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桓十年
이라 初
에 有玉
이러니 虞公求
한대 弗獻
이라가 旣而悔之曰
周諺有之
하니 〈曰〉 匹夫無罪
라 라하니 吾焉用此
리오
注
【主意】虞公以貪失國하고 虞叔以吝逐君의 此二句는 可爲此事之斷案이라
又
出新意
하야 言人能以貪財之心而求道
하고 以吝財之心而守道
면 則所得詎可璧
이리오하니라
虞公以貪失國
注+求玉而又求劍 至於見逐하고 虞叔以吝逐君
注+獻玉而不獻劍 至於伐君하니 貪與吝遇
하야 此禍之所以成也
라
貪者惟恐不得人之物하고 吝者惟恐失己之物하며 貪者雖得萬金而不能滿하고 吝者雖失一金而不能忘이라
虞之君臣
이 上貪而下吝
하야 貪者求之
하고 吝者
之
하니 亂安得而不作乎
아
視人之物則貪
하고 視己之物則吝
하며 未得而求之則貪
하고 旣得而守之則吝
하니 名雖不同
이나 其心則同出於嗜貨焉
注+虞公貪人之物 虞叔吝己之物 同一好貨之心이라
使虞公思吾求劍之心
이 卽虞叔守劍之心
注+吾愛彼之劍 彼寧不自守乎이면 必不至於貪矣
注+虞公能如此 則貪之病除요 使虞叔思吾守劍之心
이 卽虞公求劍之心
注+吾自愛其劍 彼豈不欲得之乎이면 必不至於吝矣
注+虞叔能如此則吝之患消리라
惟其不能交相恕
하고 而反相責
注+恕 謂以己之心度人之心 相責則反是하니 此其所以釀莫大之釁也
注+一貪一吝 成用兵伐君之禍라
由古而曁今히 人所以相戕相賊相刃相靡者는 職此之由니라
彼方貪而吾告之以廉이면 是敎餓虎之不求肉也요 彼方吝而吾告之以施면 是將求肉於餓虎也니 無益於彼요 祗取辱焉이라
至理之中
에 無一物之可廢
注+貪吝雖非美事 而皆有用處며 人心之中
에 無一念之可除
注+貪吝是非善心 亦人情所不能無니라
貪吝之念
이 苟本無邪
면 安從而有
注+若以爲無 則人安得有貪吝者며 苟本有邪
면 安得而無
注+今旣有此貪吝之人 則亦安能盡除此念리오
是貪吝固不可强使之無
注+人情不能此 어니와 然亦不必使之無也
注+但要善用其貪吝耳니라
吾心一旦渙然氷釋
注+心悟於差 渙然如春氷之消融이면 則曰貪曰吝
이 孰非至理哉
注+善用之則皆至理也리오
蓋事有善惡
이나 而念無善惡
注+ 念生於中 此卽天理人欲同行異情之意이라
是念加於事之善者則名善念
注+如貪吝之念 用之以好道 則爲善念矣이요 是念加于事之惡者卽名惡念
注+貪吝之念 用之以好貨 則爲惡念矣이니 所謂念者
는 初無二也
注+叔出貪吝之念 而所用則不同라
譬之於火컨대 用之㸑釜則爲善하고 用之燎原則爲惡이라 然曷嘗有二火哉아
譬之於水컨대 用之漑田則爲善하고 用之灌城則爲惡이나 然曷嘗有二水哉아
世所以指虞公爲貪者
注+此下一節 發明以治貪之說는 以其求財
不厭耳
注+虞公貪 故爲惡念라
苟用是念以求道不厭
注+善用其貪 卽善念矣하야 之念 猶未已也
하고 必求與權
注+必求造於達權之變之妙하며 賢而不已
注+ 貪道之念 猶未已也하고 必求爲聖
注+求造於之境이면 則與夫子
과 何以異乎
注+不厭則貪之意也아
世所以指虞叔爲吝者
注+此下一節 發明以吝治吝之說는 以其守財欲不失耳
注+虞叔吝財 故爲惡念라
苟用是念以守道不失
注+善用其吝 卽善念矣하야 與生俱生
하야 欲不能遷
注+當生而不爲物欲所移하고 與死俱死
하야 威不能奪
注+當死而不爲威武所屈이면 則與顔子服膺弗失
과 何以異乎
注+勿失 卽吝之意也 服膺 謂珮服於心胸間 아
求財與求道相去遠矣나 而所謂不厭者는 其念未嘗加損也며 守財與守道相去遠矣나 而所謂不失者는 其念未嘗加損也니라
向之惡
과 今之善
注+好道은 特因物而改其名耳
注+物 事也 因事之善惡而改其名니 吾之念曷嘗改哉
注+其爲貪吝之念一也아
人徒見其嘗名貪嘗名吝하고 遂疑而惡之하야 乃欲求道於是念之外하니
傳
환공桓公 10년, 당초에 우숙虞叔이 좋은 옥玉을 갖고 있었는데, 우공虞公이 그 옥玉을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았다가 오래지 않아 후회하며 말하기를
“주周나라 속담에 ‘필부匹夫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옥벽玉璧을 가진 것이 죄이다.’라고 하였으니, 내게 이 옥玉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옥玉 때문에 해害를 사게 될 것이다.”라고 하고서, 그 옥을 우공虞公에게 바쳤다.
우공이 또 보검寶劍을 요구하자, 우숙虞叔은 “이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어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화禍가 장차 나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우공虞公을 쳤다.
注
‘우공虞公은 탐욕貪慾으로 인해 나라를 잃었고, 우숙虞叔은 인색吝嗇으로 인해 임금을 축출하였다.’는 이 두 구는 이 사건의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
또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하여 “사람이 재물을 탐하는 마음으로 도道를 구하고 재물을 아끼는 마음으로 도道를 지킨다면, 얻는 것이 어찌 옥벽玉璧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논설하는 가운데 신의新意를 끄집어낸 것이니, 기묘奇妙하다 하겠다.
우공虞公은
탐욕貪慾으로 인해 나라를 잃었고
注+옥玉을 요구하고 또다시 검劍을 요구하였다가 축출당하는 데에 이르렀다.우숙虞叔은
인색吝嗇으로 인해 임금을 축출하였으니
注+옥玉은 바쳤으나 검劍은 바치지 않고서 임금을 치기까지 하였다., 탐욕과 인색이 서로 만나서 이
화란禍亂을 조성한 것이다.
탐욕스러운 자는 오직 남의 물건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인색한 자는 오직 자기 물건을 잃을까 걱정하며, 탐욕스러운 자는 비록 만금萬金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인색한 자는 비록 한 푼을 잃어도 잊지 못한다.
우虞나라 군신君臣이 윗사람은 탐욕스럽고 아랫사람은 인색하여, 탐욕스런 자는 끝없이 요구하고 인색한 자는 죽기로 지켰으니, 화란이 어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탐욕과 인색은 각각 다른 두 가지 일이 아니다
注+두 가지 병통은 같은 한 몸이라는 말이다..
남의 물건을 보고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이 탐욕이고 자기 물건을 보고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인색이며, 얻지 못하여 얻기를 구하는 것이 탐욕이고 얻은 뒤에 죽기로 지키는 것이 인색이니, 이름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마음은 다 같이 재물을 좋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注+우공虞公이 남의 물건을 탐한 것과 우숙虞叔이 자기 물건을 아낀 것은 똑같이 재화財貨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가령
우공虞公이 자신이
검劍을 요구한 마음이 바로
우숙虞叔이 검을 지키려는 마음임을 생각하였다면
注+내가 그의 검을 좋아하듯이 그도 어찌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탐욕貪慾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注+우공虞公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면 탐욕貪慾의 병통이 제거되었을 것이다., 가령 우숙이 자신이 검을 지키려는 마음이 바로 우공이 검을 요구한 마음임을 생각하였다면
注+내가 스스로 나의 검을 아끼듯이 그도 어찌 얻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반드시
인색吝嗇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注+우숙虞叔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면 인색吝嗇의 병통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은〉 자기 마음을 미루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서로 꾸짖었으니
注+서恕는 나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서로 꾸짖는 것은 이와 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더없이 큰
흔단釁端을 빚게 된 까닭이다
注+한 사람의 탐욕貪慾과 한 사람의 인색吝嗇이 끝내 무력武力을 사용하여 임금을 치는 화를 만들었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서로 해치며 서로 찌르고 서로 쓰러뜨린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내가 장차 탐욕스러운 자에게 청렴淸廉을 말해주고, 인색한 자에게 베풂을 말해준다면, 탐욕과 인색을 고칠 가망이 있겠는가?
저 사람이 바야흐로 탐욕스러운데 내가 그에게 청렴을 말해주면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꼴이고, 저 사람이 바야흐로 인색한데 내가 베풂을 말해주면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나누어달라고 요구하는 꼴이니, 저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다만 나 스스로 욕을 취할 뿐이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과연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는 것인가?
‘그 방법은 본래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도리를 탐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탐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도리를 아끼는 마음으로 재물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불과할 뿐이다.’
지극한 이치 중에는 한 가지 일도 버릴 것이 없고
注+탐욕과 인색이 비록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유용한 곳이 있다., 사람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도 버릴 것이 없다
注+탐욕과 인색이 선심善心은 아니지만 인정人情에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탐하고 아끼는 마음이 본래 없는 것이라면 탐욕과 인색이 어디에서 생겼겠으며
注+만약 없다고 여긴다면 사람에게 어찌 탐욕과 인색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본래 있는 것이라면 탐욕과 인색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注+지금 이미 이렇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이 있다면 또한 어찌 이런 생각을 다 없앨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와 같다면 탐욕과 인색은 본래 억지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注+인정人情에 이것을 없앨 수 없다., 또 굳이 없앨 필요도 없는 것이다
注+탐욕과 인색을 잘 쓰기를 구할 뿐이다..
내 마음에 쌓였던 탐욕과 인색이 하루아침에 얼음 녹듯이 다 풀리면
注+마음으로 잘못을 깨달으면 봄날에 얼음이 녹듯 다 없어진다는 뜻이다. 탐욕과 인색이 어느 것인들 지극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注+잘 쓰면 모두 지극한 이치라는 말이다.
대체로 일에는
선악善惡이 있으나 생각에는 선악이 없다
注+일은 밖(身外)에서 탐욕스럽게 되고 생각은 마음에서 생겨나니, 이것이 바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함께 행해지지만 정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생각이 선한 일에 이른 것을
선념善念이라 하고
注+탐욕과 인색의 생각을 도를 좋아하는 데에 쓰면 선념善念이 된다는 말이다., 생각이 악한 일에 이른 것을
악념惡念이라 하니
注+탐욕과 인색의 생각을 재물을 좋아하는 데에 쓰면 악념惡念이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생각’이라는 것에 애당초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注+우숙虞叔의 행위는 탐욕과 인색의 생각에서 나와서 쓴 곳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것을 불에 비유하면 불을 취사炊事에 쓰면 좋은 불이 되고, 들판을 태우는 데 쓰면 나쁜 불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렇다면 어찌 불에 두 가지 불이 있겠는가?
물에 비유하면 농지를 관개灌漑하는 데 쓰면 좋은 물이 되고, 성읍城邑을 잠기게 하는 데 쓰면 나쁜 물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렇다면 어찌 물에 두 가지 물이 있겠는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두 가지인 것 같지만, 그 한 가지가 우뚝하게 두 가지 안에 홀로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세상에서
우공虞公을 가리켜 탐욕스럽다고 하는 것은
注+이하의 한 구절은 도道를 탐하는 마음으로 재물財物을 탐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뜻을 천명闡明한 것이다. 그가 재물을 구하는 데 항상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注+우공虞公은 재물을 탐하였기 때문에 악념惡念이 된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도를 구하는 데 사용하여 항상 만족해하지 않고서
注+탐하는 생각을 선善한 곳에 쓰는 것이 바로 선념善念이다., 확고하게 설 수 있어도 그치지 않고
注+함께 배워 도에 나아가고 함께 자립하게 되었어도 도를 탐하는 마음을 오히려 그치지 않음이다. 반드시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 있기를 구하며
注+반드시 권權이 변變하는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는 데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현인賢人이 되었어도 그치지 않고
注+본성을 회복하여 보호해 지키니 현인賢人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도를 탐하는 생각을 오히려 그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성인聖人이 되기를 구하였다면
注+반드시 ‘성언性焉’, ‘안언安焉’의 경지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공자孔子의 ‘
학이불염學而不厭(학문을 항상 만족해하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注+‘불염不厭(만족해하지 않음)’이 바로 탐貪의 뜻이다.
세상에서
우숙虞叔을 가리켜 인색하다고 하는 것은
注+이하의 한 구절은 도道를 아끼는 마음으로 재물財物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그가 재물을 지켜 잃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注+우숙虞叔은 재물에 인색하였기 때문에 악념惡念이 된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도를 지키는 데 사용하여 굳게 지켜 잃지 않고서
注+그 인색을 선善한 곳에 쓰는 것이 바로 선념善念이다., 살아서는 도와 함께
공생共生하여
물욕物慾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注+살아서는 물욕物慾에 흔들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어야 할 때는 도와 함께
공사共死하여 위협이나 무력에 지조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注+죽어야 할 때는 죽어서 위협이나 무력에 굴복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자顔子의 ‘
복응이물실服膺而勿失(가슴에 새겨 잊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注+‘물실勿失’이 바로 ‘인吝’의 뜻이다. ‘복응服膺’은 마음속에 깊이 새김이다. 《예기禮記》 〈중용中庸〉에 보인다.
재물財物을 구하는 것과 도道를 구하는 것이 서로 거리가 멀지만 이른바 ‘불염不厭(만족해하지 않음)’에는 그 생각이 덜하거나 더한 적이 없으며, 재물을 지키는 것과 도를 지키는 것이 서로 거리가 멀지만 이른바 ‘불실不失(잃지 않음)’에는 그 생각이 덜하거나 더한 적이 없다.
먼저의
악惡과 지금의
선善은
注+도道를 좋아함을 이른다. 다만 일로 인하여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니
注+물物은 일이다. 일의 선악善惡에 따라 그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나의 생각이 어찌 바뀐 것이겠는가?
注+그 탐하고 아끼는 생각은 하나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일찍이 ‘탐貪’이라 명칭하고 ‘인吝’이라 명칭한 것만을 보고서 드디어 의심하고 미워하여, 도를 이 생각(貪念) 밖에서 구하고자 한다.
이는 불이 가옥을 태우는 것을 미워하여 익혀 먹기를 포기하고, 물이 사람을 빠뜨리는 것을 미워하여 물 마시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으니,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