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東萊博議(3)

동래박의(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동래박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1-04-01 楚子賜鄭伯金
[左傳]十八年이라 하니 楚子賜之金하고 旣而悔之하야 與之盟曰 하라 하다
11-04-02 趙姬請逆叔隗
[左傳]僖二十四年이라 狄人歸季隗于晉하고 하다 文公妻趙衰하야 하다
하니 子餘辭하다 姬曰 이릿가 必逆之하소서 固請한대 許之하다
以盾爲才라하야 固請于公하야 以爲嫡子하고 而使其三子下之하고 하고 而己下之하다
11-04-03 楚子討陳
[左傳]宣十一年이라 伐陳할새 謂陳人無動하라 라하고 遂入陳하야 殺夏徵舒하야 하고
하다 하다 申叔時使於齊라가하야 復命而退하니
王使讓之曰 夏徵舒爲不道하야 弑其君이어늘 寡人以諸侯討而戮之하니 이로되 女獨不慶寡人 何故
對曰 猶可辭乎잇가 王曰 可哉 夏徵舒弑其君 其罪大矣 討而戮之 君之義也니이다
抑人有言曰 牽牛以蹊人之田이면 而奪之牛라하니 牽牛以蹊者 信有罪矣어니와 而奪之牛 罰已重矣니이다
諸侯之從也 曰討有罪也어늘 今縣陳하시니 貪其富也니이다 以討召諸侯라가 而以貪歸之 無乃不可乎잇가
王曰 吾未之聞也로다 反之可乎 對曰 可哉니이다 니이다
乃復封陳하고 鄕取一人焉以歸하야 謂之夏州라하다 故書曰 楚子入陳하야 納公孫寧儀行父于陳이라하니
11-04-04 晉使魯歸汶陽田
[左傳]成八年이라 晉侯使韓穿來言汶陽之田歸之于齊하다
할새 私焉曰 大國制義라야 以爲盟主 是以諸侯懷德畏討하야 無有二心이라
謂汶陽之田 敝邑之舊也라하야 하야 使歸諸이러니 今有二命曰 歸諸齊
七年之中 一與一奪하니 二三孰甚焉 士之二三 猶喪妃耦 而況霸主
霸主將德是어늘 而二三之 其何以長有諸侯乎
詩曰 이라하니 懼晉之不遠猶而失諸侯也 是以敢私言之하노라
11-04-05 鄭伯石辭卿
[左傳]襄三十年이라 鄭伯有旣死 하다
이어늘 復命之한대 又辭하다
如是者三 乃受策入拜하다 로되 하다
11-04-06 楚復取魯大屈
[左傳]昭七年이라 할새 하다 하고 旣而悔之하다
薳啓彊聞之하고 見公하니 公語之하다 拜賀한대 公曰 何賀
對曰 齊與晉越欲此久矣로되 러니 而傳諸君이니이다
하야 愼守寶矣리니 敢不賀乎잇가 公懼하야 反之하다
予奪之際 猶辭受之際也 已受者可辭어니와 已辭者不可受 已奪者可予어니와 已予者不可奪이라
趙姬旣爲內子 復推以與叔隗而身下之하니 已受者可辭也
鄭伯石爲卿旣辭하고 而復請命 子産是以惡其爲人하니 已辭者不可受也
楚莊王已縣陳하고 從申叔時之諫而續其封하니 已奪者可與也
晉景公剖齊汶陽之田以畀魯하야 七年之中一予一奪하야 以納季文子之侮하니 已予者不可奪也
君子無苟辭하니 知其不可復受也 君子無苟與하니 知其不可復奪也 理不當辭 在我何愧리오
始辭而卒受之 則愧心生焉이라 理不當予 在彼何怨이리오 始予之而卒奪之 則怨心生焉이라
吾尙欲釋有愧爲無愧어든 豈可反使無愧爲有愧乎 吾尙欲平有怨爲無怨이어든 豈可反使無怨爲有怨乎
觀其辭受未定之初 人競自處於廉하고 而處王述以貪이로되 王述固不辨也
及觀其終하얀 則人皆不免於愧로되 超然居衆愧之外者 王述一人而已矣로다
觀其予奪未定之初競自處於義하고 而處伊尹以吝이로되 伊尹固不辨也
及觀其終하얀 則人皆不免於怨이로되 泰然居衆怨之外者 伊尹一人而已矣로다
是故 賢王述於後者 貪王述於先者也 聖伊尹於後者 吝伊尹於先者也 聖賢之辭受予奪 非衆人所能識也니라
物在彼則謂之辭受 物在我則謂之予奪이니 一名而二實者也 辭受旣不可中悔 予奪其可中悔乎
予奪不可中悔 若土地之博 爵秩之崇 猶人情之所重者일새 不能堅하고 尙有說也
彼楚成之金 楚靈之弓 淺心狹量하야 拳拳於一物하니 何其愈下耶
世俗猶以鑄兵之盟 薳啓疆之說 爲楚之得計 抑不知楚成與鄭以金하고 而禁其鑄兵하니
則鄭忘楚之賜하고 而怨楚之猜 是雖不奪鄭之金이나 而實奪鄭之心也
在楚하고 在鄭得無用之具하야 我有所損而彼無所益하니 計無拙於此矣로다
魯侯懼薳啓疆之說하야 而反楚之弓者 非果懼三隣之窺也 懼楚靈之怒也니라
不壓以全楚之威 則區區兒戱之說 豈足以動魯侯耶 以堂堂六千里之楚 而下臨蕞爾之魯하니
令出於正이면 何索不獲이리오 乃以一弓之故 卑體巧說하야 惟恐魯之不從하니
想啓疆之膝一屈이면 而楚國之威索然矣 信哉 予奪之不可輕也
予奪不可輕 猶衆人事耳 聖人之視予奪 初未嘗有輕重也 舜視天下如棄弊屣 豈舜眞輕天下如弊屣哉리오
孟子特爲桃應言之耳注+舜視天下如棄弊屣……孟子特爲桃應言之耳: 天下者 桃應之所重也 弊屣者 桃應之所輕也
以其所輕으로 而明其所重하야 欲使知舜之等視輕重而已 孟子止言舜之無所重이나 而人遂疑舜之有所하니 誤矣
吾將因孟子之言而附益之하야 曰 舜當其可與 視天下如弊屣하고 當其不可與 視敝屣如天下라하노라


楚子鄭伯에게 을 하사하다
僖公 18년, 鄭伯이 비로소 나라에 朝見하니, 楚子鄭伯에게 을 주고는 곧 後悔하여, 鄭伯盟約하기를 “이 으로 兵器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鄭伯은 이 으로 세 개의 종을 鑄造하였다.
趙姬叔隗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다
僖公 24년, 狄人季隗나라로 보내면서 그 두 아들의 去就를 물었다. 文公이 딸을 趙衰에게 아내로 주어 原同屛括樓嬰을 낳았다.
趙姬趙衰에게 과 그 어미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니 子餘(趙衰)가 거절하였다. 趙姬가 말하기를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다 하여 옛사람을 잊는다면 어떻게 사람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맞이해 오십시오!”라고 하면서 굳이 청하니 趙衰는 허락하였다.
과 그 어미가〉 온 뒤에 趙姬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文公에게 굳이 청하여 嫡子로 삼고서 자기의 세 아들을 그의 下位에 있게 하고, 叔隗內子로 삼고서 자기는 그의 下位가 되었다.
楚子나라를 토벌하다
宣公 11년, 겨울에 楚子나라 夏氏을 이유로 나라를 討伐할 적에 陳人들에게 이르기를 “驚動하지 말라. 少西氏를 치려는 것이다.” 하고서 드디어 나라로 쳐들어가 夏徵舒를 죽여 栗門에서 車裂하고서,
나라를 나라의 으로 삼았다. 이때 陳侯나라에 있었다. 申叔時(나라 大夫)가 나라에 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復命하고 물러가니,
楚王이 사람을 보내 꾸짖어 말하기를 “夏徵舒不道하여 그 임금을 弑害하였기에 寡人諸侯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討伐해 죽였다. 諸侯縣公은 모두 寡人에게 慶賀하는데 유독 그대만이 경하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다.
申叔時가 대답하기를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라고 하니, 楚王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자 申叔時가 말하였다. “夏徵舒가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은 큰 이고, 그를 토벌해 죽인 것은 君王께서 正義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소를 끌고 남의 農地 가운데로 지나다니면 농지의 主人은 그 소를 빼앗는다.’고 합니다. 소를 끌고 남의 농지로 지나다니는 자는 진실로 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소를 빼앗는 것은 이 너무 무겁습니다.
諸侯君王을 따라 〈함께 나라를 친 것은〉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고 하셨기 때문인데, 지금 나라를 우리나라의 으로 삼으려 하시니, 이는 나라의 풍부한 財物하는 것입니다. 〈죄 있는 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諸侯를 불러놓고, 재물을 탐하는 것으로 결말을 낸다면 불가하지 않습니까?”
楚王이 “내 아직 이런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 땅을 도로 나라에〉 돌려주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하니, 申叔時가 대답하기를 “좋습니다. 우리 小人들이 이른바 ‘그 사람의 품에서 빼앗은 물건을 그 사람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楚王은 다시 陳侯를 그곳에 해주고, 에서 한 사람씩 데리고 가서 한곳을 정해 살게 하고는 돌아와 그곳을 ‘夏州’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에 “楚子나라로 쳐들어가 公孫 儀行父나라로 들여보냈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楚子處事가〉 에 맞았음을 기록한 것이다.
晉侯나라에게 汶陽의 땅을 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다
成公 8년, 봄에 晉侯韓穿을 보내 와서 汶陽의 땅을 나라에 돌려주라고 말하였다.
季文子韓穿餞送할 때 사사로이 말하였다. “大國處事道義에 맞아야 盟主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諸侯들이 思慕하고 懲罰을 두려워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貴國汶陽의 땅이 본래 우리나라의 領土라 하여 나라에 兵力을 사용해 나라로 하여금 우리에게 돌려주게 하더니, 이제 다시 ‘나라에 돌려주라.’는 다른 命令을 내리셨습니다.
大國으로써 道義를 실행하고, 道義로써 命令을 완성하기를 小國이 바라고 생각하는 바인데, 大國을 알지 못하고 를 수립하지 않는다면 사방의 諸侯가 누군들 마음이 떠나지 않겠습니까?
詩經≫에 ‘여자는 잘못이 없는데 사내는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하네. 사내는 準則[]이 없어 그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하네.’라고 하였는데,
7년 안에 한 번 주었다가 한 번 빼앗으니, 이랬다저랬다 함이 이보다 심함이 어디 있습니까? 사내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오히려 아내를 잃게 되는데, 하물며 霸主이겠습니까?
霸主을 행해야 하는데, 이랬다저랬다 한다면 어찌 길이 諸侯의 추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詩經≫에 ‘計謀遠大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크게 한다.’고 하였으니, 나는 나라의 計謀가 원대하지 못하여 諸侯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사사로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라 伯石을 사양하다
襄公 30년, 나라 伯有가 죽은 뒤에 鄭伯太史를 보내어 伯石에 임명하자, 伯石은 사양하였다.
太史가 물러나올 때 〈伯石太史에게 다시 자기를 에〉 任命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므로 다시 임명하니 또 사양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한 뒤에 策命(任命狀)을 접수하고 조정에 들어와 肅拜하였다. 子産은 이로 인해 그 사람됨을 미워하였으나 〈그가 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恩寵을 내려〉 그를 자기의 다음 자리에 앉혔다.
나라가 나라 주었던 大屈弓을 도로 가져가다
昭公 7년, 楚子新臺에서 宴會를 열어 昭公을 접대할 때 수염이 긴 자에게 를 돕게 하였다. 〈楚子宴席에서〉 友好하기 위해 昭公에게 大屈弓을 주고는 오래지 않아 이를 후회하였다.
薳啓彊楚子가 후회한다는 말을 듣고는 昭公을 찾아가 뵈니, 昭公大屈弓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薳啓彊이 절하고서 축하하자, 昭公이 “무엇 때문에 축하하는가?”라고 물었다.
薳啓彊이 대답하기를 “나라와 나라‧나라가 이 물건을 갖고 싶어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우리 임금님께서는 그중 한 사람에게만 줄 수 없으므로 〈주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임금님(昭公)께 전하셨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아마도 세 이웃 나라를 대비하고 방어하여 이 寶弓을 신중히 지키실 것이니, 어찌 감히 축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昭公은 겁이 나서 그 寶弓을 되돌려주었다.
‘주고 빼앗음[予奪]’의 관계는 ‘사양하고 받음[辭受]’의 관계와 같다. 이미 받은 것은 사양할 수 있으나 이미 사양한 것은 다시 받을 수 없고, 이미 빼앗은 것은 다시 줄 수 있으나 이미 준 것은 다시 빼앗을 수 없다.
趙姬는 이미 內子(嫡妻)가 된 뒤에 다시 적처를 사양해 叔隗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은 그녀의 아랫사람이 되었으니 이는 이미 받은 것은 사양할 수 있기 때문이고,
나라 伯石이 되는 것을 이미 사양하고서 다시 임명해주기를 청하자 子産이 이로 인해 그 사람됨을 미워했으니 이는 이미 사양한 것은 다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莊王은 이미 나라를 나라의 으로 만들고서도 申叔時의 간언에 따라 陳侯를 그곳에 봉해주었으니 이는 이미 빼앗은 것은 도로 줄 수 있기 때문이고,
景公나라 汶陽의 땅을 떼어서 나라에 주고서 7년 사이에 한 번은 주고 한 번은 빼앗아 季文子의 비난을 받았으니 이는 이미 준 것은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君子는 구차하게 사양함이 없으니 다시 받지 않음을 알 수 있고, 君子는 구차히 줌이 없으니 다시 빼앗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도리로 보아 사양함이 부당하다면 〈사양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처음에 사양하다가 뒤에 받는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것이다. 도리로 보아 주는 것이 부당하다면 〈주지 않더라도〉 저 상대가 무슨 원망을 하겠는가? 그러나 처음에 주었다가 뒤에 뺏는다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는 마음’을 없애고서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 되게 하고자 하면서, 어찌 도리어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부끄러움이 있는 마음’이 되게 하는가? 나는 오히려 ‘원망함이 있는 마음’을 平靜心으로 돌려 ‘원망함이 없는 마음’이 되게 하고자 하면서, 어찌 도리어 ‘원망함이 없는 마음’을 ‘원망함이 있는 마음’이 되게 하는가?
王述은 관직을 사양한 적이 없으니,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로 그가 탐욕스럽다고 의심하였다.注+ 哀帝 興寧 2년(364)에 揚州刺史 王述尙書令으로 삼았다. 王述官職에 제수될 때마다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짓을 하지 않고, 반드시 받지 말아야 할 경우에만 사양하였다. 王述尙書令이 되자 아들 王坦之王述에게 아뢰었다. “故事에 비춰보건대 마땅히 사양하여야 합니다.” 王述이 말하였다. “너는 내가 이 벼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王坦之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다만 사양하는 것이 본래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王述이 말하였다. “이미 감당할 수 있다고 했으니 어찌 다시 사양하겠느냐. 사람들은 네가 나보다 낫다고 말하나 너는 참으로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伊尹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니,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로 그가 인색하다고 의심하였다.注+萬章이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伊尹이 고기를 썰어 요리하는 것으로 湯王에게 등용되기를 요구하였다.’ 하니,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孟子가 말하였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伊尹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면서 堯舜를 좋아하여, 正義가 아니고 正道가 아니면, 천하로써 녹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4천 필이 매어 있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正義가 아니고 正道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으며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伊尹伊尹
사양할 것인지 받을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초기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다투어 자신은 청렴한 사람으로 자처하고 王述은 탐욕스런 사람으로 처우하지만, 그래도 王述은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 後日을 살펴봄에 미쳐서는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함을 면치 못하나,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밖에서 초연히 있을 수 있는 이는 王述 한 사람뿐이다.
줄 것인지 빼앗을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초기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모두 다투어 자신은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하고 伊尹은 인색한 사람으로 처우하지만, 그래도 伊尹은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 後日을 살펴봄에 미쳐서는 사람들은 모두 원망을 면치 못하나, 원망하는 사람들 밖에서 태연히 지낼 수 있는 이는 伊尹 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뒤에 王述을 현인으로 여긴 자가 앞에서 王述을 탐욕스런 사람으로 여긴 자이고, 뒤에 伊尹을 성인으로 여긴 자가 앞에서 伊尹을 인색한 사람으로 여긴 자이니, 聖賢의 ‘주고 빼앗음[予奪]’과 ‘사양하고 받음[辭受]’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사물이 상대에게 있는 경우에는 이를 ‘辭受’라 하고, 사물이 나에게 있는 경우에는 이를 ‘予奪’이라 하니, 명칭은 하나이나 내용은 둘이다. 사양하거나 받는 일을 이미 중도에 후회할 수 없다면 주거나 빼앗는 일을 어찌 중도에 후회할 수 있겠는가?
주거나 빼앗는 일은 이미 중도에 후회할 수 없지만, 광대한 토지와 崇高官爵과 같은 것은 그래도 사람들이 중대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결단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회하는〉 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저 을 준 成王이나 활을 준 靈王은 마음이 옅고 도량이 좁아 〈광대한 토지나 숭고한 관작도 아닌〉 한 물건에 연연하였으니 어쩌면 그리도 더욱 낮았는가?
세속에서는 오히려 병기를 주조하지 말라는 맹약과 薳啓疆이 유세한 말을 나라의 좋은 계책으로만 여겼고, 成王나라에 을 주고서 兵器를 주조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니
나라가 나라의 恩賜를 잊고 나라의 시기를 원망하리라는 것을 모른 것이다. 이는 비록 나라에 주었던 을 빼앗지는 않았으나 실제로는 나라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나라는 유용한 보물을 잃고 나라는 쓸모없는 기물을 얻어서, 우리도 손해이고 저들도 이익이 없으니 계책이 이보다 더 졸렬할 수 없다.
魯侯薳啓疆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나라에 활을 돌려준 것은 과연 세 이웃나라가 기회를 엿볼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靈王이 노할까를 두려워한 것이다.
나라 전체의 위세로 압박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장난 같은 하찮은 말로 어찌 魯侯를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6천 리 땅을 소유한 당당한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아래로 굽어보고 있으니,
명령을 내는 것이 정당하였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곧 한 자루의 활 때문에 몸을 낮추고 말을 교묘하게 꾸며 오직 나라가 따르지 않을까만 걱정하였으니,
아마도 薳啓疆이 무릎을 한 번 굽히자 나라가 위세를 완전히 잃게 된 것이다. 진실이로다. 주고 빼앗음을 가벼이 할 수 없음이여!
주고 빼앗음을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보통 사람의 일일 뿐이다. 聖人은 주고 빼앗음에 대하여 애초에 輕重의 차이를 둔 적이 없다. 〈孟子는〉 “임금은 天下보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다.”고 하였으나, 어찌 순임금이 참으로 천하를 헌신짝처럼 가볍게 여겼겠는가?
孟子는 다만 桃應을 위해 이렇게 말한 것뿐이다.注+孟子≫에 보인다.天下’는 桃應이 중하게 여긴 것이고 ‘헌신짝’은 桃應이 가벼이 여긴 것이다.
그가 가벼이 여기는 것을 가지고 그가 중하게 여기는 것을 밝혀서 그로 하여금 순임금은 輕重을 똑같이 보았음을 알게 하고자 한 것뿐이다. 맹자는 다만 순임금이 특별히 하게 여긴 것이 없음을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마침내 순임금이 특별히 하게 여긴 것이 있다고 의심하였으니 잘못이다.
나는 孟子의 말로 인하여 아래와 같이 보충하고자 한다. “임금은 주어야 할 때를 당해서는 천하를 헌신짝처럼 보았고, 주어서는 안 될 때를 당해서는 헌신짝을 천하처럼 보았다.”


역주
역주1 (伯)[僖] : 저본에는 ‘伯’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僖’로 바로잡았다.
역주2 鄭伯始朝于楚 : 中國에 霸者가 없었기 때문이다.〈杜注〉
역주3 無以鑄兵 : 楚의 銅으로 兵器를 만들면 銳利하기 때문이다.〈杜注〉
역주4 故以鑄(之)[三]鐘 : 옛날에는 銅으로 兵器를 만들었다. 傳의 말은 楚나라가 霸者로서의 遠大한 策略이 없다는 뜻이다.〈杜注〉 ‘三’은 저본에는 ‘之’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5 而請其二子 : 두 아들은 伯鯈와 叔劉이다. 보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下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附注〉
역주6 生原同屛括樓嬰 : 原‧屛‧樓는 세 아들의 邑이다.
역주7 趙姬請逆盾與其母 : 趙姬는 文公의 딸이자, 趙衰의 아내이다. 趙衰가 狄에 있을 때 叔隗를 아내로 맞아 盾을 낳았으므로 이제 그들을 맞이해 晉나라로 데려오기를 청한 것이다.〈附注〉
역주8 得寵而忘舊 何以使人 :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다 하여 옛사람을 잊는다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悅服시킬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杜注〉
역주9 以叔隗爲內子 : 卿의 嫡妻를 ‘內子’라 한다.
역주10 楚子爲陳夏氏亂故 : 宣公 10년에 夏徵舒가 그 임금을 弑害하였다.〈杜注〉
역주11 將討於少西氏 : 少西는 徵舒의 祖父 子夏의 이름이다.〈杜注〉
역주12 轘諸栗門 : 轘은 車裂하는 것인데, 車裂은 사람의 肢體를 두 수레의 중간에 매어놓고 수레를 끌어 찢어 죽이는 것이다. 栗門은 陳나라의 城門이다.
역주13 因縣陳 : 陳나라를 滅하고서 楚나라의 郡縣으로 삼은 것이다.〈杜注〉
역주14 陳侯在晉 : 陳侯는 陳 靈公의 아들 成公 午이다.〈杜注〉
역주15 諸侯縣公皆慶寡人 : 楚나라는 縣大夫를 모두 公으로 僭稱하였다.〈杜注〉
역주16 [曰] : 저본에는 ‘曰’이 없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吾儕小人所謂取諸懷而與之也 : 叔時가 小人은 생각이 얕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그 사람의 품에서 빼앗은 물건을 그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돌려주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18 書有禮也 : 陳나라를 縣으로 삼고자 한 楚王의 本意는 묻어두고 오로지 亂賊을 討伐하고 陳나라를 보존시킨 것으로 글을 만든 것은 楚王의 처사가 禮에 맞은 것을 훌륭하게 여겨서이다.〈杜注〉
역주19 季文子餞之 : 餞은 길을 떠나는 사람을 보내며 술을 먹이는 것이다.〈杜注〉
역주20 而用師於齊 : 用師는 鞍의 戰爭을 이른다.〈杜注〉
역주21 (數)[敝] : 저본에는 ‘數’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敝’로 바로잡았다.
역주22 信以行義 義以成命 : 信義를 지킴으로써 處事가 道義에 맞고, 처사가 도의에 맞음으로써 命令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주23 信不可知 義無所立 : 주었다가 빼앗았다가 하여 信義를 모르고, 魯나라에서 빼앗아 齊나라에 주어 義를 수립한 바가 없다는 말이다.〈附注〉
역주24 四方諸侯 其誰不解體 : 諸侯들이 다시는 晉나라를 恭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杜注〉
역주25 女也不爽……二三其德 : 爽은 허물이고, 極은 中正이다. 詩는 ≪詩經≫ 〈衛風 氓篇〉이다. 婦人이 남편의 행위가 한결같지 않은 것을 원망한 詩인데, 魯나라가 晉나라를 섬김에 女子가 남편을 섬기듯이 감히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데도 晉나라는 不正[罔極]한 마음을 가지고서 도리어 그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26 [以]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以’를 보충하였다. 以는 使用하는 것이다.〈杜注〉
역주27 猶之未遠 是用大(諫)[簡] : 猶는 圖謀이고, 簡은 諫함이다. 詩는 ≪詩經≫ 〈大雅 板篇〉이다. 王者가 일을 圖謀하는 것이 遠大하지 못하기 때문에 大道로써 諫한다는 말이다.〈杜注〉 ‘簡’은 저본에는 ‘諫’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28 行父 : 季文子의 이름이다.
역주29 使太史命伯石爲卿 辭 : 伯石을 策命(任命)하여 卿으로 삼으니 伯石이 사양한 것이다.〈附注〉
역주30 太史退 則請命焉 : 太史에게 다시 자기를 卿에 임명해주기를 청한 것이다.〈杜注〉
역주31 子産由是以惡(오)其爲人也 : 사실은 卿의 지위를 얻고자 하면서 거짓으로 세 차례 사양하였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다.
역주32 使次己位 : 그가 亂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에게 恩寵을 내린 것이다.〈杜注〉
역주33 楚子享公于新臺 : 新臺는 章華臺이다. 잔치를 열어 章華臺의 완성을 알리는 落成式을 거행한 것이다.〈附注〉
역주34 使長鬛(렵)者相 : 鬣은 鬚(수염)이다. 魯侯에게 과시하고자 해서이다. 吳나라와 楚나라의 사람들은 수염이 적기 때문에 수염이 긴 자를 뽑아 禮를 보좌하게 한 것이다.(≪春秋左傳正義≫)
역주35 好以大屈 : 宴席에서 友好를 表하기 위해 준 것이다. 大屈은 弓名이다.〈杜注〉 大屈(地名)에서 생산한다.〈附注〉
역주36 寡君無適與也 : 누구를 오로지 重視하여 주어야 할지 몰랐다는 말이다. 適은 專主로 오로지 依存하거나 중시하는 것이다.
역주37 君其備禦三隣 : 齊나라‧晉나라‧越나라가 魯나라를 侵伐하여 大屈을 탈취하려 할 것이라는 말이다.〈杜注〉
역주38 以揚州刺史王述爲尙書令……定不及也 : ≪資治通鑑≫ 〈晉紀〉에 보인다.
역주39 萬章問曰……一介不以取諸人 : ≪孟子≫ 〈萬章 上〉에 보인다.
역주40 : 三民書局本에는 ‘皆’가 없다.
역주41 : 三民書局本에는 ‘旣’로 되어 있다.
역주42 廣輪 : 토지의 면적이 넓음을 이른다. 동서를 ‘廣’이라 하고, 남북을 ‘輪’이라 한다.
역주43 印韍 : 인끈[印綬]과 같은 말이다. 인끈이란, 벼슬아치가 兵符를 차던 긴 끈을 이른다.
역주44 (次)[決] : 저본에는 ‘次’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決’로 바로잡았다.
역주45 (未有寳之用)[失有用之寶] : 저본에는 ‘未有寳之用’으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失有用之寶’로 바로잡았다.
역주46 [역주]見孟子 : ≪孟子≫ 〈盡心 上〉에 보이며, 전문은 아래와 같다. “桃應이 물었다. ‘舜임금이 天子이시고, 皐陶가 법관인데, 瞽瞍가 사람을 죽였다면 〈皐陶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孟子가 말하였다. ‘法을 집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舜임금은 금지하지 않습니까?’ ‘舜임금이 어떻게 금지할 수 있겠는가. 전수받은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舜임금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舜임금은 천하를 버림을 보되 마치 헌신짝을 버리듯이 하여, 〈고수를〉 몰래 업고 도망하여 바닷가를 따라 거처하면서 종신토록 흔쾌히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으셨을 것이다.’[桃應問曰 舜爲天子 皐陶爲士 瞽瞍殺人 則如之何 孟子曰 執之而已矣 然則舜不禁與 曰 夫舜惡得而禁之 夫有所受之也 然則舜如之何 曰 舜視棄天下猶棄敝蹝也 竊負而逃 遵海濱而處 終身訢然 樂而忘天下]”
역주47 (重)[輕] : 저본에는 ‘重’으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輕’으로 바로잡았다.

동래박의(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