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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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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박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22-05-01 單伯請子叔姬
【左傳】 文十四年이라 襄仲使告于王하야 請以王하니 焉用其母릿가 請受而罪之하노이다
하야 請子叔姬하니 하고 하다
22-05-02 季文子如晉
【左傳】 文十五年이라 季文子如晉하니 爲單伯與子叔姬故也 註云 因晉請齊라하다
22-05-03 齊人赦單伯歸子叔姬
【左傳】 文十五年이라 齊人來歸子叔姬하니 王故也 註云 單伯雖見執 能守節不移 終達王命 使叔姬得歸라하다
前人未決之訟 後人之責也 前儒未判之疑 後儒之責也 吏職官府하고 儒職簡牘하니
官府有枉하고 簡牘亦有枉이라 辨今世之枉者 屬之吏하고 辨異世之枉者 屬之儒하니라
人雖有去有來 然同一官府也 事雖有久有近이나 然同一簡牘也 吏不得以非己之時而却其訟하니 儒者亦豈以非己之時置其疑而不辨哉
單伯爲魯請子叔姬於齊 左氏無異辭 公羊穀梁兩家以爲單伯淫於叔姬 是以見執이라하니 從左氏耶ㄴ댄 則單伯無毫髮之愆이어니와 從公穀耶ㄴ댄 則單伯有丘山之惡하니
此千載未斷之獄으로 待後儒之閱實也 하며 以同時之人爲左驗하야 平反而昭雪之하노라
今訴人之罪者 所訴之諜其氏族爵位鄕土猶不能知 則弗待訊鞠而知其爲誣
單伯實周臣이어늘라하야 周魯之辨且復倒置하야 尙未辨其爲何國人하니 則所言之罪 豈足信乎
吾非據左氏而指單伯爲周臣也 公穀方與左氏訟하면 左氏之言雖直이나 焉能折二家之口哉리오
吾之所以指單伯而爲周臣者 蓋以經知之 非以左氏知之
畿內諸侯見於經者多矣하니 祭伯之來注+祭伯之來: 凡伯之伐注+凡伯之伐: 毛伯之錫命注+毛伯之錫命: 召伯之會葬注+召伯之會葬: 考其書法하면 與單伯無少異어늘 公穀何所據而以彼爲周하고 以此爲魯乎
自周之外 經未有書諸侯之臣爲伯者하니 觕擧內大夫以明之
不氏而名者也 兼氏而名者也 配親而名者也 仲遂叔老 配仲叔而名者也
二百四十二年之間 不書名者 獨季子來歸一語而已 曷嘗聞內大夫不名而書伯者乎 公穀之誣 瞭然矣
政使如公穀之說以單伯爲魯大夫 則聖經不名而書伯 亦當如季子之比
季友有討亂之略하고 有託孤之忠하야 以身爲一國之安危 故春秋不名以貴之하니라
若單伯果魯大夫어늘 聖經不名而書伯이면 必有大功大善 居季子之右리니 安得反負淫齊之罪乎
負甚大之罪어늘 而得甚美之褒 則何以爲孔子 何以爲春秋리오 孔子是則公穀非 孔子非則公穀是리니 持二說以詰二家 雖秦儀代厲라도 亦未必能對也리라
左公穀者曰 單伯之列於經 自請叔姬以前이니 如逆王姬 如伐宋 如會鄄 不絶於簡이라가 至請叔姬之後하얀 則載於策者 有單子而無單伯하니 庸詎知書伯者非魯 書子者非周乎 曰 爵列升降 各隨其時
如滕前侯而後子 不聞其兩滕也注+如滕前侯而後子 不聞其兩滕也:隱十一年 滕侯卒 二年 滕子來朝 杞前伯而後子 不聞其有兩杞也注+杞前伯而後子 不聞其有兩杞也:僖十七年 杞伯來朝 僖二十三年 杞子卒하니 是何足以病吾說哉 或者又曰 前古枉直未辨者 何可勝數리오 單伯之事 特牛一毛 倉一粟耳
浩浩塵編 子能盡發而細辨之乎 曰 人無故負寃하야 更百世而莫能雪이어늘 後之人 又以爲瑣屑而不足問이면 是終天地而無伸眉之日矣리라
推是心以涖官臨政이면 則攬山積之文書하고 對麕至之黎庶 必將厭其叢脞하야 漫不復經意하리니 抑不知我視之甚微 彼視之甚重하며 我視之甚緩이나 彼視之甚急이라 亦何愛頃刻之勞하야 而使彼賫沒身之恨乎
肄於塾하고 聽於府하며 執筆之際 皆不可不思


선백單伯자숙희子叔姬를 돌려보내기를 청하다
문공文公 14년, 양중襄仲사자使者를 보내어 보고報告하고서 은총恩寵으로 나라에서 소희昭姬를 데려올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그 아들을 죽였으니 그 어미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니 나라로 데려다가 를 다스리려 합니다.”고 하였다.
겨울에 선백單伯나라로 가서 자숙희子叔姬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제인齊人선백單伯을 잡아 가두고 또 자숙희子叔姬도 잡아 가두었다.
계문자季文子나라에 가다
문공文公 15년, 봄에 계문자季文子나라에 갔으니, 선백單伯자숙희子叔姬의 일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두예杜預의〉 에 “나라를 통해 나라에 요청하기 위해 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인齊人선백單伯을 사면하고 자숙희子叔姬를 돌려보내다
문공文公 15년, 제인齊人이 와서 자숙희子叔姬를 돌려주었으니 이는 주왕周王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두예杜預의〉 에 “선백單伯은 잡히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절개를 지켜 흔들리지 않고 끝내 왕명王命을 전달하여 숙희叔姬가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전인前人이 판결하지 못한 송사訟事후인後人이 판결할 책임이 있고, 선유先儒가 판별하지 못한 의문은 후유後儒가 판별할 책임이 있다. 관리는 관부官府의 〈송안訟案을〉 맡고 유자儒者간독簡牘에 〈실린 의사疑事를〉 맡는다.
그러나 관부官府의 〈판결에〉 억울함이 있고 간독簡牘의 〈기재記載에도〉 오류가 있으니, 당세의 억울함을 밝히는 일은 관리에게 관계되고, 전세前世의 오류를 밝히는 일은 유자에게 관계되었다.
인사人事는 비록 변천이 있으나 〈판결하는 것은〉 동일한 관부이고, 사건은 비록 원근이 있으나 〈기재하는 것은〉 동일한 간독이다. 관리는 자기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하여 송사를 물리칠 수 없으니, 유자 또한 어찌 자기 시대의 일이 아니라 하여 의문을 버리고 분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백單伯나라를 위하여 나라에게 자숙희子叔姬을 돌려보내기를 요청한 것에 대해 좌씨左氏는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 두 사람은 선백單伯숙희叔姬와 간음하였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라고 하였다. 좌씨左氏를 따르면 선백單伯에게 털끝만한 허물도 없으나,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를 따르면 선백單伯에게 태산 같은 큰 죄악이 있다.
이는 수천 년 동안 결단하지 못한 의옥疑獄으로 후유後儒열실閱實(조사해 사실을 확인함)을 기다리는 〈사안이다.〉 나는 이제 한번 성경聖經으로 법률을 삼고, 삼전三傳으로 안정案情을 삼으며, 동시대 사람으로 증거를 삼아, 잘못을 바로잡아 억울한 누명을 씻어주고자 한다.
지금 남의 죄상을 공소控訴하는 자가 그 소첩訴牒에 〈기록할 상대방의〉 씨족氏族작위爵位향토鄕土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신문할 필요도 없이 그 공소가 무고임을 알 수 있다.
선백單伯은 실제로 나라 신하인데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는 도리어 나라의 대부라고 하여, 나라와 나라의 분별조차 전도시켜 오히려 선백單伯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분변할 수 없게 하였으니, 그들이 말한 죄상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근거해 선백單伯나라 신하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가 바야흐로 좌씨와 쟁변爭辯[]한다면 좌씨左氏의 말이 비록 옳다하더라도 어찌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의 말을 〈일방적으로〉 꺾을 수 있겠는가?
내가 선백單伯을 지칭해 나라 신하라고 한 것은 ≪춘추春秋경문經文을 통해 안 것이고, ≪춘추좌씨전≫을 통해 안 것이 아니다.
기내畿內제후諸侯에 보이는 자가 많으니, 예컨대 ‘채백지래祭伯之來(제백祭伯이 오다)’注+隱公 원년의 일이다.․‘범백지벌凡伯之伐(범백凡伯이 토벌을 당하다)’注+隱公 7년의 일이다.․‘모백지석명毛伯之錫命(모백毛伯을 보내어 와서 문공文公에게 작명爵命을 내리다)’注+文公 원년의 일이다.․‘소백지회장召伯之會葬(소백召伯이 장례에 참석하다)’注+文公 5년의 일이다. 등은 서법書法을 고찰해보면 선백單伯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데,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는 무엇에 근거하여 제백祭伯범백凡伯모백毛伯소백召伯나라 신하라고 하고 선백單伯나라 대부라고 하였는가?
춘추春秋≫에 나라 신하 이외에 제후의 신하를 ‘’이라고 기록한 경우는 없으니, 대략 나라 대부들의 예를 들어 밝혀보겠다.
의여意如 등은 는 쓰지 않고 이름만 쓴 경우이고, 숙손득신叔孫得臣중손하기仲孫何忌 등은 와 이름을 겸하여 쓴 경우이며, 공자경보公子慶父공제숙힐公弟叔肹 등은 군주와의 친족관계에 이름을 배속한 경우이고, 중수仲遂숙로叔老숙궁叔弓숙의叔誼 등은 〈형제兄弟간의 차서次序인〉 에 이름을 배속한 경우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242년 사이에 이름을 쓰지 않은 경우는 유독 “계자내귀季子來歸(계자季子가 돌아오다)”라고 한 한 마디뿐이니, 언제 나라 대부의 이름을 쓰지 않고 이라고 썼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가?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의 왜곡이 분명하다.
가령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의 말과 같이 선백單伯나라 대부로 여긴다면 성인이 지은 ≪춘추春秋≫에 이름을 쓰지 않고 이라고 쓴 이유 또한 계자季子의 경우와 같아서일 것이다.
계우季友(계자季子)는 난리를 토평討平할 만한 지략이 있고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한 충심이 있어서 그 몸에 한 나라의 안위가 달렸기 때문에 ≪춘추春秋≫에 그의 이름을 쓰지 않음으로써 그를 존숭尊崇[]하였다.
만일 선백單伯이 과연 나라 대부인데 성인이 지은 ≪춘추≫에 이름을 쓰지 않고 이라고 썼다면 반드시 〈선백單伯에게〉 계자季子보다 더 훌륭한 큰 공적과 큰 선행이 있어서일 것이니 어찌 도리어 나라에서 〈숙희叔姬와〉 사통했다는 죄명罪名을 지웠겠는가?
매우 중대한 죄를 졌는데 매우 아름다운 포장褒獎을 받게 한 것이라면 어찌 공자孔子가 될 수 있으며, 어찌 ≪춘추≫가 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의 말이 옳다면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의 말이 그르고, 공자孔子의 말이 그르다면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의 말이 옳다. 이 두 가지 말을 가지고 두 사람(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을 힐문한다면 비록 소진蘇秦장의張儀소대蘇代소려蘇厲라 하더라도 반드시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공양씨公羊氏곡량씨穀梁氏를 편드는 자들이 “선백單伯경문經文에 기재한 것은 숙희叔姬를 요청하기 이전부터이니 이를테면 ‘역왕희逆王姬(왕희王姬를 호송하다)’․‘벌송伐宋(나라를 토벌하다)’․‘회견會鄄(에서 회맹하다)’ 등의 일이 간책簡冊에 끊이지 않다가, 〈나라에〉 숙희叔姬를 요청한 뒤에 와서는 간책에 실린 것 중에 선자單子만 있고 선백單伯은 없으니, 이라고 쓴 것이 나라 대부를 가리킨 것이 아니며 라고 쓴 것이 나라 신하를 가리킨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하기에, 내가 “작위의 승강升降은 각각 시대에 따라 변경이 있었다.
예컨대 나라 임금을 앞에는 ‘’로 칭하고 뒤에는 ‘’로 칭하였으나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注+隱公 11년에 滕侯가 卒하였다. 桓公 2년에 滕子가 와서 朝見하였다. 나라 임금을 앞에서는 ‘’으로 칭하고 뒤에는 ‘’로 칭하였으나 두 개의 나라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注+僖公 17년에 杞伯이 와서 朝見하였다. 僖公 23년에 杞子가 卒하였다. 어찌 이로써 나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혹자或者가 또 “고대의 일 중에 시비是非를 변별할 수 없는 것을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 선백單伯의 일은 다만 구우일모九牛一毛요, 태창일속太倉一粟일 뿐이다.
세간에 많은 서적에 실린 〈억울한 일들을〉 그대가 다 들춰내어 자세히 변별할 수 있는가?”라고 묻기에, 내가 “어떤 사람이 까닭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해 백 세대가 지나도록 억울함을 풀지 못했는데, 후세 사람이 또 ‘자잘한 일이라 따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이는 세상이 다하도록 원한을 풀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마음을 미루어 관직을 맡아 정무를 처리한다면 산적山積한 문서를 열람하거나 무리지어 오는 백성들을 대할 때에 반드시 자잘한 것을 싫어하여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내가 보기에는 매우 하찮으나 백성들이 보기에는 매우 중요하고, 내가 보기에는 매우 느긋하나 백성들이 보기에는 매우 다급함을 모르는 것이니, 또한 어찌 잠시의 수고를 아껴 백성에게 종신終身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학교에서 과업課業을 익히고 관부에서 송사를 청단聽斷하면서 붓을 들고 글을 쓸 즈음에는 언제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역주
역주1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寵’을 보충하였다.
역주2 : 昭姬는 子叔姬이다.〈杜注〉 周王의 恩寵을 빌려 齊나라에 請求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한 것이다.〈附注〉
역주3 : 아들은 商人이 弑害한 舍이다.
역주4 : 周王은 魯나라의 요청에 따라 大夫를 齊나라에 보낸 것이다.〈附注〉
역주5 : 魯나라가 周王의 權勢를 믿고 딸을 돌려달라고 요청한 것에 怨恨을 품었기 때문이다.〈杜注〉
역주6 : 魯나라에 恥辱을 주고자 한 것이다.〈杜注〉 子叔姬가 單伯과 함께 魯나라로 돌아가려 하였기 때문에 齊人이 잡아 가둔 것이다.(朴致遠, ≪雪溪隨錄≫)
역주7 : 經은 ≪春秋≫를 가리키고, 傳은 春秋三傳인 ≪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을 가리킨다. 按은 案情이니, 사건의 내용이나 경위를 이른다.
역주8 : ≪春秋公羊傳≫ 莊公 원년에 “여름에 單伯이 王姬를 맞이하였다. 單伯은 누구인가? 魯나라 大夫로서 天子에게 명을 받은 자이다.[夏單伯逆王姬 單伯者何 吾大夫之命乎天子者也]”라고 하였고, ≪春秋穀梁傳≫ 莊公 원년에 “여름에 單伯이 王姬를 맞이하였다. 單伯은 누구인가? 魯나라 大夫로서 天子에게 명을 받은 자이다. 대부를 명하였기 때문에 〈經에〉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이다.[夏單伯逆王姬 單伯者何 吾大夫之命乎天子者也 命大夫故不名也]”라고 하였다.
역주9 : 翬, 挾, 柔, 溺, 豹, 婼, 意如는 모두 魯나라 대부의 이름이다. 이 중 翬은 公子 翬이며, 溺은 公子 溺이고, 豹는 叔孫豹이며, 婼은 叔孫婼으로 叔孫豹의 庶子이다. 婼은 ≪春秋左傳注疏≫ 小注 ‘婼敕略反’에 의거하여 ‘착’으로 읽는다.
역주10 : 叔孫得臣은 魯나라 대부로 시호는 莊叔이고, 仲孫何忌는 魯나라 대부인 孟懿子이다.
역주11 : 公子 慶父는 魯 桓公의 아들이자 莊公의 아우이니 곧 共仲을 가리킨다. 公弟叔肹는 魯나라 宣公의 아우이다.
역주12 : 저본에는 ‘兮’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弓’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 仲遂는 公子 遂이며, 叔老는 叔肹의 아들이다. 叔弓은 叔老의 아들이고, 叔誼는 ≪春秋左氏傳≫에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叔詣’의 오류인 듯하다.
역주14 : 저본에는 1자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置’를 보충하였다.
역주15 : ≪春秋≫에 “겨울 12월에 祭伯이 聘問왔다.[冬 十有二月 祭伯來]”라고 하였다.
역주16 : ≪春秋≫에 “겨울에 天王이 凡伯을 魯나라에 보내어 聘問하였다. 戎이 楚丘에서 범백의 길을 막고 공격하여 데리고 돌아갔다.[冬 天王使凡伯來聘 戎伐凡伯于楚丘以歸]”라고 하였다.
역주17 : ≪春秋≫에 “天王이 毛伯을 보내 와서 文公에게 爵命을 내렸다.[天王使毛伯來錫公命]”라고 하였다.
역주18 : ≪春秋≫에 “王이 召伯을 보내 와서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다.[王使召伯來會葬]”라고 하였다.
역주19 : ‘威’는 ‘威公’이니, 바로 魯 桓公을 가리킨다. 宋나라 欽宗의 이름 ‘桓’을 諱하기 위해 ‘威’자로 바꿔 쓴 것이다. 이하 威公은 별도의 설명 없이 桓公으로 번역하였다.

동래박의(4)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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