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
十八年
이라 하니 楚子賜之金
하고 旣而悔之
하야 與之盟曰
하라 하다
傳
[左傳]僖二十四年
이라 狄人歸季隗于晉
하고 하다 文公妻趙衰
하야 하다
하니 子餘辭
하다 姬曰
이릿가 必逆之
하소서 固請
한대 許之
하다
來
에 以盾爲才
라하야 固請于公
하야 以爲嫡子
하고 而使其三子下之
하고 하고 而己下之
하다
傳
[左傳]宣十一年
이라 冬
에 로 伐陳
할새 謂陳人無動
하라 라하고 遂入陳
하야 殺夏徵舒
하야 하고
하다 하다 申叔時使於齊
라가 反
하야 復命而退
하니
王使讓之曰 夏徵舒爲不道
하야 弑其君
이어늘 寡人以諸侯討而戮之
하니 이로되 女獨不慶寡人
은 何故
오
對曰 猶可辭乎
잇가 王曰 可哉
라 夏徵舒弑其君
은 其罪大矣
요 討而戮之
는 君之義也
니이다
抑人有言曰 牽牛以蹊人之田이면 而奪之牛라하니 牽牛以蹊者는 信有罪矣어니와 而奪之牛는 罰已重矣니이다
諸侯之從也는 曰討有罪也어늘 今縣陳하시니 貪其富也니이다 以討召諸侯라가 而以貪歸之면 無乃不可乎잇가
王曰 吾未之聞也
로다 反之可乎
아 對曰 可哉
니이다 니이다
乃復封陳
하고 鄕取一人焉以歸
하야 謂之夏州
라하다 故書曰 楚子入陳
하야 納公孫寧儀行父于陳
이라하니 라
傳
[左傳]成八年이라 春에 晉侯使韓穿來言汶陽之田歸之于齊하다
할새 私焉曰 大國制義
라야 以爲盟主
라 是以諸侯懷德畏討
하야 無有二心
이라
謂汶陽之田
이 敝邑之舊也
라하야 하야 使歸諸
邑
이러니 今有二命曰 歸諸齊
라
七年之中에 一與一奪하니 二三孰甚焉가 士之二三도 猶喪妃耦온 而況霸主아
詩曰
이라하니 懼晉之不遠猶而失諸侯也
라 是以敢私言之
하노라
傳
[左傳]昭七年
이라 할새 하다 하고 旣而悔之
하다
薳啓彊聞之하고 見公하니 公語之하다 拜賀한대 公曰 何賀오
對曰 齊與晉越欲此久矣
로되 러니 而傳諸君
이니이다
하야 愼守寶矣
리니 敢不賀乎
잇가 公懼
하야 反之
하다
予奪之際는 猶辭受之際也라 已受者可辭어니와 已辭者不可受요 已奪者可予어니와 已予者不可奪이라
趙姬旣爲內子에 復推以與叔隗而身下之하니 已受者可辭也요
鄭伯石爲卿旣辭하고 而復請命에 子産是以惡其爲人하니 已辭者不可受也라
楚莊王已縣陳하고 從申叔時之諫而續其封하니 已奪者可與也요
晉景公剖齊汶陽之田以畀魯하야 七年之中一予一奪하야 以納季文子之侮하니 已予者不可奪也라
君子無苟辭하니 知其不可復受也요 君子無苟與하니 知其不可復奪也라 理不當辭면 在我何愧리오
始辭而卒受之면 則愧心生焉이라 理不當予면 在彼何怨이리오 始予之而卒奪之면 則怨心生焉이라
吾尙欲釋有愧爲無愧어든 豈可反使無愧爲有愧乎며 吾尙欲平有怨爲無怨이어든 豈可反使無怨爲有怨乎아
王述之未嘗辭官
하니 不察者
는 固疑其貪也
注+王述之未嘗辭官……固疑其貪也:晉哀帝興寧二年 요 伊尹之一介不以與人
하니 不察者
는 固疑其吝也
注+伊尹之一介不以與人……固疑其吝也:라
觀其辭受未定之初면 人競自處於廉하고 而處王述以貪이로되 王述固不辨也라
及觀其終하얀 則人皆不免於愧로되 超然居衆愧之外者는 王述一人而已矣로다
觀其予奪未定之初
면 人
競自處於義
하고 而處伊尹以吝
이로되 伊尹固不辨也
라
及觀其終하얀 則人皆不免於怨이로되 泰然居衆怨之外者는 伊尹一人而已矣로다
是故로 賢王述於後者가 貪王述於先者也요 聖伊尹於後者가 吝伊尹於先者也니 聖賢之辭受予奪은 非衆人所能識也니라
物在彼則謂之辭受요 物在我則謂之予奪이니 一名而二實者也라 辭受旣不可中悔면 予奪其可中悔乎아
予奪
不可中悔
는 若土地
之博
과 爵秩
之崇
은 猶人情之所重者
일새 不能堅
하고 尙有說也
라
彼楚成之金과 楚靈之弓은 淺心狹量하야 拳拳於一物하니 何其愈下耶아
世俗猶以鑄兵之盟과 薳啓疆之說로 爲楚之得計요 抑不知楚成與鄭以金하고 而禁其鑄兵하니
則鄭忘楚之賜하고 而怨楚之猜라 是雖不奪鄭之金이나 而實奪鄭之心也라
在楚
하고 在鄭得無用之具
하야 我有所損而彼無所益
하니 計無拙於此矣
로다
魯侯懼薳啓疆之說하야 而反楚之弓者는 非果懼三隣之窺也라 懼楚靈之怒也니라
不壓以全楚之威면 則區區兒戱之說로 豈足以動魯侯耶아 以堂堂六千里之楚로 而下臨蕞爾之魯하니
令出於正이면 何索不獲이리오 乃以一弓之故로 卑體巧說하야 惟恐魯之不從하니
想啓疆之膝一屈이면 而楚國之威索然矣라 信哉라 予奪之不可輕也여
予奪不可輕은 猶衆人事耳라 聖人之視予奪에 初未嘗有輕重也라 舜視天下如棄弊屣나 豈舜眞輕天下如弊屣哉리오
孟子特爲桃應言之耳
注+舜視天下如棄弊屣……孟子特爲桃應言之耳:라 天下者
는 桃應之所重也
요 弊屣者
는 桃應之所輕也
라
以其所輕
으로 而明其所重
하야 欲使知舜之等視輕重而已
라 孟子止言舜之無所重
이나 而人遂疑舜之有所
하니 誤矣
라
吾將因孟子之言而附益之하야 曰 舜當其可與엔 視天下如弊屣하고 當其不可與엔 視敝屣如天下라하노라
傳
僖公 18년, 鄭伯이 비로소 楚나라에 朝見하니, 楚子가 鄭伯에게 銅을 주고는 곧 後悔하여, 鄭伯과 盟約하기를 “이 銅으로 兵器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鄭伯은 이 銅으로 세 개의 종을 鑄造하였다.
傳
僖公 24년, 狄人이 季隗를 晉나라로 보내면서 그 두 아들의 去就를 물었다. 文公이 딸을 趙衰에게 아내로 주어 原同‧屛括‧樓嬰을 낳았다.
趙姬가 趙衰에게 盾과 그 어미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니 子餘(趙衰의 字)가 거절하였다. 趙姬가 말하기를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다 하여 옛사람을 잊는다면 어떻게 사람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맞이해 오십시오!”라고 하면서 굳이 청하니 趙衰는 허락하였다.
〈盾과 그 어미가〉 온 뒤에 趙姬는 盾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文公에게 굳이 청하여 盾을 嫡子로 삼고서 자기의 세 아들을 그의 下位에 있게 하고, 叔隗를 內子로 삼고서 자기는 그의 下位가 되었다.
傳
宣公 11년, 겨울에 楚子가 陳나라 夏氏의 亂을 이유로 陳나라를 討伐할 적에 陳人들에게 이르기를 “驚動하지 말라. 少西氏를 치려는 것이다.” 하고서 드디어 陳나라로 쳐들어가 夏徵舒를 죽여 栗門에서 車裂하고서,
陳나라를 楚나라의 縣으로 삼았다. 이때 陳侯는 晉나라에 있었다. 申叔時(楚나라 大夫)가 齊나라에 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復命하고 물러가니,
楚王이 사람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夏徵舒가 不道하여 그 임금을 弑害하였기에 寡人이 諸侯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討伐해 죽였다. 諸侯와 縣公은 모두 寡人에게 慶賀하는데 유독 그대만이 경하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다.
申叔時가 대답하기를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라고 하니, 楚王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자 申叔時가 말하였다. “夏徵舒가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은 큰 罪이고, 그를 토벌해 죽인 것은 君王께서 正義를 行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소를 끌고 남의 農地 가운데로 지나다니면 농지의 主人은 그 소를 빼앗는다.’고 합니다. 소를 끌고 남의 농지로 지나다니는 자는 진실로 罪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소를 빼앗는 것은 罰이 너무 무겁습니다.
諸侯가 君王을 따라 〈함께 陳나라를 친 것은〉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고 하셨기 때문인데, 지금 陳나라를 우리나라의 縣으로 삼으려 하시니, 이는 陳나라의 풍부한 財物을 貪하는 것입니다.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諸侯를 불러놓고, 재물을 탐하는 것으로 결말을 낸다면 불가하지 않습니까?”
楚王이 “내 아직 이런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 땅을 도로 陳나라에〉 돌려주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하니, 申叔時가 대답하기를 “좋습니다. 우리 小人들이 이른바 ‘그 사람의 품에서 빼앗은 물건을 그 사람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楚王은 다시 陳侯를 그곳에 封해주고, 鄕에서 한 사람씩 데리고 가서 한곳을 정해 살게 하고는 돌아와 그곳을 ‘夏州’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經에 “楚子가 陳나라로 쳐들어가 公孫 寧과 儀行父를 陳나라로 들여보냈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楚子의 處事가〉 禮에 맞았음을 기록한 것이다.
晉侯가 魯나라에게 汶陽의 땅을 齊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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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公 8년, 봄에 晉侯가 韓穿을 보내 와서 汶陽의 땅을 齊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였다.
季文子가 韓穿을 餞送할 때 사사로이 말하였다. “大國의 處事가 道義에 맞아야 盟主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諸侯들이 德을 思慕하고 懲罰을 두려워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貴國은 汶陽의 땅이 본래 우리나라의 領土라 하여 齊나라에 兵力을 사용해 齊나라로 하여금 우리에게 돌려주게 하더니, 이제 다시 ‘齊나라에 돌려주라.’는 다른 命令을 내리셨습니다.
大國이 信으로써 道義를 실행하고, 道義로써 命令을 완성하기를 小國이 바라고 생각하는 바인데, 大國이 信을 알지 못하고 義를 수립하지 않는다면 사방의 諸侯가 누군들 마음이 떠나지 않겠습니까?
≪詩經≫에 ‘여자는 잘못이 없는데 사내는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하네. 사내는 準則[極]이 없어 그 행동[德]을 이랬다저랬다 하네.’라고 하였는데,
7년 안에 한 번 주었다가 한 번 빼앗으니, 이랬다저랬다 함이 이보다 심함이 어디 있습니까? 사내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오히려 아내를 잃게 되는데, 하물며 霸主이겠습니까?
霸主는 德을 행해야 하는데, 이랬다저랬다 한다면 어찌 길이 諸侯의 추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詩經≫에 ‘計謀가 遠大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크게 諫한다.’고 하였으니, 나는 晉나라의 計謀가 원대하지 못하여 諸侯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사사로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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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公 30년, 鄭나라 伯有가 죽은 뒤에 鄭伯이 太史를 보내어 伯石을 卿에 임명하자, 伯石은 사양하였다.
太史가 물러나올 때 〈伯石은 太史에게 다시 자기를 卿에〉 任命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임명하니 또 사양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한 뒤에 策命(任命狀)을 접수하고 조정에 들어와 肅拜하였다. 子産은 이로 인해 그 사람됨을 미워하였으나 〈그가 亂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恩寵을 내려〉 그를 자기의 다음 자리에 앉혔다.
楚나라가 魯나라 주었던 大屈弓을 도로 가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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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公 7년, 楚子가 新臺에서 宴會를 열어 魯 昭公을 접대할 때 수염이 긴 자에게 禮를 돕게 하였다. 〈楚子는 宴席에서〉 友好를 表하기 위해 昭公에게 大屈弓을 주고는 오래지 않아 이를 후회하였다.
薳啓彊이 楚子가 후회한다는 말을 듣고는 昭公을 찾아가 뵈니, 昭公이 大屈弓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薳啓彊이 절하고서 축하하자, 昭公이 “무엇 때문에 축하하는가?”라고 물었다.
薳啓彊이 대답하기를 “齊나라와 晉나라‧越나라가 이 물건을 갖고 싶어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우리 임금님께서는 그중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없으므로 〈주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임금님(昭公)께 전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아마도 세 이웃 나라를 대비하고 방어하여 이 寶弓을 신중히 지키실 것이니, 어찌 감히 축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昭公은 겁이 나서 그 寶弓을 되돌려주었다.
‘주고 빼앗음[予奪]’의 관계는 ‘사양하고 받음[辭受]’의 관계와 같다. 이미 받은 것은 사양할 수 있으나 이미 사양한 것은 다시 받을 수 없고, 이미 빼앗은 것은 다시 줄 수 있으나 이미 준 것은 다시 빼앗을 수 없다.
趙姬는 이미 內子(嫡妻)가 된 뒤에 다시 적처를 사양해 叔隗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그녀의 아랫사람이 되었으니 이는 이미 받은 것은 사양할 수 있기 때문이고,
鄭나라 伯石은 卿이 되는 것을 이미 사양하고서 다시 임명해주기를 청하자 子産이 이로 인해 그 사람됨을 미워했으니 이는 이미 사양한 것은 다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楚 莊王은 이미 陳나라를 楚나라의 縣으로 만들고서도 申叔時의 간언에 따라 陳侯를 그곳에 봉해주었으니 이는 이미 빼앗은 것은 도로 줄 수 있기 때문이고,
晉 景公은 齊나라 汶陽의 땅을 떼어서 魯나라에 주고서 7년 사이에 한 번은 주고 한 번은 빼앗아 季文子의 비난을 받았으니 이는 이미 준 것은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君子는 구차하게 사양함이 없으니 다시 받지 않음을 알 수 있고, 君子는 구차히 줌이 없으니 다시 빼앗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도리로 보아 사양함이 부당하다면 〈사양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처음에 사양하다가 뒤에 받는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것이다. 도리로 보아 주는 것이 부당하다면 〈주지 않더라도〉 저 상대가 무슨 원망을 하겠는가? 그러나 처음에 주었다가 뒤에 뺏는다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는 마음’을 없애고서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 되게 하고자 하면서, 어찌 도리어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부끄러움이 있는 마음’이 되게 하는가? 나는 오히려 ‘원망함이 있는 마음’을 平靜心으로 돌려 ‘원망함이 없는 마음’이 되게 하고자 하면서, 어찌 도리어 ‘원망함이 없는 마음’을 ‘원망함이 있는 마음’이 되게 하는가?
王述은 관직을 사양한 적이 없으니,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로 그가 탐욕스럽다고 의심하였다.
注+晉 哀帝 興寧 2년(364)에 揚州刺史 王述을 尙書令으로 삼았다. 王述은 官職에 제수될 때마다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짓을 하지 않고, 반드시 받지 말아야 할 경우에만 사양하였다. 王述이 尙書令이 되자 아들 王坦之가 王述에게 아뢰었다. “故事에 비춰보건대 마땅히 사양하여야 합니다.” 王述이 말하였다. “너는 내가 이 벼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王坦之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다만 사양하는 것이 본래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王述이 말하였다. “이미 감당할 수 있다고 했으니 어찌 다시 사양하겠느냐. 사람들은 네가 나보다 낫다고 말하나 너는 참으로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伊尹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니,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로 그가 인색하다고 의심하였다.
注+萬章이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伊尹이 고기를 썰어 요리하는 것으로 湯王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다.’ 하니,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孟子가 말하였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伊尹이 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堯舜의 道를 좋아하여, 正義가 아니고 正道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4천 필이 매어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正義가 아니고 正道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며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伊尹
사양할 것인지 받을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초기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다투어 자신은 청렴한 사람으로 자처하고 王述은 탐욕스런 사람으로 처우하지만, 그래도 王述은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 後日을 살펴봄에 미쳐서는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함을 면치 못하나,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밖에서 초연히 있을 수 있는 이는 王述 한 사람뿐이다.
줄 것인지 빼앗을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초기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모두 다투어 자신은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하고 伊尹은 인색한 사람으로 처우하지만, 그래도 伊尹은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 後日을 살펴봄에 미쳐서는 사람들은 모두 원망을 면치 못하나, 원망하는 사람들 밖에서 태연히 지낼 수 있는 이는 伊尹 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뒤에 王述을 현인으로 여긴 자가 앞에서 王述을 탐욕스런 사람으로 여긴 자이고, 뒤에 伊尹을 성인으로 여긴 자가 앞에서 伊尹을 인색한 사람으로 여긴 자이니, 聖賢의 ‘주고 빼앗음[予奪]’과 ‘사양하고 받음[辭受]’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사물이 상대에게 있는 경우에는 이를 ‘辭受’라 하고, 사물이 나에게 있는 경우에는 이를 ‘予奪’이라 하니, 명칭은 하나이나 내용은 둘이다. 사양하거나 받는 일을 이미 중도에 후회할 수 없다면 주거나 빼앗는 일을 어찌 중도에 후회할 수 있겠는가?
주거나 빼앗는 일은 이미 중도에 후회할 수 없지만, 광대한 토지와 崇高한 官爵과 같은 것은 그래도 사람들이 중대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결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회하는〉 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저 銅을 준 楚 成王이나 활을 준 楚 靈王은 마음이 옅고 도량이 좁아 〈광대한 토지나 숭고한 관작도 아닌〉 한 물건에 연연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더욱 낮았는가?
세속에서는 오히려 병기를 주조하지 말라는 맹약과 薳啓疆이 유세한 말을 楚나라의 좋은 계책으로만 여겼고, 楚 成王이 鄭나라에 銅을 주고서 兵器를 주조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니
곧 鄭나라가 楚나라의 恩賜를 잊고 楚나라의 시기를 원망하리라는 것을 모른 것이다. 이는 비록 鄭나라에 주었던 銅을 빼앗지는 않았으나 실제로는 鄭나라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楚나라는 유용한 보물을 잃고 鄭나라는 쓸모없는 기물을 얻어서, 우리도 손해이고 저들도 이익이 없으니 계책이 이보다 더 졸렬할 수 없다.
魯侯가 薳啓疆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楚나라에 활을 돌려준 것은 과연 세 이웃나라가 기회를 엿볼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楚 靈王이 노할까를 두려워한 것이다.
楚나라 전체의 위세로 압박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장난 같은 하찮은 말로 어찌 魯侯를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6천 리 땅을 소유한 당당한 楚나라로서 작은 魯나라를 아래로 굽어보고 있으니,
명령을 내는 것이 정당하였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곧 한 자루의 활 때문에 몸을 낮추고 말을 교묘하게 꾸며 오직 魯나라가 따르지 않을까만 걱정하였으니,
아마도 薳啓疆이 무릎을 한 번 굽히자 楚나라가 위세를 완전히 잃게 된 것이다. 진실이로다. 주고 빼앗음을 가벼이 할 수 없음이여!
주고 빼앗음을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보통 사람의 일일 뿐이다. 聖人은 주고 빼앗음에 대하여 애초에 輕重의 차이를 둔 적이 없다. 〈孟子는〉 “舜임금은 天下보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다.”고 하였으나, 어찌 순임금이 참으로 천하를 헌신짝처럼 가볍게 여겼겠는가?
孟子는 다만
桃應을 위해 이렇게 말한 것뿐이다.
注+≪孟子≫에 보인다. ‘
天下’는
桃應이 중하게 여긴 것이고 ‘헌신짝’은
桃應이 가벼이 여긴 것이다.
그가 가벼이 여기는 것을 가지고 그가 중하게 여기는 것을 밝혀서 그로 하여금 순임금은 輕重을 똑같이 보았음을 알게 하고자 한 것뿐이다. 맹자는 다만 순임금이 특별히 重하게 여긴 것이 없음을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마침내 순임금이 특별히 輕하게 여긴 것이 있다고 의심하였으니 잘못이다.
나는 孟子의 말로 인하여 아래와 같이 보충하고자 한다. “舜임금은 주어야 할 때를 당해서는 천하를 헌신짝처럼 보았고, 주어서는 안 될 때를 당해서는 헌신짝을 천하처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