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左傳]莊十一年
이라 秋
에 宋大水
하다 公使弔焉曰 天作
雨
하야 害于粢盛
하니 若之何不弔
리오
〈對〉曰 孤實不敬
하야 天降之災
어늘 又以爲君憂
하니 하노라
臧文仲曰 宋其興乎
ㄴ저 禹湯罪己
라 하고 桀紂罪人
이라 이라
旣而聞之
하니 曰 公子
之辭也
라 臧孫達曰 是宜爲君
이로다有恤民之心
이라
近禹湯者는 莫如桀紂니라 禹湯은 大聖也요 桀紂는 大惡也니 其相去之遠이 不啻天淵이어늘 何爲其相近也오
禹湯은 善之極이요 桀紂는 惡之極이니 善惡二也나 其所以行之者는 一也ㄹ새니라 禹湯은 歸功於人하고 桀紂도 亦歸罪于人하니라
禹湯은 功冠天下로되 皆推而歸之人曰 此左右之功이요 此群臣之功이요 此諸侯之功이요 此萬姓之功이라하야 自視不見有一毫之功焉하며
桀紂는 罪冠天下로되 皆推而歸之人曰 此左右之罪요 此群臣之罪요 此諸侯之罪요 此萬姓之罪라하야 自視不見有一毫之罪焉하니
禹湯은 引天下之罪而歸之己曰 此我之愆이요 非汝之愆이며 此我之責이요 非汝之責이라하야 欲以一身盡代天下之罪焉하고
桀紂는 引天下之功而歸之己曰 此我之謀요 非汝之謀며 此我之力이요 非汝之力이라하야 欲以一身盡攘天下之功焉하니
然則禹湯歸罪之心이 豈非桀紂歸功之心乎아 由是觀之컨대 禹湯之所以爲善이 乃桀紂之所以爲惡者也니
使禹湯移歸功之心하야 爲歸罪之心이면 則桀紂矣요 使桀紂移歸罪之心하야 爲歸功之心이면 則禹湯矣리라
人之所甚尊而不敢仰望者는 禹湯也요 人之所甚賤而不足比數者는 桀紂也라
平居自期
호되 以謂吾雖自奮
이라도 必不能爲禹湯
이요 吾雖
이라도 必不至爲桀紂
라하나니라
今觀自狂入聖이 如此之易면 則吾有時而禹湯矣니 安得而不喜며 自聖入狂도 亦如此之易면 則吾有時而爲桀紂矣니 安得而不懼리오
一念之是면 咫尺禹湯이요 一念之非면 咫尺桀紂라 誘于前하고 迫於後면 則善豈待勉이며 惡豈待戒哉리오
凡人之學이 太高則驕하고 太卑則怠하니 二者는 學者之大病也라 苟思去禹湯爲甚近이면 怠烏乎生이며
又思去桀紂爲甚近이면 驕烏乎生이리오 聖狂二法으로 更相懲勸이면 驕怠二病이 更相掃除리라
或輓之
하고 或推之
면 此顔子所以欲罷不能也歟
注+見論語어늘 久矣
로다 世之不知此理也
여
而臧文仲獨知之曰 禹湯罪己라 其興也勃焉하고 桀紂罪人이라 其亡也忽焉이라하야 判禹湯與桀紂호되 以人己之兩語하니 意者古之遺言歟ㄴ저
至其論公子御說之宜爲君
하여는 則流入于
하니 惜乎
라 也
여
天下之人
이 忿爭貪暴
하야 衆惡蔓延
하야 徧布海內
하니 禹湯皆
之於己
하야 以爲己罪
하니라
人見禹湯之罪己하고 忿者平하고 爭者息하며 貪者愧하고 暴者悔하니 禹湯一罪己하야 而盡收天下之惡하야 使歸于善일새니라
天下皆歸于善이 是亦禹湯之善也라 雖曰罪己나 然天下功孰有居禹湯之右者哉아
禹湯所收者惡이로되 所得者善이요 所引者罪로되 所得者功이니 何耶오
蓋旣除稂莠면 何必復求稼之茂며 旣除塵垢면 何必復求鏡之明이리오 但收其惡이요 不必求善이라
惡旣盡이면 則善將焉往哉리오 此所以收惡而得善也요 引罪而得功也니라
桀紂安于爲惡하야 不自咎而咎人하니 天下亦從而相咎하니라 本所犯者一惡耳로되 諱其惡而不自咎하니 詐也요 嫁其惡而咎人하니 險也라
變一惡而數惡하야 日滋月長하야 自十而百하고 自百而千하며 自千而萬하야 覆國亡身하야 遺臭後世하니
由不能收天下之惡하고 而長天下之惡也ㄹ새니라 禹湯受其罪로되 而終不能汚하고 桀紂辭其罪로되 而終不能逃하니라
一興一亡이 邈然遼絶이나 揆厥本原이면 不過差之辭受之間而已니라 吾是以益知其相近이로라
雖然이나 大聖大惡相近若此면 屠酤盜賊이 翻然爲善者는 尙多有之어니와 未聞有旣聖而復爲惡者하니 何也오
曰 河之險에 入則死하고 出則生이니 死生之分이 纔跬步라 人固有陷其中而得脫者矣어니와 豈有旣出而復肯入者哉아
우왕禹王과 탕왕湯王은 죄罪를 자기에게 돌리고,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은 죄를 남에게 돌리다
傳
장공莊公 21년, 가을에 송宋나라에 큰물이 졌다. 장공이 송宋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위문慰問하기를 “하늘이 장맛비를 내려 자성粢盛에 재해災害를 입혔으니 어찌 위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송 민공宋 閔公이 대답하기를 “고孤가 실로 하늘을 공경하지 않아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인데, 도리어 공公(노 장공魯 莊公)께 근심을 끼쳐 관심關心을 보여주시니 한없이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문중臧文仲이 말하기를 “송宋나라는 아마도 부흥復興할 것이다. 우禹와 탕湯은 죄罪를 자신에게 돌렸으므로 그 흥興하는 것이 빨랐고, 걸傑과 주紂는 죄를 남에게 돌렸으므로 그 망하는 것이 빨랐다.
열국列國에 흉재凶災가 있으면 그 나라 임금이 자신을 ‘고孤’라고 칭하는 것이 예禮이다. 송공宋公은 말이 공구恐懼스러웠고 명칭名稱이 예禮에 맞았으니 아마도 부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그 말이 공자 어열公子 御說의 말이었다는 것을 듣고, 장손달臧孫達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아마도 임금이 될 것이다.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하였다.
우禹와 탕湯에 가까운 자로는 걸桀과 주紂만 한 자가 없다. 우禹와 탕湯은 큰 성인聖人이고, 걸桀과 주紂는 큰 악인惡人이니, 서로의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 멀 뿐만이 아닌데, 어째서 서로 가깝다고 하는가?
우禹와 탕湯은 선善의 극치極致이고, 걸桀과 주紂는 악惡의 극치極致이니, 선善과 악惡은 비록 다르지만 그것을 행한 방법은 같았기 때문이다. 우禹와 탕湯은 공功을 남에게 돌렸고, 걸桀과 주紂도 죄罪를 남에게 돌렸다.
우禹와 탕湯은 공功이 천하에 으뜸이었으되, 그 공을 모두 남에게 돌리면서 “이는 좌우左右의 공이고, 이는 군신群臣의 공이고, 이는 제후의 공이고, 이는 만백성의 공이다.”라고 하여, 자기에게는 터럭만 한 공도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걸桀과 주紂는 죄罪가 천하에 으뜸이었으되, 그 죄를 모두 남에게 돌리면서 “이는 좌우의 죄이고, 이는 군신의 죄이고, 이는 제후의 죄이고, 이는 만백성의 죄이다.”라고 하여, 자기에게는 터럭만 한 죄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우禹와 탕湯이 공을 남에게 돌린 마음이, 어찌 바로 걸桀과 주紂가 죄를 남에게 돌린 마음이 아니겠는가?
우禹와 탕湯은 죄를 자기에게 돌렸고, 걸桀과 주紂도 공을 자기에게 돌렸다.
우禹와 탕湯은 천하의 죄를 다 끌어다가 자기에게 돌리면서 “이는 나의 잘못이고 너의 잘못이 아니며, 이는 나의 책임이고 너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하여, 자기 한 몸으로 천하의 죄를 모두 대신 지고자 하였으며,
걸桀과 주紂는 천하의 공을 다 끌어다가 자기에게 돌리면서 “이는 나의 계모計謀이고 너의 계모가 아니며, 이는 나의 힘이고 너의 힘이 아니다.”라고 하여, 자기 한 몸으로 천하의 공을 다 빼앗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우禹와 탕湯이 죄罪를 자기에게 돌린 마음이, 어찌 걸桀과 주紂가 공功을 자기에게 돌린 마음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보면, 우禹와 탕湯이 선善을 행한 방법이 바로 걸桀과 주紂가 악惡을 행한 방법이니,
가령 우禹와 탕湯이 공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을 바꾸어 죄를 남에게 돌리기로 마음먹었다면 걸桀과 주紂가 되었을 것이고, 가령 걸桀과 주紂가 죄를 남에게 돌리는 마음을 바꾸어 공을 남에게 돌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우禹와 탕湯이 되었을 것이다.
성인聖人이라도 선행善行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선행을 생각하면 성인이 되니, 아침에 성인이 되었다가 저녁에 광인이 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쉬울 뿐이다.
사람들이 매우 존경하여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는 분은 우禹와 탕湯이고, 사람들이 매우 천시賤視하여 함께 논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자는 걸桀과 주紂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평소에 “내가 아무리 분발해도 우禹와 탕湯이 될 수는 없지만, 내가 아무리 자화自畫하여도 걸桀과 주紂가 되는 데는 이르지 않을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지금 광인狂人에서 성인聖人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처럼 쉬운 것을 보면 나도 때로 우禹와 탕湯이 될 수 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성인에서 광인으로 들어가는 것도 이처럼 쉬운 것을 보면 나도 때로 걸桀과 주紂가 될 수 있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생각이 옳으면 우禹와 탕湯에 가까워지지만, 한 생각이 그르면 걸桀과 주紂에 가까워진다. 〈우禹와 탕湯이 되는 기쁨이〉 앞에서 유인하고 〈걸桀과 주紂가 되는 두려움이〉 뒤에서 핍박하니, 어찌 남의 권면勸勉을 기다려 선善을 행하고, 어찌 남의 경계警戒를 기다려 악惡을 없애겠는가?
대체로 학문學問이 너무 높은 사람은 교만驕慢하고 너무 낮은 사람은 태만怠慢하니, 이 두 가지는 학자들의 큰 병통이다. 만약 우禹‧탕湯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지기를 생각한다면 태만이 어찌 생기겠으며,
또 걸桀‧주紂와 거리가 매우 가까워질 것을 생각한다면 교만이 어찌 생기겠는가? 성인聖人이 되는 법과 광인狂人이 되는 법으로 서로 경계하고 권면한다면 교만한 병과 태만한 병이 다 없어질 것이다.
앞에서 끌어주기도 하고 뒤에서 밀어주기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안자顔子가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었던 방법인데,
注+≪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장문중臧文仲만 홀로 그런 이치를 알고서 “우禹와 탕湯은 죄를 자기에게 돌렸으므로 그 흥興하는 것이 빨랐고, 걸桀과 주紂는 죄를 남에게 돌렸으므로 그 망하는 것이 빨랐다.”라고 하여, 우禹‧탕湯과 걸桀‧주紂를 ‘죄를 남에게 돌리고 죄를 자기 돌렸다.’는 두 마디 말로 판별判別하였으니, 이 말은 아마도 예로부터 전해온 말인 듯하다.
그러나 그가 “공자 어열公子 御說이 아마도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논한 것은 고사瞽史의 학學에 빠져든 말이니, 애석하다, 여우 갖옷에 염소 가죽으로 소매를 단 것이여!
내 일찍이 아래와 같이 논論한 적이 있다. 우禹와 탕湯은 천하의 악惡을 제거除去[수收]하였는데, 걸桀과 주紂는 천하의 악을 조장助長하였다.
천하 사람이 분한忿恨해하며 서로 다투고, 탐욕貪慾을 부리며 포학을 부리는 등의 온갖 악행惡行이 만연하여 사해四海 안에 두루 퍼지자, 우禹와 탕湯은 이 악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려 자기의 죄로 삼았다.
사람들은 우禹와 탕湯이 자기의 죄로 돌리는 것을 보고서 분한해하던 자가 화평해지고, 다투던 자가 다툼을 중지하고, 탐욕을 부리던 자가 부끄러워하며, 포학하던 자가 후회하였으니, 이는 우禹와 탕湯이 한 번 죄를 자기에게 돌림으로써 천하의 악을 다 제거하여 사람들을 선善으로 돌아가게 하였기 때문이다.
천하 사람이 모두 선善으로 돌아간 것은 이 또한 우禹와 탕湯의 선행善行이다. 비록 죄를 자기에게 돌렸으나, 천하의 공功 중에 우禹와 탕湯의 공보다 더한 공이 어디 있겠는가?
우禹와 탕湯이 제거한 것은 악惡뿐이었으되 백성이 선善해지는 효과를 얻었고, 인책引責한 것은 죄뿐이었으되 태평을 이룬 공功을 얻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대체로 잡초를 이미 제거하였으면 다시 농작물農作物이 무성해지기를 구할 필요가 뭐 있고, 이미 먼지를 제거하였으면 다시 거울이 밝아지기를 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단지 그 악만 제거할 뿐, 선을 구할 필요가 없다.
악이 다 없어지면 선이 어디로 가겠는가? 이것이 바로 악을 제거하여 선을 얻고, 죄를 인책하여 공을 얻는 방법이다.
걸桀과 주紂가 악행惡行을 편안히 여겨 죄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남에게 돌리니, 천하 사람들도 따라서 서로 죄를 남에게 돌렸다. 본래 범한 것은 한 가지 죄악罪惡일 뿐인데, 그 죄악을 숨기고서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으니 이는 속이는 죄까지 범한 것이고, 그 죄악을 전가하여 남에게 돌렸으니 이는 음험陰險한 죄까지 범한 것이다.
하나의 죄악이 몇 가지 죄악으로 변하여 나날이 불어나고 다달이 자라나서, 열이 백으로, 백이 천으로, 천이 만으로 죄악이 늘어나서,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여, 악명惡名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악을 제거하지 않고, 천하의 악을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우禹와 탕湯은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들였으되 끝내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걸桀과 주紂는 죄를 남에게 떠넘겼으되 끝내 죄를 피하지 못하였다.
한 번 흥성興盛하고 한 번 멸망滅亡하는 것이 아득히 먼 것 같지만, 그 근원根源을 따져보면 그 차이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불과할 뿐이니, 나는 이로 인해 우禹‧탕湯과 걸桀‧주紂가 서로 가깝다는 것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비록 그러하나 큰 성인聖人과 큰 악인惡人이 이처럼 서로 가깝다면, 백정이나 술장수나 도적 중에 마음을 고쳐먹고 선인善人이 된 자는 오히려 많이 있지만, 이미 성인이 되었던 사람 중에 다시 악인이 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위험한 황하黃河에 들어가면 죽고 나오면 사니, 죽고 사는 갈림길이 겨우 반걸음 차이일 뿐이다. 사람 중에는 황하에 빠졌다가 탈출한 자는 있지만, 어찌 이미 탈출하였다가 다시 들어가는 자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