父가 시를 읊다
文公 7년, 先蔑이 〈公子 을 맞이하는〉 使臣으로 〈나라에〉 갈 적에 荀林父가 말리며 말하기를 “夫人太子가 그대로 있는데 밖에서 임금을 구해 오는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으니[不行] 그대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가 미칠 것이다. 다른 사람을 代理로 보내도 되는데 무엇 때문에 꼭 그대가 갈 필요가 있겠는가? 同官라 하는데 우리는 同僚였으니 감히 마음을 다해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荀林父가 또 그를 위해 〈의 제3을 읊었으나 또 듣지 않았다. 그가 亡命하자 荀伯(荀林父)은 그의 妻子器用財物을 모두 나라에 보내주며 말하기를 “同僚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鄭伯宴會를 열어 文公을 접대할 때, 子家季文子가 시를 읊다
文公 13년, 鄭伯에서 文公과 회합하여 또 나라와의 화평을 주선해주기를 청하니 文公은 두 나라 모두 나라와 화평을 맺도록 도와주었다.
鄭伯에서 宴會를 열어 文公을 접대할 때 子家가 〈鴻鴈〉을 읊으니, 季文子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도 이런 근심에서 면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하고서 季文子는 〈四月〉을 읊었다.
子家가 〈載馳〉의 4을 읊으니 文子가 〈采薇〉의 4을 읊었다. 鄭伯拜謝하니 文公答拜하였다.
成公宴會를 열어 季文子를 대접할 때, 季文子穆姜이 시를 읊다
成公 9년, 伯姬나라로 시집갔다. 여름에 季文子나라에 가서 致女하고 돌아와 復命하니, 成公宴會를 열어 그를 대접하였다. 〈宴會 자리에서〉 季文子가 〈韓奕〉의 제5을 읊으니,
穆姜이 방에서 나와 再拜하며 말하기를 “大夫는 욕보셨소. 先君을 잊지 않는 〈그 忠誠이〉 嗣君에 미치고, 이 未亡人에게까지 뻗어 미쳤으니, 先君께서도 오히려 大夫가 이렇게 하기를 바랐을 것이오.
감히 大夫께서 거듭 수고한 것에 拜謝하오.”라고 하고서, 또 〈綠衣〉의 卒章을 읊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襄公燕享할 때 范宣子가 시를 읊다
襄公 8년, 나라 范宣子가 와서 聘問하고서 또 지난번 襄公나라에 朝見한 것에 대해 拜謝하고, 이어 나라에 用兵(토벌)하려 한다는 것을 하였다.
襄公燕享할 때 范宣子가 〈摽有梅〉를 읊거늘 季武子가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지금 草木에 비유하면 寡君晉君에 있어 晉君臭味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을 받들 것이니 어찌 시기의 遲速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季武子가 〈角弓〉을 읊었다. (范宣子)이 물러가려 할 때 季武子가 〈彤弓〉을 읊으니,
范宣子가 말하기를 “城濮戰爭에서 〈승리하고서〉 우리 先君 文公께서 衡雍으로 가서 戰功(戰利品)을 바치고 襄王彤弓을 받아 子孫에게 전할 寶藏(家寶)으로 삼았습니다.
范匄先君 守官後孫이니 어찌 감히 그대의 을 받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君子宣子를 알았다고 하였다.
叔孫穆子가 시를 읊다
襄公 14년, 諸侯大夫晉侯를 따라 나라를 토벌하였다. 晉侯國境에서 기다리고 六卿에게 諸侯軍을 거느리고 전진하게 하였다.
涇水에 이르러 諸侯軍이 강을 건너려 하지 않자, 叔向叔孫穆子를 찾아가 만나니 穆子가 〈匏有苦葉〉을 읊었다. 그러자 叔向은 물러나와 배[]를 준비하였다. 魯人莒人이 먼저 강을 건넜다.
高厚가 시를 읊다
襄公 16년, 平公이 즉위하여 諸侯들과 에서 宴會할 때 大夫들에게 춤을 추게 하며 말하기를 “를 노래하되 반드시 춤의 동작과 調和되게 부르라.”고 하였다.
나라 高厚가 맞지 않으니, 荀偃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諸侯 중에 딴마음을 품은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大夫들로 하여금 高厚結盟하게 하자, 高厚가 도망해 나라로 돌아갔다.
穆叔이 시를 읊다
襄公 16년, 겨울에 穆叔(叔孫豹)이 나라에 가서 聘問하고, 또 나라가 나라를 侵攻할 것을 말하자, 晉人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아직 禘祭를 지내지 못하셨고, 백성들이 아직 휴식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出兵貴國을 도와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히 〈貴國患亂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穆叔이 말하였다. “齊人이 아침저녁으로 우리나라 땅을 侵攻하여 怨恨을 풀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정중히 청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의 위급한 상황은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으므로 백성들이 목을 늘여 서쪽을 바라보며 ‘나라가 거의 우리를 救援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만약 執事가 한가할 때에 미쳐 〈우리나라를 구원한다면〉 아마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中行獻子를 만나 〈圻父〉를 읊자, 獻子가 말하기를 “나는 내 죄를 아니, 감히 執事를 따라 함께 社稷(나라)의 어려움을 救恤하지 않아 나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范宣子를 만나 〈鴻鴈〉의 卒章을 읊으니, 范宣子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있으니 어찌 감히 나라를 안정시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晉侯宴會를 열어 접대할 때 季武子가 시를 읊다
襄公 19년, 季武子나라에 가서 〈나라를 위해〉 出兵해준 것에 대해 拜謝하니, 晉侯宴會를 열어 접대하였다. 이때 范宣子國政을 담당하였는데 〈黍苗〉를 읊자,
季武子가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小國大國에게 기대하는 것이 百穀이 단비를 기대하는 것과 같으니, 만약 항상 단비와 같은 恩澤을 내려주신다면 天下和睦할 것이니 어찌 우리나라뿐이겠습니까?”라고 하고서 〈六月〉을 읊었다.
晉侯鄭伯를 읊다
襄公 26년, 衛侯나라에 가니, 晉人이 그를 잡아 士弱氏의 집에 가두었다. 가을 7월에 齊侯鄭伯衛侯를 돕기 위해 나라에 갔다.
晉侯宴會를 열어 두 임금을 함께 접대할 때 晉侯가 〈嘉樂〉을 읊으니, 齊侯相禮 國景子가 〈蓼蕭〉를 읊고, 鄭伯相禮 子展이 〈緇衣〉를 읊었다.
그러자 叔向晉侯에게 []하여 두 임금에게 拜謝하게 하고서 말하기를 “寡君은 감히 齊君께서 우리 先君宗廟를 편안하게 하신 것에 대해 拜謝하고, 鄭君께서 두마음을 품지 않는 것에 대해 拜謝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國子晏平仲을 보내어 叔向에게 사사로이 “晉君께서 밝은 德行諸侯에게 宣揚하여 患難救恤하고 결점을 보완하며 잘못을 바로잡고 煩亂을 다스려주셨기 때문에 盟主가 되신 것인데,
지금 臣下를 위해 임금을 잡았으니 어째서입니까?”라고 말하게 하였다. 叔向이 이 말을 趙文子에게 고하자, 趙文子가 이를 晉侯에게 고하니, 晉侯衛侯罪狀을 말해주면서 叔向을 시켜 두 임금에게 고하게 하였다.
그러자 國子가 〈轡之柔矣〉를 읊고 子展이 〈將仲子兮〉를 읊으니, 晉侯衛侯의 귀국을 허락하였다.
叔向이 말하기를 “ 穆公의 후손 일곱 家門 중에서 罕氏가 최후에 망할 것이다. 子展은 몸가짐은 儉素하고 마음 씀이 專一하다.”라고 하였다.
慶封은 〈叔孫이〉 를 읊은 〈이유를 알지 못하다〉
襄公 27년, 나라 慶封이 와서 聘問하였다. 叔孫이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慶封恭敬하지 않자, 叔孫이 〈相鼠〉를 읊었는데도 慶封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나라의 일곱 사람이 를 읊다
襄公 27년, 鄭伯垂隴에서 宴會를 열어 趙孟()을 접대할 때 子展伯有子西子産子太叔과 두 子石鄭伯侍從하였다.
趙孟이 말하기를 “일곱 분이 임금님을 시종하여 나를 榮光[]스럽게 하니 모두 를 읊어 임금님이 내리신 이 연회를 잘 마치기 바랍니다. 나 또한 를 듣고서 일곱 분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展이 〈草蟲〉을 읊자, 趙孟이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그대는 참으로〉 백성의 主人이 될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칭찬을〉 받을 만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伯有가 〈鶉之賁賁〉을 읊자, 趙孟이 “잠자리의 말은 문지방을 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郊野이겠습니까? 使臣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子西가 〈黍苗〉의 4을 읊자, 趙孟이 “우리 임금께서 계시니 내가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産이 〈隰桑〉을 읊자, 趙孟이 “나는 그 卒章만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太叔이 〈野有蔓草〉를 읊자, 趙孟이 “그대의 은혜입니다.”라고 하였다. 印段이 〈蟋蟀〉을 읊자, 趙孟이 “훌륭합니다. 집안을 보존할 주인이니, 내 기대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蟋蟀蟋蟀
公孫 이 〈桑扈〉를 읊자, 趙孟이 “사람을 사귐에 있어 傲慢하지 않으니 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말을 잘 지킨다면 福祿을 사양하고자 한들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宴會를 마친 뒤에 文子(趙孟)가 叔向에게 말하기를 “伯有는 장차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는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인데, 그의 뜻은 임금을 誣陷하고 공공연히 怨望하는 데 있고, 또 이 시로써 賓客光榮스럽게 하였으니 어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幸運이 있은 뒤에야 죽지 않고 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叔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너무 傲慢[]하니 이른바 ‘5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바로 저 사람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文子가 말하기를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여러 를 전할 主人이지만 그중에 子展이 가장 뒤에 망할 사람이니 윗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낮추기를 잊지 않습니다.
印氏가 그 다음으로 오래갈 사람이니 안락을 즐기되 職務廢棄[]하지 않습니다. 안락으로 백성들을 安定시키고 과도하게 백성을 부리지 않으니 남보다 뒤에 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薳罷를 읊다
襄公 27년, 나라 薳罷나라에 가서 結盟에 참가하니 晉侯宴會를 열어 그를 접대하였다. 연회를 마치고 나오려 할 때 薳罷가 〈旣醉〉를 읊자,
叔向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薳氏後孫나라에서 대대로 祿位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임금의 을 받고 나와서 민첩하게 응대하기를 잊지 않았으니 子蕩(薳罷)은 장차 政權을 잡게 될 것이다.
민첩함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반드시 백성을 잘 養育할 수 있으니 정권이 어디로 가겠는가?”
穆叔慶封에게 음식을 접대할 때 를 읊다
襄公 28년, 叔孫穆子慶封에게 음식을 접대하는데 慶封(고수레)하는 음식을 멀리 흩으니 穆子는 불쾌하여 樂工을 시켜 그를 위해 〈茅鴟〉를 朗誦하게 하였으나, 慶封은 〈작년에도 〈相鼠〉가 자기를 諷刺하는 것인 줄을 모르더니〉 이번에도 자기를 풍자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令尹趙孟를 읊다
昭公 원년, 令尹()이 宴會를 열어 趙孟을 접대할 때 令尹이 〈大明〉의 首章을 읊으니, 趙孟이 〈小宛〉의 제2을 읊었다.
宴會를 마친 뒤에 趙孟叔向에게 “令尹은 스스로 자신의 이 될 만하다고 여기니, 앞으로 어찌 되겠는가?”라고 묻자, 叔向이 “楚王하고 令尹하니 아마도 令尹楚王이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된다 하더라도〉 그 結果가 좋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趙孟이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叔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強者로서 弱者를 이기고서 편안히 여기는 것은 하기만 하고 의롭지 못한 것이니, 의롭지 못하면서 강한 자는 그 멸망이 반드시 빠른 것입니다.”
穆叔子皮를 읊다
昭公 원년, 여름 4월에 趙孟叔孫豹나라 大夫나라로 들어가니, 鄭伯宴會를 열어 이들을 함께 접대하기로 하였다.
子皮趙孟에게 가서 宴會日告知[]하였는데, 고지하는 의식이 끝나자 趙孟이 〈瓠葉〉을 읊었다. 子皮는 드디어 穆叔에게 가서 宴會日을 고지하고서 趙孟이 〈瓠葉〉을 읊은 것을 말하자,
穆叔이 말하기를 “趙孟一獻를 원하니 그대는 그 뜻을 따르시오.”라고 하였다. 子皮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穆叔이 말하기를 “그분이 원하는 바인데 어찌 감히 할 수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宴會日에 미쳐 나라는 五獻籩豆幕下에 준비하였다. 趙孟五獻를 사양하고서 子産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冢宰에게 〈一獻를 거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一獻를 사용하여 趙孟主賓으로 삼았다.
享禮(禮物을 올리는 )를 마치고 宴禮(宴會)를 거행하였는데, 穆叔이 〈鵲巢〉를 읊으니, 趙孟이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穆叔이 또 〈采蘩〉을 읊고서 말하기를 “小國蘩菜와 같지만 大國이 아껴 쓰신다면 어찌 大國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皮가 〈野有死麕〉의 卒章을 읊으니, 趙孟이 〈常棣〉를 읊고서 말하기를 “우리 兄弟 나라들이 친밀하게 지내며 안정을 추구한다면 삽살개도 짖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穆叔子皮나라 大夫가 일어나 절하고, 외뿔소의 뿔로 만든 술잔을 들고서 말하기를 “우리 小國들은 당신의 도움을 힘입어 禍難(나라의 責罰)에서 면한 줄을 압니다.”라고 하고서, 술을 마시며 즐겼다. 趙孟이 나와서 말하기를 “나는 다시 이런 즐거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季武子韓宣子를 읊다
昭公 2년, 봄에 晉侯韓宣子를 보내어 나라에 와서 聘問하였다. 昭公宴會를 열어 그를 접대할 때 季武子가 〈〉의 卒章을 읊으니, 韓宣子가 〈角弓〉을 읊었다.
季武子가 일어나 절하며 “감히 그대가 우리나라를 兄弟의 의리로 대해준 것[彌縫]에 대해 拜謝합니다. 우리 임금님께서는 기대하고 계십니다.”라고 하고서, 季武子가 〈節南山〉의 卒章을 읊었다.
宴會를 마친 뒤에 季氏의 집에서 酒宴을 베풀었는데, 季氏의 집에 아름다운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韓宣子가 그 나무를 칭찬하자, 季武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감히 이 나무를 잘 가꾸어 〈角弓〉의 뜻을 기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드디어 〈甘棠〉을 읊으니, 韓宣子가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는 召公의 경지에 미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楚子를 읊다
昭公 3년, 10월에 鄭伯나라에 갈 때 子産으로 수행하였다. 楚子宴會를 열어 鄭伯을 접대할 때 〈吉日〉을 읊었다.
宴會를 마친 뒤에 子産이 사냥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니, 楚王鄭伯과 함께 江南雲夢에서 사냥하였다.
나라의 여섯 이 시를 읊다
昭公 16년, 나라 韓起나라에 빙문을 갔다. 나라 六卿郊外에서 宣子餞送할 때 宣子가 말하기를 “여러 君子께서는 모두 한 수씩 읊기를 청합니다. 나 또한 를 듣고서 나라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子齹가 〈野有蔓草〉를 읊자, 宣子는 “孺子가 훌륭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子産이 〈鄭風〉의 〈羔裘〉를 읊자, 宣子는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子太叔이 〈褰裳〉을 읊자, 宣子는 “내가 지금 이곳에 와 있으니 어찌 감히 그대에게 다른 사람에게 가는 勞苦를 끼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太叔拜謝하니, 宣子는 “훌륭합니다. 그대가 〈變心警戒한〉 이 를 말한 것이여! 이 를 읊어 〈나를 깨우치지〉 않았다면 어찌 두 나라가 끝까지 〈友好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子遊가 〈風雨〉를 읊고, 子旗가 〈有女同車〉를 읊고, 子柳가 〈蘀兮〉를 읊으니,
宣子는 기뻐하며 “나라는 강성해질 希望이 있습니다. 여러 君子께서 임금의 을 받고 나와 나를 餞送하면서 읊은 나라의 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모두 親愛友好를 표현한 였습니다.
여러 君子께서는 子孫이 여러 세대 동안 大夫의 직위를 누릴 것이니 나라는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小邾國穆公季平子를 읊다
昭公 17년, 小邾國穆公이 와서 朝見하니 昭公이 잔치를 열어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때 季平子가 〈采菽〉을 읊으니 穆公은 〈菁菁者莪〉를 읊었다. 昭子가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才能이 없다면 어찌 나라를 오래도록 소유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宋公를 읊다
昭公 25년, 宋公宴會를 열어 昭子를 접대할 때 〈新宮〉을 읊으니 昭子는 〈車舝〉을 읊었다.
이튿날 宴會할 때 술을 마시고 즐거워서 宋公昭子를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고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때 樂祁가 〈宴會의 진행을〉 도왔는데, 물러나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宋君叔孫이 모두 죽을 것이다. 내 듣건대 ‘즐거울 때 슬퍼하고 슬플 때 즐거워하는 것은 모두 常心을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마음의 精爽(정신)을 魂魄이라 하는데 魂魄이 떠났으니 어찌 오래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 말하였다. “人心天機에서 나왔으니 義例訓詁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는 마음속에 있는 온전한 經典이니 春秋君臣들은 일로 인하여 시를 읊고 구절을 끊어 의미를 취하였다.
이는 신묘한 마음이 통해서 이치를 만난 것이지 말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니 를 사용하기를 잘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에 이치가 있음을 밝혔으니 〈작자는〉 아마도 안의 뜻을 깊이 터득한 자일 것이다.
지극한 이치를 간직한 곳은 마음으로 만날 수는 있으나 힘으로 구할 수는 없다.注+시작하는 말이 매우 이치가 있으니, 이 한 편의 主意가 여기에 있다. 잘려진 채 남겨진 簡編에 적힌 글은注+온전하게 전해지지 못한 古人의 책을 이른다. 애써 읊조리고 외우더라도注+古人의 책을 읽는 것이다. 자고 나면 이미 잊어버리나,注+혹 하룻밤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입으로는 그 글을 외우나 마음으로 그 맛을 터득함이 없기 때문이다.
길거리나 마을에서 불리는 노래가注+지금의 歌曲의 종류와 같다는 말이다. 우연히 내 귀에 들어오게 되면注+우연히 듣는다는 말이다. 종신토록 잊히지 않는다.注+종신토록 기억하여 잊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천하의 이치는 본래 구하는 데서 현혹되고 만나는 데서 참되게 된다.注+문장수법이 좋다. 은 미혹됨이다. 이는 ‘마음으로 만날 수 있으나 힘으로 구할 수는 없다.’는 뜻을 푼 것이다. 잘라져 나가 잔존된 簡編으로 여러 경전을 비유하였고, 길거리와 마을에서 불리는 노래로 를 비유한 것이다.
이치는 내 마음에 닿는 것이 있는 것이지,注+‘만나다[]’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의도해서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며 약속해서 서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注+이치와 마음은 저절로 서로 만나는 것이니, ‘’와 ‘’는 모두 ‘’자를 반영한 것이다. 성대하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어서, 비록 내가 한 것이라도 남에게 말해줄 수 없으니注+자득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힘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注+첫머리의 말에 호응한다.
한번 구함을 겪게 되면 비록 보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바르지 않다.注+구한다면 얻는 것이 참이 아니다. 먹고 마시는 일상생활에 지극한 이치 아님이 없으나,注+종신토록 행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오직 내가 절박해서 힘으로 구하면,注+힘으로 구할 수 없는 뜻을 밝힌 것이다. 얻었다가도 잃어버리게 된다.注+참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注+구하기를 더욱 힘쓴다는 말이다. 나날이 천착함에 빠지면,注+도리어 천착하여 를 해친다는 말이다.
일찍이 이 이치가 내 앞에 교차하여 일어나는 줄 몰라서 내 스스로 그것과 만나지 못하니,注+마음이 이치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힘을 쓰지 못하는 잘못이 아니라 힘을 쓰는 잘못이다.注+힘으로 구하기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천하의 배우는 자들은 모두 힘을 쓰지 않는 해로움은 알지만,注+冉求가 힘이 부족하다고 여겨 스스로 미리 한계를 긋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힘을 쓰는 해로움은 모른다.注+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힘을 씀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됨을 알아서注+‘가령 이와 같을 수 있다면’의 뜻이다. 힘쓰는 것을 다 제거해 힘을 씀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注+이는 ‘생각하지 않고도 알고, 힘쓰지 않고도 에 맞는’ 신묘함을 이른다. 거의 〈마음으로 이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注+이렇게 되면 거의 진정으로 터득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곧 學問의 지극한 공효이며 聖神能事이니 ‘庶幾’일 뿐만이 아니다. ‘’자의 쓰임이 온당치 못하다. ○나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이 글의 첫머리의 말이 비록 玄妙한 말이기는 하지만 도리어 병폐가 없을 수 없다. 孔子는 ‘하루라도 에 힘을 쓸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나는 힘이 부족한 자는 보지 못했다.’라고 했으니, 聖人은 힘을 쓰는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孟子는 ‘지혜를 비유하자면 솜씨 좋음이고, 聖人을 비유하자면 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인의 힘은 伯夷柳下惠伊尹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혜의 솜씨 좋음은 集大成孔子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힘쓰는 것을 다 제거해 힘을 씀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이 말은 정도가 지나치다.”
二帝三王의 ≪書經≫과注+二帝는 ≪書經≫의 〈虞書〉를 이르고, 三王은 ≪書經≫의 〈夏書〉‧〈商書〉‧〈周書〉를 이른다. 伏羲氏文王孔子의 ≪易經≫과注+伏羲氏가 비로소 八卦를 긋고 이것을 중첩하여 64괘를 만드니, 文王 아래에 〈彖辭〉를 지었고, 孔子는 〈彖傳〉 2권‧〈象辭〉 2권‧〈繫辭〉 2권과 아울러 〈文言〉‧〈說卦〉‧〈序卦〉‧〈雜卦〉를 지었으니 이것이 十翼이다.禮經≫에 기록된 儀禮典章注+周公은 ≪儀禮≫와 ≪禮記≫를 지었으니, 이른바 ‘經禮가 3백 조항이고 曲禮가 3천 조항이다.’라는 것이 이것이다.樂經≫의 節奏注+樂書는 오늘날 더 이상 전해지지 않으나, ≪禮記≫ 〈樂記〉와 같은 종류가 그 나머지이다.春秋≫의 포폄은注+孔子나라 史書에 의거해 ≪春秋≫를 지음에 加筆減削을 더했다. 모두 천하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들이다.注+’자의 표현이 좋다. 이치는 본래 형체가 없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만 여러 경전을 빌려 형용한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은 이치로 經典을 보지 않고 경전으로 경전을 보았으니,注+이 이하의 글은 義例訓詁가 성인의 經典을 파쇄하였음을 비난한 것이다. 도려내고 쪼개어 분석하며 새기고 쌓아 소통하고 천착하는 등의 변질이 많아 천하에 온전한 경전이 없게 되었다.注+刳剔離析’은 義例의 폐단이고, ‘彫繢疏鑿’은 訓詁의 폐단이다.
聖人이 이 점을 걱정하여注+천하에 온전한 경전이 없음을 근심한 것이다. 널리 하늘과 땅 사이를 관찰해보니, 새가 봄에 울고, 벌레가 가을에 욺에注+韓愈의 〈送孟東野序〉에 “새로써 봄에 울고, 우레로써 여름에 울며, 벌레로써 가을에 울고, 바람으로써 겨울에 운다.”라고 하였다. 匹夫匹婦가 기뻐하고 위로받으며 편안해짐과 슬프고 노엽고 참담함이,注+이것은 心情의 변화이다.
天機에서 움직여注+벌레와 새가 스스로 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張子厚가 나귀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과 〈程顥가〉 ‘나의 意思(仁心)와 똑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 모두 天機가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막을 수 없어서 저절로 시를 읊고 노래 부르는 사이에 그 소리가 새어나왔다.注+이는 가 지어진 이유이다. 이에 근심이 풀려 기뻐하며 말하기를注+’자는 앞글의 ‘’자와 서로 호응한다. “아직 천착되지 않은 天理가 오히려 여기에 존재하고 있구나!”注+천지의 자연에서 나오기 때문에 천착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본래 匹夫匹婦의 가슴속에 있는 온전한 경전인데,注+앞글의 ‘천하에 온전한 경전이 없다.’와 서로 호응한다. 갑자기 이를 가져다가 ≪書經≫‧≪易經≫‧≪禮經≫‧≪樂經≫‧≪春秋≫의 사이에 열거하여 함께 세어서 이를 ‘六經’이라고 하였다.注+앞글에서 말한 五經에 지금 ≪詩經≫을 더하여 六經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그네나 천첩의 말이注+는 나그네이다. 예컨대 ≪詩經≫ 〈邶風 式微〉편은 나그네에 대한 가사이고, ≪詩經≫ 〈召南 小星〉은 賤妾에 대한 가사이다. 의 바른 말씀 및 큰 교훈과注+五經은 이 여섯 성인의 말씀에 대하여 우선 그 대강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나란히 열거되어 輕重의 차이가 없게 되었다.注+이에 ≪詩經≫이 五經과 아울러 전해졌다는 말이다.
聖人의 뜻은注+詩經≫을 경전으로 삼은 뜻을 이른다. 장차 匹夫匹婦의 가슴속에 보존된 온전한 경전을 들어 천하의 파열되어 온전치 못한 경전을 구제해서,注+이 구절이 이 글의 관건이다. 앞 두 단락의 뜻이 매우 긴밀하니, 五經義例訓詁에 의해 파쇄되었기 때문에 파열되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학자들에게 이른바 라는 것은 본래 시골마을이나 초야의 민간에서 나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발설하고 붓을 들어 이루어졌으니 義例로 바로잡거나 訓詁로 국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注+義例는 종류에 따른 조항을 이르고, 訓詁注釋을 이른다. 〈≪詩經≫은〉 마음이 저절로 그러한 데서 나왔기 때문에 義例訓詁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義例學訓詁學에 이르러 다 폐지되었다. 이런 종류의 학풍이 폐지되고 나니, 어지럽게 섞어서 연구하고 탐색하는 사사로움으로 그 뜻을 구속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하여 한 번 시를 읊조리고 諷諫하는 가운데注+읊어 노래할 수 있고, 諷諫하여 외울 수 있다는 말이다. 聲調가 바뀌고 天氣가 돌아서注+詩經≫으로 인하여 天機를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여유롭고 한가하면서도注+가사가 박절하지 않다는 말이다. 지극한 이치를 저절로 만나니,注+힘써 구하지 않아도 마음이 이치와 만난다는 말이다. 한 조각 말에도 맛이 있어 五經의 뜻이 모두 얼음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注+경전의 종류는 다르나 지극한 이치는 같으니, 과연 ≪詩經≫ 안에서 참된 의미를 터득한다면 五經의 이치가 모두 봄 얼음처럼 풀릴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聖人의 평이함으로 五經의 지리함을 구제하려는 것이니,注+平易는 가슴속의 온전한 경전을 이르고, 支離는 파열되어 온전하지 못함을 이른다. 후세에 도리어 五經의 지리함으로 의 평이함을 바꿀 줄 누가 알았겠는가?注+이 구절은 結尾의 뜻을 포괄하니, 後世 사람들은 또 義例訓詁로 ≪詩經≫을 파쇄했음을 이른다.
대체로 春秋時代를 관찰해보니 列國朝聘할 때에 모두 를 읊어 서로 하였다.注+〈여기부터〉 본편의 일로 들어간다. 는 일로 인한 것이지注+우연히 일로 인하여 시를 읊었다는 말이다. 일을 떠나 에 나아간 것이 아니고,注+지금의 일을 떠나 고인의 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을 에 부친 것이지注+일로 인해 뜻을 시에 부쳤다는 말이다. 를 떠나 일에 나아간 것이 아니다.注+고인의 시를 떠나 오늘의 일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근육과 힘줄의 사이처럼 미세한 틈새에서 의미를 전하여注+荘子≫ 〈養生主에 나온다. 庖丁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고 말하였다.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신묘한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고,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래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이므로 經絡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밖으로 암말인지 수말인지 검은지 누른지의 형적이 달라지는 것처럼,注+列子≫ 〈說符에 나온다. 〈말을 잘 보는 伯樂 穆公에게〉 九方臯라는 자가 있으니 만나줄 것을 청하였다. 穆公이 그에게 명마를 구해 오게 하였는데 석 달 만에 돌아와서 아뢰었다. “〈명마를〉 구했습니다.” 목공이 물었다. “어떤 말이냐?” 답하였다. “누런 암말입니다.” 목공이 사람을 보내어 말을 몰고 오게 하였는데, 검은 수말이었다. 목공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백락을 불러 말하였다. “그대가 말을 구해 오게 한 자는 누른지 검은지, 수말인지 암말인지도 모르니, 어떻게 말을 알아보겠는가?” 백락이 말하였다. “이자는 저보다 천 배 만 배 뛰어나 그 재주를 헤아릴 수 없는 자입니다. 九方臯天機만 볼 뿐입니다.” 말이 도착하였는데 과연 천하의 좋은 말이었다. 구절을 끊어 의미를 취하니,注+춘추시대에 시를 읊은 자들은 章句를 끊어 뜻을 취해서 한때의 흥취를 부쳤다. 그러므로 遷就의 폐단이 없어 庖丁이 소를 해체하고 九方臯가 말을 보는 것과 같아서 天機의 신묘함을 얻었다. 신묘한 마음으로 이치를 만날 수 있지 말로 찾을 수는 없다.注+첫머리의 主意에 호응한다.
보잘것없는 누추한 유자들의 義例訓詁는 이 점에서 모두 실패한 것이니,注+旨趣를 깊이 터득했기 때문에 義例訓詁를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 를 잘 사용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注+〈이와 같은 이들을 작자가〉 깊이 허용한 말이다.
당시에 先王의 법도는 점점 땅에 추락하였고, 卜筮에 빠졌으며, 는 참람한 데로 떨어졌고, 은 음란한 데로 흘렀으며, 는 순리를 어기는 데서 잘못되었다.
비록 제후들에게 見聞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左史倚相 같은 이도 三墳五典八索九丘를 외우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 데 불과했으나, 를 읊는 것만은 아직도 누추한 유자들의 학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先王의 가르침 중에 유린되지 않아 우뚝 홀로 온전한 것은 오직 일 뿐이다. 이는 孔子가 이미 六經을 논하고 또 〈伯魚가〉 뜰을 지날 때 를 먼저 물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에서 불태워지고,注+ 始皇은 경전의 학술을 불태워 없앴다. ○이 이하의 글은 후세에서는 도리어 五經의 지리함으로 의 평이함을 변질시켰음을 말하였다. 나라에서 뒤섞였으며,注+나라 儒者들은 章句의 학문을 전공하여 ≪≫를 뒤섞었다는 말이다. 齊詩魯詩로 갈라지고,注+仲尼가 죽은 뒤에 ≪≫는 넷으로 갈라졌다. 申公은 ≪魯詩≫를 지었고, 轅固는 ≪齊詩≫를 지었으며, 나라의 韓生(韓嬰)은 ≪韓詩≫를 지었고, 毛公(毛亨毛萇)은 ≪毛詩≫를 지어서 오늘날 세상에 유행한다. 讖緯說에 빠지고,注+나라의 五經 해석에는 모두 緯書雜言圖讖의 일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五際로 어지럽게 되었으며,注+前漢書≫ 〈翼奉傳〉에 “≪≫에는 五際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에 ≪韓詩內傳≫을 인용하여 “〈五除는〉 이니 陰陽이 만나는 해이다.”라고 하였다.
專門으로 편협해져서,注+專門의 배움은 전수받은 자가 각각 자기 스승의 학설만을 지키는 것을 이른다. 자디잘게 쪼개고,注+黃鍾의 대통에는 1,200개의 기장알이 담기는데, 무게는 12이다. 24를 1이라 한다. 마디마디 따졌으니,注+黃鍾의 길이는 9이다. 10을 1이라 한다. ○이 구절은 지리함의 폐단을 말하였다. 어찌 다시 가 있을 수 있겠는가?注+≫가 분석되어 가슴속의 온전한 경전이 다시 義例訓詁에 의해 지리하게 되었으니, 비록 ≪≫가 없다고 해도 옳다는 말이다. 아! 어떻게 하면 춘추시대에 를 읊던 의미를 말할 수 있을까?注+‘혹시 지리함의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까.’의 뜻이다.


역주
역주1 吾不如衰之文也 : ‘文’은 세련된 말솜씨[文辭]가 있다는 말이다.〈杜注〉
역주2 公子賦河水 : 〈河水〉는 逸詩(≪詩經≫에 수록되지 않은 詩)이다. 河水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秦나라를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3 公賦六月 : 〈六月〉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尹吉甫가 周 宣王을 도와 征伐한 일을 讚揚한 詩인데, 公子가 晉나라로 돌아가 임금이 되면 반드시 王國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옛날에는 禮會(軍事의 會合이 아닌 友好의 會合)에 古詩를 이용해 자신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에 ‘賦’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읊은 詩는 斷章인데 온전한 詩篇의 이름을 稱한 것은 대체로 首章의 뜻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이와 같다.〈杜注〉
역주4 重耳拜賜 : 拜賜는 내린 은혜나 또는 말을 절하고서 받는 것이다.
역주5 公子降拜稽首 公降一級而辭焉 : 한 계단을 내려가 公子의 稽首를 사양한 것이다.〈杜注〉
역주6 君稱所以佐天子者命重耳 重耳敢不拜 : 〈六月〉 詩의 首章에는 王國을 바로잡을 것을 말하였고, 다음 章에는 天子를 도울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趙衰가 뭉뚱그려 말한 것이다. 明年에 秦伯이 重耳를 晉나라의 임금으로 들여보낸 張本이다.〈杜注〉
역주7 賦菁菁者莪 : 〈菁菁者莪〉는 ≪詩經≫ 〈小雅〉의 篇名인데, 이 편의 ‘이미 君子를 만나보니 내 마음 즐겁고, 君子는 禮儀가 있다.’는 句를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8 莊叔以公降拜 : 晉侯가 文公을 君子에 비교한 데 대해 謝禮하라는 말이다.〈杜注〉
역주9 小國受命於大國 : 小國은 魯나라이고 大國은 晉나라이다. 命은 晉侯가 文公을 君子에 비유해 읊은 시를 말한다.
역주10 晉侯降 辭 : 뜰을 내려가서 文公에게 사양한 것이다.〈杜注〉
역주11 登 成拜 : 함께 堂上으로 올라와서 拜禮를 이룬 것이다.〈杜注〉
역주12 公賦嘉樂 : 〈嘉樂〉은 ≪詩經≫ 〈大雅〉의 篇名인데, 이 편의 ‘드러난 아름다운 덕이 백성과 관리에게 모두 합당하니 하늘에게 복록을 받는다.’는 句를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13 [爲]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였다.
역주14 [爲]賦湛露及彤弓 : 禮의 正常이 아니다. 公이 특별히 樂人에게 명하여 자신의 뜻을 보이게 하였기 때문에 ‘爲賦’라고 한 것이다. 〈湛露〉와 〈彤弓〉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杜注〉
역주15 使行人私焉 : 사사로이 묻게 한 것이다.
역주16 臣以爲肄業及之也 : 臣은 樂工이 이 樂歌를 연습하다가 우연히 이 詩에 미친 것으로 여겼고, 臣을 접대하기 위해 연주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附注〉 肄는 익히는 것이다. 魯人이 읊어서는 안 될 詩를 읊었는데도 寗武子는 모르는 체하였으니, 이 점이 바로 ‘其愚不可及’이다.〈杜注〉 ‘其愚不可及’은 ≪論語≫ 〈公冶長〉에 있는 말로 孔子께서 寗武子를 칭찬한 말씀이다. ≪論語≫에 “孔子께서 寗武子를 두고 말씀하기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지혜를 숨기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처신하니, 그 지혜는 따를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하였다.
역주17 朝正於王 : 朝正을 杜預는 ‘王께 朝會하여 政敎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楊伯峻의 설을 취해 번역하였다. 襄公 29년 傳에 “經에 ‘봄 周王 正月에 公이 楚나라에 있었다.’고 한 것은 正月에 祖廟에 朝見하지 않은 것을 해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正에는 祖廟로 가서 賀正하는 것을 ‘朝正於廟’라고 하니, 이곳의 ‘朝正於王’도 正月에 王께 朝見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春秋左傳注≫)
역주18 於是乎賦湛露……諸侯用命也 : 〈湛露〉에 ‘촉촉히 젖은 이슬은 태양이 아니고는 말릴 수 없네.’라고 하였는데, 晞는 乾(마름)이다. 이슬이 해를 보면 마르는 것이 諸侯가 天子의 命을 받아 행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9 諸侯敵王所愾 : 敵은 當과 같고, 愾는 恨怒이다.〈杜注〉
역주20 以覺報宴 : 覺은 明이다. 諸侯가 四夷를 토벌해 공을 세우면 왕이 弓矢를 하사하고 또 〈彤弓〉 詩를 노래하여 功을 보답하는 宴樂임을 밝힌다는 말이다.〈杜注〉
역주21 今陪臣來繼舊好 : 바야흐로 天子의 音樂을 논하였기 때문에 ‘陪臣’이라고 自稱한 것이다.〈杜注〉
역주22 君辱貺之……以自取戾 : 貺은 賜이고, 干은 犯이고, 戾는 罪이다.〈杜注〉
역주23 將及 : 장차 禍가 몸에 미칠 것이라는 말이다.〈杜注〉
역주24 攝卿以往 可也 : 大夫를 卿의 代理로 보내어 公子 雍을 맞이하게 하라는 말이다. 攝卿은 大夫에게 잠시 동안 卿의 직무를 대리하게 하는 것이다.〈附注〉
역주25 爲賦板之三章 : 〈板〉은 ≪詩經≫ 〈大雅〉의 篇名이다. 그 3章의 ‘나무꾼의 말도 허술히 여길 수 없는데 하물며 동료의 말이겠느냐?’의 뜻을 취한 것이다. 僖公 28년에 荀林父는 中行(항)을 거느렸고, 先蔑은 左行을 거느렸기 때문에 同僚라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26 鄭伯會公于棐……公皆成之 : ≪春秋左氏傳≫에는 이 기사 바로 앞에 “겨울에 文公이 晉나라에 가서 晉君에게 朝見하고 또 전에 맺은 盟約을 거듭 다졌다. 衛侯가 沓에서 公과 會合하여 晉나라와의 和平을 주선해주기를 청하였고, 公이 돌아올 때……[公如晉 朝且尋盟 衛侯會公于沓 請平于晉 公還……]”라고 하였다. 鄭나라와 衛나라가 楚나라에 붙자 晉나라가 불쾌하게 여기니, 두 나라는 晉나라를 두려워하여 公을 통해 晉나라에 화평을 청한 것이다.
역주27 鄭伯與公宴于棐 子家賦鴻鴈 : 子家는 鄭나라 大夫 公子 歸生이다. 〈鴻鴈〉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侯伯이 鰥寡를 가엾게 여겨 길을 걷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취하여, 鄭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니 魯侯에게 다시 晉나라로 돌아가서 鄭나라를 구휼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28 季文子曰 寡君未免於此 : 魯나라도 鄭나라와 같이 미약한 國力을 근심하고 있다는 말이다.〈杜注〉
역주29 文子賦四月 : 〈四月〉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여행에서 돌아갈 시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돌아가서 제사를 지내기를 생각한다는 뜻을 취하여, 도로 晉나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30 子家賦載馳之四章 : 〈載馳〉는 ≪詩經≫ 〈鄘風〉의 篇名이다. 4章 이하를 읊은 것이다. 小國에 위급한 일이 있어 大國에 호소해 구조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31 文子賦采薇之四章 : 〈采薇〉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어찌 편안히 거처할 수 있으리, 한 달 사이에 세 번 승리하였네.”라는 詩句의 뜻을 취하여 鄭나라를 위해 다시 晉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감히 편안히 있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32 鄭伯拜 : 文公이 鄭나라를 위해 가겠다고 한 데 대해 謝禮한 것이다.〈杜注〉
역주33 季文子如宋致女 : 딸이 出嫁한 지 3개월 만에 또 大夫를 보내어 聘問하는 것을 ‘致女’라 하는데, 이는 婦人이 되는 禮를 이룬 것을 致賀하고 婚姻의 友好를 돈독히 하기 위함이다. ≪左氏會箋≫에 의하면 며느리가 들어온 지 3개월 만에 宗廟에 謁見시키고, 宗廟에 謁見한 뒤에 남편과 잠자리를 하고서 비로소 夫人이 되는데, 宗廟에 謁見하기 전에는 그 나라의 夫人이 되어 그곳에 남느냐 아니면 쫓겨나 돌아오느냐가 未定이기 때문에 딸을 시집보낸 나라에서는 이때를 기다려 大夫를 보내어 딸을 그 나라에 바치는[致] 禮를 거행한다.
역주34 賦韓奕之五章 : 〈韓奕〉은 ≪詩經≫ 〈大雅〉의 篇名이다. 제5장은 蹶父가 韓侯에게 딸을 시집보내고서 딸이 사는 것을 살펴보니 韓에서의 생활이 매우 안락하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文子가 이 詩를 읊어, 魯侯는 蹶父의 德을 가졌고 宋公은 韓侯와 같으며 宋나라는 韓나라처럼 안락하다는 것을 비유하였다.〈杜注〉
역주35 穆姜出于房……施及未亡人 : 穆姜은 伯姬의 母后이다. 伯姬가 宣公의 딸이기 때문에 先君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고, 成公의 누이이기 때문에 嗣君에 미쳤다고 말한 것이다. 文子가 宋나라의 생활이 안락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기뻐서 나와 그 勞苦에 감사한 것이다. 남편이 죽은 부인은 스스로를 未亡人이라고 칭한다.〈杜注〉
역주36 敢拜大夫之重勤 : 文子가 上卿으로 伯姬의 婚事를 주관하였는데, 지금 또 宋나라에 가서 致女하였기 때문에 거듭 수고했다고 한 것이다.(≪左氏會箋≫)
역주37 又賦綠衣之卒章而入 : 〈綠衣〉는 ≪詩經≫ 〈邶風〉의 篇名인데, 그 詩의 ‘내 古人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을 아셨다.’는 말을 취하여 文子의 말이 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38 且拜公之辱 : 襄公이 금년 봄에 晉나라에 朝見한 것에 대해 拜謝한 것이다.〈杜注〉
역주39 宣子賦摽有梅 : 〈摽有梅〉는 ≪詩經≫ 〈召南〉의 篇名이다. 摽는 落이다. 梅實의 盛함이 極에 달하면 떨어지니, 詩人이 이를 보고 女人의 얼굴이 한껏 피어나면 衰함이 있는 것을 興(詩의 한 體制로 어떤 사물을 보고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을 먼저 말하여 읊고 싶은 말을 일으키는 것)하여 총각들이 아내를 구하려면 제때에 미치는 것이 좋다고 읊은 것이다. 范宣子는 魯나라가 제때에 맞춰 出兵하여 晉나라와 함께 鄭나라를 토벌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이 詩를 읊어 그 뜻을 表한 것이니 서둘러 달려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摽有梅摽有梅
역주40 誰敢哉 : 누가 감히 晉나라의 命을 따르지 않겠느냐는 말이다.〈杜注〉
역주41 今譬於草木……君之臭味也 : 〈杜注〉에서는 “같은 무리라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附注〉에서는 “花草의 香氣와 나무의 열매처럼 냄새와 맛이 같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范宣子가 ‘摽有梅’를 읊었기 때문에 季武子가 草木으로 비유한 것이다. 晉君이 꽃과 과일이라면 魯君은 단지 그 꽃의 향기와 과일의 맛일 뿐이라고 하여 晉君을 높이고서, 또 兩國의 情이 一體와 같다고 한 것이다.〈楊注〉
역주42 歡以承命 : 즐거운 마음으로 晉나라의 命을 받들어 따르겠다는 말이다.〈附注〉
역주43 何時之有 : 林堯叟는 “出兵의 遲速을 命에 따를 뿐이니, 어찌 시기에 구애되겠느냐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꽃과 향기, 과일과 맛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魯나라와 晉나라는 一體여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어찌 시기의 遲速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역주44 武子賦角弓 : 〈角弓〉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兄弟와 姻戚은 서로 멀리하지 말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45 武子賦彤弓 : 〈彤弓〉은 天子가 功이 있는 諸侯에게 弓矢를 下賜할 때 읊는 詩이다. 季武子는 晉君이 文公의 霸業을 계승하여 다시 周王께 彤弓을 받기를 바란 것이다.〈杜注〉
역주46 城濮之役 : 城濮의 戰爭은 僖公 28년에 있었다.〈杜注〉
역주47 以爲子孫藏 : 이것을 家寶로 간직하여 子孫에게 보인다는 말이다.〈杜注〉
역주48 先君守官之嗣也 敢不承命 : 范宣子는 자기가 先君 때 守官(卿)이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어 守官이 되었으니, 감히 命(武子의 命)을 버리지 않고 晉君을 匡輔(바르게 인도함)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49 君子以爲知禮 : 〈彤弓〉을 읊은 뜻은 그 뜻이 晉君에 있었기 때문에 范匄(宣子)가 받아들인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禮를 알았다는 것이다.〈杜注〉
역주50 晉侯待于竟 : 秦나라와 晉나라의 接境에서 기다린 것이다.〈附注〉
역주51 及涇 不濟 : 諸侯의 군대가 涇水를 건너려 하지 않은 것이다. 涇水는 安定 朝那縣에서 發源하여 京兆 高陸縣에 이르러 渭水로 들어간다.〈杜注〉
역주52 穆子賦匏有苦葉 : 詩는 ≪詩經≫ 〈邶風〉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입은 채로 건너고 물이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넌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자기의 뜻은 반드시 건너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53 歌詩必類 : 杜預는 ‘類’를 ‘恩好之義類(恩愛하고 友好하는 義理와 서로 같은 것)’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그 노래가 반드시 춤과 서로 配合하는 것이라고 한 楊伯峻의 說을 취해 노래의 가락이 춤의 동작에 調和되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54 齊高厚之詩不類 : 齊나라가 두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杜注〉
역주55 諸侯有異志矣 : 諸侯가 한마음으로 晉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附注〉
역주56 使諸大夫盟高厚 高厚逃歸 : 大國인 齊나라의 高厚가 이와 같이 하였으니 반드시 齊나라를 따르는 小國이 있을 줄을 안 것이다.〈杜注〉
역주57 且言齊故 : 齊나라가 재차 魯나라를 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58 禘祀 : 三年喪을 마친 뒤에 지내는 吉祭이다.〈杜注〉
역주59 與民之未息 : 새로 許나라와 楚나라를 討伐하였기 때문이다.〈杜注〉
역주60 庶幾乎 : 晉人이 와서 救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杜注〉
역주61 比執事之閒 恐無及也 : 만약 晉나라가 한가해질 때를 기다려 魯나라를 救援하고자 한다면 魯나라는 이미 망하여 事機(機會)에 미칠 수 없을까 두렵다는 말이다.〈附注〉
역주62 見中行獻子 : 獻子는 荀偃이다. 그의 아버지 荀林父가 中軍을 거느린 적이 있었으므로 中行氏로 호칭한 것이다.〈附注〉
역주63 賦圻父 : 〈圻父〉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周나라 司馬는 封畿(王畿)의 兵甲을 관장하기 때문에 그를 ‘圻父’라 한다. 圻父가 王의 爪牙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않아 백성으로 하여금 困難과 勞苦의 憂患을 당하게 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한 것을 꾸짖은 詩이다.〈杜注〉
역주64 敢不從執事以同恤社稷 而使魯及此 : 어찌 감히 魯나라의 諸臣을 따라 함께 社稷(魯나라)의 危難을 救恤하지 않아 魯人으로 하여금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하겠느냐는 말이다.〈附注〉
역주65 賦鴻鴈之卒章 : 〈鴻鴈〉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卒章에 “鴻鴈이 날면서 우는 소리 구슬프네. 이 明哲한 이만이 우리들 고생한다 하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魯나라 사람들이 憂患과 苦難을 당하여 한탄하는 것이 마치 鴻鴈이 살 곳을 잃고 구슬피 우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큰 놈을 ‘鴻’이라 하고, 작은 놈을 ‘鴈’이라 한다.〈杜注〉
역주66 敢使魯無鳩乎 : 鳩는 安集(安定)이다.〈杜注〉
역주67 范宣子爲政 : 荀偃의 뒤를 이어 中軍을 거느린 것이다.〈杜注〉
역주68 賦黍苗 : 黍苗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召伯이 諸侯를 勞來(恩德으로 慰勞해 오게 함)한 것이 마치 비가 기장 싹을 자라게 한 것과 같다고 讚美한 詩인데, 晉君이 魯나라를 위해 근심하고 괴로워한 것이 召伯과 같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69 賦六月 : 〈六月〉(≪詩經≫ 〈小雅〉)은 尹吉甫가 天子를 보좌해 征伐한 것을 서술한 詩인데, 晉侯를 出征해 王國을 바로잡은 尹吉甫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70 衛侯如晉 : 衛侯가 晉나라에 간 것은 두 사람의 放免을 請하기 위해서이다.〈附注〉
역주71 晉人執而囚之[於]士弱氏 : 士弱은 獄을 주관하는 晉나라 大夫이다. 士弱의 집에 가둔 것이다.〈附注〉
역주72 [於] : 저본에는 ‘於’가 없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73 齊侯鄭伯爲衛侯故如晉 : 함께 衛侯의 放免을 청하고자 해서이다.〈杜注〉
역주74 晉侯兼享之 晉侯賦嘉樂 : 〈嘉樂〉은 ≪詩經≫ 〈大雅〉의 篇名이다. 그 詩의 “아름답고 和樂한 君子여, 아름다운 德이 백성에게도 마땅하고 官人에게도 마땅하니, 하늘에서 녹을 받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75 賦蓼蕭 : 〈蓼蕭〉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太平의 恩澤이 멀리 미친 것이 마치 이슬이 쑥에 내려 적신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여, 晉君의 은택이 諸侯에 미친 것을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76 賦緇衣 : 〈緇衣〉는 ≪詩經≫ 〈鄭風〉의 篇名이다. “그대의 館舍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내 그대에게 음식을 접대하리라.”는 뜻을 취하여, 감히 晉나라의 뜻을 어겨 멀리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77 寡君……敢拜鄭君之不貳也 : 〈蓼蕭〉와 〈緇衣〉 두 詩는 趣旨가 각각 같지 않기 때문에 두 임금에게 拜謝한 말도 달랐다.〈杜注〉 近親의 廟를 ‘宗’이라 하고, 遠祖의 廟를 ‘祧’라 한다.〈附注〉
역주78 恤其患而補其闕 正其違而治其煩 : 衛나라에 孫林父가 있는 것이 ‘患’이고, 능히 懲罰하지 못하고 서로 공격한 것이 ‘闕’이고, 晉나라의 수비병 3백 人을 죽인 것이 ‘違’이고, 공격하고 서로 원망해 蚌鷸(大蛤과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고 있는 것이 ‘煩亂’이니, 대체로 時事를 말한 것이다.(≪左氏會箋≫)
역주79 今爲臣執君 若之何 : 晉나라가 孫林父를 위해 衛侯를 잡은 것을 이른다.〈杜注〉
역주80 晉侯言衛侯之罪 使叔向告二君 : 晉侯는 衛軍이 晉나라에서 간 수비병 3백 人을 죽인 것을 罪로 삼은 것이고, 孫林父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81 國子賦轡之柔矣 : 〈轡之柔矣는〉 逸詩이다. ≪逸周書≫에 보인다. 政事를 너그럽게 하여 諸侯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마치 부드러운 고삐가 강한 말을 制御하는 것과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82 子展賦將仲子兮 : 〈將仲子〉는 ≪詩經≫ 〈鄭風〉의 篇名이다. 사람들의 말이 두렵다는 뜻을 취하여, 衛侯에게 설령 다른 罪가 있어서 잡았을지라도 사람들은 오히려 晉나라가 신하를 위해 임금을 잡았다고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83 鄭七穆……子展儉而壹 : 子展은 鄭나라 子罕의 아들로 몸가짐이 儉素하고 마음 씀이 專一하였다. 鄭 穆公의 11子 중에 子然과 두 子孔 등 세 宗族은 이미 망하였고, 子羽는 卿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직 七穆만을 말한 것이다.〈杜注〉 七穆은 子展 罕氏, 子西 駟氏, 子産 國氏, 伯有 良氏, 子太叔 遊氏, 子石 豐氏, 伯石 印氏를 이른다.〈附注〉
역주84 爲賦相鼠 亦不知也 : 〈相鼠〉는 ≪詩經≫ 〈鄘風〉의 篇名이다. 그 詩에 “쥐를 보면 가죽이 있는데 사람으로서 威儀가 없을쏜가? 사람으로서 威儀가 없으면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고 하였다. 慶封이 자기의 不敬 때문에 이 詩를 읊는 줄을 몰랐다는 것은 그가 매우 昏闇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明年에 慶封이 魯나라로 도망해 온 傳의 배경이다.〈杜注〉
역주85 鄭伯享趙孟于垂隴 : 趙孟이 宋나라에서 晉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鄭나라를 지난 것이다.〈杜注〉
역주86 二子石從 : 두 子石은 印段과 公孫 段이다.〈杜注〉
역주87 七子從君 以寵武也 : 武는 趙文子의 이름이다. 詩로써 나에게 光榮을 내려달라는 말이다.〈附注〉
역주88 請皆賦 以卒君貺 : 일곱 사람이 모두 詩를 읊어 鄭君의 賜宴을 마치기를 청한 것이다.〈附注〉
역주89 武亦以觀七子之志 : 詩로써 뜻[志]을 말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역주90 子展賦草蟲 : 〈草蟲〉은 ≪詩經≫ 〈召南〉의 篇名이다. 본래 이 詩는 出役한 大夫의 아내가 풀벌레의 암수가 울음소리로 서로 짝을 찾고 메뚜기의 암수가 서로 붙어 있는 것을 보자, 남편 생각이 나서 “君子(남편)를 보지 못해 근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네. 군자를 보고 군자와 交合하면 내 마음이 가라앉으련만.”이라고 읊은 詩인데, 子展은 詩의 原義와 관계없이 斷章取義하여 鄭나라를 도와줄 君子를 만나지 못해 근심하였는데, 〈趙孟을 君子에 비유하여〉 이미 君子를 만나 서로 뜻이 통하였으니 몸을 낮추어 晉나라에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이 詩를 읊은 것이다.
역주91 善哉 民之主也 :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기를 잊지 않기 때문에 백성의 主人이라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92 抑武也 不足以當之 : 자기를 君子에 비유한 것을 사양한 것이다.〈杜注〉
역주93 伯有賦鶉之賁賁 : 〈鶉之賁賁〉은 ≪詩經≫ 〈鄘風〉의 篇名이다. 衛人이 그 임금의 淫亂을 諷刺하여 메추라기나 까치만도 못하다고 한 것이다. “선량하지 못한 사람을 나는 그를 兄이라고 하고 나는 그를 임금이라 하네.”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94 牀笫之言不踰閾……非使人之所得聞也 : 笫는 자리이다. 이 詩는 淫亂을 諷刺한 것이다. 그러므로 잠자리의 말이라고 한 것이다. 閾은 문지방이다. 使人은 趙孟이 자신을 이른 것이다.〈杜注〉
역주95 子西賦黍苗之四章 : 〈黍苗〉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그 4章에 “신속히 이룬 謝邑의 工役은 召伯이 經營한 것이고, 武勇스러운 行役軍은 召伯이 編成한 것이네.”라고 하였다. 趙孟을 召伯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96 寡君在 武何能焉 : 經營해 성공한 것이 모두 晉君의 功이고 趙孟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말로, 잘한 일을 그 임금에게 사양한 것이다.〈杜注〉
역주97 子産賦隰桑 : 〈隰桑〉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군자를 만나보기를 생각하여 마음을 다해 섬긴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詩에 “이미 군자를 만나보았으니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杜注〉
역주98 武請受其卒章 : 卒章에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 어찌 그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언제고 잊을 날이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趙武는 子産이 警戒해 가르쳐주기를 바란 것이다.〈杜注〉
역주99 子太叔賦野有蔓草 : 〈野有蔓草〉는 ≪詩經≫ 〈鄭風〉의 篇名이다. “우연히 서로 만나니 나의 소원에 맞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100 吾子之惠也 : 太叔이 趙孟과 서로 만난 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趙孟이 그 恩惠를 받았다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101 印段賦蟋蟀(실솔) : 〈蟋蟀〉은 ≪詩經≫ 〈唐風〉의 篇名이다. 그 詩에 “너무 安樂하게 지내지 말고 오히려 자기의 職分을 생각하여 안락을 좋아하되 職務를 荒棄하지 않는 것이 良士가 경계할 바이다.”라고 하였으니, 두려운 마음으로 禮儀를 돌아본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02 保家之主也 : 警戒하고 두려워하여 職分을 폐기하지 않는 것이 집안을 보존하는 방법이다.〈杜注〉
역주103 公孫段賦桑扈 : 〈桑扈〉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君子는 禮文이 있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104 匪交匪敖 福將焉往 : 이 句는 〈桑扈〉의 卒章이다. 趙孟은 公孫 段이 詩를 읊었으므로 인하여 卒章의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105 志誣其上而公怨之 以爲賓榮 : ‘誣(무함)’라고 말하였으니 鄭伯에게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것이다. 趙孟이 “詩를 읊어 자신을 榮光스럽게 하라.”고 誘導[倡]하였기 때문에 伯有가 공공연히 원망하여 賓客을 영광스럽게 하였을 뿐이다.〈杜注〉
역주106 幸而後亡 : 반드시 제일 먼저 망한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07 已侈 : 伯有의 驕慢과 奢侈가 너무 심하다는 말이다.〈附注〉
역주108 所謂不及五稔者 夫子之謂矣 : 稔은 年이다. 襄公 30년에 鄭나라가 良霄(伯有)를 죽인 傳의 배경이다.〈杜注〉
역주109 其餘 皆數世之主也 : 그 밖의 여섯 사람은 모두 그 遺澤이 여러 代에 미칠 것이라는 말이다.〈附注〉
역주110 在上不忘降 : 〈草蟲〉의 “내 마음이 가라앉으련만.”이란 句를 읊은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11 樂而不荒 : 〈蟋蟀〉의 “안락을 좋아하되 직분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句를 읊은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12 樂以安民 : 安樂을 백성과 함께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安定을 얻은 것이다.〈附注〉
역주113 不淫以使之 : 慾心을 절제하지 않고 지나치게 放縱하여 백성을 모질게 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附注〉
역주114 楚薳罷如晉涖盟 : 薳罷는 令尹 子蕩이다. 荀盈이 楚나라로 가서 結盟에 참가한 데 대한 보답으로 薳罷가 晉나라로 가서 결맹에 참가한 것이다.〈杜注〉
역주115 賦旣醉 : 〈旣醉〉는 ≪詩經≫ 〈大雅〉의 篇名이다. 그 詩에 “이미 술로써 취하게 하셨고 이미 恩德으로써 배부르게 하셨으니, 君子(周 成王)께서는 萬年의 長壽 누리소서. 하늘이 큰 福으로 당신을 도우실 겁니다.”라고 하였는데, 薳罷가 이 詩로써 晉侯를 讚美하여 太平을 이룩한 君子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毛詩≫에 의하면 이 詩는 周 成王이 宗廟에 祭祀를 마치고서 群臣을 접대한 것을 읊은 詩이다. ≪毛詩≫와 朱子 注에는 介를 大로 訓詁하여 “너의 큰 복을 크게 하리라.”로 해석하였고, 鄭玄의 箋에는 介를 助로 訓詁하여 “하늘이 너에게 큰 복으로 도와줄 것이다.”로 해석하였다. 역자는 鄭玄의 설을 취해 번역하였다.
역주116 承君命 不忘敏 : 그가 일에 임해 민첩히 달성하기를 잊지 않았다는 말이다.〈附注〉
역주117 政其焉往 : 政權이 반드시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18 慶封氾祭 : 禮에 음식을 먹을 때에 祭(고수레)함이 있으니, 이는 음식을 처음 만든 분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氾祭는 祭하는 음식을 멀리 흩는 것이니 공경스럽지 못하다.〈杜注〉 여기서의 ‘祭’는 옛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밥과 반찬을 조금씩 덜어내어 그릇 사이에 놓고서 최초에 음식을 發明한 사람에게 祭祀하였던 것을 이른다.
역주119 使工爲之誦茅鴟 : 工은 樂師이다. 〈茅鴟〉는 逸詩인데, 不敬을 諷刺한 詩이다.〈杜注〉
역주120 亦不知 : 慶封이 이번에도 그 詩가 자기를 풍자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매우 어리석었음을 말한 것이다.〈附注〉
역주121 賦大明之首章 : 〈大明〉은 ≪詩經≫ 〈大雅〉의 篇名이다. 그 首章에 ‘文王의 밝은 德이 아래 下土에 빛났기 때문에 하늘의 命이 위 上天에 성대하게 드러났다.’라고 말하였다. 令尹의 뜻이 首章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首章을 稱誦하여 스스로 〈자기의 德이〉 光明正大하다고 자랑한 것이다.〈杜注〉
역주122 趙孟賦小宛之二章 : 〈小宛〉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2章의 ‘각기 너의 威儀를 공경하라. 天命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天命은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여 令尹을 警戒한 것이다.〈杜注〉
역주123 令尹自以爲王矣 : 楚나라 令尹 圍가 스스로 자기의 德이 王이 될 만하다고 여긴다는 말이다.〈附注〉
역주124 何如 : 장차 성공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은 것이다.〈杜注〉
역주125 其可哉 :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26 強以克弱而安之 : 強한 신하로서 弱한 임금을 이기고서도 편안히 여겨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附注〉
역주127 強不義也 : 임금을 이기는 것을 편안히 여기는 것은 強하기만 하고 의롭지 못한 것이다.〈杜注〉
역주128 趙孟叔孫豹曹大夫入于鄭 : 會盟을 마치고서 鄭나라에 들른 것이다.〈杜注〉
역주129 子皮戒趙孟 : 宴享의 기일을 告知[啓]한 것이다.〈杜注〉
역주130 禮終 趙孟賦瓠葉 : 告知를 받는 禮가 끝나자, 詩를 읊은 것이다. 〈瓠葉〉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古人은 식품이 변변치 못하다 하여 禮를 폐하지 않은 뜻을 취한 것이다. 비록 박잎과 한 마리의 토끼라 하더라도 오히려 賓客을 접대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31 趙孟欲一獻 : 〈瓠葉〉을 읊은 것은 변변찮은 食物이라도 獻酬할 수 있다는 뜻을 취한 것이므로 一獻을 원한다는 것을 안 것이다.〈杜注〉 一獻은 主人이 賓에게 술잔을 한 차례만 올리는 것이다. 술을 한 차례만 올린다면 그 밖에 식품의 儀節도 이에 맞게 경감한다.〈楊注〉
역주132 敢乎 : 감히 그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33 夫人之所欲也 : 夫人은 趙孟을 이른다.〈杜注〉
역주134 及享 具五獻之籩豆於幕下 : 朝聘의 제도에 大國의 卿에게는 五獻의 禮로 접대한다.〈杜注〉
역주135 趙孟辭 : 趙孟은 스스로 지금 鄭나라에 聘問 온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五獻의 禮를 사양한 것이다.〈杜注〉
역주136 武請於冢宰矣 : 武는 趙孟의 이름이고, 冢宰는 子皮이다. 請은 〈瓠葉〉을 읊은 것을 이른다.〈杜注〉
역주137 趙孟爲客 : 趙文子를 上賓으로 삼은 것이다.〈附注〉
역주138 穆叔賦鵲巢 : 〈鵲巢〉는 趙孟이 勞苦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小國이 편안하게 된 것을 비유한 것이니, 叔孫豹 자신이 楚나라의 誅戮을 면한 것을 가리킨 것이다.(≪左氏會箋≫)
역주139 武不堪也 : 감히 叔孫豹를 誅戮에서 벗어나게 한 공을 자신의 공으로 과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左氏會箋≫)
역주140 又賦采蘩 : 〈采蘩〉도 ≪詩經≫ 〈召南〉의 篇名이다. 蘩菜(쑥)가 변변찮은 食物이지만 公侯에게 올릴 수 있다는 뜻을 취하여, 그 사람의 誠信만을 享受(受用)하고 豐厚한 식품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41 小國爲蘩……其何實非命 : 穆叔이 “小國의 변변찮음이 蘩菜와 같지만 大國이 아껴 쓰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감히 命을 따르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穡은 아끼는 것이다.〈杜注〉
역주142 子皮賦野有死麕之卒章 : 〈野有死麕〉은 ≪詩經≫ 〈召南〉의 篇名이다. 그 卒章에 “천천히 걸어와서 내 수건 흔들리게 하지 말고 삽살개 짖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君子는 천천히 걸어 禮로써 와서 나로 하여금 節介를 잃지 말게 하고 우리 개로 하여금 짖게 하지 말라고 한 뜻을 취하여, 趙孟이 道義로써 諸侯를 安撫하고 非禮로써 侵陵(侵犯해 陵蔑함)하지 않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143 趙孟賦常棣 : 〈常棣〉는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무릇 지금 사람들 중에는 형제만 한 이가 없다.”는 詩句를 취하여 형제의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44 吾兄弟比以安 : 比合(和合)하여 安靖하는 것이다.〈附注〉
역주145 尨也可使無吠 : 子皮의 詩를 받아들인 것이다.〈杜注〉
역주146 穆叔子皮及曹大夫興 拜 : 세 大夫는 모두 兄弟國의 신하이다. 興은 일어나는 것이다.〈杜注〉
역주147 擧兕爵曰……知免於戾矣 : 兕爵은 不敬을 罰하는 술잔이다. 小國이 趙孟의 德을 힘입어 친밀하게 지내며 안정되었으므로 스스로 이 懲罰과 誅戮에서 免한 줄을 알았다고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48 晉侯使韓宣子來聘 : 昭公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杜注〉
역주149 季武子賦緜之卒章 : 〈緜〉은 ≪詩經≫ 〈大雅〉의 篇名이다. 卒章의 文王이 네 신하가 있었기 때문에 면면히 이어온 나라를 흥성하게 만든 뜻을 취하여 晉侯를 文王에 비유하고, 韓宣子를 四輔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四輔는 바로 四臣을 가리킨 말로 그 詩에 말한 疏附(아랫사람을 이끌고 윗사람을 가까이하는 신하)‧先後(앞뒤에서 인도하는 신하)‧奔秦(德으로 曉喩하여 聲譽를 宣揚하는 신하)‧禦侮(敵의 氣勢를 꺾는 武臣)이다.
역주150 韓子賦角弓 : 〈角弓〉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兄弟와 姻戚은 서로 멀리하지 말라.’는 詩句를 취하여 兄弟國은 서로 친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51 敢拜子之彌縫敝邑 : 彌縫은 補合(갈라진 틈을 기워 붙임)이니, 兄弟의 義理로 대함을 이른다.〈杜注〉
역주152 武子賦節之卒章 : 〈節南山〉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卒章의 ‘네 마음을 고쳐 萬邦을 기르라.’는 詩句를 취하여 晉나라의 德이 萬邦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53 宣子譽之 : 나무가 아름다움을 칭찬한 것이다.〈杜注〉
역주154 宿敢不封殖此樹 : 封은 나무의 뿌리에 흙을 두터이 덮는 것이고, 殖은 기르는 것이다.〈杜注〉
역주155 遂賦甘棠 : 〈甘棠〉은 ≪詩經≫ 〈召南〉의 篇名이다. 召伯이 甘棠樹 아래에서 쉰 적이 있었으므로 詩人은 召伯을 사모해 그 나무까지 사랑하였다. 季武子는 아름다운 나무를 甘棠처럼 기르고자 한다고 말하여, 韓宣子를 召公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156 楚子享之 賦吉日 : 〈吉日〉은 ≪詩經≫ 〈小雅〉의 篇名인데, 周 宣王이 사냥에 대해 읊은 詩이다. 楚王은 鄭伯과 함께 사냥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詩를 읊은 것이다.〈杜注〉
역주157 王以田江南之夢 : 夢은 楚나라 雲夢으로, 長江의 남북에 걸쳐 있다.〈杜注〉
역주158 鄭六卿餞宣子于郊 : 餞은 떠나는 사람을 보내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杜注〉
역주159 子齹(차)賦野有蔓草 : 子齹는 子皮의 아들 嬰齊이다. 〈野有蔓草〉는 ≪詩經≫ 〈鄭風〉의 篇名이다. ‘우연히 서로 만나니 나의 소원에 맞았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160 孺子 : 諸侯나 世卿의 承繼人을 칭하는 말이다.
역주161 吾有望矣 : 군자가 서로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라는 말이다.〈杜注〉
역주162 子産賦鄭之羔裘 : ‘鄭風’이라고 말한 것은 〈唐風〉의 〈羔裘〉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저 사람이여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개를 변치 않으리. 國家의 彦士일세.’라는 詩句를 취하여 韓子를 찬미한 것이다.〈杜注〉
역주163 起不堪也 : 國家의 司直이란 말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164 子太叔賦褰裳 : ≪詩經≫ 〈鄭風 褰裳〉에 “그대 나를 사랑해 나를 생각하면 나는 치마를 걷고 溱水를 건너 그대에게 가겠지만, 그대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른 사람(남자)이 없으리오.”라고 하였다. ‘宣子가 우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장차 치마를 걷고 물을 건너 宣子에게 달려갈 뜻이 있지만, 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어찌 다른 사람(依託할 다른 나라)이 없겠느냐?’를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65 起在此 敢勤子至於他人乎 : 내가 지금 友好를 重視[崇]하여 이곳(鄭나라)에 와 있으니 다시 그대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가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66 子太叔拜 : 宣子가 鄭나라에 愛情을 두고 있는 것에 謝禮한 것이다.〈杜注〉
역주167 善哉子之言是 : 是는 〈褰裳〉을 이른다.〈杜注〉
역주168 不有是事 其能終乎 : 이렇게 서로 경계하는 말이 없다면 어찌 끝까지 友好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附注〉
역주169 子遊賦風雨 : 子遊는 駟帶의 아들 駟偃이다. ≪詩經≫ 〈鄭風 風雨〉를 읊은 것은 ‘君子를 만나보고 나니 어찌 마음 和平하지 않으리.’라고 한 詩句를 취한 것이다.〈杜注〉
역주170 子旗賦有女同車 : 子旗는 公孫段의 아들 豐施이다. ≪詩經≫ 〈鄭風 有女同車〉를 읊은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閒雅하네.’라는 詩句를 취하여 宣子의 뜻을 愛好한 것이다.〈杜注〉
역주171 子柳賦蘀兮 : 子柳는 印段의 아들 印癸이다. ≪詩經≫ 〈鄭風 蘀兮〉를 읊은 것은 ‘나를 부르면 너에게 和答하리.’라는 詩句를 취하여, 宣子가 나를 부르면 장차 화답해 따르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172 鄭其庶乎 : 興盛을 바랄 수 있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73 二三君子以君命貺起 : 鄭나라 임금의 命으로 나를 餞送한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74 不出鄭志 : 詩는 뜻[志]을 말한 것이므로 鄭詩를 ‘鄭志’라고 한 것이다.(≪左氏會箋≫)
역주175 皆昵燕好也 : 昵은 親이니, 모두 그 나라의 詩를 읊어 親愛와 友好의 뜻을 보였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76 二三君子……可以無懼矣 : 여섯 大夫는 모두 恩澤이 몇 代에 미쳐 禍患이 없을 것이고, 鄭나라도 怨恨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附注〉
역주177 季平子賦采菽 : 〈采菽〉은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그 詩에 ‘君子가 와서 朝見하니 무엇을 下賜할꼬.’라는 句를 취하여, 穆公을 君子에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178 穆公賦菁菁者莪 : 〈菁菁者莪〉도 ≪詩經≫ 〈小雅〉의 篇名이다. 그 詩에 ‘이미 君子를 만나보니 즐거운데, 또 예의로써 접대해주시네.’라는 句를 취하여 〈采菽〉에 和答한 것이다.〈杜注〉
역주179 不有以國 : ‘以는 爲이다.’라고 한 楊伯峻의 說을 취해 ‘以國’을 ‘治國’으로 번역하였다.
역주180 賦新宮 : 〈新宮〉은 逸詩이다.〈杜注〉
역주181 昭子賦車舝 : 詩는 ≪詩經≫ 〈小雅〉의 편명이다. 周人이 어진 女人을 얻어 君子의 配偶로 삼기를 바라는 생각을 읊은 詩이다. 昭子가 季孫을 위하여 宋公의 딸을 맞이하려 하였기 때문에 이 시를 읊은 것이다.〈杜注〉
역주182 宋公使昭子右坐 : ≪儀禮≫ 〈燕禮〉를 참고하면 禮에 맞는 坐席은 公이 서쪽을 향해 앉으면 빈객은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이다. 宋公이 昭子로 하여금 오른쪽에 앉게 해서 宋公의 오른쪽에 있게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宋公의 북쪽에 있게 되니 함께 서쪽을 향해 서로 가까이 앉게 된 것이니, 禮坐를 바꾼 것을 말한 것이다.(≪春秋左傳正義≫)
역주183 樂祁佐 : 宴禮의 進行을 도운 것이다.〈杜注〉
역주184 哀樂 : 즐거워해야 하는데 슬퍼하는 것이다.〈杜注〉
역주185 樂哀 : 슬퍼해야 하는데 즐거워하는 것이다.〈杜注〉
역주186 心之精爽 是謂魂魄 : 精은 血이고 爽은 聰明이다. 精血은 陰에 속하니 魄이고, 聰明은 陽에 속하니 魂이다.〈附注〉
역주187 義例 : 義理를 드러내는 事例를 이른다. ≪春秋經傳集解≫ 〈序〉에 “舊例에 의거해 經의 뜻을 드러내고 行事의 是非를 지적해 褒貶을 바룬다.[據舊例而發義 指行事以正褒貶]”라고 하였고, “경문에 義例가 없이 行事에 따라 말한 것은 ≪春秋左氏傳≫에서도 포폄을 가하지 않고 그 결과만을 말했을 뿐이다.[其經無義例 由行事而言 則傳直言其歸趣而已”라고 하였다.
역주188 : 三民書局本과 四庫全書本에는 ‘落’으로 되어 있다.
역주189 冉求以力不足而自畫 : ≪論語≫ 〈雍也〉에 “冉求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의 힘이 부족합니다.’라고 하니, 孔子가 ‘힘이 부족한 자는 도중에서 그만두는데, 너는 지금 미리 한계를 긋는구나.’라고 하였다.[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하였다.
역주190 不思而得不勉而中 : ≪中庸≫에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도에 맞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용히 도에 맞는다.[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라고 하였다.
역주191 孔子曰……我未見力不足者 : ≪論語≫ 〈里仁〉에 보인다.
역주192 孟子曰……聖譬則力也 : ≪孟子≫ 〈萬章 下〉에 보인다.
역주193 [繢]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繢’를 보충하였다.
역주194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 의거하여 ‘繢’를 보충하였다.
역주195 : 四庫全書本에는 ‘夏’로 되어 있다.
역주196 張子厚聞驢鳴 : 程顥는 “병아리를 보면 仁을 볼 수 있다.[觀雞雛 此可觀仁]”라고 하였고, 張載(字 子厚, 1020~1077)는 나귀의 울음을 듣고, 사람과 똑같이 生意가 있음을 알았다고 하였다.(≪二程遺書≫)
역주197 與自家意思一般 : 程顥는 “周茂叔(周敦頤)이 창 앞에 있는 풀을 제거하지 않으시므로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말씀하시기를 ‘나 자신의 意思와 一般이기 때문이다.’ 하셨다.[周茂叔 窓前草不除去 問之 云 與自家意思一般]”라고 하였다.(≪近思錄≫)
역주198 [鑿]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鑿’을 보충하였다.
역주199 (不可)[至詩] : 저본에는 ‘不可’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과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至詩’로 바로잡았다.
역주200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다.
역주201 方今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莊子≫에 의거하여 ‘方今’을 보충하였다.
역주202 (元)[驪] : 저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驪’로 바로잡았다.
역주203 三墳五典八索九丘 : 孔安國의 〈尙書序〉에 “伏羲‧神農‧黃帝의 글을 ‘三墳’이라 하고, 少昊‧顓頊‧高辛‧唐‧虞의 글을 ‘五典’이라 하고, 八卦의 說을 ‘八索’이라 하고, 九州의 기록을 ‘九丘’라 한다.”라고 하였다.
역주204 而又以首過庭之問也 : ≪論語≫ 〈季氏〉에 보인다. “陳亢이 〈孔子의 아들〉 伯魚에게 물었다. ‘그대는 역시 특이한 들음이 있었는가?’ 〈伯魚가〉 대답하였다. ‘없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빨리 걸어 뜰을 지나는데, 「詩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가 詩를 배웠노라.’라고 하였다.[陳亢 問於伯魚曰 子亦有異聞乎 對曰 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詩乎 對曰 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역주205 前漢翼奉傳 詩有五際注 : ≪前漢書≫ 〈翼奉傳〉에 “≪易≫에는 冥陽이 있고, ≪詩≫에는 五際가 있으며, ≪春秋≫에는 災異가 있으니, 모두 終始를 열거하고 得失을 미루며 天心을 고찰하여 王道의 安危를 말하였다.[易有冥陽 詩有五際 春秋有災異 皆列終始 推得失 考天心 以言王道之安危]”라고 하였다. 注는 孟康의 注를 이른다.
역주206 (未□)[戌亥] : 저본에는 ‘未’로 되어 있고 그 아래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前漢書≫ 〈翼奉傳〉의 注에 의거하여 ‘戌亥’로 바로잡았다.

동래박의(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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