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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2)

동래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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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晉里克帥師敗狄
나라 이극里克이 군대를 거느리고 적군狄軍을 무찌르다
[左傳]僖八年이라 晉里克帥師하고 梁由靡御하고 虢射爲右하야 以敗狄于하다
희공僖公 8년, 나라 이극里克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유미梁由靡가 되고 괵석虢射가 되어 적군狄軍채상采桑에서 패배시켰다.
양유미梁由靡가 말하였다. “적인狄人은 도망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추격追擊하면 반드시 대승大勝할 것입니다.” 이극里克이 대답하였다. “저들에게 겁만 주면 그만이지, 많은 적군狄軍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虢射曰 로다 狄伐晉하니 報采桑之役也 期月이라
괵석虢射이 말하였다. “우리가 함을 보였으니 1년 뒤에 적인狄人이 틀림없이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여름에 적인狄人나라를 침벌侵伐하였으니, 이는 채상采桑전쟁戰爭에서 패배한 것을 보복한 것이다. ‘기월期月’이라고 한 괵석虢射예언預言이 들어맞았다.
治戎狄如姦民하니 姦民狎官府則多訟하고 戎狄狎邊鄙則多難이라 一日之懲而終身不敢入官府者 善政也
융적戎狄을 다스리는 일은 간사한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같다. 간사한 백성이 관부官府에 친압하면 쟁송爭訟이 많아지고, 융적이 변방에 친압하면 화난禍難이 많아진다. 하루를 징계하여 종신토록 감히 관부에 들어올 수 없게 하는 것이 좋은 정치이고,
一戰之威而百年不敢近邊鄙者 善謀也 戎狄之性 折則服하고 縱則驕
한 번의 전쟁으로 위엄을 보여 백 년 동안 감히 변방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은 계책이다. 융적의 성정性情은 기가 꺾이면 복종하고 풀어놓으면 교만하다.
彼其悍然執兵하야 剪我郊保하고 我積聚하며 歐我馬牛하고 蹂我稼穡이면
저 융적이 사납게 무기를 들고서 우리의 교외와 마을을 침범하고 우리가 쌓아놓은 재물을 불사르며 우리의 말과 소를 몰아가고 우리의 농사를 짓밟으면,
羽檄雷動하고 車馳轂擊하야 謀臣勞於朝하고 戰士勞於野니라 賴天之靈 宗廟之福하야 幸而一勝이면 反抑鋒按銳하야 縱之徐驅而歸
격문檄文을 번개처럼 발동하고 수레를 달려, 모신謀臣은 조정에서 수고하고 전사戰士는 들에서 고생한다. 그리하여 영험한 하늘과 종묘宗廟의 복에 의지하여 요행히 일단 이기게 되면, 도리어 예봉으로 싸우는 일을 억제하고, 융적을 풀어주어 천천히 돌아가게 한다.
爲夷狄者 勝有重利하고 敗無他虞하니 亦何苦而不爲寇哉리오 是故狃於爲寇之利하야 視吾邊境如登虛邑하니
융적의 입장에서는 승리하면 많은 이익이 있고, 실패해도 다른 염려가 없으니 무엇이 괴로워 중국을 침입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침입하는 이로움에 익숙하여 우리 중국의 변경을 빈 고을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니,
吾邊境之民 歲暴骨而月裹瘡하야 哭泣之聲未絶이나 而鼓鐸之音已振矣 是何待戎狄之厚而待吾民之薄耶
우리 변경의 백성이 해마다 죽어 뼈가 드러나고 달마다 상처를 싸매어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도 전쟁터의 북소리 징소리가 이미 진동한다. 어찌하여 융적을 후대厚待하고 우리 백성을 박대薄待한단 말인가?
然此亦非所以厚戎狄也 恕生侮하고 侮生怒하니 恕之與怒 相反而相生者也
그러나 이것도 융적戎狄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모욕을 낳고 모욕은 분노를 낳으니, 용서와 분노는 서로 반대이지만 또 서로 발생하는 요인이 된다.
始吾恕戎狄하야 以爲不足治라하야 其侵不問하고 其衂不迫하니 犬羊之心으로 恣睢桀驁하야
예전에 우리 중국이 융적을 용서하여 다스릴 가치도 없다 여기고, 침입한 죄를 묻지 않고 손실에 대한 핍박도 하지 않았는데, 금수禽獸의 마음을 지닌 융적이 오만방자하여,
意我之不能라 하야 陵侮暴犯하니 非人所堪이라 於是不勝其忿하야 掃境內之衆하야 窮誅極討하야
우리 중국이 군대를 부릴 능력이 없다고 여기고 능멸하여 무력으로 침벌하니 이는 사람으로서 견딜 수 있는 모욕이 아니었다. 이에 〈중국이〉 분함을 이길 수 없어 변경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융적을 모조리 주살하고 토벌하였다.
覆其巢하고 鋤其根하야 以逞吾憾하니 召今日之怒者 庸非前日之恕乎
그들의 소굴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근거지를 파내어 우리의 유감을 다 풀어내었으니, 어찌 오늘의 분노를 부른 것이 전날의 용서해준 일이 아니겠는가?
嫚書之恕 所以召絶幕之怒也注+漢惠帝卽位 冒頓致書呂太后曰 陛下獨立 孤僨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太后好報書 遂和親 武帝 卽位恢以馬邑 誘匈奴 自是絶和親 先是 漢趙信 降匈奴 敎單于益北絶幕以誘漢兵 於是 漢遣衛靑等十萬騎 絶幕擊匈奴 渭橋之恕 所以召定襄之怒也注+唐太宗初 突厥進寇高陵 尉遲敬德 與突厥戰於涇陽 大破之 癸未 頡利可汗 進至渭水便橋之北上自出玄武門 與高士廉房玄齡等 六騎徑詣渭水上 與頡利隔水而語 責以負約 突厥大驚 皆下馬羅拜 俄而諸軍繼至 頡利見軍容甚盛 有懼色 頡利請和 詔許之 遂與頡利盟于便橋之上 突厥引兵退 後復冠邊 四年正月 李靖帥驕騎三千 自馬邑進 夜襲定襄破之 又破於陰山 擒頡利可汗 故曰 此非以所厚戎狄也라호라
오만한 편지를 용서해준 것이 사막을 침입하는 분노를 불러왔고,注+한 혜제漢 惠帝가 즉위하자 묵특冒頓여태후呂太后에게 편지를 보내어 “폐하께서 혼자 사시고 나 또한 혼자 사니 두 임금이 이 없어 스스로 즐길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꿉시다.”라 하였는데, 여태후가 현명하게 답장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다.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에 왕회王恢마읍馬邑으로 흉노匈奴를 유인하니 이때부터 흉노匈奴와의 화친이 끊겼다. 이보다 앞서 나라 조신趙信흉노匈奴에 투항하여 선우單于에게 북쪽 사막으로 더욱 들어가 한나라 군대를 유인하게 하니, 이에 한나라가 위청衛靑 등과 십만의 기병을 파견하여 사막을 건너가 흉노를 공격했다. 위수渭水편교便橋의 침입을 용서해준 것이 정양定襄을 습격하는 분노를 불러왔다.注+당 태종唐 太宗 초년初年돌궐突厥고릉高陵을 침략하니 위지경덕尉遲敬德경양涇陽에서 돌궐突厥과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계미癸未힐리가한頡利可汗위수渭水에 있는 편교便橋 북쪽을 침입하니, 현무문玄武門으로 나아가 고사렴高士廉방현령房玄齡 등과 함께 륙기六騎를 타고 곧바로 위수渭水 가로 가 힐리가한頡利可汗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서 말하며 약속을 저버린 것을 꾸짖었다. 돌궐突厥이 크게 놀라 모두 말에서 내려 줄 지어 절하였는데, 얼마 후 여러 군사들이 계속 도착하자 힐리가한頡利可汗이 군대의 위용이 대단한 것을 보고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이 화친을 청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마침내 힐리가한頡利可汗편교便橋 위에서 맹약하니 돌궐突厥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뒤에 다시 변방을 침입하니 4년 1월에 이정李靖교기驕騎 3천을 거느리고 마읍馬邑에서 악양령惡陽嶺으로 나아가 밤에 정양定襄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또 음산陰山을 쳐부수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융적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小治之於未侮之前이면 傷少而怨淺이어니와 大治之於積侮之後 傷多而怨深이니
모욕을 받기 전에는 조금만 다스리면 되니 〈이때에는〉 상처가 적고 원망이 적지만, 모욕이 누적된 뒤에는 크게 다스려야 하니 〈이때에는〉 상처가 많고 원망이 깊다.
孰厚孰薄이며 孰寬孰猛 必有能辨之者矣리라 吾是以知里克之待戎狄不得爲仁이요 而梁由靡之策亦未始爲虐也로라
그러니 누구를 후대하고 누구를 박대하며, 누구에게 관대하고 누구에게 사납게 해야 하는지를 반드시 구별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므로 이극里克이 융적을 대한 것이 이 될 수 없고, 양유미梁由靡의 계책이 애초에 잔학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主里克之說者 歷擧 嚴尤之論하야 以謂王者治戎狄 正當如此라하니
이극里克의 말을 주장하는 자는 선왕宣王엄우嚴尤의 논의를 일일이 열거하여 왕자王者가 융적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고 한다.
抑不知理有似而差하고 言有類而異니라 歐之而已者 之稱宣王也注+見漢匈奴傳 懼之而已者 里克之沮梁由靡也
그러나 이치가 근사한 듯하지만 어긋나고, 말이 유사한 듯하지만 다르다. 몰아내면 될 뿐이라고 한 것은 엄우가 선왕을 칭찬한 말이고,注+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보인다. 두렵게만 하면 될 뿐이라고 한 것은 이극이 양유미梁由靡를 저지한 말이다.
兩者相去 不能以寸이나 然謂之歐則不止於懼矣 謂之懼則本未嘗歐矣 其言 其利
두 말의 차이가 한 치도 못 되지만, 몰아낸다고 하면 두렵게 할 뿐만이 아닌 것이고, 두렵게 한다고 하면 본래 몰아내는 것은 아니니, 양자兩者의 말이 치수淄水민수澠水의 맛처럼 현격히 다르고, 양자兩者의 이로움이 경수涇水위수渭水처럼 확연히 다르다.
宣王之詩 薄伐玁狁하야 至於太原이라하니 太原 周境也 小雅宣王之逐戎狄 不盡吾境不置也
선왕의 시에 “잠깐 험윤玁狁을 정벌하여 태원太原에 이르렀네.”라 하였다. 태원은 나라의 국경 내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서 선왕이 융적戎狄을 쫓아낸 일은, 우리 중국 땅에서 다 몰아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고자 한 것이다.
乃若采桑之戰 實在屈之 平陽之西南하니 固晉地也 狄尙在吾地로되 里克僅得小勝하곤 遽卷甲而不進하니
채상采桑에서의 전쟁은 실제로 굴성屈城의 북쪽과 평양平陽의 서남쪽에 해당하니 본래 나라 땅이다. 융적이 아직도 우리 땅에 있는데 이극이 겨우 작은 승리를 하고서 갑자기 군대를 거두고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니,
安得自附於宣王之師乎 宣王縱戎狄於吾境之外하고 而里克乃縱戎狄於吾境之內어늘 世比而同之하니 過矣
어찌 선왕이 시행하였던 군대 일로 자부할 수 있겠는가? 선왕은 융적을 중국 땅 밖으로 풀어주었고 이극은 중국 땅 안에다 융적을 풀어놓았거늘, 세상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나란히 하여 동일하게 여기니, 잘못된 것이다.
吾嘗論縱戎狄者 有二하니 驕之使不吾忌하야 待其自墮術中者 詐者之事也 爲阱以陷獸者也
내가 일찍이 논하건대, 융적을 풀어주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만하여 우리 중국을 꺼리지 않게 함으로써 스스로 〈우리의〉 계책 안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방법인데, 이는 사기꾼의 일이니 함정을 만들어 짐승을 빠지게 하는 것이다.
寬之使知吾不足忌하야 遂敢肆其貪噬者 懦者之事也 開門以招盜者也
〈또 하나는〉 저들을 너그럽게 대하여 우리 중국이 꺼릴 만한 것이 없음을 알게 함으로써 마침내 탐욕을 부리게 하는 것인데, 이는 나약한 자의 일이니 문을 열어놓고 도둑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古今之縱戎狄者 揣其情硏其實이면 不出二說而已矣 前一說 聖人不忍爲也 後一說 聖人不肯爲也니라
융적을 풀어주는 것에 대하여 고금古今의 실정을 헤아리고 연구해보면, 단지 이 두 가지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자는 성인이 차마하지 않는 것이고, 후자는 성인이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역주
역주1 采桑 : 平陽 北屈縣 서남쪽에 采桑津이 있다.
역주2 狄無恥……必大克 : 敗走하는 것을 羞恥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追擊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주3 懼之而已 無速衆狄 : 怨恨이 깊어지면 많은 무리가 쳐들어와 보복할 염려가 있다는 말이다.
역주4 期年狄必至 示之弱矣 : 狄軍을 추격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먼저 저들에게 弱함을 보여준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5 : 말을 실천하는 것을 復이라 하고, 또 預言이 들어맞는 것을 復이라 한다.
역주6 〈燔〉 : 저본에는 없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7 〈師〉 : 저본에 1자 공란이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8 〈王〉 : 저본에 1字 空欄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王’을 보충하였다.
역주9 : 저본에 1字 空欄이 있으나, 문맥에 지장이 없어 그대로 번역하였다.
역주10 〈惡陽嶺〉 : 저본에 3字 공란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1 宣王之詩 : ≪詩經≫ 〈小雅 六月〉의 “잠깐 玁狁을 정벌하여 太原에 이르렀네.[薄伐玁狁 至於太原]”를 이른다. 험윤이 중국을 침략하자 周 宣王이 尹吉甫를 장군에 명하여 정벌하게 하니, 윤길보가 험윤을 중국 밖으로 몰아내고 돌아온 일을 칭송한 시이다.
역주12 嚴尤 : 王莽의 장군이다. 왕망이 30만의 군대로 흉노를 정벌하려 하니, 엄우가 “周 宣王 때에 험윤이 涇水 북쪽을 침략하자 장군에게 명하여 험윤을 몰아내기만 하고 돌아오게 했으니, 이는 오랑캐의 침략을 모기나 등에가 무는 정도로 여겨 굳이 정벌하지 않은 것입니다. 천하 사람들은 이를 오랑캐에 대처하는 中策이라고 칭송합니다.[周宣王時 玁狁內侵 至于涇陽 命將征之 盡境而還 其視玁狁之侵 譬猶蚊蝱 敺之而已 故天下稱明 是爲中策]”라고 간하였다. ≪資治通鑑 권37≫
역주13 淄澠 : 山東省에 있는 淄水와 澠水를 이른다. 두 물은 맛이 달라 합해놓으면 구별하기 어려웠으나, 춘추시대 齊나라의 易牙가 구별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역주14 涇渭 : 陝西省의 涇水와 渭水를 이른다. 涇水는 흐리고 渭水는 맑은데 두 물을 합해놓아도 그 淸濁이 분명하다 하여 주로 是非와 善惡을 구별할 때 비유하여 쓴다.
역주15 (址)[北] : 저본에는 ‘址’로 되어있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北’으로 바로잡았다.

동래박의(2) 책은 2019.1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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