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重耳不可曰
하고 이어늘 이라 吾其奔也
하리라하고 遂奔狄
하다
從者 狐偃趙衰顚頡魏武子
러라 狄人伐
하야 獲其二女叔隗季隗
하야 納諸公子
하니
公子取季?
하야 生伯?叔劉
하고 以叔?妻趙衰
하야 生
하다
將適齊
할새 謂季隗曰 待我二十五年
하야 不來而後嫁
하라 對曰 我二十五年矣
라 이리라
傳
하니 公子怒
하야 欲鞭之
한대 라하니 稽首受而載之
하다
及齊
하야 齊桓公妻之
하니 하다 從者以爲不可
라하야 러니
이라가 하고 而謂公子曰 子有四方之志
어늘 其聞之者
를 吾殺之矣
니이다
公子曰 無之
로라 하소서 이니이다 公子不可
라한대 하다
傳
及曹
하니 曹共公聞其
하고 欲觀其裸
하야 浴
에 하다
之妻 曰 吾觀晉公子之從者
컨대 皆足以相國
이니 若以相
이면 必反其國
이요
反其國
이면 必得志於諸侯
하고 得志於諸侯
하야 而誅無禮
면 曹其首也
리니 가
傳
及宋하니 宋襄公贈之以馬二十乘하니이다 及鄭하니 鄭文公亦不禮하다
及楚
하니 楚子享之曰 公子若反晉國
이면 則何以報
고
對曰
玉帛
은 則君有之
하고 羽毛齒革
은 則君地生焉
이라
其波及晉國者는 君之餘也니 其何以報君이리잇가 曰 雖然이나 何以報我오
天將興之
하니 誰能廢之
리오 違天
이면 必有大咎
라하고 乃送諸秦
하다 秦伯納女五人
하니 與焉
이라
傳
寺人披請見한대 公使讓之하고 且辭焉曰 蒲城之役에 君命一宿이어늘 女卽至하고
其後에 余從狄君以田渭濱에 女爲惠公來求殺余할새 命女三宿이어늘 女中宿至하니
對曰 臣謂君之入也에 其知之矣러니 若猶未也하니 又將及難하니 君命無二가 古之制也니이다
傳
初
에 는 守藏者也
라 其出也
에 竊藏以逃
하야 하다
及入에 求見한대 公辭焉以沐하니 謂僕人曰 沐則心覆하고 心覆則圖反하니 宜吾不得見也라
居者爲社稷之守하고 行者爲羈絏之僕이 其亦可也어늘 何必罪居者오
國君而讐匹夫면 懼者甚衆矣리라 僕人以告한대 公遽見之하다
晉文公은 自出亡으로 至於霸天下히 拔身流離阨困之中하야 而成閎大豐顯之業이라
一時諸臣狐趙
郤推挽翊賛之功居多焉
이나 疇諸臣之功
은 次者
로다
文公未入之前엔 必以反晉之謀爲冠이요 文公旣入之後엔 必以城濮之戰爲冠이나
吾獨以爲反晉之功
은 不若去齊
요 而城濮之諸將
은 序
論勳
이나 曾未及寺人披頭湏之萬一也
라
天之生物에 自蘗而條하고 自華而實은 特造化之小者耳요
霜焉雪焉하야 勁烈刻厲히 翦擊其枝葉하며 剝傷其膚理하고 然後能反膏收液하야 鬱積磅礴이라가
發而爲陽春之滋榮하니 此天下之大造化也라 必有大彫落하고 然後有大發生하며 必有大摧折하고 然後有大成就하니
文公安齊之富
하고 無
四方之志
할새 苟從行諸臣亦徇其欲
이면 라
幸而從行者識高慮遠하야 謀於桑下하야 載而去齊하니 奪其燕安之雨露하고 而壓以禍患之雪霜하야
激之觀浴沃盥하야 以起其憤하고 激之鄭文子玉하야 以作其憂라
乃切乃磋
하고 乃琢乃磨
하야 向來弛墮驕怠之氣掃除咸盡
하니 伯心勃然而生
하야 이라
向非奪其安齊면 亦安能進文公之志而霸之耶아 文公始所以眷眷於齊者는 屬意於二十乘之馬耳라
從者奪文公二十乘之馬하고 而與文公全晉四千乘之賦는 使之棄鴻毛而得泰山이니 可謂知取予矣로다
苟不去齊면 烏能入晉이리오 然則策復國之勳에 安得不以去齊爲首乎아
文公旣入晉하야 席未及煖에 已忘其初하고 於寺人披頭湏之見에 忿然有不平之心이라
若肆行忿戮
이면 則懼者甚衆
이리니 雖幸免焚宮之變
이라도 安知他日無蒯聵戎州之釁乎
注+安知他日無蒯聵戎州之釁乎:아
頼披與湏力抗危言以警之하야 文公一聞其警에 忿戾俱消하니 變淺陋褊急之襟量하야 爲廣大易直之規模라
隆寛盡下에 人皆思奮하야 以取城濮之勝하니 豈非披與湏一警之力乎아
回萬里之迷途者는 一呼之力也요 瘳十年之廢疾者는 一鍼之力也며 登五霸之盛烈者는 一警之力也라
自披湏而視城濮諸將之功이면 則我源而彼流며 我根而彼幹이니 其小大輕重判然矣라 此吾所以高披湏而下城濮也로다
文公方安其小하니 遽奪之而使不得安於小하고 文公方驕其大하니 遽警之而使不敢驕於大라
奪於前而警於後하야 置文公於不得不霸之地하니 信矣라 諸臣之功也여
雖然이나 此非專諸臣之功也라 其本實在於文公焉이라 文公當出亡之初에 不校君父之命하니 旣有君人之資矣라
其未安齊之前
에 危於渭濵
하고 餓於五鹿
하야 가 亦非一日也
라
雖時有所蔽라도 一奪一警에 初心遽還하야 遷移改悔를 速不容瞬하니 若文公先無所資면 二三臣者雖有斡旋之妙用이라도 亦安所施乎아
其君有如是之資하고 其臣有如是之用이로되 反僅成霸業而止하니 此吾所以爲文公恨也로다
之濵
에 하니 聖化天運
하야 奪子貢之學而一貫自通
하고 奪顔淵之才而卓爾自見
注+奪子貢之學而一貫自通 奪顔淵之才而卓爾自見:이라子貢
或謦或咳하고 或顧或盼하며 或語或笑하야 一警之下에 萬慮消亡하니
吾未嘗不恨文公生夫子之前이요 而又自恨今之學者生夫子之後也라
嗚呼라 夫子則遠矣나 乃若夫子之神化는 盖通萬世古今爲一爐冶하니 初未嘗息也라 孰謂吾生之晩乎아
‘晉나라 重耳가 狄으로 도망가다’부터 ‘上衣를 벗고 스스로 罪囚 모양을 하고서 謝罪하다’까지
‘晉나라 重耳가 狄으로 도망가다’부터 ‘上衣를 벗고 스스로 罪囚 모양을 하고서 謝罪하다’까지
傳
僖公 23년, 公子 重耳가 禍難를 만났을 때에 晉人이 蒲城을 攻伐하니, 蒲城 사람들이 맞아 싸우려 하자
重耳가 반대하며 “君父의 命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는 祿을 받았고, 이로 인해 人民을 얻었는데 人民을 소유하였다 하여 〈君父의 命에〉 저항[校]한다면 이보다 큰 罪가 없으니, 나는 도망갈 것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狄으로 도망갔다.
이때 그를 侍從한 사람은 狐偃, 趙衰, 顚頡, 魏武子(魏犨), 司空季子였다. 狄人이 廧咎如를 討伐하여 그 두 딸 叔隗와 季隗를 포로로 잡아와서 公子에게 바치니,
公子는 季隗를 취하여 伯儵와 叔劉를 낳고, 叔隗를 趙衰의 아내로 주어 盾을 낳았다.
重耳가
齊나라로 가려 할 때
季隗에게 이르기를 “나를 25년 동안 기다렸다가 돌아오지 않거든 시집가라.”고 하였다.
季隗가 대답하기를 “내 나이 지금 25세인데 다시 25년이 지난 뒤에 시집간다면
棺에 들어갈 때가 될 것이니, 〈
公子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晉나라 重耳가 列國을 주유하다[晉重耳周遊列國]
傳
衛나라를 지날 때 衛 文公이 禮遇하지 않으니, 五鹿으로 나와 野人에게 음식을 求乞하였다.
野人이 그에게 흙덩이를 주니 公子가 怒하여 채찍으로 치려 하자 子犯이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니, 重耳는 머리를 조아리고 그 흙덩이를 받아 수레에 실었다.
齊나라에 이르러 齊 桓公이 딸을 重耳에게 아내로 주니, 公子는 齊나라의 생활에 安住하였다. 그러자 그를 따른 자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여겨 장차 떠날 것을 뽕나무 아래에서 謀議하였는데,
누에 치는 妾이 그 나무 위에 있다가 그 모의를 듣고 돌아와서 그 일을 姜氏에게 고하였다. 姜氏는 그 첩을 죽여 입을 막고서 公子에게 “公子께서 가지신 天下를 經營할 遠大한 뜻에 대해 들은 사람을 내가 이미 죽였습니다.”라고 하니,
公子가 “그런 뜻이 없다.”라고 하였다. 姜氏가 “떠나십시오. 아내를 사모하고 安逸을 탐하는 것은 실로 功名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하였다. 公子가 듣지 않자, 姜氏는 子犯과 상의하여 公子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에 수레에 싣고 齊나라를 떠나보냈다.
傳
曹나라에 이르니 曹 共公은 重耳의 갈비가 통뼈라는 말을 듣고 그의 알몸을 보고자 하여 그가 목욕할 때에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하였다.
僖負羈의 아내가 僖負羈에게 말하였다. “내가 晉公子의 從者들을 보건대 모두 나라의 宰相이 되기에 충분한 人才들이니 만약 公子가 저들의 보좌를 받는다면 夫子는 반드시 晉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晉나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諸侯의 霸主가 될 것이고, 제후의 霸主가 되어 無禮한 나라를 誅罰한다면 아마 曹나라가 맨 먼저 주벌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찌 일찍이 스스로 두 마음을 품은 것을 公子에게 보이지 않습니까?”
아내의 말을 들은 僖負羈가 한 소반의 음식을 보내면서 밥 속에 구슬을 넣으니, 公子는 그 밥만을 받고 구슬은 돌려주었다.
傳
宋나라에 이르니 宋 襄公이 그에게 말 20乘을 보내주었다. 鄭나라에 이르니 鄭 文公 또한 禮遇하지 않았다.
楚나라에 이르니 楚子가 酒宴을 베풀어 重耳을 접대하며 말하기를 “公子가 만약 晉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무엇으로써 不穀에게 報答하겠소?”라고 하니,
重耳가 대답하기를 “子女와 玉帛이라면 임금께서 이미 소유하셨고, 羽‧毛‧齒‧革이라면 임금님의 땅에서 생산됩니다.
우리 晉나라에 흘러온 것들은 임금님께서 쓰시고 남은 것들이니, 무엇으로 임금께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楚子가 다시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무엇으로써 보답하겠소?”라고 하니,
重耳가 대답하였다. “만약 임금님의 덕으로 晉나라로 돌아가게 된다면 晉나라와 楚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서 中原에서 만났을 때 임금님을 위해 3舍를 물러나겠습니다.
그래도 〈戰爭을 중지하자는〉 임금님의 命을 들을 수 없으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차고서 임금님과 한판 겨루어보겠습니다.”
이에 子玉이 죽이기를 청하니 楚子는 “晉公子는 뜻이 廣大하면서도 儉素하고 文華하면서도 禮가 있으며, 그 從者들은 엄숙하면서도 너그럽고 충성스러워 힘을 다해 그 임금을 섬기는데,
현재의 晉侯는 親近한 사람이 없어 內外가 모두 그를 미워한다. 내가 듣건대 姬姓 諸侯 중에 唐叔의 後孫이 가장 뒤에 衰亡할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晉公子가 장차 晉나라의 임금이 되기 때문이리라.
하늘이 그를 일으키려 하는데 누가 그를 廢黜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어기면 반드시 큰 災殃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서, 重耳를 秦나라로 보내주었다. 秦伯이 重耳에게 여자 다섯을 보내주었는데 懷嬴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하루는 懷嬴이 주전자[匜]에 물을 담아 들고 重耳의 손에 부어 洗手하게 하였는데, 〈重耳가〉 세수를 마치고는 젖은 손의 물을 懷嬴에게 뿌리니, 懷嬴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秦나라와 晉나라는 對等[匹]한 나라인데 어째서 나를 卑賤하게 대하십니까?” 公子는 겁이 나서 上衣를 벗고 스스로 罪囚 모양을 하고서 謝罪하였다.
‘秦伯이 重耳를 晉나라로 들여보내다’부터 ‘頭湏가 뵙기를 청하다’까지
傳
僖公 24년, 봄에 秦伯이 重耳를 晉나라로 들여보냈다.
重耳가 黃河에 이르렀을 때 子犯이 璧玉을 公子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臣이 羈絏을 지고 임금님을 따라 天下를 돌아다니는 사이에 臣이 지은 罪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떠나겠습니다.”라고 하니,
公子가 말하였다. “만약 내가 舅氏(外叔)와 마음을 한가지로 하지 않는다면 白水의 神이 證人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그 璧玉을 黃河에 던졌다.
黃河를 건너 令狐를 포위하고 桑泉으로 진입한 뒤에 臼衰를 취하였다. 晉軍이 廬柳에 주둔하거늘 秦伯이 公子 縶을 晉軍에 보내니 晉軍이 퇴각하여 郇에 주둔하였다.
狐偃이 秦나라‧晉나라의 大夫와 郇에서 結盟하였다. 公子가 晉軍의 陣營으로 들어갔다.
丙午日에 曲沃으로 들어가서 丁未日에 武宮을 謁見하고 戊申日에 高梁으로 사람을 보내어 懷公을 죽였다.
傳
寺人 披가 뵙기를 청하자 文公이 사람을 시켜 꾸짖고 또 接見을 거절하며 말하였다. “蒲城의 戰爭 때 임금(獻公)께서는 하룻밤을 묵으면서 가라고 명하셨는데 너는 卽日로 달려왔고,
그 뒤에 내가 狄君과 渭水 가에서 사냥할 때 너는 또 惠公을 위해 와서 나를 죽이려 하였는데 그때 惠公은 너에게 사흘 밤을 묵으면서 가라고 명하였는데, 너는 이틀 만에 달려왔다.
비록 君命이 있기는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그리도 속히 왔느냐? 그때 너에게 소매가 잘린 옷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으니 너는 떠나거라.”
披가 대답하였다. “臣은 임금님께서 들어와 〈임금이 되셨으니〉 당연히 임금의 도리를 아실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아직도 임금의 도리를 모르시는 것 같으니 또 장차 患難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의 命을 奉行함에 있어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옛 制度입니다.
임금의 害惡을 제거함에는 오직 힘만을 볼 뿐이니 蒲人과 狄人이 어찌 나의 眼中에 있었겠습니까? 이제 임금께서 즉위하였으니 어찌 蒲人‧狄人이 없겠습니까?
齊 桓公은 帶鉤를 쏜 원한을 버리고서 管仲을 丞相으로 삼았으니 君께서 만약 桓公과 반대로 옛 怨恨을 잊지 않으시겠다면 어찌 命을 내리시는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떠나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이니 어찌 刑臣뿐이겠습니까?” 文公이 그를 접견하니 變難을 고하였다.
傳
당초에 晉侯의 小吏 頭湏는 창고를 지키는 자였다. 文公이 出奔했을 때 창고의 財物을 훔쳐 가지고 도망하여 그 재물을 다 써가며 諸侯들에게 文公을 도와 귀국시켜 주기를 구하였다.
文公이 귀국함에 미쳐 頭湏가 뵙기를 청하자 文公은 머리를 감는다는 핑계로 접견을 辭絶하였다. 頭湏가 僕人에게 말하였다. “머리를 감으면 심장이 顚倒[覆]되고 심장이 전도되면 생각[圖]도 전도되는 것이니 내가 謁見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國內에 남았던 사람들은[居者] 公子를 위해 社稷을 지키고, 出奔에 따라간 사람들은[行者] 公子를 위해 말굴레와 말고삐를 잡는 奴僕 노릇을 한 것은 모두 할 일을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남았던 사람들만을 죄주려 하는가?
國君으로서 匹夫를 원수로 대한다면 두려워할 사람이 매우 많을 것이다.” 僕人이 이 말을 고하자 文公은 서둘러 그를 접견하였다.
晉 文公은 晉나라를 떠나 망명했을 때부터 천하의 패자가 될 때까지 流離乞食하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 拔身하여 閎大하고 豐顯한 기업을 이루었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인 狐偃‧趙衰‧胥臣‧郤穀이 좌우에서 보익한 공로가 크지만, 이와 같은 지난날 여러 신하들의 공로는 〈寺人 披나 頭湏의 공적에 비하면〉 次善이다.
〈功은〉 文公이 晉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반드시 晉나라로 돌아갈 계책을 으뜸으로 삼고, 文公이 이미 晉나라에 들어온 뒤에는 반드시 城濮의 전쟁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홀로 ‘晉나라로 돌아온 功은 齊나라를 탈출한 계책을 성사시킨 功이 비교적 좋고, 城濮의 전쟁에서의 여러 장수들은 공훈에 따라 논의하여 공적이 메겨질 수 있으나, 이들은 寺人 披나 頭湏의 공적에 비하면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만물을 냄에 싹이 나서 가지가 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것은 다만 작은 조화일 뿐이다.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려서 강렬하고 엄혹하게 가지와 잎을 잘라내고 쳐내며 겉껍질과 속결을 깎아내고 상처 낸 뒤에 기름과 진액을 거두어 무성히 저장해두다가,
피어나 따뜻한 봄날에 생장하는 꽃이 되니, 이것이 천하의 큰 조화이다. 반드시 크게 시들어 떨어진 뒤에 크게 발생하고, 반드시 크게 꺾여 부러진 뒤에 크게 성취하는 것이니,
文公이 齊나라에서의 부유함을 편안히 여기고 더 이상 四方으로 나아갈 뜻이 없었을 때 만일 시종하는 여러 신하들도 文公의 바람을 따랐다면 종신토록 營丘에 사는 일개 布衣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종하는 신하들의 식견이 높고 사려가 원대하여 뽕나무 아래에서 계획하고 문공을 수레에 실어 齊나라를 떠나게 했으니, 이는 단비와 이슬 같은 안락을 빼앗고 폭설과 서리 같은 환란으로 누른 것이다.
그리하여 목욕하는 알몸을 보이고 손 씻은 물을 뿌려 모욕을 받은 일로 격발시켜 그의 분심을 일으키고, 〈無禮한〉 鄭 文公과 〈重耳를 죽일 것을 청한〉 子玉의 일로 격발시켜 그 걱정을 일으켰다.
이에 切磋琢磨해서 지난날 해이하고 타락했던 교만하고 나태한 기운을 모두 다 쓸어버리니, 패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불끈 생겨나 武公의 사당에 배알하고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이다.
지난날 齊나라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을 빼앗지 않았다면 또한 어찌 文公의 의지를 추진시켜 霸者가 되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文公이 처음에 齊나라에서 연연했던 까닭은 말 20승에 뜻이 매어서였을 뿐이다.
시종하는 신하들이 文公에게서 20승의 말을 빼앗고 文公에게 온 晉나라의 4천 승의 구실을 준 것은, 그에게 기러기 털을 버리고 泰山을 얻게 한 것이니 취사선택할 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만일 齊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찌 晉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본국으로 돌아갈 계책을 세운 공훈 중에 어찌 齊나라를 탈출할 계책을 성사시킨 功이 으뜸이 아니겠는가?
文公이 晉나라에 들어가고 나서 방석이 미처 따뜻해지기도 전에 벌써 初心을 잊고 寺人 披와 頭湏가 알현하고자 함에 화를 내며 불평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일 맘대로 행동하여 분한 마음에 그들을 죽였다면 두려운 일이 매우 많았을 것이니, 비록 요행히 궁실이 불타는 변고를 면했다 하더라도 어찌 훗날
蒯聵가 당했던
戎州의 분란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注+哀公 2년의 일이다.
寺人 披와 頭湏가 힘써 위험을 무릅쓰고 直言으로 경계해준 데 힘입어 文公이 한번 그 경계를 듣자 성나고 삐뚤어진 마음이 다 사라지니, 비루하고 조급한 흉금과 도량이 변하여 광대하고 온화하며 정직한 氣槪가 되었다.
아랫사람을 관대함으로 극진하게 대하자 사람들이 모두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여 城濮에서의 승리를 취하게 되었으니 어찌 寺人 披와 頭湏가 한번 경계시킨 힘이 아니겠는가?
만 리 길을 헤매고 있는 자를 되돌리는 것은 한번 부른 힘이고, 십 년 앓은 고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바늘 하나의 힘이며, 五霸의 융성한 공렬에 오른 것은 한번 경계해준 힘이다.
寺人 披과 頭湏의 입장에서 城濮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여러 장군들을 비교해보면, 나는 근원이고 저 장군들은 말류이며, 나는 뿌리이고 저 장군들은 줄기이니 그 대소와 경중이 확연하다. 이것이 내가 寺人 披와 頭湏를 높이 여기고 城濮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낮게 여기는 이유이다.
文公이 바야흐로 작은 일에 안주하자 갑자기 그것을 빼앗아 작은 일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였고, 文公이 바야흐로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자 갑자기 경계하여 감히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지 못하게 하였다.
앞에서 빼앗고 뒤에서 경계하여 文公을 패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놓았으니, 여러 신하들의 공임에 틀림없다.
비록 그렇지만 이는 오로지 여러 신하들의 공만이 아니라, 그 근본은 실제로 文公에게 있는 것이다. 文公은 망명할 초기에 君父의 命을 저항하지 않았으니, 이미 군주의 자질이 있었다.
아직 齊나라에서 안정되기 전에 渭水 가에서 위험에 처했고, 五鹿에서 굶주려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격을 참았으니, 그의 부족한 점을 증익한 날이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비록 당시에 분별력을 잃었다 해도 한번 빼앗기고 한번 경계받음에 初心이 대번에 돌아와 눈 깜짝할 사이에 改過遷善하였으니 만일 文公에게 먼저 타고난 자질이 없었다면 몇몇 신하들이 일을 잘 주선하는 신묘한 功用이 있다 해도 또한 그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 군주가 이와 같은 자질이 있고 그 신하가 이와 같은 功用이 있는데도, 도리어 겨우 패업을 이루는 데 그쳤으니, 이것이 내가 文公을 위하여 유감으로 여기는 이유이다.
洙水와
泗水 가에서 한 길[
丈]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앉으니
聖人(
孔子)의 교화가 하늘이 운행하는 것 같아,
子貢에게는 그동안 배웠던 학문을 버리고 〈성인의〉 하나의 이치가 관통하는 것으로 저절로 통하게 하였고,
顔淵에게는 재주를 다하게 하여 〈성인이〉 우뚝하게 서 계신 것 같은 것으로 저절로 드러났다.
注+모두 ≪論語≫에 보인다. 孔子
때로는 기침소리로, 때로는 돌아보심과 눈빛으로, 때로는 큰소리와 웃음으로 교화하여 한번 경계함에 온갖 염려가 다 없어졌다.
이러므로 나는 文公이 孔子보다 먼저 태어난 것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고, 또 오늘날의 배우는 자가 孔子의 뒤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유감으로 여긴다.
아! 孔子가 살아계셨던 시대는 오래되었으나, 孔子의 신묘한 교화는 萬世古今을 통틀어 한 용광로에 넣어 다스려지고 있으니, 애당초 쉰 적이 없다. 누가 나의 출생이 늦었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