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遂惡之하고 愛共叔段하야 欲立之하야 亟請於武公한대 公弗許하다
及莊公卽位
하야 한대 公曰 制
는 巖邑也
라 叔死焉
하니 他邑
이면 唯命
하리이다
先王之制에 大都不過參國之一이요 中五之一이요 小九之一이어늘 今京不度하니 非制也라
君將不堪이리이다 〈公曰 姜氏欲之어니 焉辟害리오
對曰 姜氏何厭之有
릿까〉 不如早爲之所
하야 無
滋蔓
이니이다
蔓이면 草도 猶不可除온 況君之寵弟乎잇가 公曰 多行不義면 必自斃리니 子姑待之하라
旣而太叔
이 한대 公子呂曰 國不堪貳
니 君將若之何
오
欲與太叔인댄 臣請事之어니와 若弗與인댄 則請除之하야 無生民心하소서 公曰 無庸이라
太叔又收貳以爲己邑하고 至于廩延하니 子封曰 可矣니이다
厚將得衆이리이다 公曰 不義不暱하니 厚將崩하리라
太叔完聚하고 繕甲兵하고 具卒乘하야 將襲鄭하니 夫人將啓之하다
公聞其期하고 曰 可矣라하고 命子封帥車二百乘以伐京하다
書曰 鄭伯克段于鄢이라하니 段不弟라 故不言弟하고 如二君이라 故曰克이라하다
傳
은공隱公 원년元年, 정鄭 무공武公이 신국申國에서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그가 무강武姜이다.
장공이 오생寤生하여 강씨姜氏를 놀라게 하였다.
강씨가 마침내 그를 미워하고, 공숙단을 사랑하여 그를 세우려고 자주 무공에게 청하였으나 무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장공이 즉위함에 미쳐 무강이 공숙단을 위해 제읍制邑을 청하자, 장공이 말하기를 “제읍은 지세地勢가 험한 고을이어서 괵숙虢叔이 그곳에서 죽었으니, 다른 고을을 청하신다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성京城을 청하니 그를 그곳에 살게 하고는 그를 경성태숙京城太叔이라고 하였다.
채중祭仲이 말하기를 “국도國都 이외의 도성都城이 백치百雉를 넘는 것은 국가의 해害가 됩니다.
선왕의 제도에 대도大都의 성은 국도의 3분의 1, 중도中都는 5분의 1, 소도小都는 9분의 1을 넘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경성京城은 법도에 맞지 않으니 선왕의 제도가 아닙니다.
임금님께서 장차 감당하지 못하게 되실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어머니 강씨姜氏가 이렇게 하기를 바라시니 내 어찌 해害를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채중이 대답하기를 “강씨姜氏야 어찌 만족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조처하여 그 세력이 뻗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뻗어나가면 풀도 제거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임금님의 총애寵愛하는 아우이겠습니까?”라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불의한 짓을 많이 행하면 반드시 스스로 패망할 것이니, 그대는 우선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태숙太叔이 정鄭의 서쪽 변방과 북쪽 변방에 명하여 양쪽에 소속되어 정 장공의 통치를 받는 동시에 자기의 통치도 받게 하자, 공자公子 려呂가 말하기를 “한 나라에 두 임금을 감당할 수 없으니, 임금님께서는 이를 장차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나라를 태숙에게 주고자 하신다면 신은 그를 임금으로 섬기겠습니다마는 만약 주려 하지 않으신다면 그를 제거하시어 백성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장차 스스로 화에 미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태숙이 또 양쪽에 소속됐던 땅을 거두어들여 자기 고을로 만들고, 또 그 영토領土를 늠연廩延까지 확장하자, 자봉子封이 말하기를 “손을 쓸 때가 되었습니다.
그냥 버려두면 태숙의 영토가 넓어져서 장차 많은 백성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공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의리義理를 지키지 않고 아우로서 형에게 친애親愛하지 않으니, 아무리 영토가 넓어도 장차 스스로 붕궤崩潰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숙太叔이 성곽城郭을 견고히 쌓고 군량軍糧을 모으고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고 군사와 병거兵車를 갖추어서 정鄭을 기습奇襲하려 하니, 부인夫人이 내응內應하여 성문을 열어주기로 하였다.
장공이 그 시기時期를 듣고는 “손을 쓸 때가 되었다.”라 하고서, 자봉子封에게 명하여 병거兵車 2백 승乘을 거느리고 가서 경성京城을 치게 하였다.
경성京城 사람들이 태숙단太叔段을 배반하니, 단이 도망해 언鄢으로 들어갔다.
장공이 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언을 치니, 〈5월月 신축일辛丑日에〉 태숙이 공국共國으로 도망하였다.
《춘추春秋》에 “정백鄭伯이 언鄢에서 단段을 극克(이김)하였다.”고 기록했으니, 이는 단이 아우답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우라고 말하지 않았고, 형제가 다툰 것이 마치 두 나라 임금이 교전交戰한 것 같기 때문에 극克이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