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莊十八年이라 虢公晉侯鄭伯 使原莊公 逆王后于陳하다 陳嬀歸于京師하니 實惠后라
傳
[左傳]莊十九年
이라 初
에 嬖于莊王
하야 生子頹
하니 子頹有寵
하야 蔿國爲之師
하다
及
卽位
하야 하고 之宮近於王宮
하니 王取之
하고 王奪
田
하고 而收
하다
故蔿國邊伯石速詹父子禽祝跪作亂
하야 因
하다 秋
에 五大夫奉子頹以伐王
이나 不克
하야 出奔溫
하다
蘇子奉子頹以奔衛하니 衛師燕師伐周하야 冬에 立子頹하다
傳
[左傳]莊二十年이라 〈春에〉 鄭伯和王室이나 不克하고 〈執燕仲父하다 夏에 鄭伯〉遂以王歸하니 王處于櫟하다
〈秋
에 王及鄭伯入于
라가 遂入成周
하야 取其寶器而還
하다 冬
에〉 王子頹享五大夫
할새 樂及
하니
鄭伯聞之하고 見虢叔 曰 寡人聞之컨대 哀樂失時면 殃咎必至라하니라 今王子頹歌舞不倦하니 樂禍也라
夫司寇行戮에 君爲之不擧온 而況敢樂禍乎아 奸王之位하니 禍孰大焉가 臨禍忘憂하니 憂必及之하리라 盍納王乎아 虢公曰 寡人之願也라
傳
[左傳]莊二十一年
이라 春
에 于弭
하고 夏
에 同伐王城
하다
鄭伯將王自圉門入
하고 虢叔自北門入
하야 殺王子頹及五大夫
하다 鄭伯享王于闕西辟
에 하다
王與之武公之略自虎牢以東하다 原伯曰 鄭伯效尤하니 其〈亦〉將自有咎리라 〈五月에 鄭厲公卒하다〉
傳
[左傳]僖五年
이라 會于首止
하야 會王太子鄭
하니 라
傳
[左傳]僖七年
이라 冬閏月
에 惠王崩
하다 하야 懼不立
하야 不發喪
하고 而告難于齊
하다
傳
[左傳]僖八年이라 春王正月에 公會王人齊侯宋公衛侯許男曹伯陳世子款盟于洮하다 左氏曰 謀王室也
傳
[左傳]僖十一年이라 夏에 揚拒泉皐伊雒之戎同伐京師하야 入王城하야 焚東門하니
王子帶召之也라 秦晉伐戎以救周하다 秋에 晉侯平戎于王하다
傳
[左傳]僖十二年이라 王以戎難故로 討王子帶하니 秋에 王子帶奔齊하다
傳
[左傳]僖十三年이라 春에 齊侯使仲孫湫聘于周하고 且言王子帶러니 事畢에 不與王言하고
歸하야 復命曰 未可니이다 王怒未怠하니 其十年乎ㄴ저 不十年이면 王弗召也리이다
傳
[左傳]僖二十年이라 滑人叛鄭而服於衛하니 夏에 鄭公子士洩堵寇帥師入滑하다
傳
[左傳]僖二十二年
이라 富辰言於王曰 請召大叔
하소서 曰 協比其隣
하면 昏姻孔云
이라하니
吾兄弟之不協이면 焉能怨諸侯之不睦이릿가 王說하다 王子帶自齊復歸于京師하니 王召之也라
07-05-13 襄王以狄伐鄭以狄女爲后 大叔以狄師攻王 王使告難
傳
[左傳]僖二十四年이라 鄭之入滑也에 滑人聽命이러니 師還에 又卽衛하다
鄭公子士洩堵兪彌帥師伐滑
하니 王使伯服游孫伯如鄭請滑
하다 鄭伯怨惠王之入而
也
하고 又怨襄王之與衛滑也
라
故不聽王命而執二子하다 王怒하야 將以狄伐鄭하다 富辰諫이나 王弗聽하고 使頹叔〈桃子〉出狄師하다
夏에 狄伐鄭取櫟하니 王德狄人하야 將以其女爲后어늘 富辰諫한대 王又弗聽하다 甘昭公通於隗氏하니 王替隗氏하다
頹叔桃子曰 我實使狄하니 狄其怨我리라하고 遂奉大叔하야 以狄師攻王하다
王御士將禦之한대 王曰 先后其謂我何오 寧使諸侯圖之하리라하고 王出適鄭하야 處于氾하다 大叔以隗氏居于溫하다
冬에 王使來告難曰 不穀不德하야 得罪于母弟之寵子帶하야 鄙在鄭地氾일새 敢告叔父하노라
臧文仲對曰 天子
于外
하시니 敢不奔問官守
릿가 王使簡師父告于晉
하고 使左鄢父告于秦
하다
傳
[左傳]僖二十五年이라 春에 秦伯師于河上하야 將納王이어늘 狐偃言於晉侯曰 求諸侯ㄴ댄 莫如勤王이니
諸侯信之요 且大義也니이다 繼文之業하야 而信宣於諸侯ㄴ댄 今爲可矣니이다
使卜偃卜之한대 曰 吉하니 晉侯辭秦師而下하야 三月甲辰에 次于陽樊하야 右師圍溫하고 左師逆王하다
夏四月丁巳
에 王入于王城
하야 取大叔于溫
하야 殺之于隰城
하다 戊午
에 晉侯朝王
하니 王享醴
하고 命之
하다
天下之事는 遠近隱顯之所在니 初未嘗有定名이라 古非遠也요 今非近也며 古之事非隱也요 今之事非顯也니 惟吾心之所見如何耳라
今之所謂甚近而易見者는 莫如身之所親歷也어늘 惠王身被子頹簒奪之禍코도 而復寵子帶하고
鄭伯身見子頹徧舞之僭코도 而復奏備樂하며 襄王身經子帶召戎之變코도 而復親戎狄하니
身遇之而復身蹈之는 何耶오 人心蔽於此者는 怠於彼일새니라 惠王蔽於愛라 故雖近被簒奪之害로되 已如異世而忘之矣요
鄭伯蔽於侈라 故雖近見徧舞之僭이로되 已如異世而忘之矣며 襄王蔽於忿이라 故雖近經召戎之變이로되 已如異世而忘之矣니라
是三君者는 心一有所蔽하야 雖耳目之所親接者도 視之惘然如異世事어든
況欲責紂使鑑數百年前之桀하고 責幽厲使鑑數百年前之紂면 難矣哉ㄴ저
故嘗論之호대 心有所蔽면 則以今爲古하고 心無所蔽면 則以古爲今이라 是何也오
心有所蔽
면 則
하야 釁在前而不見
하고 戮在後而不知
하며
身所親歷
도 曾未踰時
하야 若醉若夢
하야 視之猶太古鴻荒之世
하야 不復
이라 此以今爲古也
니 惠襄鄭伯之類是也
라
心無所蔽
면 則
하야 合千載爲一朝
하고 合萬代爲一世
하야 與古聖賢
으로 更相授受
하고 更相酬酢
하야
以古爲今과 以今爲古는 特在吾心之通與蔽耳니 曷嘗有定名哉아
嗚呼라 人心不可有所蔽也니 處當世之事호되 而蔽於私情이면 則雖易見之禍라도 有不能見焉하고
論異世之事호되 而蔽於陳迹이면 則雖易見之理라도 有不能見焉이라
惠襄鄭伯旣蔽於私情하야 而不能見其禍矣나 後世論之도 亦未免蔽於陳迹也라
自其迹觀之면 則鄭伯은 首唱納惠王者요 虢公은 從鄭伯而納惠王者라
鄭功大로되 而惠王反薄之하고 虢功小로되 而惠王反厚之하니 世皆疑惠王待鄭之薄也니라
襄王以狄伐鄭에 富辰固諫之하고 襄王召子帶에 富辰實導之하니 能見狄之禍요 而不見子帶之禍니 世皆悔富辰導子帶之失也니라
惠王失位於齊桓伯諸侯之時하고 襄王失位於晉文伯諸侯之時한대 納襄王者在晉이요 而納惠王者不在齊하니 世皆咎齊桓之納王緩也라
揆之以理컨대 則惠王之待鄭薄은 本無可疑요 富辰之召子帶도 本無可悔며 齊桓之緩於納王도 本無可咎니 是豈有難見之理哉아
兩人交訟에 其行賂多出於理之曲者하니 蓋恃直則不必賂也라 鄭恃功之大而守其常하고 虢慊功之小而獻其諂이라
功은 已往而易忘이요 諂은 方至而易惑이니 此惠王之所以厚虢而薄鄭歟ㄴ저
劉文靖裴寂俱唐室功臣이나 然首建大義는 皆文靜之謀니 非寂敢望也라
高祖厚寂而薄文靜者
는 文靜以其功
이요 寂以其諂耳
注+見唐史本紀ㄹ새니라 人情豈相遠哉
리오 故曰 惠王之待鄭薄
은 本無可疑
라하니라
兄弟當親이요 戎狄當疎니 子帶之不可絶이 政如戎之不可通也니라 富辰敎襄王親其所親하고 疎其所疎하니 本無二說이라
使襄王納其諫하야 而不與狄通이면 則子帶何自而成其惡乎아 苟與狄通이면 雖無子帶라도 猶不免於亂也리라
自古與戎狄共功者
는 未有不爲其
하니 唐之回紇
注+回紇 本匈奴高車部也 安祿山反 肅宗藉其兵力 復兩京 自是輕功 時入冦邊과 晉之契丹
注+五代晉高祖 以河東節度使 假契丹援 擧兵滅唐而據其位 割幽燕十六州之地與契丹而臣事之 出帝卽位 不肯稱臣於契丹 大怒 遣使責讓 後大擧入冦 出帝北遷에 始借其力
이라가 終罹其患
하니
彼二國者도 亦豈有子帶之釁召之邪아 爲襄王者는 當以與狄通爲悔요 不當以召子帶爲悔也니라 故曰 富辰之召子帶는 本無可悔라하니라
天子猶父也요 諸侯猶子也니 父有難에 一子居近而能救之면 爲諸子는 幸其父之免足矣니 何必競其功耶아
齊桓伯天下에 鄭虢納王이로되 而齊桓未嘗爭其功하니 當是時하야 風俗猶厚也ㄹ새니라
及襄王之出
에 晉與秦俱欲納王
이나 晉文辭秦師而獨擅其功
하니라
若不納이면 秦將納之리라 則失周矣니 何以求諸侯리오하니 是猶一子欲專救父之名하야 拒諸子使不得前이라
其心不在於父而在於名하니 安得爲孝乎리오 吁라 亦薄矣로다 然則齊桓晉文孰爲咎耶아 故曰 齊桓之緩於納王은 本無可咎라하니라
後世之論은 疑其所不當疑하고 悔其所不當悔하며 咎其所不當咎하니라
원장공原莊公이 진陳나라로 가서 왕후王后를 맞이하다
원장공原莊公이 진陳나라로 가서 왕후王后를 맞이하다
傳
장공莊公 18년, 괵공虢公‧진후晉侯‧정백鄭伯이 원장공原莊公을 진陳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왕후王后를 맞이해 오게 하였다. 진규陳嬀가 경사京師로 시집갔으니 이가 실로 혜후惠后이다.
傳
장공莊公 19년, 당초에 왕요王姚가 주 장왕周 莊王의 사랑을 받아 자퇴子頹를 낳으니, 장왕은 자퇴를 총애하여 위국蔿國을 그의 스승으로 삼았다.
혜왕惠王이 즉위한 뒤에 위국의 채포菜圃를 탈취하여 유囿로 만들고, 왕궁王宮과 가까이 있는 변백邊伯의 집을 왕이 탈취하고, 왕이 자금子禽‧축궤祝跪‧첨보詹父의 땅을 빼앗고, 선부膳夫(요리사料理師)의 봉록俸祿을 몰수沒收하였다.
그러므로 위국蔿國‧변백邊伯‧석속石速‧첨보詹父‧자금子禽‧축궤祝跪가 반란叛亂을 일으켜 소씨蘇氏에게 의지하였다. 가을에 다섯 대부大夫가 자퇴子頹를 모시고 혜왕惠王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온溫으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소자蘇子가 자퇴子頹를 모시고 위衛나라로 도망가니, 위군衛軍‧연군燕軍이 주周나라를 쳐서 겨울에 자퇴를 주왕周王으로 세웠다.
傳
장공莊公 20년, 봄에 정백鄭伯이 주 왕실周 王室의 불화不和를 화해和解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연중보燕仲父만을 잡았다. 여름에 정백鄭伯이 드디어 혜왕惠王을 모시고 돌아오니 혜왕이 역櫟에 거처하였다.
가을에 혜왕이 정백과 함께 오鄔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성주成周로 가서 주周나라의 보기寶器를 가지고 돌아왔다. 겨울에 왕자 퇴王子 頹가 다섯 대부大夫를 접대할 때에 연주演奏하는 음악音樂이 편무徧舞에 미치니,
정백이 이 소식을 듣고 괵숙虢叔을 만나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듣건대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때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화란禍亂이 이른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왕자 퇴王子 頹는 가무歌舞를 즐겨 피곤한 줄을 모르니, 이는 화란을 즐기는 것이다.
사구司寇가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하면 임금은 그 사형당한 자를 위해 성찬盛饌을 들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감히 화란을 즐긴다는 말인가. 천왕天王의 자리를 범犯하였으니, 이보다 큰 화란이 어디 있는가. 화란이 닥쳐오는데도 근심을 잊고 있으니, 근심스러운 일이 반드시 그에게 닥칠 것이다. 그러니 어찌 혜왕을 들여보내어 복위시키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괵공虢公이 “이것이 바로 과인의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정백鄭伯과 괵공虢公이 혜왕惠王을 왕성王城으로 모셔 들이다
傳
장공莊公 21년, 봄에 〈정백鄭伯과 괵공虢公이〉 미弭에서 서명胥命하고서, 여름에 함께 왕성王城을 공격하였다.
정백鄭伯은 혜왕惠王을 모시고서 어문圉門으로 들어가고, 괵숙虢叔은 북문北門으로 들어가서 왕자 퇴王子 頹와 다섯 대부大夫를 죽였다. 정백이 서쪽 궐闕에서 혜왕을 접대할 적에 육대六代의 음악을 모두 연주하였다.
혜왕이 여공厲公에게, 옛날 정 무공鄭 武公 때 정鄭나라의 경계였던 호뢰 이동虎牢 以東의 땅을 주었다. 원백原伯이 말하기를 “정백이 왕자 퇴의 잘못을 그대로 본받으니, 그에게도 장차 재앙災殃이 닥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5월에 정 여공鄭 厲公이 졸卒하였다.
傳
희공僖公 5년, 제후諸侯가 수지首止에서 회합會合하여 왕태자 정王太子 鄭을 회견會見하였으니, 이는 주 왕실周 王室의 안정安定을 모의謀議하기 위함이었다.
傳
희공僖公 7년, 겨울 윤월閏月에 혜왕惠王이 붕崩하였다. 양왕襄王은 태숙 대太叔 帶가 화난禍難을 일으킬 것을 꺼리고[오惡] 자신이 왕위王位에 오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상喪을 발표하지 않고 제齊나라에 화난禍難을 통보通報하였다.
傳
희공僖公 8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희공이 왕인王人‧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허남許男‧조백曹伯‧진세자 관陳世子 款과 회합會合하여 조洮에서 결맹結盟하였다.
傳
희공僖公 11년, 여름에 양揚‧거拒‧천泉‧고皐‧이伊‧낙雒의 융인戎人이 함께 경사京師를 공격攻擊하여 왕성王城으로 들어가서 동문東門을 불태웠으니,
이는 왕자 대王子 帶가 불러들인 것이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융戎을 토벌討伐하여 주周나라를 구원救援하였다. 가을에 진후晉侯가 융인戎人을 천왕天王과 화평和平시켰다.
傳
희공僖公 12년, 양왕襄王이 융인戎人이 쳐들어왔던 난리를 이유로 왕자 대王子 帶를 토벌討伐하니, 가을에 왕자 대王子 帶가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傳
희공僖公 13년, 봄에 제후齊侯가 중손추仲孫湫를 보내어 주周나라에 빙문聘問하고, 또 왕자 대王子 帶의 일을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손추는〉 빙문의 일을 마친 뒤에 왕王에게 말하지 않고,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아직은 불가능不可能합니다. 왕王의 노여움이 아직 누그러지지 않았으니, 10년은 지나야 할 것입니다. 10년이 되기 전에는 왕王이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傳
희공僖公 20년, 활인滑人이 정鄭나라를 배반하고 위衛나라에 복종하니, 여름에 정鄭나라 공자 사公子 士와 설도구洩堵寇가 군대를 거느리고 활滑나라로 쳐들어갔다.
부신富辰이 왕자 대王子 帶를 불러들이기를 청하다
傳
희공僖公 22년, 부신富辰이 왕王께 말하였다. “태숙太叔을 불러들이소서. ≪시경詩經≫에 ‘이웃과 화목和睦하면 인척姻戚들도 매우 우애友愛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형제兄弟 사이에 화목하지 못하다면 어찌 제후諸侯들의 불목不睦을 원망怨望할 수 있겠습니까?” 왕王이 기뻐하였다. 왕자 대王子 帶가 제齊나라에서 다시 경사京師로 돌아왔으니 왕王이 불러들인 것이다.
양왕襄王이 적인狄人을 거느리고 가서 정鄭나라를 토벌하고서 적인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태숙太叔이 적군狄軍을 거느리고서 양왕을 공격하니, 양왕이 노魯나라 사신을 보내어 난리가 난 것을 통고하다
傳
희공僖公 24년, 정군鄭軍이 활滑나라로 쳐들어갔을 때는 활인滑人이 정鄭나라의 명命을 듣겠다고 하더니, 정군鄭軍이 돌아가자 활滑나라는 다시 위衛나라에 붙었다.
정공자 사鄭公子 士‧설도유미洩堵兪彌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활滑나라를 토벌하니, 왕이 백복伯服‧유손백游孫伯을 정鄭나라로 보내어 활滑나라를 치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정백鄭伯은 혜왕惠王이 들어갔을 때 여공厲公에게 술잔[작爵]을 주지 않은 일을 원망하고, 또 양왕襄王이 위衛나라와 활滑나라를 편드는 것을 원망하였다.
그러므로 왕명王命을 듣지 않고 두 사람을 잡아 가두니, 왕은 노하여 적군狄軍을 거느리고서 가서 정鄭나라를 치려 하였다. 부신富辰이 간諫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서 퇴숙頹叔과 도자桃子를 보내어 적군狄軍을 출동出動시키게 하였다.
여름에 적인狄人이 정鄭나라를 토벌하여 역櫟을 취하니 왕은 적인의 덕德을 입었다고 여겨 적인의 딸을 왕후王后로 삼으려 하자 부신富辰이 간하였으나, 왕은 또 듣지 않았다. 감소공甘昭公이 외씨隗氏와 사통私通하니 왕은 외씨隗氏를 폐출廢黜하였다.
퇴숙頹叔‧도자桃子가 말하기를 “우리가 실로 적인狄人에게 딸을 왕후로 바치도록 시켰으니, 적인狄人이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태숙太叔을 받들어 모시고 적군狄軍을 거느리고서 왕을 공격하였다.
왕의 어사御士가 방어防禦하려 하자 왕이 말하기를 “선후先后께서 나를 무어라고 하시겠느냐? 차라리 제후諸侯들에게 도모圖謀하도록 하겠다.”라고 하고서, 왕이 경사京師를 떠나 정鄭나라로 가서 범氾에 머물렀다. 태숙太叔은 외씨隗氏를 데리고 온溫에 거주하였다.
겨울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와서 난리가 난 것을 통고通告하며 말하기를 “불곡不穀이 부덕不德하여 모후母后의 총애하는 아들 대帶에게 죄罪를 얻어 정鄭나라 범氾의 향촌鄕村[야野]에서 머물고 있기에 감히 숙부叔父에게 고하노라.”라고 하였다.
장문중臧文仲이 대답하기를 “천자天子께서 밖으로 몽진蒙塵하셨으니 감히 달려가 관수官守에게 문후問候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간사보簡師父를 보내어 진晉나라에 고하게 하고, 좌언보左鄢父를 보내어 진秦나라에 고하게 하였다.
傳
희공僖公 25년, 봄에 진백秦伯이 군대를 황하黃河 가에 주둔시키고서 왕王을 호송護送해 경사京師로 들여보내려고 하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패자霸者가 되기를 구하려면 왕사王事에 진력盡力하는 것만 한 게 없습니다.
제후가 신임信任할 것이고 또 대의大義에도 부합합니다. 문후文侯의 공업功業을 계승하여 제후에게 신의信義를 선양宣揚하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라고 하였다.
문공文公이 복언卜偃에게 거북점을 치게 하니, 복언卜偃이 “길吉합니다.”라고 하니, 진후晉侯는 진군秦軍에게 사양하고서 물길을 따라 내려갔다. 3월 갑진일甲辰日에 양번陽樊에 주둔하여 우군右軍은 온溫을 포위하고, 좌군左軍는 왕王을 맞이하였다.
여름 4월 정사일丁巳日에 왕이 왕성王城으로 들어가서 태숙太叔을 온溫에서 잡아 습성隰城에서 죽였다. 무오일戊午日에 진후晉侯가 왕께 조현朝見하니 왕이 단술을 접대하고 유宥를 명命하였다.
천하의 일에는, 먼 일, 가까운 일, 은미隱微한 일, 현저顯著한 일이 있으니, 애당초 정해진 명칭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古代의 일이라 하여 먼 것이 아니고, 금세今世의 일이라 하여 가까운 것이 아니며, 고대의 일이라 하여 은미한 것이 아니고, 금세의 일이라 하여 현저한 것이 아니니, 오직 내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먼 일, 가까운 일, 은미한 일, 현저한 일이 결정될 뿐이다.〉
지금 매우 가까워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내가 몸소 겪은 일만 한 것이 없는데, 혜왕惠王은 자퇴子頹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禍를 몸소 겪고도 다시 자대子帶를 총애하였고,
정백鄭伯은 육대六代의 음악[편무徧舞]을 연주하는 자퇴의 참람함을 직접 보고도 다시 육대의 음악을 연주[비악備樂]하였으며, 양왕襄王은 자대가 융적戎狄을 불러들인 변란을 몸소 겪고도 다시 융적을 가까이하였다.
이들이 모두 직접 화를 당하고도 다시 몸소 그 일을 답습한 것은 어째서인가? 사람의 마음은 이 일에 마음이 가려지면 저 일에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혜왕은 자식 사랑에 가려졌기 때문에 근자에 찬탈의 화를 당하고도 이미 다른 세대의 일처럼 잊었고,
정백은 사치奢侈에 가려졌기 때문에 근자에 편무徧舞를 참용僭用하는 것을 보고도 이미 다른 세대의 일처럼 잊었으며, 양왕은 분노憤怒에 가려졌기 때문에 근자에 융적을 불러들인 변란을 당하고도 이미 다른 세대의 일처럼 잊은 것이다.
이 세 임금은 마음이 한 곳에 가려졌기 때문에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본 것도 마치 아득한 다른 세대의 일처럼 보았는데,
하물며 주왕紂王에게 수백 년 전 걸왕桀王의 일을 거울 삼으라고 요구하고,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에게 수백 년 전 주왕을 거울 삼으라고 요구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이렇게 논하였다. 마음에 가려진 것이 있으면 지금의 일을 옛 일로 여기고, 마음에 가려진 것이 없으면 옛 일을 지금의 일로 여긴다. 이는 어째서인가?
마음에 가려진 것이 있으면 정욕情欲에 흔들리고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여 흔단釁端(화단禍端)이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살육殺戮이 뒤에 있어도 알지 못하며,
몸소 겪은 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취중이나 꿈속의 일처럼 모호하여 아득한 태고太古의 일처럼 다시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의 일을 옛 일로 여기는 것이니, 혜왕惠王‧양왕襄王‧정백鄭伯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마음에 가려진 것이 없으면 상하 사방上下 四方으로 통하여 천 년을 하루아침으로, 만대萬代를 일세一世로 여겨, 옛 성현聖賢과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 묻고 답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천도天道〉 가운데서 한마음 한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옛 일을 지금의 일로 여기는 것이니, 순舜임금과 문왕文王이 부절符節을 맞춘 것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옛 일을 지금의 일로 여기고 지금의 일을 옛 일로 여기는 것은, 단지 내 마음이 통通하였느냐 가려졌느냐에 달렸을 뿐이니, 어찌 일찍이 정해진 명칭이 있었겠는가?
아! 사람의 마음은 가려짐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세의 일을 처리하면서 사사로운 인정에 가려지면 비록 보기 쉬운 화도 보지 못하고,
고대의 일을 논하면서 옛 사적事迹에 가려지면 비록 보기 쉬운 이치도 보지 못한다.
혜왕惠王‧양왕襄王‧정백鄭伯은 이미 사사로운 인정에 가려져서 그 화를 보지 못하였지만, 후세에 이들의 일을 논하는 자들 또한 옛 사적에 가려짐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적으로 보면, 정백은 혜왕惠王을 모셔 들일 것을 먼저 주창主唱한 자이고, 괵공虢公은 정백을 따라 혜왕을 모셔 들인 자이다.
정백의 공이 큰데도 혜왕은 도리어 박대薄待하였고, 괵공의 공이 작은데도 혜왕은 도리어 후대厚待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혜왕이 정백을 박대한 것으로 의심한다.
양왕襄王이 적인狄人을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정벌할 때 부신富辰이 강력히 간하였고, 양왕이 자대子帶를 불러들일 때는 부신이 실로 인도하였으니, 부신은 적인의 화禍만 알고 자대의 화는 알지 못한 것이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부신이 자대를 불러들이도록 인도한 잘못을 회한悔恨한다.
혜왕惠王은 제 환공齊 桓公이 제후의 패자霸者였을 때에 왕위를 잃었고, 양왕襄王은 진 문공晉 文公이 제후의 패자였을 때에 왕위를 잃었는데, 양왕을 왕경王京으로 모셔 들인 이는 진 문공이고, 혜왕을 모셔 들인 이는 제 환공이 아니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제 환공이 혜왕을 너무 늦게 모셔 들인 것을 죄로 여겨 나무란다.
그러나 사리로 헤아려보면, 혜왕이 정백鄭伯을 박대한 것은 본래 의심할 것이 없고, 부신이 자대를 불러들인 것도 본래 회한할 것이 없으며, 제 환공이 혜왕을 늦게 모셔 들인 것도 본래 나무랄 것이 없으니, 여기에 어찌 알기 어려운 이치가 있겠는가?
두 사람이 쟁송爭訟할 때에 뇌물을 쓰는 일은 대체로 잘못이 있어 승소할 수 없는 자에게서 나오니, 이는 잘못이 없는 자는 자기의 곧음을 믿어 뇌물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백鄭伯은 자기의 공이 큰 것을 믿고서 상도常道를 지켰고, 괵공虢公은 자기의 공이 작은 것을 불만으로 여겨 아첨하여 양왕襄王의 비위를 맞추었다.
공을 세운 것은 이미 지난 일이어서 잊기 쉽고, 아첨은 지금 이른 것이어서 현혹되기 쉬우니, 이것이 혜왕惠王이 괵공을 후대하고 정백을 박대한 까닭일 것이다.
유문정劉文靖과 배적裴寂은 모두 당唐나라의 공신이었지만, 먼저 대의를 세운 것은 문정의 계획이었으니 배적이 감히 비교될 수 없다.
그런데도
당 고조唐 高祖가 배적을 후대하고 문정을 박대한 것은, 문정은 자기의 공을 믿었고, 배적은 아첨으로 고조의 비위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注+≪당서唐書≫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보인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서로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혜왕이 정백을 박대한 일은 본래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형제兄弟는 친근하게 대해야 하고 융적戎狄은 소원하게 대해야 하니, 자대子帶와 형제의 정을 단절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융적과 교통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부신富辰이 양왕襄王에게 가까이할 사람을 가까이하고, 멀리할 사람을 멀리하라고 가르쳤으니, 본래 이 밖에 달리 더할 말이 없다.
가령 양왕이 그의 간언을 받아들여 융적과 통호通好하지 않았다면 자대가 어떻게 간악한 반역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가령 융적과 통호하였다면 비록 자대가 없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융적의 환란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융적과 함께 공을 이룬 자는 융적의 배반을 당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당唐나라가
회흘回紇과
注+회흘回紇은 본래 흉노匈奴의 고차부족高車部族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숙종肅宗이 그들의 힘을 빌려 양경兩京(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수복하였다. 이때부터 회흘은 공功을 믿고서 때때로 들어와 변방을 침략하였다. 〈통호하고〉
진晉나라가
거란契丹과
注+오대五代 때 진 고조晉 高祖가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서 거란契丹의 응원應援을 빌려 군사를 일으켜 후당後唐을 멸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등 16주州의 땅을 떼어 거란에 주고서 신하의 도리로 거란을 섬겼다. 출제出帝(고조高祖의 형)가 즉위하여 거란에게 신하로 칭하려 하지 않으니, 거란이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꾸짖었다. 뒤에 대군大軍을 일으켜 쳐들어오니, 출제가 요양遼陽에서 북쪽 건주建州로 천도遷都하였다. 〈통호하여〉 처음에는 두 융적의 힘을 빌렸다가 마침내 융적의 환란을 당하였으니,
저 두 나라에도 어찌 자대 같은 화근이 있어서 융적의 환란을 부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양왕의 일을 논하는 자들은 융적과 통호한 것을 회한悔恨해야지, 자대를 불러들인 것을 회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부신이 자대를 불러들인 것은 본래 회한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천자天子는 아비와 같고 제후諸侯는 자식과 같으니, 아비에게 화난禍難이 닥쳤을 때 가까이 있는 한 자식이 아비를 구제하였으면 여러 자식들은 그 아비가 화를 면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 만족해할 것이니, 어찌 그 공을 다투겠는가?
제 환공齊 桓公이 천하의 패자霸者가 되었을 때 정백鄭伯과 괵공虢公이 혜왕惠王을 경사京師로 모셔 들였으되 제 환공은 그 공을 다투지 않았으니, 이는 당시의 풍속이 오히려 순후하였기 때문이다.
양왕襄王이 경사에서 도망해 나왔을 때 진후晉侯와 진백秦伯이 서로 양왕을 모셔 들이고자 하였는데, 진 문공晉 文公은 진군秦軍을 사절謝絶하고서 그 공을 독차지하였다. 외전外傳(≪국어國語≫)에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양왕을 경사로 모셔 들이지 않으십니까?
만약 임금께서 모셔 들이지 않으시면 진백秦伯이 모셔 들이려 할 것입니다. 그리 된다면 주왕周王의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니, 어떻게 제후의 신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자범子犯에 말이 기재되어 있으니, 이는 한 자식이 아비를 구제하였다는 명예를 독차지하기 위해 여러 자식들을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은 것과 같다.
그 마음이 아비를 구제하는 데 있지 않고 명예를 얻는 데 있었으니 어찌 효孝가 될 수 있겠는가? 아! 너무나도 야박했다 하겠다. 그렇다면 제 환공과 진 문공 두 사람 중에 누구를 꾸짖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제 환공이 늦게 양왕을 모셔 들인 것은 본래 꾸짖을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논의는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심하고, 회한하지 말아야 할 것을 회한하며, 꾸짖지 말아야 할 것을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