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僖二十六年
이라 齊孝公伐我北鄙
어늘 할새 하다
하야 曰 寡君聞君親擧玉趾
하야 將辱於敝邑
하고 하니이다
齊侯曰 魯人恐乎
아 對曰 小人恐矣
어니와 君子則否
니이다 齊侯曰
고
對曰 恃先王之命이니이다 昔周公太公股肱周室하야 夾輔成王하니
成王勞之
하사 而賜之盟曰 世世子孫無相害也
하라 하야 니이다
桓公是以糾合諸侯
하야 而謀其不協
하고 하니 昭舊職也
니이다
其若先君何
오 君必不然
이리라 恃此以不恐
이니이다 齊
乃還
하다
傳
[左傳]僖二十六年
이라 如楚乞師
하다 而道之伐齊宋
하니 라
傳
冬
에 楚令尹子玉司馬子西帥師伐宋
하야 圍緡
하다 公以楚師伐齊
하야 取穀
하다 라
緩則信하고 急則詐하며 安則信하고 危則詐하니 習俗之情皆然也라
公卿大夫平居佚豫
면 侃侃正論
하야 視儀秦代厲
爲何等物
고라가
一朝羽檄雷動하고 邊聲四起하야 搶攘怵迫하야 不知所出에 有能拾儀秦代厲之遺策하야 以排難解紛者면 則皆欣然하야 恨聞之晩이리라
彼非遽忘前日之論也요 苟以濟一時之難이면 不暇顧一時之詐也라
故無事則爲君子하고 有事則爲小人하며 在國則爲君子하고 在敵則爲小人이라
彼其心以謂 誠信者는 國家閑暇用之하야 以厚風俗則可耳라
四郊多壘하니 此何時也오 兩陣相向하니 此何地也아 區區之小謀를 豈當施於此耶아
可以爲吾利면 雖置敵於害勿恤也요 可以爲吾福이면 雖置敵於禍勿恤也라하니
彼孰知君子之道는 行乎兵革之間에 固有兩全而不傷者耶아
聞其語오도 未必信有其人也며 聞其名이오도 未必信有其實也하니 吾請擧其人하고 指其實以曉之하노라
齊孝公親帥師伐魯北鄙에 魯使展喜犒師하고 其行也에 實受辭於柳下惠焉하니라
他人爲之辭면 必捭闔詭辨하야 期於誤齊而全魯리라 吾觀柳下惠之辭컨대 何其溫厚誠篤하야 守約而施博也오
首告之以先王之命하야 以發其尊周之心하고 繼告之以周公太公之睦하야 以發其親魯之心하고
終告之以威公之盛하야 以發其圖霸之心하니라 旣爲魯慮之하고 又爲齊慮之하야 初無一語之欺하니라
想展喜致命之際에 齊侯一聞王命之重에 必肅然而敬이요 再聞齊魯之舊에 必驩然而和요
三聞霸業之盛에 必慨然而奮하야 向來憤毒怨憾之氣가 陰銷潛鑠하야 不知所在니 是宜還轅反斾하야 不待其辭之畢也라
柳下惠之辭命에 無儀秦代厲之詐나 而有儀秦代厲之功이라 然則排難解紛者는 變詐之外에 豈無術耶아
吾今而後
에 知存魯亂吳破齊強晉霸越者
가 決不出於孔子之徒也
注+1) 吾今而後……決不出於孔子之徒也:子貢 라
雖然柳下惠之辭命則善이나 魯所以用其辭命則不善이라 齊孝公成師以出하야 旣臨魯境하니 在常情論之면 豈有聞一言而遽還者乎아
孝公度越常情하야 樂於從善하고 不憚三軍之暴露코서 徒手而還하니 是有大造於魯也라
魯曾不知報齊之施하고 反以德爲怨하야 與楚連兵而伐齊하니 是柳下惠之辭命이 適爲魯款敵之具耳라
盜跖得柳下惠之飴而爲盜跖하고 魯得柳下惠之辭而爲詐라 一物而兩用하고 一言而兩心은 隨人之所見何如耳라
傳
僖公 26년, 齊 孝公이 우리나라[魯]의 북쪽 변방을 토벌하자 僖公이 齊軍을 犒饋하기 위해 展喜를 보낼 때 展禽(柳下惠)에게 가서 가르침[命]을 받아 가지고 가게 하였다.
齊侯가 아직 魯나라의 境內로 들어오지 않았는데 展喜는 그를 찾아가서 말하였다. “우리 임금께서는 君께서 친히 귀한 발걸음을 옮겨 우리나라로 오신다는 말을 들으시고 下臣을 보내어 執事를 犒饋하게 하셨습니다.”
齊侯가 “魯人은 두려워하는가?”라고 묻자, 展喜는 “小人(下流階級)은 두려워하지만 君子(上流階級)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齊侯가 “집에는 경쇠를 달아놓은 것 같아 안이 텅 비었고, 들에는 푸성귀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하자,
展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先王의 命을 믿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周公과 太公이 周나라 王室의 手足이 되어 成王을 좌우에서 輔佐하니,
成王은 두 분의 공로를 위로하시고 두 분에게 結盟하도록 명하시며 ‘대대로 子子孫孫 서로 해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載書(盟書)가 盟府에 보관되어 太師가 맡아 관리하고 있습니다.
齊 桓公이 이 때문에 諸侯를 糾合하여 諸侯 사이의 不和를 해결하기를 도모하고, 諸侯들의 闕失을 彌縫하며 災難을 구제하였으니, 이는 옛날 太公의 職分을 밝힌 것입니다.
君께서 즉위함에 미쳐 제후들은 君께서 ‘齊 桓公의 功業을 따를 것’이라 기대하였고, 우리나라도 이 때문에 감히 城을 지키지도 군대를 모으지도 않고서 ‘어찌 대를 이어 임금이 된 지 9년 만에 先王의 命을 버리고 太公의 직분을 폐기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무슨 낯으로
先君을 대하겠는가?
君은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君子들은〉 이를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齊侯는 즉시
還軍하였다.
柳下惠가 응대할 말을 전해주어 적을 물리치다[柳下惠授辭却敵]
傳
僖公 26년, 東門襄仲과 臧文仲이 楚나라에 가서 援軍을 빌었다. 臧孫이 子玉을 만나 齊나라와 宋나라를 토벌하라고 권하였으니[道] 이는 齊나라와 宋나라가 楚나라를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傳
僖公 26년, 宋나라는 자기들이 晉侯를 잘 대우하였다 하여 楚나라를 배반하고 晉나라에 붙으니,
겨울에 楚나라 令尹 子玉과 司馬 子西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宋나라를 토벌하여 緡을 포위하였다. 僖公이 楚軍를 거느리고[以] 齊나라를 토벌하여 穀을 취하였다. 凡例에 의하면 군대를 左之右之하는 것을 ‘以’라 한다.
상황이 완화되면 信義를 강구하다가도 위급해지면 속임수를 쓰며, 안전할 때는 신의를 강구하다가도 위태로울 때는 속임수를 쓰니, 세속의 인심은 모두 그러하다.
公卿大夫가 평소 한가롭고 안락할 때에는 강직하게 正論을 펴면서 張儀‧蘇秦‧蘇代‧蘇厲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전쟁을 알리는 격문이 진동하고 변방에 戰鼓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서 어지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를 적에 張儀‧蘇秦‧蘇代‧蘇厲가 남긴 계책을 사용하여 난리를 물리치고 분란을 해결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기뻐하면서 늦게 들은 것을 한으로 여길 것이다.
이는 저 공경대부들이 갑자기 지난날의 正論을 잊은 것이 아니라 한때의 위난을 구제할 수 있다면 한때에 속임수를 쓰는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사할 때에는 君子가 되고 일이 있을 때는 小人이 되며, 자기 나라에 있으면 君子가 되고 敵國에 있으면 小人이 된다.
저 공경대부들은 마음속으로 “성실한 사람은 국가가 한가할 때에 등용하여 풍속을 두터이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의 郊野에 城壘가 많으니 이것이 어떤 때이고, 적군과 아군이 대치하고 있으니 여기가 어떤 곳인가? 그런데 하찮은 작은 꾀를 어찌 이런 때에 쓸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비록 적군이 해를 당하여도 연민하지 말고, 우리에게 복이 된다면 비록 적군이 화를 당하여도 연민하지 말라.”고 하니,
저 공경대부들이 어찌 君子의 도는 전쟁하는 사이에도 행해져서 兩軍이 모두 안전하여 상해를 입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런 말을 듣고도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 이름을 듣고도 반드시 그런 실상이 있다고 믿지 않으니, 나는 그 사람을 예로 들고 그 실상을 지적해서 깨우치고자 한다.
齊 孝公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魯나라 북쪽 변방을 침벌하자 魯 僖公은 展喜를 보내어 齊나라 군대를 犒饋하게 하고서, 갈 때에 실제로 柳下惠에게 응대할 말을 받아가지고 가게 하였다.
〈가령 柳下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응대할 말을 일러주었다면 반드시 說客의 詭辯을 늘어놓아 齊나라를 誤導하고 魯나라를 보전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내가 柳下惠의 말을 관찰하건대 어쩌면 그리도 온후하고 독실하여 지킴은 간략하나 베풂은 광대한가?
먼저 先王의 命을 고해주어 齊君으로 하여금 尊周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이어 周公과 太公이 화목했던 일을 고해주어 齊君으로 하여금 魯나라를 친애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끝으로 齊 桓公의 성대했던 업적을 고해주어 齊君으로 하여금 霸業을 도모할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미 魯나라를 위하여 염려하고 또 齊나라를 위하여 염려하여 애초에 속이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생각해보건대 展喜가 魯君의 命을 전할 때에 齊侯는 첫째 王命의 중대함을 듣자 반드시 엄숙해져서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둘째 齊나라와 魯나라 사이의 오랜 友誼를 듣자 반드시 기뻐서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일고,
셋째 桓公의 霸業의 성대함을 듣자 반드시 감격해 분발할 뜻이 일어나서 종전의 분노와 원한의 기운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은연중 사라졌을 것이니, 展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레를 돌리고 깃발을 돌려 回軍한 것이 당연하다.
柳下惠의 辭命(외교언사)에 張儀‧蘇秦‧蘇代‧蘇厲의 속임수는 없었으나 張儀‧蘇秦‧蘇代‧蘇厲의 功은 있었다. 그렇다면 난리를 물리치고 분란을 해소하는 데 속임수 말고 어찌 다른 방법이 없겠는가?
나는 이제야
魯나라를 보존하고,
吳나라를 교란시키고,
齊나라를 파멸시키고,
晉나라를 강대하게 만들고,
越나라를 패자로 만든 자가 결코
孔子의
門徒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注+子貢의 일이다. ≪史記≫에 보인다.
비록 그러나 柳下惠의 辭命은 훌륭했으나 魯나라가 그 사명을 쓴 것은 옳지 못했다. 齊 孝公이 大軍[成師]을 이끌고 나와서 이미 魯나라 국경에 이르렀으니, 常情으로 논하면 어찌 한마디 말을 듣고 대뜸 돌아갔겠는가?
孝公은 상정을 초월할 정도로 善言을 따르기 좋아하고 三軍의 暴露(野營)를 두려워하지 않고서 빈손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魯나라에 큰 은덕을 베푼 것이다.
그런데도 魯나라는 끝내 齊나라의 은혜를 갚을 줄 모르고 도리어 은덕을 원수로 여겨 楚나라와 연합하여 齊나라를 쳤으니, 이는 柳下惠의 사명이 다만 魯나라가 적의 침략을 늦추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옛날 말에 이런 말이 있다. “柳下惠는 엿을 보고서 ‘이것으로 노인을 봉양할 수 있겠다.’라고 하고, 盜跖은 엿을 보고서 ‘이것으로 자물쇠에 바르면 문을 잘 열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盜跖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魯나라를 위해서 한 말이다.
盜跖은 柳下惠의 엿을 얻고서도 盜跖이 되고, 魯나라는 柳下惠의 사명을 얻고서도 남을 속였다. 물건은 동일한데 사용을 달리하고, 말은 동일한데 마음가짐을 달리한 것은 사람들의 소견이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다.
엿과 사명에 무슨 죄가 있는가? 그렇다면 魯나라의 君臣도 일개 盜跖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