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4-01 莊公丹桓宮楹刻其桷 使宗婦覿用幣
傳
[左傳]莊二十二年
이라 秋
에 하다 二十四年春
에 刻其桷
하니 라
諫曰 臣聞之
하니 儉
은 德之共也
요 侈
는 惡之大也
라하니이다 先君有
이어늘 而君納諸大惡
하니 無乃不可乎
잇가
秋
에 哀姜至
한대 公使宗婦覿
에 用幣
하니 非禮也
라 御孫曰
하고
傳
[左傳]莊三十二年
이라 한대 對曰 慶父材
니이다 하노이다
曰 飮此
면 則有後於魯國
이어니와 不然
이면 死且無後
하리라 飮之
하고 歸
라가 하다
傳
[左傳]莊三十二年
이라 八月癸亥
에 公薨于路寢
하다 하다
傳
齊侯許之
하고 使召諸陳
하니 하다 季子來歸
는 嘉之也
라
傳
[左傳]閔二年
이라 秋八月辛丑
에 하다 成季以
適邾
러니 하다
以賂求共仲于莒
하니 莒人歸之
하다 하다 不許
한대 哭而往
하니 共仲曰 奚斯之聲也
라하고 乃縊
하다
驕者는 亂之母也요 疑者는 奸之媒也며 懦者는 事之賊也요 弱者는 盜之招也니
四者有一焉이면 皆足以亡其國이어늘 魯莊閔之際에 合四者而兼之하니 簒弑之變이 胡爲而不交作哉아
至嚴之地
는 宗廟是也
요 至嚴之防
은 男女是也
어늘 莊公以一
之故
로 上侮宗廟而僭其飾
하고 下亂男女而紊其幣
하니라
二者를 旣不足憚이면 則擧天下無可憚者矣라 使哀姜來歸之初에 已傲然視天下擧無足憚하니
宜其淫縱恣睢하야 朋慶父而敗魯國하고 敢於戕殺而不忌也니 哀姜固死有餘罪어니와 導之驕而納之於亂者가 果誰歟아
問生於疑니 未有問所不疑者也니라 子般之當爲後니 奚疑哉아 莊公疾病에 反狐疑而徧問後於大夫하니 此所以一問而起二奸也니라
未問之前엔 父沒子繼를 誰敢干之리오 旣問之後에 慶父叔牙知莊公之意猶未有所定하고 始動其覬覦之心矣니
慶父叔牙固死有餘罪어니와 示人以疑而召奸者가 果誰歟아
慶父叔牙一體也어늘 季友誅叔牙而置慶父하야 除惡而留其根은 何耶오
五王黜武而興唐
에 武三思在其掌握
이로되 縱而不殺
이라가 終死其手
注+唐桓彦範 崔玄暐 張柬之 袁恕己 敬暉 同誅張昌宗兄弟 奉中宗反正 以計罷其政事封王 號 尋遭貶逐 皆爲武三思所害하니 懦之爲害如此
니라
然五王欲遺中宗自誅之하야 以强主威하니 雖失策이나 猶有說也어니와 吾不知季友復何說耶아
借曰 不忍一朝而尸二昆이면 盍亦宥之以遠竄於裔土아 則君臣兄弟之間이 豈不兩全哉아
一失此幾라가 及子般之禍하야 奉頭鼠竄之不暇하니 非所謂當斷不斷하야 反受其亂者耶아
慶父旣弑子般하고 凶威日熾에 閔公還季友以自輔하니 望之者厚矣라 乃含垢忍恥하야 一無所爲하니
意者示弱以有待歟아 昔之智者는 外雖示弱이나 而其中實有不可犯也하니 使季友以此全閔公이면 斯可謂之示弱矣어니와
今俛首結舌하고 坐待簒弑之至하니 是眞弱者耳언정 何名示弱哉리오 閔公幼而知倚季友하고
昏而知倚裴度
注+見唐史나 皆不免弑
하니 吾未嘗不深悲二君之意
하고 而深恨二臣之負其託也
로라 二臣將何以見二君於地下耶
아
嗚呼라 失之驕하고 失之疑하야 基禍於前者는 莊公也요 失之懦하고 失之弱하야 成禍於後者는 季友也라
總四惡而論之컨대 君取其二焉하고 臣取其二焉하니 君臣分受其責이 可也라
雖然이나 瑕不掩瑜하고 瑜不掩瑕며 罪不掩功하고 功不掩罪니 季友之失則然矣어니와 至其立僖公以續魯祀하얀 其忠亦不可誣也니라
注+僖九年하고 季友許莊公以死
코도 而不能死
하니 季友其有愧於荀息歟
ㄴ저라호되
吾以爲荀息當愧季友요 季友不當愧荀息也라하노라 荀息雖許獻公以死나 當奚齊之禍하야 胡爲不死耶아 以有卓子存也ㄹ새라
向若卓子能定其位면 則荀息之不死가 賢於死矣라 縱死者復生이라도 獻公亦豈責荀息之食言耶아
其所以死於卓子之弑者
는 勢窮理絶
하야 不得不殉以身也
ㄹ새라 季友
於子般閔公之難
하야 輕棄其身
이면
則僖公不復立하고 慶父不復討하야 周公之廟不復血食矣리니 一身之死와 一國之亡이 孰輕孰重耶아
季友之不死於子般閔公은 卽荀息之不死於奚齊니 本無異者라 然荀息所輔者邪요 季友所輔者正이니
是荀息有愧於季友언정 而季友無愧於荀息也라 是故以不能全子般閔公으로 責季友則可어니와
以不能死子般閔公으로 責季友則不可니라 世儒論人臣之節者는 至於死而止耳니 孰知復有大於死者耶리오
장공莊公이 환공桓公의 사당 기둥에 붉은 칠을 하게 하고 서까래에 조각을 하게 하였으며 종부宗婦에게 〈애강哀姜을 알현할 때에〉 폐백을 올리게 하다
장공莊公이 환공桓公의 사당 기둥에 붉은 칠을 하게 하고 서까래에 조각을 하게 하였으며 종부宗婦에게 〈애강哀姜을 알현할 때에〉 폐백을 올리게 하다
傳
장공莊公 22년, 가을에 환공桓公의 사당 기둥에 붉은 칠을 하였다. 24년 봄에 사당의 서까래에 조각彫刻을 하였으니 모두 예禮가 아니다.
어손御孫이 간諫하기를 “신이 듣건대 ‘검약儉約은 덕德 중에 큰 것이고, 사치는 악惡 중에 큰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군先君께서는 큰 덕德을 가지셨는데 군君께서는 선군先君을 대악大惡 속에 모시려 하시니, 불가不可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가을에 애강哀姜이 노魯나라로 오자, 장공莊公이 종부宗婦들에게 애강哀姜을 알현謁見할 때 폐백幣帛을 올리게 하였으니, 예禮가 아니다. 어손御孫이 말하기를 “남자男子의 폐백은 신분身分이 존귀尊貴한 자는 옥백玉帛을 가지고 가서 알현하고
신분이 낮은 자는 금조禽鳥를 가지고 가서 알현하여 각각 같지 않은 물건으로 신분身分의 등급等級을 드러내고, 여자女子의 폐백은 개암‧밤‧대추‧건육乾肉을 사용하여 정성을 표시表示할 뿐인데, 지금 남녀男女가 동일한 폐백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남녀의 분별分別을 무시한 것이다.
남녀의 분별은 나라의 큰 예절禮節인데, 부인夫人으로 말미암아 이 분별을 어지럽혔으니 불가不可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傳
장공莊公 32년, 장공이 병病을 앓을 때 숙아叔牙에게 후사後嗣에 대해 물으니, 숙아는 “경보慶父가 임금 재목材木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계우季友에게 물으니, 계우는 “신臣은 목숨을 걸고 자반子般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장공이 계우에게 “조금 전에 숙아는 경보가 재목이라고 하더라.”라고 하니, 성계成季가 사람을 시켜 임금의 명으로 희숙僖叔에게 명命하여 침무씨鍼巫氏의 집으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는
침계鍼季를 시켜 그에게 독주毒酒를 주며 “이것을 마시면 그대의 후손後孫이 노魯나라에서 복록福綠을 누릴 것이지만, 마시지 않으면 그대가 죽는 것은 물론이고 후손도 복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숙아가 그 독주를 마시고서 돌아오다가 규천逵泉에 이르러 졸卒하니, 노魯나라는 그의 아들을 후계後繼로 세워 숙손씨叔孫氏로 삼았다.
傳
장공莊公 32년, 8월 계해일에 공公이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였다. 자반子般이 즉위하여 당씨黨氏의 집으로 가서 머물렀다.
겨울 10월 기미일에 공중共仲이 어인 락圉人 犖을 시켜 자반을 당씨 집에서 죽이니, 성계成季가 도망갔다. 경보慶父가 민공閔公을 세웠다.
민공閔公이 계우季友가 귀국하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다
傳
민공閔公 원년, 가을 8월에 민공이 제후齊侯와 낙고落姑에서 결맹하였으니, 이는 제후齊侯에게 계우季友가 귀국하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제후齊侯가 이를 허락하고서 진陳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계우季友를 불러오게 하니, 민공은 낭郎에 머물러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경經에 “계자季子가 돌아왔다.”라고 기록한 것은 계우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공중共仲이 민공閔公을 죽이자 성계成季가 희공僖公을 세우다
傳
민공閔公 2년, 가을 8월 신축일辛丑日에 공중共仲(경보慶父)이 복의卜齮를 시켜 무위武闈에서 민공을 시해弑害하였다. 성계成季(계우季友)가 희공僖公을 모시고 주邾나라로 갔다가 공중이 거莒나라로 도망간 뒤에야 노魯나라로 들어와서 희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그리고 거莒나라에 뇌물을 주며 공중을 넘겨주기를 요구하니, 거인莒人이 그를 노魯나라로 돌려보냈다. 밀密에 당도하여 공중이 공자 어公子 魚를 노魯나라 조정에 보내어 사면赦免해주기를 요청하였다. 허락하지 않자 공자 어公子 魚가 울면서 돌아가니 공중이 그 울음소리를 듣고서 “이는 해사奚斯의 소리이다.” 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교만은 난亂의 원인이고 의심은 간사함의 매개이며 나약은 일의 적이고 유약은 도적을 부르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있다면 모두 나라를 망치기에 충분하다. 노魯나라 장공莊公과 민공閔公 때에 이 네 가지가 모두 있었으니, 찬시簒弑의 변란이 어찌 번갈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지극히 엄숙한 곳은 종묘宗廟이고, 지극히 엄하게 삼가야 할 일은 남녀男女의 일인데, 장공莊公은 한 사람 애강哀姜 때문에, 위로는 종묘를 무시하고 수식修飾을 분수에 넘치게 하였고, 아래로는 남녀 사이가 어지러워 폐백을 분별없이 사용하였다.
이 두 가지를 이미 꺼리지 않고 했다면 온 천하에 꺼리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다. 애강으로 하여금 그녀가 막 시집왔을 때에 이미 천하 보기를 오만하게 하여 꺼릴 것이 없게 하였으니,
음란하고 방자하여 경보慶父와 결탁하여 노魯나라를 망치고 사람을 살해하는 일도 꺼리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애강은 진실로 죽어도 죄가 남지만, 그를 교만으로 인도하고 화란에 들어가게 한 자는 과연 누구인가?
물음은 의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의심나지 않는 것을 묻는 자는 없다. 자반子般이 후사後嗣가 되는 것은 당연한데 어찌하여 물었는가? 장공莊公이 병이 위중해지자 도리어 의심이 생겨 대부들에게 두루 물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를 물어 두 가지 간악한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이다.
묻기 전에는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계승하는 것을 누가 감히 침범하겠는가? 물은 뒤에 경보慶父와 숙아叔牙가 장공의 뜻이 아직도 정해진 바가 없음을 알고 비로소 기회를 엿보려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니,
경보와 숙아는 진실로 죽어도 죄가 남지만, 남에게 의심함을 보여 간악한 일을 부른 자는 과연 누구인가?
경보慶父와 숙아叔牙는 일체인데 계우季友가 숙아叔牙만 죽이고 경보慶父를 살려두어 악을 제거하면서 그 뿌리를 남겨둔 것은 어째서인가?
오왕五王이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축출하고
당唐나라를 일으킬 때에
무삼사武三思가 그들의 수중에 있었는데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았다가, 마침내 무삼사의 손에 죽었으니
注+당唐나라 환언범桓彦範‧최현위崔玄暐‧장간지張柬之‧원서기袁恕己‧경휘敬暉가 함께 장창종張昌宗의 형제兄弟를 주살하고 중종中宗을 받들어 반정反正하였는데, 무삼사武三思가 그들이 맡고 있는 정사를 파할 것을 계획하여 왕王에 봉하고 오왕五王이라 불렀다. 〈오왕五王은〉 얼마 뒤 쫓겨나 모두 무삼사武三思에게 해를 당하였다. 나약함의 해가 이와 같다.
그러나 오왕五王은 중종中宗을 복위시키기 위해 스스로 상대를 죽여 군주의 위엄을 강화하였으니, 비록 잘못된 계책이지만 그래도 할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계우季友는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두 형제를 죽이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해서라고 핑계대어 말할 것이라면, 어찌 그들을 용서하여 멀리 변방으로 귀양 보내지 않았는가? 그렇게 하였더라면 군신君臣과 형제兄弟 사이가 어찌 모두 온전하지 않았으리오?
한번 이런 기회를 잃자 자반子般이 화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머리를 가리고 쥐구멍을 찾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결단해야 할 때에 결단하지 못하다가 도리어 화란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보慶父가 자반子般을 시해하고 흉악한 위엄이 날로 치성하자, 민공閔公은 계우季友를 돌아오게 하여 자신을 보필하게 하였으니 그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그러나 〈계우는 경보의〉 원한을 숨기고 치욕을 참고서 한 가지도 처리한 일이 없었다.
생각하건대, 겉으로 약함을 보이며 때를 기다리고자 한 것인가? 옛날 지혜로운 자는 비록 겉으로 약함을 보였으나 속마음은 진실로 범접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가령 계우季友가 이런 계획으로 민공閔公을 온전히 하고자 한 것이라면 이 일을 두고 약함을 보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고개를 숙이고 할 말을 못한 채 찬시簒弑의 화가 이른 것을 좌시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약한 자일 뿐이지 어찌 ‘약함을 보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민공閔公은 어리지만 계우季友에게 의지할 줄 알았고,
경종敬宗은 혼미하지만
배도裴度에게 의지할 줄 알았으나
注+≪신당서新唐書≫ 〈경종기敬宗紀〉에 보인다. 모두 시해를 면치 못하였으니, 나는 두 임금의 뜻을 깊이 슬퍼하고 두 신하가 그 의탁을 저버린 일을 깊이 한스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두 신하는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두 임금을 만나보려는가?
아, 교만에서 잘못되고 의심에서 잘못되어 앞에서 화란의 기틀을 마련한 자는 장공莊公이고, 나약에서 잘못되고 유약에서 잘못되어 뒤에서 화란을 이룬 자는 계우季友이다.
네 가지 악을 총괄하여 논하건대, 임금이 그 가운데 두 가지를 가졌고 신하가 그 가운데 두 가지를 가졌으니, 임금과 신하가 그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단점은 장점을 가릴 수 없고 장점은 단점을 가릴 수 없으며, 죄는 공훈을 가릴 수 없고 공훈은 죄를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계우季友의 잘못은 그러하지만, 계우가 희공僖公을 세워 노나라의 제사를 잇게 한 것으로 말하면 그의 충심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
순식荀息은
헌공獻公에게 죽음으로써
해제奚齊를 보호하겠다고 허락하고서 끝내 그를 위해 죽었고,
注+노 희공魯 僖公 9년의 일이다. 계우季友는
장공莊公에게 죽음으로써 〈
자반子般을 보호하겠다고〉 허락하고서도 끝내 자반을 위해 죽지 않았으니, 계우는 아마도 순식에게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순식이 계우에게 부끄러움은 마땅하고, 계우는 순식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순식이 비록 헌공에게 죽음으로 허락하였으나 해제가 화禍를 당하였을 때 어찌하여 죽지 않았는가? 이는 탁자卓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만약 탁자가 그 자리에서 안정할 수 있었다면 순식이 죽지 않은 것이 죽는 것보다 현명하였을 것이니, 비록 죽은 헌공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어찌 순식이 거짓말을 했다고 책망하겠는가?
순식이 탁자가 시해당하였을 때 죽어야 하는 이유는 형세가 다한 이치여서 따라 죽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우가 자기 몸을 가벼이 하여 자반子般과 민공閔公의 화난禍難에 따라 죽었다면,
다시는 희공僖公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다시는 경보慶父를 토벌할 수 없어 주공周公의 사당에 제사가 끊겼을 것이니, 한 몸이 죽는 것과 한 나라가 망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대한가?
계우季友가 자반子般과 민공閔公의 화난에 죽지 않은 것은, 곧 순식荀息이 해제奚齊의 화난에 죽지 않은 것과 본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순식이 보필한 상대는 부정하고 계우가 보필 한 상대는 정통이니,
이 점이 순식이 계우에게 부끄러움이 있을지언정 계우가 순식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자반과 민공이 보전하지 못한 것으로써 계우를 책망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자반과 민공의 화난에 죽지 못한 것으로써 계우를 책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하의 절개에 대하여 논하는 세상의 학자들은 목숨 바쳐 죽으면 최고라고 여길 뿐이니, 다시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