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僖二十六年
이라 로 叛楚卽晉
하니 楚令尹子玉司馬子西帥師伐宋
하야 圍緡
하다
傳
對曰 不知所賀
니이다 子之傳政於子玉
에 曰 以靖國也
라하더니 면 오
子玉之敗는 子之擧也라 擧以敗國하니 將何賀焉이릿가 子玉剛而無禮하야 不可以治民이니
傳
하야 作三軍
하고 謀元帥
하다 趙衰曰 郤縠
이 可
니이다
乃使將中軍
하고 郤溱佐之
하며 使狐偃將上軍
하니 讓於
而佐之
하고
命趙衰爲卿
하니 讓於
先軫
이어늘 使欒枝將下軍
하고 先軫佐之
하며 하고 魏犨爲右
하다
傳
而敎其民
하고 二年
에 欲用之
하니 子犯曰
하니이다
傳
衛侯請盟
이어늘 晉人弗許
하다 晉侯圍曹
하야 三月丙午
에 入曹
하야 令無入僖負羈之宮而免其族
하니 라
執曹伯
하고 하다 楚子入居于申
하야 使申叔去穀
하고
요 民之情僞
를 盡知之矣
라 하고 하니 天之所置
를 其可廢乎
아
王怒하야 少與之師하다 公乃拘宛春於衛하고 且私許復曹衛하니 曹衛告絶於楚하다
傳
하니 晉師退
한대 軍吏曰 以君辟臣
은 辱也
요 且楚師老矣
어늘 何故退
오
子犯曰 師直爲壯
이요 曲爲老
니 豈在久乎
아 니 라
退三舍하다 楚衆欲止하니 子玉不可하다 四月에 晉侯次于城濮한대 楚師背酅而舍라
己巳
에 晉師陳于
하다 楚師敗績
이라 하고 及癸酉而還
하다 甲午
에 하다
傳
하야 曰 重耳敢再拜稽首
하야 하노이다 受策以出
하야 하다
傳
衛侯聞楚師敗
하고 懼
하야 出奔楚
라가 遂適陳
하야 하다
癸亥
에 王子虎盟諸侯于王庭
하다 曰 皆獎王室
하야 無相害也
하라
有渝此盟
이면 明神殛之
하야 俾隊其師
하야 無克祚國
하고 及
玄孫
히 無有老幼
하리라
傳
이라하야 殺之
하야 以徇于諸侯
하고 使茅茷代之
하다
하니 民於是大服
하다 君子謂文公其能刑矣
로다 而民服
이로다
傳
冬
에 會于溫
하니 討不服也
라 注+會于溫 討不服也:討許衛하다
且合諸侯而滅兄弟
는 非禮也
요 하고 而不與偕復
은 非信也
요 同罪異罰
은 라
禮以行義
하고 信以守禮
하며 刑以正邪
니 舍此三者
면 君將若之何
오 公說
하야 復曹伯
하고 許
하다
戶有樞
하고 言亦有樞
하며 射有的
하고 言亦有的
하며 有會
하고 言亦有會
하니
一得其樞면 萬戶皆開하고 一破其的이면 萬矢皆廢하며 一中其會하면 萬理皆解라
千世之所不能決과 百家之所不能定과 群說之所不能該를 聖人折之以一字하야 而包羅交結하야 擧無所遺하니 是果何術耶아
晉文公之霸諸侯에 其謀畫과 其政刑과 其征伐과 其盟會를 使後世學者定其是非면
必
之曰 此臧也
요 彼否也
며 此優也
요 彼劣也
며 此工也
요 彼拙也
라하야 雖
이라도
如拔其尤者論之
컨대 라 兼受二國之施
하니 則當兼報二國之德
이라
豈當有所偏助哉아 文公之心은 則以宋弱國也니 因前日之德而親我者也요 楚強國也니 挾前日之德而陵我者也라
今楚伐宋하니 爲吾計者컨대 固當助宋以厚其親我之心이요 挫楚以奪其陵我之氣라
不寧惟是라 吾方圖霸業호되 坐視楚橫行而不敢較면 則霸權在楚不在晉矣라
然遽加兵於楚면 則天下必以我爲背惠食言이리니 其誰與我리오 於是不攻楚而攻楚之所必救라
伐曹伐衛면 皆楚親暱이니 外無背楚之名이요 而內有怒楚之實이라
使兵端發於楚하고 而不發於我하야 待楚之先動而後에 徐起而應之면 則雖破楚而無背惠之名이니 其爲謀可謂譎矣라
此猶非其譎之尤者也라 文公名雖救宋이나 而意實在於勝楚라 時天下之強國은 爲晉與楚니
必先摧楚之鋒然後에 晉可以專霸於天下라 楚子固倦於兵하니 其很戾而好戰者는 獨子玉耳라
儻不深激楚之怒면 則楚將知難而退리니 晉楚之雌雄不決矣리라
於是因執曹伯하고 分曹衛之田賜宋은 所以深激楚之怒하야 而趣之戰也라
苟文公意止於救宋이면 則當宛春之使에 必欣然而從矣리라
何者오 始伐曹衛는 本所以救宋也어늘 今楚果以愛曹衛之故로 將釋宋圍면 是適投吾欲也라
我復曹衛하고 彼釋宋圍면 兩得其欲이니 何爲不許之乎아 文公非惟不許라 乃執宛春以辱之하고
又私許復曹衛以挑之하야 惟恐激而不怒하고 怒而不戰하니
是其心果在於勝楚요 而不在於救宋也라 人知文公救宋而止耳니 孰知其譎之尤가 一至於此乎아
至於退舍之事하야는 則其譎又深矣라 楚本無與晉競之心이로되 文公多方以怒之하고 迫而使戰하니
雖子玉不勝一朝之忿이나 然上則楚子와 下則士卒이 皆不欲也라
自常情論之컨대 雖車馳卒奔이라도 猶懼失楚師온 況退舍避之하야 使子玉得假以爲班師之名乎아
盖文公固已料子玉於度內하야 明知子玉內懷蒍賈之謗하고 急於立功以刷其恥하야
見吾之退避면 必謂幸遇脆敵하니 功業易取가 無若此時라 雖吾退十舍라도 猶將來追온 況三舍乎아
文公之所以肯退者는 先有以必楚之不退也라 心欲戰而形若不欲戰하야 用以報德하고
用以驕敵하고 用以惑諸侯之心하고 用以作三軍之憤이라 一世爲其所眩惑而不自知하고
雖明智如左氏者로도 猶信其我退楚還我將何求之語하야 載之於書하니 信矣로다 文公之善譎也여
文公之譎
이 夫豈一端而已哉
리오 하니 果王者之師耶
아
利小則用信
하고 利大則用暴
하니 吾是以知文公之譎也
로라 三罪而民服
注+三罪而民服:하니 若欲自附於王者之刑矣
라
疏者則用法하고 愛者則用私하니 吾是以知文公之譎也로라 統而論之컨대 大則如託狩以召王이요
小則如
이니 殆未易徧擧
라 要皆不能出夫子一字之外
하니 聖人之言可畏也
라
嗚呼라 文公之譎이 所就者區區之霸業耳라 其師一動에 而子叢死於魯하고
子玉死於楚하고 叔武歂犬士榮元咺子適子儀死於衛鄕하니 若晉師不出이면 則是皆無罪之人也라
至於若偏若禆와 若輿若臺로 膏潤原野하야 名不登於簡冊者가 抑不知其百耶千耶萬耶니 忍哉라 文公之不仁也여
雖然文公始欲譎人이나 而終不免爲人所譎이라 曹伯之當執當復과 衛侯之當殺當釋이 出於文公可也어늘
顧乃爲巫所譎而還曹伯
하고 爲醫所譎而生衛侯
라 至於反衛侯於國
하얀 則爲魯所餌
하야 而使恩歸於魯
注+曹伯之當執當復……而使恩歸於魯:僖公二十八年 晉人執衛侯歸之于京師 三十年 晉侯使醫衍酖衛侯 寗兪貨醫 使薄其酖 不死 公爲之請 納玉於王與晉侯皆十瑴 王許之 秋乃釋衛侯하니라
魯는 諸侯也니 受其譎이라도 猶不足深愧어니와 孰謂巫醫下流其譎이 又有在文公之上者耶아
傳
僖公 26년, 가을에 宋나라는 자기들이 晉侯를 잘 대우하였다 하여 楚나라를 배반하고 晉나라에 붙으니, 楚나라 令尹 子玉과 司馬 子西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宋나라를 토벌하여 緡을 포위하였다.
‘楚子가 宋나라를 포위하려 하다’에서 ‘文公이 백성을 敎導한 結果이다’까지
傳
僖公 27년, 楚子가 宋나라를 포위하려고 子文에게 睽에서 治兵하게 하니, 子文은 終朝에 治兵을 마치고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다.
子玉에게 다시 蔿에서 治兵하게 하니 子玉은 하루해가 다한 뒤에 마치고 일곱 사람에게 매질을 하고 화살로 세 사람의 귀를 꿰었다.
國老가 모두 子文에게 祝賀하니 子文이 그들에게 술을 대접하였다. 蔿賈는 아직 젊었는데 늦게 와서 축하도 하지 않거늘 子文이 그 까닭을 묻자
蔿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축하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께서 子玉에게 國政을 전할 때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한다.’고 하셨는데, 國內는 안정된다 하더라도 國外에서 실패한다면 소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子玉의 실패는 당신의 薦擧 때문입니다. 國事를 실패할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무엇을 축하하란 말입니까? 子玉은 剛愎(퍅)하고 無禮하여 군대[民]를 다스릴 수 없으니,
300乘 이상을 거느리고 出戰하면 군대를 온전히 거느리고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온전하게 거느리고 돌아온다면 〈그때에 가서 축하한들〉 무엇이 늦겠습니까?”
傳
겨울에 楚子가 諸侯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서 宋나라를 포위하니 宋나라 公孫固가 晉나라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였다.
先軫은 “恩惠를 보답하고 患難을 구제하여 威嚴을 취하고 霸業을 정하는 것이 이 일에 달렸습니다.”라 하고,
狐偃은 “楚나라가 비로소 曹나라를 얻었고 衛나라와 새로 婚姻을 맺었으므로 우리가 曹나라와 衛나라를 치면 楚나라는 반드시 이들을 救援할 것이니, 齊나라와 宋나라는 楚나라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晉나라는 被廬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三軍을 편성하여 元帥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를 상의하였다. 趙衰가 말하였다. “郤縠이 좋습니다.”
이에 晉侯는 郤縠에게 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郤溱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狐偃에게 上軍을 거느리게 하니 〈狐偃이〉 狐毛에게 사양하고서 자신은 그의 보좌가 되었으며,
趙衰에게 卿을 命하니 欒枝와 先軫에게 사양하거늘 欒枝에게 下軍을 거느리게 하고 先軫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였으며, 荀林父에게 戎車를 몰게 하고 魏犨를 車右로 삼았다.
傳
晉侯가 처음 歸國했을 때부터 백성들을 敎導하였는데, 〈교도한 지〉 2년 만에 文公이 이들을 사용해 戰爭하려 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道義를 몰라 그 생활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에 文公은 出兵하여 襄王의 위치를 안정시키고 還國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政治에 힘을 쓰니, 백성들이 생활을 편안히 여겼다.
文公이 다시 이들을 사용해 전쟁하려 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信義를 몰라 施行할 방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에 文公은 原을 쳐서 백성들에게 信義를 보이니, 物資를 交易하는 백성들이 많은 이익을 구하지 않고 약속한 말을 分明한 證據로 삼았다.
文公이 “이제 사용해도 되겠는가?”라고 하니 子犯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아직 禮를 몰라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에 文公은 군사 훈련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禮를 보이고, 執秩를 설치하여 官爵의 등급을 바로잡으니, 백성들이 上司의 命을 따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뒤에 이들을 사용하여 穀에 주둔한 楚나라의 戍兵을 축출하고 宋나라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한 번 戰爭하여 霸業을 이루었으니 이는 文公이 백성을 敎導한 결과이다.
‘晉侯가 曹나라를 討伐하고자 하다’에서 ‘〈曹伯이〉 許나라로 가서 諸侯와 會盟하다’까지
傳
僖公 28년, 晉侯가 曹나라를 討伐하기 위해 衛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으나 衛人이 허락하지 않자,
길을 돌아 衛나라의 남쪽에서 黃河를 건너 曹나라를 侵攻하고 아울러 衛나라도 討伐하였다. 五鹿을 취하였다. 晉侯가 齊侯와 斂盂에서 結盟하였다.
이때 衛侯가 결맹에 참여하기를 요청하였으나 晉人이 허락하지 않았다. 晉侯가 曹나라를 포위하고서 3월 丙午日에 曹나라의 國都로 쳐들어가서 僖負羈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令을 내려 그 家族이 禍를 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恩惠를 보답한 것이다.
이에 曹伯을 잡고, 曹나라와 衛나라의 땅을 나누어 宋人에게 주었다. 楚子가 申으로 들어가 거주하면서 申叔에게는 穀에서 떠나게 하고,
子玉에게는 宋나라에서 떠나게 하며 말하였다. “晉軍을 추격하지 말라. 晉侯가 亡命하여 國外에 19년 동안 있었으나 끝내 晉나라를 얻었으니,
세상의 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빠짐없이 경험하였고, 백성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 데다가 하늘이 그에게 壽命을 주었고 또 그의 害惡을 제거하였으니, 하늘이 세운 사람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폐할 수 있겠는가?”
子玉이 伯棼을 보내어 楚子에게 出戰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감히 기필코 공을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이용해[以] 讒慝한 입을 막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楚王은 노하여 그에게 少數의 군대만 주었다. 文公은 이에 宛春을 衛나라에 억류하고, 또 은밀히 曹나라와 衛나라의 恢復을 허락하니 曹나라와 衛나라는 楚나라에 관계의 단절을 通告하였다.
傳
子玉이 노하여 晉軍을 추격하니 晉軍이 후퇴하였다. 軍吏가 말하였다. “임금으로서 신하를 피하는 것은 恥辱이고, 또 楚軍은 出征한 지 오래여서 지쳤는데[老] 무엇 때문에 후퇴하십니까?”
子犯이 말하였다. “군대는 名分이 바르면[直] 士氣가 旺盛[壯]하고 名分이 바르지 못하면[曲] 士氣가 衰退[老]하는 것이니, 어찌 出征의 久近에 달렸겠습니까? 지난날 楚나라의 은혜가 없었다면 임금님께서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3舍를 후퇴해 피하는 것은 그 은혜를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에 晉軍이 3舍를 후퇴하였다. 楚軍이 추격을 멈추려 하니 子玉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에 晉侯가 군대를 거느리고서 城濮에 주둔하였는데, 楚軍이 험한 丘陵을 등지고 陣을 쳤다.
子玉이 鬪勃(楚나라 대부)을 晉나라 軍中으로 보내어 戰鬪를 요청하였다. 晉侯가 有莘의 언덕에 올라 군대를 査閱[觀師]하고는 “少長이 모두 禮가 있으니 쓸 만하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나무를 베어 兵器를 더 만들게 하였다.
己巳日에 晉軍이 莘北에 陣을 쳤다. 楚軍이 大敗하였다. 晉軍이 사흘 동안 주둔하며 楚軍이 버리고 간 軍糧을 먹고 癸酉日에 還軍하였다. 甲午日에 衡雍에 이르러서 踐土에 王宮을 지었다.
傳
丁未日에 楚나라와의 戰爭에서 얻은 戰利品[俘]을 王에게 바쳤다. 己酉日에 王이 晉侯에게 단술을 대접하고, 이어 晉侯에게 宥를 명하였다.
王이 尹氏와 王子虎‧內史 叔興父에게 명하여 晉侯를 策命하여 侯伯으로 삼게 하고서,
大輅의
服裝과
戎輅의 복장과
彤弓 하나와
彤矢 백 개와
玈弓矢 천 개와
秬鬯 한 통과
虎賁 3백 명을
下賜하면서 말하였다.
大輅圖
“王은 叔父에게 이르노니 삼가 王命에 복종하여 사방의 諸侯를 安撫하고 王에게 잘못하는 자들을 다스리라.”
晉侯는 세 번 사양한 뒤에 王命을 받아들이며 “重耳는 감히 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天子의 크고 밝으신 아름다운 命을 받들어 宣揚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策命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晉侯는 와서 돌아갈 때까지 모두 세 차례 天子를 謁見하였다.
傳
衛侯는 楚軍이 敗戰했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서 楚나라로 出奔하였다가 드디어 陳나라로 가서 元咺을 보내어 叔武를 받들고 〈王庭으로 가서〉 盟約을 접수하게 하였다.
癸亥日에 王子 虎가 諸侯들과 王庭에서 맹약하였다. 맹약하기를 “모두 王室을 도와 서로 해치지 말라.
이 맹약을 어기면 明神이 벌을 내려 그 군대를 失墜시켜 國家를 享有하지 못하게 하고, 너의 玄孫에 이르기까지 老少할 것 없이 〈모두 災殃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君子는 이 맹약을 두고 “信義에 맞았다.”고 하고, 또 “晉나라가 이번 전쟁에 德으로써 進攻하였다.”고 하였다.
傳
城濮의 전쟁 때 晉나라의 中軍이 늪지대에서 큰바람을 만나 大旆의 左旃을 잃었다.
祁瞞이 軍令을 犯했다 하여 司馬가 그를 죽여 諸侯 軍中에 조리돌리고서 茅茷에게 그 職務를 대신하게
하였다. 晉軍이 還軍하여 河水를 건넜다. 舟之僑가 먼저 돌아가니 士會가 車右의 職을 代行하였다.
7월에 振旅하여 凱旋樂을 울리며 晉나라 國都로 들어와서, 宗廟에 俘와 馘을 告하고 飮至하고서 크게 상을 내리고 諸侯들을 불러 두마음 품은 나라를 討伐하게 하고
舟之僑를 죽여 全國에 조리돌리니 백성들이 크게 복종하였다. 君子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評論하였다. “文公은 刑罰을 잘 시행하였다. 세 罪人을 죽이니 백성들이 복종하였다.”
傳
겨울에
溫에서 회합하였으니, 이는
服從하지 않는 나라를
懲罰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會合에
晉侯가
王을 불러
諸侯를 거느리고
朝見하고, 또
王에게 사냥하게 하였다.
注+許나라와 衛나라를 討伐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仲尼는 “신하로서 임금을 부른 것은 敎訓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經에 “天王이 河陽에서 사냥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王이 사냥할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고, 또 晉 文公의 德을 밝힌 것이다.
晉侯가 병이 들자 豎(曹伯의 小臣) 侯獳가 筮史에게 뇌물을 주어, 〈병이 생긴 원인을〉 曹나라를 멸망시켰기 때문으로 풀이하게 하였다. 〈이에 筮史는 晉侯에게〉 “齊 桓公은 會盟하여 異姓을 諸侯로 封하였는데,
지금 君께서는 회맹하여 同姓 諸侯를 滅하셨습니다. 曹叔 振鐸은 文王의 아들이고 先君 唐叔은 武王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또 諸侯를 會合하여 兄弟의 나라를 擊滅하는 것은 禮가 아니고, 〈曹나라와〉 衛나라를 함께 회복시키겠다고 명해놓고서 함께 회복시키지 않은 것은 信이 아니며, 같은 罪에 罰을 달리하는 것은 刑이 아닙니다.
禮로써 義를 행하고 信으로써 禮를 지키며 刑으로써 邪惡을 바로잡는 것이니, 이 세 가지를 버리고서 君께서는 장차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하니, 公은 기뻐하여 曹伯을 復位시켰다. 曹伯은 드디어 許나라로 가서 諸侯와 會盟하였다.
門戶에 樞機가 있고 말에도 樞機가 있으며, 射箭에 표적이 있고 말에도 표적이 있으며, 백정은 짐승의 몸 구조를 파악함이 있고 말에도 脈理를 파악함이 있다.
한번 그 樞機을 얻으면 천만 개의 문호를 모두 열 수 있으며, 한번 그 표적을 격파하면 천만 개의 화살을 모두 폐기해야 하며, 한번 그 맥리를 理會하면 만 가지 이치가 모두 풀린다.
千世 동안 해결하지 못한 것과 百家가 결정하지 못한 것과 각종 논설이 포괄하지 못한 것들을 성인은 한 글자로 折中하고 전부를 포괄하여 빠뜨리는 것이 없으니, 이는 과연 무슨 方術인가?
대체로 運轉하는 것은 樞機이고 貫穿하는 것은 標的이고 의거하는 것은 그 이치를 體會하였기 때문이다.
晉 文公이 諸侯의 霸者가 되었을 때에 행했던 計謀와 政刑과 征伐과 盟會에 대하여 後世 학자들에게 그 是非를 論定하게 한다면,
반드시 조목별로 자세히 진술하기를 “이것은 善하고 저것은 不善하며, 이것은 우월하고 저것은 저열하며, 이것은 공교하고 저것은 졸렬하였다.”라고 장황하게 서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오히려 그 是非를 다 거론하지 못했을 것인데, 우리 夫子께서는 ‘譎’이란 한 글자로써 晉 文公을 단정하셨다.
‘譎’이란 한 글자의 含意를 음미하여 晉 文公의 일생의 〈행위를 비추어보면〉 천 개의 근원과 만 개의 물결이 滔滔히 흐르고 汨汨히 흘러 모두 하나의 ‘譎’字 안으로 달려가서 動容周旋과 橫斜曲直이 가는 곳마다 譎이 아님이 없다.
그중에 더욱 드러난 일을 뽑아서 評論하면, 楚나라와 宋나라는 모두 晉 文公에게 恩德이 있는 나라이다. 두 나라의 은혜를 동시에 받았으니 두 나라의 은덕을 똑같이 갚음이 마땅하다.
어찌 치우치게 돕는 바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文公의 마음에는 ‘宋나라는 약소국이니 전일에 우리에게 은덕을 베푼 일로 인해 우리를 친근하게 여길 것이고, 楚나라는 강대국이니 전일에 우리에게 은덕을 베푼 일을 믿고서 우리를 업신여길 것이다.
지금 楚나라가 宋나라를 攻伐하니, 우리 晉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운다면 宋나라를 도와주어 우리를 친근하게 대한 마음을 후하게 보답하고, 楚나라를 좌절시켜 우리를 업신여기는 기세를 꺾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晉나라가 바야흐로 霸業을 도모하면서 楚나라가 횡행하는 것을 좌시하고 감히 따지지 않는다면 霸權이 楚나라 있고 晉나라에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楚나라를 攻伐[加兵]한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반드시 우리 晉나라가 은혜와 언약을 저버렸다고 할 것이니, 그 누가 우리를 돕겠는가?’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楚軍을 공격하지 않고 楚軍이 반드시 구원할 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曹나라를 공격하거나 衛나라를 공격한다면 모두 楚나라가 친근히 여기는 나라이니, 겉으로는 楚나라를 저버리는 惡名이 없고 안으로는 楚나라를 激怒시키는 실상이 있을 것이다.
전쟁의 꼬투리가 楚軍에게서 발생하고 우리에게서 발생하지 않게 하여, 楚軍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린 뒤에 천천히 일어나 應戰한다면 비록 楚나라를 擊破하더라도 은혜를 저버렸다는 惡名이 없을 것이니, 文公의 계책이 狡譎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가장 狡譎한 것이 아니다. 文公이 내세운 名目은 宋나라를 구원하는 것이었으나, 本心은 실로 楚나라와 싸워 승리하는 데 있었다. 이때 천하의 強國은 晉나라와 楚나라였으니,
반드시 먼저 楚나라의 鋒芒(세력)을 꺾은 뒤에야 晉나라가 홀로 天下의 霸者가 될 수 있었다. 楚王은 본래 전쟁하기를 싫어하였으니, 楚나라에 패려궂고 사나워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오직 子玉 한 사람뿐이었다.
만약 楚나라를 심하게 격노시키지 않으면 楚軍은 아마도 어려움을 알고 물러갈 것이니 晉나라와 楚나라의 雌雄(勝負)은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曹伯을 잡고, 曹나라와 衛나라의 땅을 나누어 宋나라에 준 것은 楚나라를 심하게 격노시켜 전쟁을 재촉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晉 文公의 本意가 宋나라를 구원하는 것이었다면 〈楚나라의 大夫〉 宛春이 使臣으로 와서 〈衛侯를 회복시키고 曹나라를 封해주면 우리도 宋나라의 포위를 풀겠다고 했을 때에〉 반드시 흔연히 따랐을 것이다.
어째서냐 하면, 당초에 晉軍이 曹나라와 衛나라를 친 것은 본래 宋나라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으니, 이제 楚나라가 과연 曹나라와 衛나라를 친애하기 때문에 宋나라의 포위를 풀었다면 이는 우리(晉)의 欲望에 맞춰준 것이다.
우리(晉)는 曹나라와 衛나라를 회복시켜주고 저(楚)는 宋나라의 포위를 풀어준다면 두 나라가 모두 각자의 욕망을 얻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허락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晉 文公은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宛春을 체포하여 모욕을 주고,
또 사사로이 曹나라와 衛나라의 회복을 허락하여 楚나라에 挑戰하게 하여, 오직 楚王을 격노시켜도 노하지 않고 노하고도 전쟁을 하지 않을까만을 우려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이 과연 楚나라와 전쟁해 승리하는 데 있고 宋나라를 구원하는 데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晉 文公이 宋나라를 구원한 줄만 알 뿐이니, 누가 그의 심한 狡譎이 끝내 여기에 이른 줄을 알겠는가?
90리(3舍)를 물러난 일에 이르러서는 그의 狡譎함이 더욱 심하다. 楚나라는 본래 晉나라와 경쟁할 마음이 없었는데도 文公이 온갖 방법으로 楚軍을 격노시키고 楚나라를 핍박하여 전쟁을 하게 하니,
비록 子玉이 잠시의 분노를 참지 못해 〈應戰하였으나〉 위로 楚王에서부터 아래로 士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논하면 비록 楚軍의 車馬와 士卒이 도주하더라도 오히려 楚軍을 놓칠까 우려할 것인데, 하물며 90리를 물러나 피하여, 子玉으로 하여금 이를 핑계삼아 班師(回軍)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게 하였겠는가?
文公은 본래 子玉의 행위가 이미 자기가 예상한 범위 이내에 있어서, ‘子玉은 마음속으로 蒍賈의 비방에 한을 품고서 功을 세워 그 치욕을 씻기에 급하여,
우리가 물러나 피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脆弱한 적을 만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겨, 功業을 쉽게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보다 좋은 때가 없다고 여길 것이니, 비록 우리(晉軍)가 3백 리(10舍)를 물러나도 오히려 추격할 것인데 하물며 90리겠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文公이 기꺼이 90리를 물러난 것은 楚軍이 반드시 물러가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는 전쟁을 원하면서 겉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여 이로써 恩德을 갚고,
이로써 敵을 교만하게 하고, 이로써 諸侯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이로써 三軍의 憤愾心을 진작시켰다. 온 세상이 그에게 현혹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고,
左氏처럼 밝은 지혜를 지닌 분도 오히려 “우리가 물러난 뒤에 楚軍도 돌아간다면 우리가 장차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한 晉 文公의 말을 믿고서 ≪春秋左氏傳≫에 기재하기까지 하였으니, 文公이 狡譎을 잘하였음이 진실이로다.
文公의 狡譎함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는가? 3일 동안 〈포위했으나 항복하지 않자〉 原에서 撤軍하였으니, 〈자신의 행위를〉 王軍의 행위에 비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무덤을 파헤쳐 曹나라를 위협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王軍의 행위인가?
이익이 작으면 신의를 지키고 이익이 크면
暴力을 썼으니 나는 이로써
文公이
狡譎했음을 알았다.
顚頡‧
祁瞞‧
舟之僑 등 세 사람을 처형하자 백성들이
信服하였으니,
注+〈三罪는〉 顚頡‧祁瞞‧舟之僑 등 〈세 사람을 처형한 것이다.〉 〈자신의
行刑을〉
王者의
行刑에 비교하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뒤에 魏犫를 용서하여 法을 굽혔으니 이것이 과연 王者의 行刑인가?
소원한 자에게는 法을 쓰고, 친애하는 자에게는 私情을 썼으니 나는 이로써 文公이 狡譎했음을 알았다. 통틀어 논하면 큰 狡譎은 사냥을 핑계로 周王을 부른 것이고,
작은 교휼은 兵車에 섶[柴]을 매달고 달려 〈逃走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敵에게 해를 끼친 것이다. 이런 일들이 하도 많아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요컨대 모두 夫子께서 말씀하신 한 ‘譎’字를 벗어나지 않으니, 성인의 말씀은 〈참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한다.
아! 文公의 狡譎이 성취한 것은 보잘것없는 霸業일 뿐이다. 그 군대가 한 번 출동하자 子叢이 魯君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子玉이 楚나라에서 自殺하였으며, 叔武‧歂犬‧士榮‧元咺‧子適‧子儀가 衛鄕에서 죽었다. 만약 晉軍이 출동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모두 無罪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偏禆(副將)와 輿臺(賤人)들로 기름진 草原에서 죽어 이름이 簡冊에 登載되지 않은 자들은 또 몇 백인지 몇 천인지 몇 만인지를 알 수 없으니, 잔인하도다! 文公의 不仁함이여!
비록 그러나 文公이 처음에는 남을 속이고자 하였으나 끝내는 남에게 속임을 당함을 면치 못하였다. 曹伯을 잡고 회복시키는 일과, 衛侯를 죽이고 풀어주는 일이 文公에게서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筮史에게 속임을 당해
曹伯의
封地를 돌려주고,
醫生에게 속임을 당해
衛侯를 살려주었다.
衛侯를
衛나라로 돌려보낸 것으로 말하면
魯 僖公의 뇌물에 낚여 〈
衛侯로 하여금〉 은혜를
魯나라에 돌리게 하였다.
注+僖公 28년에 晉人이 衛侯를 잡아 京師로 보냈다. 30년에 晉侯가 醫員 衍을 보내어 衛侯를 鴆殺하게 하였다. 寗兪가 醫員에게 뇌물을 주어 鴆毒을 약하게 타게 하니 죽지 않았다. 魯 僖公이 衛侯의 석방을 청하며 王과 晉侯에게 모두 열 쌍의 玉을 바치니 王이 석방을 허락하였다. 가을에 衛侯를 석방하였다.
魯나라는 諸侯이니 속임을 당해도 크게 부끄러울 게 없지만, 천한 筮史와 醫員의 狡譎이 또 文公의 윗길일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文公을 위해 매우 부끄러워하고, 또 狡譎이 과연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