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僖十四年
이라 秋
에 沙鹿崩
하다 晉卜偃曰 期年將有大咎
하야 하리라
傳
하고 明年齊有亂
하고 君將得諸侯而不終
이리이다 退而告人曰 君失問
이로다
傳
[左傳]文十四年
이라 有星孛入于北斗
하다 周內史叔服曰 不出七年
하야 하리라
傳
[左傳]成五年
이라 梁山崩
하니 晉侯以
召伯宗
하다 하라 重人曰
라
問其所하니 曰 絳人也라 問絳事焉한대 曰 梁山崩하야 將召伯宗謀之라
問將若之何
오 曰 山有朽壤而崩
하니 可若何
오 이라 故山崩川竭
이면 하고
,
,
,
,
,
하야 이라 其如此而已
니 리오
傳
[左傳]襄九年
에 宋災
하다 하다 晉侯問於
曰 吾聞之
컨대 라하니 何故
오
對曰 古之火正
이 或食於心
하고 或食於
하야 라 니이다
하야 祀大火
하고 이러니 因之
라 故商主大火
니이다
商人閱其禍敗之釁
이 必始於火
라 니이다 公曰 可必乎
아
傳
[左傳]襄二十八年
이라 春
에 無冰
하다 曰 今玆宋鄭其饑乎
ㄴ저 하야 이라
하니 니 宋鄭必饑
리라 요 枵
는 耗名也
니 土虛而民耗
면 리오
傳
[左傳]襄二十八年
이라 曰 今玆周王及楚子皆將死
하리라 하리라
11-03-08 子産論參商
注+子産論參商:事在昭年
傳
[左傳]昭四年
이라 大雨雹
하다 아 對曰 聖人在上
에는 無雹
이요
其藏冰也
엔 深山窮
에 이면 於是乎取之
하고 其出之也
엔 의 賓食喪祭
에 라
今藏川池之冰
하고 하야 하니 雹之爲菑
를 誰能禦之
리오 니라
傳
[左傳]昭六年
이라 士文伯曰 火見
이면 ㄴ저 火未出
에 而作火以鑄
하야 하니
傳
[左傳]昭七年이라 夏四月甲辰朔에 日有食之하다 晉侯問於士文伯曰 誰將當日食고
對曰
하니 於是有災
면 리이다 其大咎
는 이리이다
國無政
하고 不用善
이면 則自取
于日月之災
니이다 故政不可不愼也
니이다
務三而已
니 이요 이요 니이다 十一月
에 季武子卒
하다
晉侯謂伯瑕曰
니 아 對曰 不可
니이다 하고 하며
對曰 歲時日月星辰
을 是謂也
니이다 公曰
辰而莫同
하니 何謂辰
고
傳
[左傳]昭八年
이라 이라 晉侯問於史趙曰 陳其遂亡乎
아 對曰 未也
니이다
傳
[左傳]昭九年이라 夏四月에 陳災하다 鄭裨竈曰 五年陳將復封하고 封五十二年而遂亡하리라
이라 歲五及鶉火而後陳卒亡
하고 楚克有之
리니 이라하니라
傳
[左傳]昭十年
이라 春王正月
에 하다 鄭裨竈言於子産曰 七月戊子
에 晉君將死
리라
傳
[左傳]昭十一年이라 景王問於萇(洪)[弘]曰 今玆諸侯何實吉하고 何實凶가 對曰 蔡凶이리이다
楚子在申
하야 召蔡靈侯
하다 靈侯將往
한대 蔡大夫曰 王貪而無信
하고 이러니
今幣重而言甘하니 誘我也라 不如無往이니이다 蔡侯不可하다
三月丙申
에 楚子伏甲而享蔡侯於申
이라가 醉而執之
하야 夏四月丁巳
에 殺之
하고 하다
傳
[左傳]昭十五年이라 春에 將禘于武公하야 戒百官하다 梓愼曰 禘之日其有咎乎ㄴ저
二月癸酉
에 禘
할새 叔弓涖事
러니 籥入而卒
하다 라
傳
其居火也久矣
니 아 이요 於商爲四月
이요 於周爲五月
이라
하니 若火作
이면 其四國當之
리니 在宋衛陳鄭乎
ㄴ저
鄭裨竈言於子産曰 宋衛陳鄭將同日火
리라 리라 하다
傳
[左傳]昭十八年
이라 夏五月
에 火始昏見
하고 丙子
에 風
하다 梓愼曰
니 ㄴ저
戊寅
에 風甚
하고 壬午
에 大甚
하다 宋衛陳鄭皆火
하다 하고 曰 宋衛陳鄭也
라하다 數日皆來告火
하다
子大叔曰 寶以保民也라 若有火면 國幾亡이니 可以救亡인댄 子何愛焉고
子産曰 天道遠
하고 人道邇
하야 非所及也
니 何以知之
오 竈焉知天道
리오 가 하다
傳
[左傳]昭二十年
이라 二月己丑
에 日南至
하다 하고 曰 今玆宋有亂
하야 國幾亡
이라가 三年而後弭
하고 蔡有大喪
하리라
傳
[左傳]昭二十一年이라 七月壬午朔에 日有食之하다 公問於梓愼曰 是何物也오 禍福何爲오
對曰
에 日有食之
는 不爲災
하나니 日月之行也
는 니이다
其他月則爲災
하니 陽不克也
라 니이다 於是叔輒哭日食
하니 昭子曰 子叔將死
리라 라 八月
에 叔輒卒
하다
傳
[左傳]昭二十四年
이라 夏五月乙未朔
에 日有食之
하니 梓愼曰
하리라
傳
[左傳]昭二十六年이라 齊有彗星하니 齊侯使禳之한대 晏子曰 無益也요 祗取誣焉이니이다
君無穢德이면 又何禳焉이며 若德之穢면 禳之何損이릿가 公說하야 乃止하다
傳
[左傳]昭三十一年이라 十二月辛亥朔에 日有食之하다 是夜也에 趙簡子夢에 童子臝而轉以歌하다
旦占諸史墨曰
오 對曰 六年及此月也
하야 吳其入郢乎
ㄴ저 終亦弗克
하리라
入郢必以庚辰하리니 日月在辰尾라 庚午之日에 日始有謫하니라 火勝金이라 故弗克이니라
傳
[左傳]哀六年
이라 吳伐陳
하니 한대 將戰
에 王有疾
하다 庚寅
에 卒于城父
하다
是歲也에 有雲如衆赤(烏)[鳥]하야 夾日以飛三日하다 楚子使問於周太史한대
王曰
이리오 아 有罪受罰
이면 又焉移之
리오하고 遂弗禜
하다
一氣運行乎天地之間이니 災祥祲兆가 未始不以其類應也라
麗於上하고 峙於下하며 群於中이 同本同生하고 同體同流하니 未有一物之不類요
未有一物之不應이라 類乎類乎여 其天地萬物之樞乎ㄴ저
有明類하고 有晦類하며 有旁類하고 有互類하며 有遠類하고 有反類라
하야 晷儀之不可測
하고 數術之不可推者
는 明類也
라
하고 恍惚杳冥
하야 相與於無相與
하며 相求於無相求者
는 晦類也
라
盪而相侵하고 迫而相陵하야 指其影而射其形하고 動於室而兆於隣者는 旁類也라
悶悶其遲하고 恢恢其容하야 形若疏而實密하고 近若差而實精者는 遠類也라
憂喜聚門하고 吉凶同域하며 或順來而逆往하고 或咎終而休始者는 反類也라
類與不類가 相與爲類하니 類之中復分其類焉하야 毫而析之하고 縷而陳之면
雖合天下之人皆爲
하고 空渭濵之竹皆爲籌筭
이라도 亦有所不能計
리라
貫之以理면 則一而已矣라 千妍萬醜라도 無二鏡也요 千柯萬葉이라도 無二木也며
春秋二百四十二年之間에 災眚之見이 視前世爲多라 一時爲瞽史之學者의 占候推步가 時合時舛하고 時得時失하야
瑣碎繳繞하니 聽者益厭之하야 則爲說以攻之曰 星墜木鳴하고 川竭谷堙은 彼之咎也요
德薄道虧하야 政荒民散은 我之咎也라 彼爲彼요 我爲我니 我不能預彼事어늘 彼亦安能預我事哉리오
是說旣出에 又有爲說以攻之者曰 居天下之上者는 君也요 居人君之上者는 天地也라
聖人患人君在人上하야 肆情任意면 無物可制라 故復假在君之上者以制之하니 此災眚變異之說所以興也라
苟明言其無預於人이면 則聖人之機 一旦發露하야 爲君者不復有所畏矣리라
是說旣出에 又有爲說以攻之者曰 天地人未有不相通也니 聖人非虛假災眚以脅人君也라
召瑞者德이요 召妖者暴가 昭然不可誣나 但不當如瞽史之苛細耳라
災眚之來면 修吾政하고 省吾過하야 以敬天怒는 可也어니와 指某災謂由某事하니 修某事以應某災는 不可也라
說至於此
하니 天下之論其
定乎
아 未定也
라 天地之應
은 未嘗不以其類也
라
汎謂之災요 而不知其所由災하며 汎謂之怒요 而不知其所由怒하니 何其汗漫而無統也오
一人之身에 痛發於股면 則知其在股하고 痛發於肱이면 則知其在肱하며 痛發於腹이면 則知其在腹하고 痛發於心이면 則知其在心하니
詎有蹙頞呻吟하야 而不知痛之所在者乎아 天地萬物皆吾體也나
惟聖人不爲私意小智所間하야 全體混然하고 大而無際하니 一星一雲之祲과 一川一阜之變이 歷然如疾痛之在身하야
無不知其所自起하야 錙錙銖銖라도 不紊不亂하니 豈若世之汗漫者哉리오
非也라 身有曆象而不廢羲和之曆象이 堯之所以爲堯也요 身有璣衡而不廢璿玉之璣衡이 舜之所以爲舜也라
彼謂制行以人不以己者
가 果足以知堯舜哉
注+是聖人曆象在身……果足以知堯舜哉:見堯典及舜典아
傳
僖公 14년, 가을에 沙鹿山이 무너졌다. 晉나라 卜偃이 말하였다. “1년 안에 큰 災難이 생겨 나라가 거의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傳
僖公 16년, 宋나라에 다섯 개의 돌이 떨어졌으니, 이는 隕星이다. 여섯 마리의 바닷새가 바람에 밀려 뒤로 날아 宋나라 都城을 지나갔으니, 이는 바람 때문이었다.
周나라 內史 叔興이 宋나라를 聘問하니, 宋 襄公이 “이것이 무슨 조짐인가? 吉凶이 어느 나라에 있겠는가?”라고 묻자,
叔興은 “금년에 魯나라에는 喪事가 많을 것이고, 齊나라에는 난리가 날 것이고, 임금께서는 諸侯의 霸主가 될 것이나 결과가 좋지 못할[不終] 듯합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물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君께서는 잘못 물으셨다.
이는 陰陽의 일이고 吉凶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길흉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상과 같이 대답한 것이다.〉”
傳
文公 14년, 彗星이 北斗星으로 들어갔다. 周나라 內史 叔服이 말하였다. “7년 안에 宋나라‧齊나라‧晉나라의 임금이 모두 叛亂에 의해 죽을 것이다.”
傳
成公 5년, 梁山이 무너지니, 晉侯가 傳車를 보내어 伯宗을 불렀다. 伯宗이 〈命을 받고 오는 途中에〉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重車)에게 길을 피하게 하며 “이 傳車를 위해 길을 피하라.”고 하니, 그 수레의 御者[重人]가 말하기를 “내가 길을 피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捷徑으로 가는 것이 빠를 것이오.”라고 하였다.
伯宗이 그에게 사는 곳을 물으니, 그는 “絳(晉나라의 首都)에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伯宗이 그에게 絳의 소식을 물으니, 그는 “梁山이 무너져 임금께서 伯宗을 불러 의논하려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伯宗이 “장차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산에 썩은 흙이 있어서 무너진 것인데,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國家는 山川을 根本[主]으로 삼기 때문에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는 變故가 생기면 임금은 盛饌을 들지 않고,
素服을 입고, 文飾이 없는 수레를 타고, 음악을 撤廢하고, 宮闕을 떠나 郊野에 거처하며, 祝이 神에게 禮幣를 바치고, 史가 神에게 祝辭를 告하여 祭禮를 올립니다. 이와 같이 할 뿐이니, 아무리 伯宗이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伯宗이 그에게 임금을 謁見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伯宗은 드디어 가서 그가 말한 대로 告하니, 晉侯는 그 말을 따랐다.
傳
襄公 9년, 宋나라에 火災가 났다. 樂喜가 司城으로 國政을 담당하였다. 晉侯가 士弱에게 “내 듣건대 宋나라는 화재로 인해 天道(吉凶을 豫示하는 天體의 현상)가 있는 줄을 알았다고 하니, 무슨 緣由로 알았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士弱이 대답하기를 “古代의 火正은 혹은 心宿 分野(中國 全域을 하늘의 28宿에 나누어 배정한 天文學 용어)에 食邑(功臣에게 주는 領地)을 받기도 하고 혹은 柳宿 分野에 食邑을 받기도 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火星의 祭祀를 주관하고 星宿의 출입을 관측하여〉 불을 出納하는 政令을 맡았습니다. 그러므로 柳宿를 鶉火라 칭하고 心宿를 大火라 칭한 것입니다.
陶唐氏의 火正 閼伯이 商丘에 거주하며 大火의 제사를 주관하고 星宿의 출입을 관측하여 불을 출납하는 시절을 기록하였는데, 〈商나라 始祖〉 相土가 閼伯의 방법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商나라는 大火의 제사를 주관하였습니다.
商나라 사람들은 禍亂과 失敗의 조짐이 반드시 불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을 考察[閱]하였기 때문에 일전에 天道가 있는 줄을 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晉 悼公이 말하기를 “期必할 수 있느냐?”고 하니,
士弱이 대답하기를 “〈國家의 治亂은〉 道의 有無에 달렸을 뿐입니다. 國家가 혼란하면 하늘이 그 조짐을 예시하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傳
襄公 28년, 봄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梓愼이 말하기를 “금년에
宋나라와
鄭나라에 아마도
饑饉이 들 것이다.
歲星(
木星)이
星紀(
斗‧
牛)에 있어야 하는데 이미 이곳을 지나
玄枵(
女‧
虛‧
危)에 가서 있어서
天時가
正常을 잃는
災變이 생겼으니 이는
陰이
陽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二十八宿分野之圖
蛇星(玄武)이 龍星(木星)을 타고 있으니, 龍星은 宋나라와 鄭나라의 星宿이다. 그러므로 宋나라와 鄭나라에 반드시 饑饉이 들 것이다. 玄枵는 虛宿가 中央에 있고, 枵는 耗(損失)의 名稱이니 土地가 비어 백성들이 손실을 입는다면 굶주리지 않고 어쩌겠는가?”라고 하였다.
傳
襄公 28년, 裨竈가 말하기를 “금년에 周王과 楚子가 모두 죽을 것입니다. 歲星이 그 位次를 버리고 明年의 位次에 가서 있어 鳥帑를 해쳤으니 周나라와 楚나라가 그 禍를 입을 것입니다.” 하였다.
子産이
商나라의
參星에 대해 논하다
注+이 일은 昭公 元年에 있다. ≪春秋左氏傳≫에 대한 本註는 본서 권8의 제1편에 보인다.
傳
“
昭公 원년,
晉侯가
病을 앓으니,
鄭伯이
公孫 僑(
子産)를
晉나라에 보내어
聘問하고 또
問病하게 하였다.
叔向이
子産에게 묻기를 ‘우리 임금님의
病患이 위독합니다.
卜人은 「
實沈과
臺駘가 빌미가 되었다.」고 하는데,
太史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감히 묻습니다. 이것이 무슨
神입니까?’라고 하니,
子産이 말하였다. ‘옛날
高辛氏에게 두 아들이 있었으니 큰 아들은
閼伯이고 작은 아들은
實沈이었습니다. 그들은
曠林에 살면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날마다
干戈를 사용해 서로 공격하니,
后帝(
堯)는 그들을 좋지 않게 여겨
閼伯을
商丘로 옮겨
辰星(
大火星)의
祭祀를 주관하게 하였더니,
商人이 이 일을
因襲하였습니다. 그러므로
辰星이
商나라의 별이 된 것입니다.
實沈을
大夏로 옮겨
參星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더니,
唐人이 이 일을
因襲하여
夏王朝와
商王朝에 복종해 섬겼습니다.
唐나라
末世의 임금이
唐叔虞였습니다.
武王의
后妃 邑姜이
太叔을
姙娠할 때를 당하여, 꿈에
天帝가
邑姜에게 「내가 너의 아들을
虞로
命名하고서, 장차 이 아이에게
唐나라를 주어
參星 분야의 땅을
歸屬시켜
子孫이 번창하게 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出生함에 미쳐 손바닥에 「
虞」자 모양의 무늬가 있으니, 드디어 「
虞」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成王에 미쳐
唐國을
滅하고
太叔을 그곳에
封하였으므로
參星이
晉나라의 별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보면
實沈은
參星의
神입니다. 옛날에
金天氏의 후예에
昧라는 자가 있었더니,
玄冥師가 되어
允格과
臺駘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臺駘는 능히 그
世業을 계승하여
汾水와
洮水를 소통시키고
大澤에
堤防을 쌓아
廣大한
平原에
人民들을 편히 살게 하니,
帝(
顓頊)가 이를 가상히 여겨 그를
汾川에 봉하였으므로 〈그
後孫인〉
沈國‧
姒國‧
蓐國‧
黃國이 실로 그 제사를 대대로 지내왔는데, 지금
晉나라가
汾水 일대를 주재(통치)하면서 이 네 나라들을 멸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臺駘는
汾水의
神입니다. 그러나 이 두
神은
晉君의
身病과는 무관합니다. 장마와 가뭄과 전염병 등의
災害가 있으면 이에
山川의 신에게
禜祭(영제)를 지내고, 눈과 서리, 바람과 비 등이 철을 잃으면 이에
日月星辰의 신에게
禜祭를 지냅니다.
晉君의
身病으로 말하면
出入,
飮食,
哀樂의 일로 인해 생긴 것이니,
山川이나
星辰의 신이 또 어찌 병을 줄 수 있겠습니까…….’
叔向이 말하기를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아직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적하신 내용이 모두 사실입니다.’ 하였다.”
成王이 唐叔虞를 봉하다[桐葉封虞]
傳
昭公 4년, 우박이 크게 내렸다. 季武子가 申豐에게 “우박을 방지할 수 있는가?”라고 묻자, 申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聖人이 윗자리에 있을 때는 우박이 없었고,
비록 있어도 災害가 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太陽이 北陸의 위치에 있을 때에 얼음을 떠서 저장하고, 太陽이 西陸의 위치에 있고 새벽에 東方에 奎星이 출현할 때에 얼음을 꺼내었습니다.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깊은 산 후미진 골짜기에 차가운 기운이 엉켜 얼음이 되면 이곳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고,〉 꺼낼 때에는 朝廷에 祿位가 있는 사람이 賓客을 맞거나 음식을 장만하거나 喪事나 祭祀의 일이 있으면 이곳(冰室)에서 꺼내어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검은 犧牲과 검은 기장으로 司寒(冬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얼음을 꺼낼 때는 복숭아나무 활과 가시나무 화살을 〈冰室 門에 걸어〉 災殃을 제거하였는데, 그 얼음을 저장하고 꺼내는 데 모두 일정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기에 넉넉한 祿을 받는 자들은 모두 얼음을 頒賜하는 班列에 참여하였으며, 大夫와 命婦의 喪에 尸身을 목욕시키는 데도 얼음을 사용하였습니다. 司寒에 제사 지내고서 얼음을 저장하고, 羊을 바치고서 冰室을 열어 國君이 먼저 사용하고,
火星이 출현하면 얼음을 나누어주는 일을 마쳤으니, 命夫‧命婦로부터 老疾者에 이르기까지 얼음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얼음은 山人이 채취하고 縣人이 운반하고 輿人이 납부하고 隷人이 저장하였습니다. 얼음은 차가운 바람으로 인해 견고해지고, 봄바람이 불면 꺼내어 씁니다.
얼음을 저장하기를 치밀하게 하고 사용하기를 널리 하면 겨울에 溫暖한 날이 없고, 여름에 陰寒한 날이 없으며, 봄에 싸늘한 바람이 없고, 가을에 장맛비가 없으며,
천둥은 쳐도 벼락이 떨어지지 않고, 서리와 우박이 재해가 되지 않으며, 전염병이 생기지 않아 백성이 요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河川과 연못의 얼음을 채취해 저장하고도 버리고 사용하지 않으므로 바람이 흩어지지 않아 草木이 말라 죽고, 천둥이 울리지 않고 벼락이 치니, 우박의 재해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詩經≫ 〈豳風 七月〉의 卒章은 얼음을 저장하는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傳
昭公 6년, 士文伯이 말하기를 “火星이 나타나면 鄭나라에 아마도 火災가 발생할 것이다. 火星이 나오기도 전에 불을 사용해 刑器를 주조하여 罪를 논쟁하는 法을 저장하였으니,
火星이 만약 불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火災가 발생하지 않고 어쩌겠는가?”라고 하였다. 6월 丙戌日에 鄭나라에 과연 火災가 발생하였다.
傳
昭公 7년, 여름 4월 초하루 甲辰日에 日食이 발생하였다. 晉侯가 士文伯(士匄)에게 “누가 장차 이 日食의 禍를 받을 것인가?”라고 묻자,
士匄가 “魯나라와 衛나라가 禍[惡]를 당할 것입니다만 衛나라는 禍가 크고 魯나라는 禍가 작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晉 平公이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士匄가 대답하기를 “〈日食할 때 太陽이〉 衛나라 分野를 떠나 魯나라 分野로 옮겨갔으니, 이로 인해[於是] 災禍가 발생한다면 魯나라도 실로 재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큰 재화는 아마도 衛君이 받게 될 것이고, 魯나라는 上卿이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晉 平公이 “≪詩經≫에 ‘저 해가 먹혔으니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인가?’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묻자, 士匄가 대답하기를 “善政을 행하지 않는 것을 이름입니다.
나라에 善政이 없고 善人을 등용하지 않으면 譴責하는 日月의 災禍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政事는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세 가지를 힘쓸 뿐이니, 첫째는 人材를 선택하는 것이고, 둘째는 백성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고, 셋째는 때를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1월에 季武子가 卒하였다.
晉侯가 伯瑕(士文伯)에게 일러 말하기를 “전에 내가 물었던 日食의 禍가 그대의 말대로 되었으니, 〈日食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 禍를 미리 알 수 있는가?”라고 하니, 伯瑕가 대답하기를 “알 수 없습니다. 六物이 같지 않고, 民心이 同一하지 않으며,
事序(事理)가 같지 않고, 官職이 같지 않으며, 始初는 같으나 終末이 다르니, 어찌 항상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晉 平公이 “무엇을 六物이라 하는가?”라고 물으니,
伯瑕는 “歲(歲星), 時(四時), 日(甲日에서 癸日까지), 月(正月에서 12월까지), 星(28宿), 辰(日月이 만나는 12會)을 이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晉 平公이 말하기를 “寡人에게 ‘辰’에 대해 말한 사람이 많은데 그 말이 모두 같지 않으니, 무엇을 ‘辰’이라 하는가?”라고 하니,
伯瑕가 대답하기를 “해와 달이 만나는 곳을 ‘辰’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地支를 天干[日]에 配合하여 〈날짜를 記錄합니다.〉”라고 하였다.
傳
昭公 8년, 楚나라 公子 棄疾이 〈陳나라를 擊滅시키자 楚 靈王이〉 穿封戌를 陳公으로 삼았다. 晉侯(平公)가 史趙에게 “陳나라가 드디어 멸망할 것인가?”라고 묻자, 史趙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平公이 “무슨 까닭이냐?”라고 묻자, 史趙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陳나라는 顓頊의 後裔입니다. 歲星이 鶉火에 있을 때에 顓頊氏가 마침내 멸망하였으니, 陳나라도 장차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지금 歲星이 析木의 나루에 있으니 오히려 장차 다시 움[由]이 돋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陳氏가 齊나라에서 政權을 잡은 뒤에야 陳나라가 마침내 멸망할 것입니다.
幕으로부터 瞽瞍에 이르기까지 天命을 어긴 이가 없었고, 舜이 거듭 밝은 德을 가졌으므로 그 德이 遂에게 이르러서 〈殷나라에 의해 諸侯로 封해졌습니다.〉 遂의 後孫이 대대로 그 德을 지키니 胡公不淫에 미쳐 〈周나라에 의해 陳나라에 封해졌습니다.〉
그러므로 周나라가 胡公에게 姓을 하사하고 虞帝(舜)의 祭祀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臣이 듣건대 盛大한 德을 가진 분은 百世 동안 제사를 받는다고 하는데, 虞舜의 代數가 아직 百世가 되지 않았으니, 그 제사를 계승해 지키는 일이 아마도 齊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 조짐이 있습니다.”
傳
昭公 9년, 여름 4월에 陳나라에 火災가 발생하였다. 鄭나라 裨竈가 말하기를 “5년 뒤에 陳나라가 다시 封해지고, 봉해진 지 52년 뒤에 드디어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産이 그 까닭을 묻자, 裨竈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陳나라는 水에 속하였고, 火는 水의 配偶로 楚나라가 다스리는 바입니다. 지금 火星이 출현하자 陳나라에 火災가 발생하였으니, 이는 楚人을 몰아내고 陳나라를 再建할 조짐입니다.
配合[妃]은 五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5년’이라 하였고, 歲星이 다섯 차례 鶉火에 미친 뒤에 陳나라가 마침내 망하고 楚나라가 그 땅을 소유할 것이니, 이는 天道입니다. 그러므로 ‘52년’이라고 한 것입니다.”
傳
昭公 10년, 봄 周王 正月에 客星이 婺女(女宿)에 출현하였다. 鄭나라 裨竈가 子産에게 말하였다. “7월 戊子日에 晉君이 죽을 것입니다.
今年에 歲星이 玄枵[顓頊之虛]에 있는데 姜氏(齊)와 任氏(薛)가 실로 그 分野의 땅을 지키고 있습니다. 女宿가 그 星次[維]의 首位에 있는데 그곳에 妖星이 출현하였으니, 이는 邑姜에게 災禍를 예고한 것입니다.
邑姜은 晉나라의 先妣입니다. 하늘은 7宿로 星次(星位)를 다스립니다. 戊子日에 逢公이 죽었는데 그때에도 客星이 이곳에 출현하였으니, 저는 이로써 晉君이 죽을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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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11년, 景王이 萇弘(周나라 大夫)에게 “금년에 諸侯 중에 어느 나라가 吉하고 어느 나라가 凶하겠느냐?”고 묻자, 萇弘이 대답하기를 “蔡나라가 凶할 것입니다.
금년이 바로 蔡侯 般이 그 임금을 弑害했던 해와 같이 歲星이 豕韋(室宿)에 있으니 蔡나라는 금년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楚나라가 장차 蔡나라를 소유하겠지만 楚나라는 惡行이 쌓였으니, 歲星이 大梁에 미치면 蔡나라는 復興하고 楚나라는 凶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天道(하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楚子가 申에 있으면서 蔡 靈侯를 불렀다. 靈侯가 가려 하자, 蔡나라 大夫들이 말하기를 “楚王은 탐욕스러워 信義가 없고, 유독 우리 蔡나라에 恨을 품고 있었는데,
지금 보내온 예물이 많고 초청하는 말이 달콤하니 이는 우리를 유인하는 것입니다.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蔡侯는 따르지 않았다.
3월 丙申日에 楚子는 군대를 매복시켜 놓고서 申에서 蔡侯를 접대하다가 蔡侯가 술에 취하자 체포하여, 여름 4월 丁巳日에 蔡侯를 죽이고, 그 수행원 70인까지 함께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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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15년, 봄에 武公의 廟에 禘祭를 지내려고 百官에게 〈미리 날짜를 알려〉 齋戒하게 하였다. 梓愼(魯나라 대부)이 말하기를 “禘祭日에 아마도 災禍가 있을 성싶다.
내가 보기에 하늘에 붉고 검은 妖氣가 있으니 이는 祭祀의 祥瑞가 아니라 喪事의 妖氣이니, 아마도 제사를 主宰하는 사람의 몸에 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월 癸酉日에 禘祭를 지낼 때 叔弓이 제사를 주재하였는데, 籥舞가 進入할 때 卒하였다. 음악을 撤去하고서 제사를 마쳤으니 禮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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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17년, 겨울에 大辰에 彗星이 출현하여 光芒(강렬한 빛)이 서쪽으로 天漢(銀河)까지 미쳤다.
申須가 말하기를 “彗는 옛것을 쓸어내고 새것을 펴는 것이다. 하늘에서 발생하는 일은 항상 吉凶의 徵兆[象]를 豫示하는 것인데, 지금 火星을 쓸어냈으니 明年에 火星이 출현하면 반드시 불이 퍼져 災殃이 질 것이니 諸侯國에 아마도 火災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하니,
梓愼이 말하였다. “昨年에 내가 彗星을 보았으니 바로 화재의 징조이다. 작년에 大火星이 출현할 때 彗星이 나타났고 금년에 大火星이 출현할 때는 그 빛이 더욱 밝으니 반드시 大火星이 들어가는 시기가 되어야 彗星이 潛伏할 것이다.
彗星이 大火星에 있은 지가 오래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大火星이 출현하는 시기가 夏正(夏曆)으로는 3월이고, 商正으로는 4월이고, 周正으로는 5월인데,
夏나라의 曆數가 天時와 符合하니 만약 화재가 발생한다면 아마도 宋‧衛‧陳‧鄭 네 나라가 화재를 당할 것이다.”
鄭나라 裨竈가 子産에게 말하기를 “宋나라‧衛나라‧陳나라‧鄭나라에 아마도 同日에 화재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瓘‧斝‧玉瓚을 神에게 바치고서 祈禱한다면 우리 鄭나라에는 반드시 화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子産은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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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18년, 여름 5월에 火星(心星)이 비로소 黃昏에 출현하고, 丙子日에 바람이 불었다. 梓愼이 말하기를 “이 바람을 融風이라 하는데 이는 火災의 시작이니, 7일 뒤에 火災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戊寅日에 바람이 심하고, 壬午日에는 더욱 심하였다. 宋나라‧衛나라‧陳나라‧鄭나라에 모두 화재가 발생하였다. 梓愼이 大庭氏의 창고에 올라가서 바라보고서 말하기를 “〈火災가 일어난 곳은〉 宋나라‧衛나라‧陳나라‧鄭나라이다.”라고 하였는데, 며칠 뒤에 네 나라가 모두 使者를 보내와서 화재를 通告하였다.
裨竈가 말하기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鄭나라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하니, 鄭人들이 그의 말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子産이 반대하였다.
子太叔이 말하기를 “國家의 寶物(瓘斝와 玉瓚을 이름)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오. 만약 화재가 발생한다면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될 것이니,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대는 아낄 게 뭐 있소.”라고 하니,
子産이 말하기를 “天道는 幽遠하고 人道는 切近하여 서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어찌 天道를 가지고 人道를 알 수 있겠습니까? 裨竈가 어찌 天道를 알겠습니까?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니 어찌 간혹 맞는 말이 없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끝내 〈瓘斝와 玉瓚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鄭나라에는〉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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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20년, 2월 己丑日에 冬至[日南至]가 들었다. 梓愼이 雲氣를 관찰하고서 말하기를 “금년에 宋나라에는 난리가 나서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안정될 것이고, 蔡나라에는 大喪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叔孫昭子가 말하기를 “〈宋나라에 난리가〉 일어난다면 〈난리를 일으키는 자가〉 戴公과 桓公의 宗族일 것이다. 그들은 교만하고 사치하여 無禮함이 너무 심하니 禍亂의 원인이 內在한 바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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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21년, 가을 7월 초하루 壬午日에 日食이 있었다. 昭公이 梓愼에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禍福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冬至‧夏至와 春分‧秋分에 발생하는 日食은 災禍가 되지 않으니, 日月의 운행은 春分과 秋分에는 같은 길을 가고[同道] 冬至와 夏至에는 서로 超過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의 달에 발생하는 日食은 災禍가 되니, 이는 陽氣가 陰氣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水災가 발생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叔輒이 日食이 〈災殃이 될 것을 근심하여〉 哭을 하니, 昭子가 말하기를 “叔輒은 아마도 죽을 성싶다. 곡할 바가 아닌데 〈곡을 하였으니 말이다.〉”라고 하였다. 8월에 叔輒이 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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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24년, 여름 5월 초하루 乙未日에 日食이 발생하였다. 梓愼이 말하기를 “장차 水災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하니,
昭子가 말하기를 “가뭄이 들 것이다. 太陽이 春分點을 지났는데도 陽氣가 오히려 陰氣를 이기지 못해 〈日食이 발생한 것이다.〉 陰氣를 이기게 되면 반드시 日光이 매우 猛烈할 것이니 가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陽氣가 늦도록[莫] 陰氣를 이기지 못하니 장차 陽氣가 모여 쌓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을 8월에 雩祭를 지냈으니 가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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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26년, 齊나라에 彗星이 출현하니 齊侯가 사람을 시켜 〈祭祀를 지내어〉 彗星의 消滅을 祈求하게 하자, 晏子가 말하기를 “도움은 없고 단지 속임만을 취할 뿐입니다.
天道는 의심할 수 없이 〈진실하여〉 그 命(天體에 나타난 現象)에 착오[貳]가 없으니 어찌 祈禱해 소멸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늘에 彗星이 출현하는 것은 더러운 것들을 쓸어내기 위함이니,
임금님께 穢德(더러운 행위)이 없다면 또 彗星의 소멸을 祈求할 필요가 뭐 있으며, 만약 임금님의 행위에 더러움이 있다면 祈求한다 해서 어찌 소멸되겠습니까?”라고 하니, 齊 景公은 기뻐하여 이에 禳除를 정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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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31년, 12월 초하루 辛亥日에 日食이 있었다. 그날 밤에 趙簡子가 꿈을 꾸었는데, 童子가 발가벗고 뒹굴면서 노래를 불렀다.
다음날 아침에 史墨을 불러 꿈의 길흉을 점치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런 꿈을 꾸었는데 오늘 일식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니, 史墨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6년 뒤 이달에 미쳐 吳軍이 아마도 楚나라 郢都로 진입할 것입니다. 하지만 끝내 승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郢都로 들어가는 일이 반드시 庚辰日에 있을 것이니, 이날은 해와 달이 辰尾에 있기 때문입니다. 庚午日에 해가 비로소 變化[謫]하기 시작하니 〈楚나라가 災禍를 입겠지만〉 火(楚를 뜻함)는 金(兵器를 뜻함)을 이기기 때문에 〈吳가〉 승리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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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公 6년, 吳나라가 陳나라를 토벌하니 楚子가 陳나라를 구원하고자 하였는데, 戰爭하려 할 때 昭王이 病을 앓았다. 庚寅日에 昭王이 城父에서 卒하였다.
이해에 〈楚나라 하늘에〉 한 떼의 붉은 새 모양을 한 彩雲이 太陽을 끼고 사흘 동안 飛翔하였다. 楚子가 사람을 보내어 周나라 太史에게 물으니,
周나라 太史가 말하기를 “〈그 應驗이〉 아마도 王의 身上에 당도할 것이다. 그러나 禳祭를 지낸다면 〈그 禍를〉 令尹이나 司馬에게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楚 昭王이 말하기를 “나[腹心]의 병을 제거하려고 그 병을 신하[股肱]에게 옮겨놓는 것이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나에게 大過가 없다면 하늘이 어찌 나를 夭死시킬 것이며, 罪가 있어 받는 罰이라면 또 어찌 남에게 옮겨가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禳祭를 지내지 않았다.
한 기운이 天地의 사이에 운행하니 災殃‧祥瑞‧妖氣의 조짐이 종류에 따라 호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위로 하늘에 걸려 있고 아래로 땅에 솟아 있으며 중간에 무리 지어 있는 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같은 몸에 함께 유행하니 한 물건도 同流가 없는 것이 없고,
한 물건도 서로 호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類여, 類여! 천지 만물의 樞紐(만물을 생성하는 관건)로다.
明類도 있고 晦類도 있으며, 旁類도 있고 互類도 있으며, 遠類도 있고 反類도 있다.
〈천자가〉 엄숙하면 제때에 비가 내리고 잘 다스리면 제때에 맑아지며 賢哲하면 제때에 따뜻해지고 잘 도모하면 제때에 추위가 와서 天文을 관측하는 儀器로도 측량할 수 없고 曆法을 계산하는 算法으로도 추산할 수 없는 것이 明類이다.
광대해 끝이 없으며 황홀하고 아득하여 함께할 수 없는 대상과 함께하고 구할 수 없는 대상을 구하는 것이 晦類이다.
옮겨가서 서로 침범하고 다가가서 서로 능멸하여 그림자를 가리키며 그 형체를 쏘아 맞히고 방에서 움직였는데 이웃에 조짐이 일어나는 것이 旁類이다.
종횡으로 종합하여 뒤섞이고, 서로 맞닿아 순환하고 변화하여 應이 다시 感이 되고 感이 다시 應이 되는 것이 互類이다.
우매하여 굼뜨고 너그럽게 포용하여, 형상은 疏遠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親切하며, 가까운 이에게 난잡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것이 遠類이다.
근심스러운 일과 기쁜 일이 한 가문에 모이고 길한 일과 흉한 일이 한 지역에 모여서, 때로는 순조롭게 왔다가 거슬러서 가고 때로는 종극에 禍가 있으나 시작이 아름다웠던 것이 反類이다.
類와 不類가 서로 더불어 類가 되기도 하니, 類 중의 무리를 다시 分類하여 세밀히 분석해서 일일이 모두 진술하려 한다면,
비록 천하 사람을 다 모아 모두 計硏과 桑弘羊으로 만들고, 渭水 가의 대나무를 다 베어다가 모두 산가지를 만들더라도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면 하나일 뿐이니, 예쁜 자와 못난 자가 천만 인이라도 거울은 둘이 아니고, 가지와 잎이 천만 개라도 나무는 둘이 아니며,
천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로 구별되어도 類는 둘이 아니니,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가지 다른 것이 생겨나고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근본으로 귀결된다.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이는 聖人(孔子)이고, 한 가지 說만으로 이름을 얻어 한 가지 종류만을 고집하는 자는 瞽史이다.
春秋時代 242년간에 발생한 재앙이 前代에 비해 많았다. 당시 瞽史學을 배운 자들이 天上을 관찰해 人事를 점치고 曆法을 推算한 것이 때로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며 때로는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는데,
세세히 분석하고 견강부회하니 듣는 자들이 더욱 혐오하여 곧 논설을 지어 아래와 같이 반박하였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고 시내가 마르고 골짜기가 메이는 것은 천지의 災禍이고,
德이 박하고 道가 무너져 정치가 황폐하고 백성이 離散하는 것은 나의 잘못이다. 저는 저이고 나는 나이니, 내가 天地의 일에 관여할 수 없는데 천지가 어찌 내 일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설이 나오자, 또 논설을 지어 아래와 같이 반박하는 자가 있었다. “天下 사람의 위에 있는 이는 임금이고, 임금의 위에 있는 이는 천지이다.
聖人이, 임금은 백성의 위에 있으니 멋대로 방종하면 제제할 방법이 없을 것을 걱정하셨다. 그러므로 다시 임금의 위에 있는 천지를 가차해 임금을 제제한 것이다. 이것이 災禍와 變異의 說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다.
만약 災禍와 變異가 人事와 무관하다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면 聖人의 心思[機]가 하루아침에 드러나 임금이 된 자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논설이 나오자, 또 논설을 지어 아래와 같이 반박하는 자가 있었다. “天‧地‧人은 서로 통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聖人이 거짓으로 재앙과 변괴에 가탁하여 임금을 위협한 것이 아니다.
有德한 임금은 瑞氣를 부르고 포악한 임금은 妖氣를 부른 것이 명백하여 속일 수 없으나, 다만 瞽史처럼 지나치게 세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災變이 생기면 나의 정사를 닦고 나의 허물을 성찰하여 하늘의 노하심을 敬畏하는 것은 옳지만, 아무 재변을 가리켜 아무 일로 인해 생겼으니 아무 일을 修行하여 아무 재변에 응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논설이 이에 이르렀으니 천하의 논의가 이미 評定되었는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天地가 호응함에는 同類끼리 호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모호하게 그것을 재앙이라 말할 뿐, 그 재앙이 무슨 연유로 생겼는지는 알지 못하며, 모호하게 그것을 하늘의 노함이라 말할 뿐, 하늘이 무슨 연유로 노했는지는 알지 못하니, 어쩌면 그리도 허탄하여 두서가 없단 말인가?
사람의 일신 중에 다리가 아프면 통증이 다리에 있음을 알고, 팔이 아프면 통증이 팔에 있음을 알며, 배가 아프면 통증이 배에 있음을 알고, 심장이 아프면 통증이 심장에 있음을 아는데,
어찌 이맛살을 찌푸리고 신음하면서 통증이 있는 곳을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天地의 萬物은 모두 내 몸이다.
그러나 오직 聖人만이 사사로운 생각과 작은 지혜의 가림을 당하지 않아 전체가 渾然하고 광대해 끝이 없으니, 별 하나 구름 한 조각의 異變과 한 하천 한 언덕의 이변이 내 몸에 있는 통증처럼 분명하여,
그 통증의 원인을 모르는 것이 없어서 조금도 문란함이 없으니 어찌 세상에 허탄하여 두서가 없는 자들과 같겠는가?
이는,
聖人은
曆象(
曆을
推算하고
天象을 관찰하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어서
羲和의
曆象을 기다릴 필요가 없고,
璣衡(천문관측기구)이 자신에게 있어서
璿玉으로 만든
璣衡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璿璣玉衡圖
그러나 堯임금은 자기를 믿지 않고 曆象을 믿었으며, 舜임금은 자기를 믿지 않고 璣衡을 믿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다른 사람의 능력을 기준으로 행위의 준칙을 제정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다. 자신에게 曆象이 있었으나 羲和의 曆象을 폐기하지 않은 것이 요임금이 요임금이 된 이유이고, 자신에게 璣衡이 있었으나 璿玉으로 만든 璣衡을 폐기하지 않은 것이 순임금이 순임금이 된 이유이다.
저 ‘다른 사람의 능력을 기준으로 행위의 준칙을 제정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고 한 자가 과연 충분히
堯舜을 안 자이겠는가?
注+≪書經≫의 〈堯典〉과 〈舜典〉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