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定公 8년, 衛侯(衛 靈公)가 晉나라를 배반하고자 하였으나 大夫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니, 王孫賈가 衛侯로 하여금 〈晉나라 國都의〉 郊外에 머물게 하였다.
大夫들이 그 까닭을 묻자, 衛 靈公은 晉나라에게 恥辱을 당한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寡人은 社稷을 욕되게 하였으니, 다른 사람을 골라 先君의 뒤를 잇게 하라. 과인은 〈그를 임금으로〉 따르겠다.”라고 하니,
大夫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衛나라의 禍이지 어찌 임금님의 잘못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靈公이 말하기를 “또 큰 걱정거리가 있다. 晉人이 과인에게 ‘반드시 너의 아들과 大夫들의 아들을 人質로 보내라.’고 한다.” 하니,
大夫들이 말하기를 “만약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公子도 인질로 가는데 신하들의 아들이 감히 羈絏을 지고 隨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公子와 大夫의 子弟가〉 떠나려 할 때 王孫賈가 “만약 衛나라에 危難이 생기면 工商人이 患難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들의 〈子弟도〉 모두 수행하게 한 뒤에야 무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靈公이 이 말을 大夫들에게 고하니, 大夫들도 모두 그들을 수행시키고자 하였다.
출발할 날을 정하고서 靈公이 國人들을 조정으로 불러놓고서 王孫賈를 보내어 그들에게 “만약 우리 衛나라가 晉나라를 배반한다면 晉나라는 우리나라를 다섯 차례 토벌할 것이니, 그 고통[病]이 어떠하겠는가?”라고 물으니, 〈大夫들이〉 모두 “다섯 차례 우리를 토벌하더라도 우리는 오히려 抗戰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王孫賈가 〈衛侯에게〉 말하기를 “〈衆意가〉 그렇다면 먼저 晉나라를 배반하는 것만 못합니다. 고통을 당하게 된 뒤에 인질을 보내더라도 어찌 늦겠습니까?”라고 하니, 衛侯는 이에 晉나라를 배반하였다. 晉人이 盟約을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衛人은 허락하지 않았다.
傳
哀公 25년, 여름 5월 庚辰日에 衛侯(出公 輒)가 宋나라로 出奔하였다.
衛侯가 籍圃에 靈臺를 建造하고서 여러 大夫들과 술을 마실 때 褚師聲子가 버선을 신은 채 자리에 오르자, 衛 出公이 노하였다.
褚師聲子가 해명해 말하기를 “신은 병(부스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버선을 벗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出公은 더욱 노하였다. 褚師聲子가 나가자, 出公은 그 손을 굽혀 三枝戟 모양으로 만들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너의 발을 자르겠다.”고 하였다.
衛 出公이 처음 衛나라로 들어왔을 때 南氏의 邑을 빼앗고, 司寇 亥의 政權을 빼앗았다. 그리고 또 出公은 侍人을 시켜 公文懿子의 수레를 못 속에 던져 넣게 하였다.
당초에 衛人이 夏丁氏를 滅하고 가족과 재산을 彭封彌子에게 주었는데, 彌子가 出公을 초청해 술을 접대하고서 夏戊의 딸을 바치니, 〈出公은 그 女人을〉 총애하여 夫人으로 삼았다.
夫人의 동생 期는 太叔疾의 外從孫이므로 어려서부터 公宮에서 자랐는데, 出公은 그를 司徒로 삼았다. 夫人에 대한 총애가 쇠하자 期도 罪를 얻었다.
公은 세 직종의 匠人을 사역하면서 오랫동안 쉬지도 못하게 하였고, 公은 광대 狡로 하여금 拳彌와 盟約하게 하여 〈拳彌에게 치욕을 주고서도〉 그를 매우 가까이하고 신임하였다.
그러므로 褚師比, 公孫彌牟, 公文要, 司寇 亥, 司徒 期가 세 직종의 匠人 및 拳彌에게 의지해 반란을 일으키니 이에 公은 出奔하였다.
蒲로 가려 하자, 拳彌는 “晉나라는 信義가 없으니 그곳은 안 됩니다.”라고 하고, 鄄으로 가려 하자, 拳彌는 “齊나라와 晉나라가 우리나라를 얻으려고 다툴 것이니 그곳도 안 됩니다.”라고 하고,
泠으로 가려 하자, 拳彌가 “魯나라는 도움이 되기에 부족하니, 城鉏로 가셔서 越나라와 관계를 맺으소서. 越나라에는 훌륭한 임금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出公은 이에 城鉏로 갔다.
拳彌가 말하기를 “衛나라의 도적이 우리를 습격할지 모르니 빨리 가소서. 나부터 먼저 출발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寶物을 싣고서 衛나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