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 晉陽處父侵蔡 楚子上救之 與晉師夾道泜水而軍
傳
【左傳】 僖三十三年
이라 하니 楚子上救之
할새 하다
하야 使謂子上曰
하고 이라하니 子若欲戰
이면 則吾退
하리니 하라 遲速唯命
하리라 하라 라하고 乃駕以待
하다
子上欲涉
한대 曰 不可
하다 晉人無信
하니 이리오 하다
陽子宣言曰 楚師遁矣라하고 遂歸하니 楚師亦歸하다
國毁當辨
이나 身毁當容
이요 國
當爭
이나 身(爲)[辱]當受
니 是固不可格以一律也
라
昔夫子能忍匡人之圍
注+昔夫子能忍匡人之圍:見論語나 而不能忍萊夷之兵
注+而不能忍萊夷之兵:見家語하고 能忍南子之見
注+能忍南子之見:見論語이나 而不能忍優施之舞
注+而不能忍優施之舞:見家語하니 聖人之心
이 何其多變也
오
가 忽變而爲撃柱之剛
하고 緩帶之和
가 忽變而爲奮髯之怒
하며 迭弛迭張
하고 迭弱迭強
하며 闔闢推移
하야 不主故常
하니 是非聖人樂於多變也
요 處身之與處國
에 其法固不相參也
ㄹ새니라
毁辱在身이면 聖人納之而不校也하니 此匡人之圍와 南子之見을 夫子所以未嘗一動念也라
毁辱在國이면 聖人競之而不置也하니 此萊夷之兵과 優施之舞를 夫子所以未嘗一毫貸也라
楚子上爲陽處父所薄而退舍에 加以遁逃之謗하니 爲子上者면 盍思是謗其身之謗乎아 其國之謗乎아
使所謗止於子上之身이면 則不與之校者는 盛德也며 閎量也며 大度也어니와 今遁逃之謗이 不專及其身하고 而且及其師하며 不專及其師하고 而且及其國하니 爲子上者면 安可嘿嘿受謗하고 遽帥師而歸乎아
楚與晉爭衡久矣
니 一
爲陽處父而被以逃遁之名
이어늘 子上曾不出一語與之競
이면 天下必以爲楚師之眞遁
이라하야 皆將雄晉而雌楚
리라
然則爲子上者將奈何오 曰 夾泜之師가 兩軍相望하니 先濟不可也며 先退亦不可也라
先濟면 則晉將乗之逞邀擊之計요 先退면 則晉將藉之爲班師之名이라
子上盍當退舍之際하야 遣一介之使以告晉師曰 大國有命하니 敝邑不敢違라 是以在此爲大國退하야 旣成列矣요 使人敢請濟期하노라 彼陽處父無辭以對然後에 卷甲而趨之면
雖使不及晉師라도 然遁逃之名은 將在晉而不在楚矣리라
大抵君子勇於公而怯於私
하니 在家庭在鄕黨在田野
하야는 含垢忍恥
하야 見侮不
하고 恂恂愉愉
하야 人百欺之而不以爲忤
어니와 在廟堂在軍旅在官府
하야는 燭奸擿隱
하야 洞見肺肝
하고 凜凜冽冽
하야 雖人一欺之
라도 亦未嘗容
이라
其所以不移朝廷軍旅官府之勇而變家庭鄕黨田野之怯은 非嫌於私己也라 一己之尊을 萬物無對ㄹ새니라
其所以不與人校者는 非不敢校也라 不見有可校者也ㄹ새니라
擧梃擊空
이면 適以自勞
요 擧刀斷水
면 適以自困
이라 彼之來毁譽者
는 適所以自損耳
니 吾從容無爲
하고 而置彼於不足校之地
면 勇不旣大矣乎
아
至於國家之事하얀 則存亡安危繫焉하니 不得已而出力與之校요 校而以力이면 則其威褻矣니
是知怯於私者를 衆人以爲怯이나 而君子則以爲勇之大也라
진晉나라 양처보陽處父가 채蔡나라를 침공侵攻하니, 초楚나라 자상子上이 채蔡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와서 진군晉軍과 지수泜水를 끼고 대치하다
傳
희공僖公 33년, 진晉나라 양처보陽處父가 채蔡나라를 침공하니, 초楚나라 자상子上이 채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와서 진군晉軍과 지수泜水를 끼고 대치하였다.
양자陽子가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보내어 자상子上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문덕文德이 있는 사람은 순리順理를 범하지 않고, 무덕武德이 있는 사람은 적敵을 피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대가 싸우고자 한다면 내가 30리를 물러날 것이니 그대는 물을 건너와 진을 치라. 시기의 조만早晩은 그대 명命을 따르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물을 건너도록 방비를〉 완화하라. 군대를 오래 주둔시켜 물자物資를 허비하는 것은 그대 또한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수레에 말을 매고 기다렸다.
자상子上이 물을 건너려 하자, 대손백大孫伯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진인晉人은 신의信義가 없으니 물을 반쯤 건넜을 때에 우리를 공격[박薄]한다면, 패전敗戰을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진군晉軍이 〈물을 건너도록 우리가 방비를〉 완화해주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상子上은 30리를 퇴각하였다.
그러자 양자陽子는 “초군楚軍이 도망갔다.”고 선언宣言하고서 드디어 돌아가니 초군楚軍도 돌아갔다.
초楚나라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자상子上을 참소하기를 “진晉나라의 뇌물을 받고 진군晉軍을 피하였으니, 초楚나라의 수치입니다. 이보다 큰 죄罪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초楚 성왕成王은 자상子上을 죽였다.
국가가 받는 훼방毁謗은 마땅히 분변해야 하지만 자신이 받는 훼방은 마땅히 포용해야 하고, 국가가 당한 모욕은 마땅히 쟁변爭辨해야 하지만 자신이 당한 모욕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본래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부자夫子께서
광인匡人의 포위는 용인하셨으면서
注+≪論語≫에 보인다. 내이萊夷의 칼날은 용인하지 않으셨고,
注+≪孔子家語≫에 보인다. 남자南子의
접견接見은 용인하셨으면서
注+≪論語≫에 보인다. 우시優施의 춤은 용인하지 않으셨으니,
注+≪孔子家語≫에 보인다. 성인의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 잘 변하였는가?
요지繞指처럼 부드럽던
성정性情이 갑자기 기둥을 치는 강철처럼 변하기도 하고, 띠처럼 느슨하던 태도가 갑자기 격렬한 분노로 변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느슨하고 긴장하며 때로는 약해지고 강해지며, 개방하기도 하고 폐쇄하기도 하여 상황에 따라 맞추어
상규常規를 주장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성인께서 많이 변화하기를 즐긴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장과 국가의 입장에서 대처하는 방법이 본래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禮見南子圖
당신을 훼방하고 모욕하는 것은 성인께서 받아들이고 따지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광인匡人의 포위와 남자南子의 접견에 부자께서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으신 까닭이다.
국가를 훼방하고 모욕하는 것은 성인께서 쟁변爭辨하시고 버려두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내이萊夷의 칼날과 우시優施의 춤을 부자께서 조금도 용서한 적이 없으신 까닭이다.
초楚나라 자상子上이 양처보陽處父의 공격을 받고 30리를 후퇴하자 〈양처보陽處父는 자상子上에게〉 도주하였다는 비방을 씌웠으니, 자상子上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하여 이 비방이 자기 개인에 대한 비방인지, 국가에 대한 비방인지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가령 그 비방이 자상子上의 신상身上에만 그친 것이라면 따지지 않은 것이 성대한 덕德이고 넓은 아량이며 큰 도량이지만, 지금 도주하였다는 비방이 오로지 자상子上의 신상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그 군대에까지 미쳤으며, 그 군대에만 미친 것이 아니라 그 국가에까지 미쳤으니, 자상子上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말없이 비방을 받아들이고 서둘러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오겠는가?
초楚나라는 진晉나라와 패권覇權을 다툰 지 오래인데, 하루아침에 양처보陽處父가 〈자상子上에게〉 도주했다는 오명汚名을 씌웠는데도 자상子上이 그에게 쟁변爭辨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초군楚軍이 참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겨, 모두 진晉나라를 강국强國으로 초楚나라를 약국弱國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오늘 이후로 몇 번 싸워 몇 번을 승리한 뒤에야 이 치욕을 씻게 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상子上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어찌해야 하였겠는가? 〈이때 진晉․초楚 양국의〉 군대가 지수泜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며 포진布陣하였으니, 먼저 도하渡河할 수도 없고 먼저 퇴각할 수도 없었다.
먼저 도하할 경우 진군晉軍은 그 기회를 이용해 초군楚軍을 요격할 계획을 세우려 할 것이고, 먼저 퇴각할 경우 진군晉軍은 이를 빙자해 환군還軍의 명분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러니 자상子上은 어찌하여, 30리를 퇴각할 때를 당하여 사자使者 한 사람을 보내어 진군晉軍에게 고하기를 “대국大國의 명령을 폐읍敝邑(초楚)이 감히 어길 수 없기에 여기에서 대국大國을 위해 퇴각하려고 이미 대열을 정비하고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귀국貴國이 언제 도하할 것인지를 감히 묻습니다.”라고 하게 하여, 저 양처보陽處父가 대답할 말이 없게 한 뒤에 군대를 철수해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렇게 하였다면〉 비록 〈비방이〉 진군晉軍에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주했다는 오명汚名은 아마도 진군晉軍에 있고 초군楚軍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처보陽處父가 어떻게 그에 대한 훼방을 퍼뜨리고, 상신商臣이 어떻게 그에 대한 참소를 올릴 수 있었겠는가?
대체로 군자君子는 공사公事에는 용감하고 사사私事에는 겁을 내니, 가정家庭이나 향당鄕黨이나 전야田野에서는 치욕을 참고서 모욕을 당해도 따지지 않고, 〈성정性情이〉 공손하고 화열和悅하여 남들이 백 번을 속여도 노하지 않지만, 묘당廟堂이나 군려軍旅나 관부官府에서는 간사한 일이 없는지를 밝게 살펴 그 폐부肺腑를 들여다보아 〈숨은 부정不正을 들추어내듯이〉 하고, 〈언행言行이〉 엄숙하고 냉정하여 비록 남이 한 번만 속여도 용서한 적이 없다.
군자가 조정朝廷이나 군려軍旅나 관부官府에 있을 때의 용기로 가정家庭이나 향당鄕黨이나 전야田野에 있을 때의 겁나怯懦를 개변改變하지 않는 것은, 사기私己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한 몸의 존엄尊嚴을 만사와 만물이 상대(필적匹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자가 사람들과 〈사사私事를〉 따지지 않는 것은 감히 따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따질 만한 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몽둥이를 들고 허공을 치면 자신만을 수고롭게 할 뿐이고, 칼을 들고 흐르는 물을 끊으면 자신만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훼방하는 저 사람들도 다만 스스로를 손상시킬 뿐이니, 나는 침착하고 한가로이 처신하여 저 일을 따질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면 어찌 큰 용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국가를 〈훼방하는〉 일로 말하면 존망存亡과 안위安危가 매어 있으니 힘을 다해 따지지 않을 수 없고, 힘을 다해 따지면 저들의 위세가 가벼워질 것이다.
이에서 사사私事에 겁을 내는 사람을 사람들은 겁나怯懦라고 하지만 군자는 그것을 대용大勇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