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君子曰 非禮也
라 婦人送迎不出門
하고 見兄弟不踰閾
하며 하나니라
享畢
하고 夜出
에 文(芊)[羋]送于軍
이어늘 하다
曰
ㄴ저 이로다 無別不可謂禮
니 將何以沒
이리오 하다
見奔而謂之敗라하고 見間而謂之讐라하며 見憊而謂之疾이라하니 何其見之晩也오
未奔之前에 有先敗焉이요 未間之前에 有先讐焉이며 未憊之前에 有先疾焉이라
冥冥之中에 其先固已瞭然而不可揜하니 豈必待見形而後悟哉리오
楚子帥師道鄭할새 納文夫人之勞하며 受享祀之僭하고 又取鄭二姬以歸하니
固蠻夷之常態요 不足以汚簡冊이라 吾獨怪叔詹之言하노니 何其見之晩也오
叔詹譏楚子取鄭之二姬하야 曰 爲禮卒於無別하니 無別不可謂禮라 是叔詹徒知無別之非禮요 而不知受享之非禮也라
使楚子不取二姬면 則叔詹將遂以受享爲禮之正矣리니 孰知夫受享之際에 乃無別之先乎아
當鄭之享楚子也
에 陳其鼎俎
하고 肅其罇彛
하며 蠲其巾冪
하고 豐其
脩
하며
威儀可則하고 進退可度하니 宜叔詹不悟其非禮也로다
抑不知生天下之善者는 出於敬하고 生天下之惡者는 出於慢이라 一籩一豆之相去는 其爲禮也微矣나
嚴之而不敢犯者는 敬心存也요 是心苟存이면 將無所不敬하야 推而上之하야 至於守君臣父子夫婦之分이니
爲世大法者는 同一敬也라 忽之而無所顧者는 慢心生也요
是心苟生이면 將無所不慢하야 推而下之하야 至於亂君臣父子夫婦之分이니 爲世大戒者는 同一慢也라
是故로 今日謹一籩一豆者는 卽他日謹君臣父子夫婦之分者也요 今日易一籩一豆者는 卽他日易君臣父子夫婦之分者也로다
楚爵則子로되 而輒當上公九獻之儀와 庭實旅百之盛과 加籩豆六品之侈는 其於燕享之禮에 固已無別矣라
燕享之無別이 卽男女之無別也니 均爲無別耳라 始之罪不爲輕하고 而後之罪不爲重하며
始之罪不爲小하고 而後之罪不爲大하니 豈可立等於其間哉아
燕享之禮無別은 其罪隱하고 二姬之無別은 其罪彰하니 叔詹捨其隱而譏其彰이라
噫라 何其見之晩也오 吏必先明法이니 然後에 可以責人之踰法이요 士必先明禮니 然後에 可以責人之踰禮라
叔詹猶以鄭之享楚爲禮하니 則旣不知禮之爲禮矣라 又何責楚子之踰禮哉아
鄭 文公의 夫人이 楚子를 위로하니, 楚子가 鄭나라에 들어가 饗宴을 받다
傳
僖公 22년, 鄭 文公의 夫人 羋氏가 菏澤에서 楚子(楚 成王)를 위로하니 楚子가 악사인 縉을 시켜 그들에게 俘馘을 보여주게 하였다.
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論評하였다. “禮가 아니다. 夫人은 남을 餞送하거나 迎接할 때 房門을 나가지 않고, 兄弟를 만날 때에도 문지방을 넘지 않으며, 戎事에는 女人의 器物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楚子가 鄭나라에 들어가 饗宴을 받을 때에 鄭伯이 아홉 잔의 술을 올리고, 뜰에 백 가지의 禮物을 벌여놓고, 籩豆에 여섯 가지 食品을 추가하였다.
연향을 마치고 楚子가 밤에 나오는데, 文羋가 楚子를 楚나라 軍中까지 護送하니, 楚子는 鄭나라의 二姬를 데리고 돌아갔다.
叔詹이 말하였다. “楚王은 아마도 壽命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禮를 행하면서 男女의 分別이 없는 일로 끝을 맺었으니 말이다. 남녀의 분별이 없는 것을 禮라 할 수 없으니 장차 어찌 수명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겠는가?” 諸侯는 이 일로 인해 楚子가 霸業을 이루지 못할 줄을 알았다.
도망하는 것을 보고서야 ‘싸움에 졌다’고 하며, 틈이 있는 것을 보고서야 ‘원수관계’라고 하며, 피곤한 모습을 보고서야 ‘병들었다’고 하니, 어쩌면 그렇게 보는 것이 늦는가?
도망하기 전에 먼저 싸움에 진 것이며, 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원수관계이고, 피곤하기 전에 먼저 병이 든 것이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먼저 이미 환하여 가릴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형체를 보고서야 깨닫는가?
楚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鄭나라를 지날 때, 文夫人의 위로를 받아들이고 참람한 享祀를 받고도 또 鄭나라 文羋의 두 딸을 데리고 돌아갔으니,
진실로 蠻夷에게나 있을 법한 행태이며, 역사책을 더럽히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나는 홀로 叔詹의 말을 괴이하게 여기니, 어쩌면 그렇게 보는 것이 늦었는가?
叔詹이 楚子가 鄭나라 文羋의 두 딸을 데리고 돌아가자 말하기를 “禮를 행하면서 男女의 分別이 없는 일로 끝을 맺었으니, 남녀의 분별이 없는 것을 禮라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叔詹이 한갓 남녀의 분별이 없는 것이 禮가 아닌 줄만 알고 참람한 연향을 받은 것이 禮가 아님은 모른 것이다.
가령 楚子가 두 딸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叔詹은 끝내 참람한 연향을 받은 것을 바른 예로 여겼을 것이니, 연향을 받을 때에 이미 먼저 분별이 없는 것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鄭나라가 楚子를 위해 연향을 베풀 때에 솥과 제기를 벌여놓고, 술단지와 술그릇을 엄숙하게 갖추었으며, 수건과 보를 정갈하게 마련하고, 연향의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예법에 맞는 행실이 모범이 될 만하고 나아가고 물러남이 법도에 맞았으니, 의당 叔詹은 禮가 아님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또 天下의 善을 생성하는 것은 공경에서 나오고, 天下의 惡을 생성하는 것은 태만에서 나옴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의 籩과 하나의 豆의 차이는 그 禮가 은미하다.
그러나 이것을 엄수하여 감히 침범하지 않는 자는 공경하는 마음이 보존되고, 이 마음이 보존되면 장차 공경하지 않을 일이 없어서 미루어 올라가 君臣‧父子‧夫婦의 분수를 지키게 되니,
세상의 큰 법도가 되는 것은 똑같이 하나의 공경이다. 이것을 소홀히 하여 되돌아봄이 없는 자는 태만한 마음이 생기고,
이 마음이 생겨나면 장차 태만하게 하지 않을 일이 없어서 미루어 내려가 君臣‧父子‧夫婦의 분수를 어지럽히게 되니, 세상의 큰 경계가 되는 것은 똑같이 하나의 태만이다.
이런 까닭으로 오늘 하나의 籩과 하나의 豆를 삼가는 자는 바로 훗날 君臣‧父子‧夫婦의 분수를 삼가는 자이고, 오늘 하나의 籩과 하나의 豆를 소홀히 하는 자는 바로 훗날 君臣‧父子‧夫婦의 분수를 소홀히 하는 자이다.
楚나라의 爵位는 子爵인데, 문득 아홉 잔의 술을 올리는 上公의 의식과 뜰에 백 가지의 禮物을 벌여놓는 성대함과 籩豆에 여섯 가지 食品을 추가하는 사치를 감당했다면 이는 燕享의 禮에 있어서 진실로 이미 분별이 없는 것이다.
燕享의 예에 분별이 없는 것이 곧 男女의 分別이 없는 일이니 똑같이 분별이 없는 것일 뿐이다. 처음의 잘못이 가볍지 않고 나중의 잘못이 무겁지 않으며,
처음의 잘못이 작지 않고 나중의 잘못이 크지 않으니, 어찌 처음과 나중 사이에 차등을 둘 수 있는가?
燕享의 禮에 분별이 없는 것은 그 잘못이 숨어 있고, 두 딸을 데리고 감에 남녀의 분별이 없는 것은 그 잘못이 드러났다. 叔詹은 숨어 있는 것을 버려두고 드러난 것만 비난하였다.
아! 어쩌면 그리도 보는 것이 늦는가? 獄吏는 반드시 먼저 형법에 밝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법을 어긴 사람을 문책할 수 있고, 선비는 반드시 먼저 예에 밝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예를 어긴 사람을 책망할 수 있다.
叔詹은 오히려 鄭나라가 楚나라를 위해 연향을 베푼 것을 禮라고 여겼으니 이미 禮를 禮로 여길 줄을 모른 것이다. 그런데 또 어찌 楚子가 예를 어겼다고 책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