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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4)

동래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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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晉使魏壽餘僞以魏叛以誘士會
【左傳】 文十三이라 하야 하다 趙宣子曰 하야 難日至矣 若之何 하라 이라
郤成子曰 하고 하니 不如隨會 하며 其知足使也 且無罪니라
忍棄其所不可棄者 必有大不可棄者也 刃在頭目이면 斷指不顧하고 病在腹心이면 灼膚不辭 彼豈以爲不足愛而棄之哉 是必有大不可棄者而奪其愛也
君子之於信義 與生俱生하야 猶手足體膚之不可須臾捨也 一旦幡然棄之하야 自處於信義之外 豈得已哉 其必有說矣리라
隨會之信義 歷數晉之公卿이라도 未能或之先也로되 至於詐秦歸晉之際하야는 雖借辭於髡衍하고 問策於儀秦이라도 殆不過如此 會果何所見而忍於自棄耶
盖壽餘之來 會之終身通塞決於俄頃이라 歸亦今日이요 否亦今日이니 此時不反이면 後將無時 此策不行이면 後將無策이라 此其所以忍棄平昔之所不可棄者也
嗚呼 使會知自古皆有死之說이면 則歸與不歸 固有命矣 不然이면 身將歸晉이나 吾恐其心放而不知歸也 爲身謀而棄信義 夫人知其不可矣 爲國謀而棄信義可乎哉
會爲身謀하니 固不逃君子之論矣어니와 嶠爲國謀하니 獨不可諒其心而許其權乎
晉祚存亡 一嶠是繫하니 使嶠幸逃虎口 則危可平하고 難可解하야 亡可存이니 豈惟江左是賴
寵嘉之하야 義存君親하니 庸非不信之信乎
曰信義不可須臾棄也 君子平居暇日이라도 尙不忍以不信不義自處 況敢以浼君親乎
吾平居暇日 未嘗爲詐어늘 因君父之難而爲之 是我之詐由君父而生也 詐由君父而生이면 亦是君父之詐也
免君父於難이라가 而納君父於詐하니 有忠孝之心者 忍爲之乎 此吾之所以罪嶠也
危晉者 王敦耳 使嶠力竭不能救社稷하야 而繼之以死라도 是亡晉者 王敦也 非嶠也
今嶠苟爲詐謀하야 幸存社稷이나 然以不正之名累君父하니 是危晉者王敦이요 而累晉者溫嶠 以五十步笑百步 相去幾何哉
世俗之說 以爲君父在難 若可圖全이면 詼譎邪枉 靡所不可라하니 皆指嶠輩爲法이라
抑不知吾身在難 知自愛者必不敢設詐以自免이로되 至於君父在難하야는 則爲之하니 豈不謂以詐免身이면 則無以自解 以詐免君父 則可以歸之君父以自解耶
是君父乃吾歸惡之地也 是以所賤事君父也 薄莫甚焉이라
隨會之過 擧知之 至於溫嶠之事하얀 吾恐意在於忠孝而未嘗學者不幸而蹈其失이라 故論之以待後世君子하노라


나라가 위수여魏壽餘에게 위읍인魏邑人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위장僞裝사회士會를 유인해 오도록 하다
문공文公 13년, 진인晉人나라가 사회士會중용重用하는 것을 근심하여, 육경六卿제부諸浮에서 서로 만나 보았다. 조선자趙宣子가 “수회隨會나라에 있고 가계賈季에 있어 화난禍難이 날로 이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하니, 중항환자中行桓子가 “가계賈季를 불러들여 그 지위地位를 회복시키십시오. 그는 외국의 사정을 잘 알고, 또 〈이렇게 하면〉 옛 공신功臣의 아들을 중용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극성자郤成子(극결郤缺)가 말하였다. “가계賈季을 일으켰고 또 지은 죄가 크니 수회隨會를 불러들여 지위를 회복시키는 것만 못합니다. 수회隨會비천卑賤하게 처신하면서도 염치가 있고 유순하면서도 남의 침범을 받지 않으며, 그 지혜도 충분히 부릴 만하고 도 없습니다.”
나라는〉 이에 위수여魏壽餘에게 위읍인魏邑人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위장해, 사회士會를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나라는 위수여魏壽餘와 그의 처자妻子를 잡아 가두고는 밤에 수여壽餘를 도망가게 놓아주었다. 〈수여壽餘나라로 도망가서〉 나라에 귀순歸順하기를 청하니 진백秦伯이 허락하였다.
이때 수여壽餘는 조정에서 사회士會의 발을 슬쩍 밟았다.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냉정하게 버리는 자는 반드시 이보다 더 중대하게 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칼날이 목 앞에 있으면 손가락이 잘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병이 뱃속에 있으면 살갗이 그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저 〈손가락이나 살갗을〉 아낄만한 가치가 없다 하여 버리는 것이겠는가. 이는 반드시 버려서는 안 될 중대한 것이 있어서 〈손가락이나 살갗에 대한〉 아낌을 빼앗아서이다.
군자와 신의信義의 관계는 출생과 함께 생겨나서 마치 잠시도 버릴 수 없는 수족手足체부體膚 같은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버리고서 스스로 신의信義의 밖에 처신한다면 이것이 어찌 기꺼이 하는 것[득이得已]이겠는가. 그렇게 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회隨會신의信義나라의 공경公卿들을 일일이 세어보아도 누구도 그를 앞설 수 없으나, 수회隨會나라를 속이고 나라로 돌아올 때의 일로 말하면 비록 순우곤과 공손연公孫衍에게 말을 빌리고 장의張儀소진蘇秦에게 책략을 물었다 해도 이와 같은 데서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회隨會는 과연 무슨 소견이 있었기에 〈자신의 신의를〉 냉정하게 버렸는가?
위수여魏壽餘가 〈나라에〉 왔을 때가 수회隨會의 일생동안의 통색通塞(궁달窮達)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오늘에 달렸고, 돌아가지 않는 것도 오늘에 달렸으니,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돌아갈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며, 지금 이 책략이 시행되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다시 시행할 책략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수회隨會가 평소에 버리지 않았던 것을 냉정하게 버린 이유이다.
아! 가령 수회隨會가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음이 있었다는 도리를 알았다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에 본래 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의 몸은 비록 나라로 돌아갔으나 그 마음이 이미 달아나 돌아올 줄 모르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다. 일신의 이해利害를 위해 신의信義를 버리는 것이 옳지 않음을 사람들은 아는데, 나라를 위하여 계획하면서 신의信義를 버려서야 되겠는가?
온교溫嶠왕돈王敦에게 억류되었을 때 왕돈王敦온교溫嶠를 파견하여 건업建業으로 돌아가게 하자, 온교溫嶠는 실제로 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겉으로는 왕돈王敦이 의심할까 두려워 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여, 이미 왕돈王敦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다가 다시 들어온 것이 두세 차례였다. 온교溫嶠왕돈王敦을 속인 방법이 바로 수회隨會진백秦伯을 속인 방법이다.
수회隨會는 자신의 이해를 위해 꾀하였으니 당연히 군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겠으나, 온교溫嶠는 나라를 위해 꾀하였으니 어찌 그 마음을 양찰諒察하고 그 권술權術(임기응변의 수단)을 허여함이 옳지 않겠는가.
나라의 존망이 온교溫嶠 한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가령 온교溫嶠가 요행히 호구虎口를 벗어났다면 나라의 위난이 평정되고 재난이 해결되어 망해가는 나라가 존속되었을 것이니, 어찌 강남江南[강좌江左]의 군민君民만이 도움을 받았겠는가.
선제宣帝경제景帝 이래로 실로 온교溫嶠총가寵嘉(총애)하여 신의가 끝내 군친君親(군주君主)과 〈신하 사이에〉 존재하였으니 온교溫嶠의 행위는 어찌 〈왕돈에 대한〉 불신으로 〈진군晉君에 대한〉 신의를 지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신의는 잠시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자는 평소 한가한 날에도 오히려 차마 불신不信불의不義에 자처할 수 없는데, 하물며 감히 〈불신과 불의로써〉 군친君親을 더럽혀서야 되겠는가.
내가 평소 한가한 날에 속임수를 쓴 적이 없는데, 군부君父위난危難을 구제하는 일로 인해 속임수를 쓴다면 이는 나의 속임수가 군부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속임수가 군부로 인해 생겨났다면 이 또한 군부의 속임수와 일반이다.
군부를 위난에서 벗어나게 하려다가 도리어 군부를 속임수에 들게 하였으니, 충효忠孝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온교溫嶠죄책罪責하는 이유이다.
나라를 위태롭게 한 자는 왕돈王敦 〈한 사람일〉 뿐이니 가령 온교溫嶠가 심력을 다하였으나 사직社稷을 구제할 수 없어서 죽음으로써 뒤를 이었더라도 바로 나라를 망친 잘못은 왕돈王敦에게 있고 온교溫嶠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온교溫嶠가 구차하게 속임수를 써서 요행히 사직은 보존하였으나 바르지 못한 악명으로 군부를 욕되게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나라를 위태롭게 한 자는 왕돈王敦이지만 나라를 욕되게 한 자는 온교溫嶠이다. 오십 보로써 백 보를 비웃는 것이니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세속의 말에 군부君父위난危難 중에 있을 때에 안전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속임수나 부정한 방법을 써도 안 될 것이 없다고 하니, 이는 모두 온교溫嶠와 같은 무리를 가리켜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래와 같은 것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의 몸이 위난에 처했을 때에 자신의 명예를 아낄 줄을 아는 자는 반드시 감히 속임수를 써서 위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지만 군부가 위난에 처했을 때는 속임수를 쓰니, 이는 어찌 속임수를 써서 자신이 위난에서 벗어나면 스스로 해명할 방법이 없으나 속임수를 써서 군부를 위난에서 벗어나게 하면 군부에게 책임을 돌리고 스스로 해명할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겠는가?
이는 군부를 바로 내가 죄악을 돌릴 수 있는 곳으로 여긴 것이다. 이는 천하게 여기는 것으로 군부를 섬기는 것이니 야박하기 그지없다.
수회隨會의 과실은 둥근 갓을 쓴 자(유자儒者)들이 모두 알고 있지만, 온교溫嶠의 일은 그의 뜻이 충효에 있었으므로 나는 아직 학문을 한 적이 없는 자들이 불행히도 그 과실을 답습할까 두렵다. 그러므로 이렇게 논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노라.


역주
역주1 : 士會가 秦나라를 强盛해지도록 도와서 晉나라의 害가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附注〉
역주2 : 諸浮는 晉나라 땅이다. 은밀한 謀議가 누설될 것을 우려해 外野로 가 사람들을 물리치고서 사사로이 모의한 것이다.(≪十三經注疏≫)
역주3 : 文公 6년에 賈季가 狄으로 도망갔다.〈杜注〉 隨會는 士會이고, 賈季는 狐射姑이다.〈附注〉
역주4 : 中行桓子는 荀林父이다. 僖公 28년에 비로소 中行의 將帥가 되었기 때문에 ‘中行’을 氏로 삼은 것이다.〈杜注〉 賈季를 불러들여 그 地位를 회복시켜주라는 말이다.〈附注〉
역주5 : 賈季는 狐突의 손자이니 본래 狄人이다. 狄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미리 대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左氏會箋≫)
역주6 : 狐偃의 舊勳이 있다는 말이다.〈杜注〉 舊勳은 그의 아버지 狐偃이 文公에게 세운 功을 말한 것이다.
역주7 : 그가 文公 6년에 公子 樂을 불러들인 일을 말한 것이다.
역주8 : 陽處父를 죽였기 때문에 죄가 크다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9 : 스스로 卑賤하게 처신하는 자는 염치가 없는데 隨會는 비천하게 처신하면서도 염치가 있고, 유순한 자는 남의 침범을 받는데 隨會는 유순하면서도 남의 침범을 받지 않으니, 이는 사람들이 능히 할 수 없는 일인데 隨會는 능히 한다는 말이다.(≪左氏會箋≫)
역주10 : 魏壽餘는 畢萬의 後裔이다. 帑은 壽餘의 아들이다.〈杜注〉 壽餘는 魏邑을 지키는 大夫이다. 壽餘가 그 私邑의 人民을 거느리고서 晉나라를 배반하고 秦나라에 붙을 것처럼 위장한 것인데, 실은 士會가 魏邑을 취하기 위해 오도록 유인해 歸國시키기로 계책을 꾸민 것이다. 壽餘의 처자는 晉나라에 잡아 가두고 壽餘는 밤에 몰래 도주하게 한 것이다.〈附注〉
역주11 : 魏邑을 사사로이 秦나라에 바치기를 청한 것이다.〈附注〉
역주12 : 그 읍을 接受하겠다고 허락한 것이다.〈杜注〉
역주13 : 士會의 발을 밟은 것은 그를 떠나게 하고자 한 것이다.〈杜注〉 壽餘는 많은 사람 앞에서 士會에게 말로 자기의 의사를 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을 밟아 士會를 데리러 왔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역주14 : 溫嶠(288~329)와 王敦(266~324)은 東晉 사람이다. 왕돈이 江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 온교를 사신으로 보냈다. 왕돈이 온교를 억류하고 보내지 않아, 온교는 오랜 시간 왕돈 치하에 있게 된다. 온교가 晉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속내를 숨기고 왕돈에게 거짓으로 충심을 보이니, 결국 왕돈이 온교를 믿고 晉의 조정이 있는 建業으로 온교를 보낸다. 이때 온교는 끝까지 건업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을 감추고 짐짓 다시 강동으로 돌아오는 몸짓을 두세 차례 하여 더욱 왕돈으로부터의 의심에서 벗어나 마침내 건업에 돌아오게 된다. 조정으로 돌아온 온교는 황제에게 왕돈의 반역사실을 고하고 마침내 왕돈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晉書≫ 〈溫嶠列傳〉)
역주15 : 宣景은 西晉의 宣帝와 景帝이다. 선제는 司馬懿이며 경제는 司馬師이다. 司馬懿의 손자인 司馬炎이 西晉의 초대황제가 된 뒤에 각각 선제와 경제로 추존하였다.
역주16 : 저본에는 ‘寘’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實’로 바로잡았다.
역주17 : 事理에 통달한 儒者을 가리키는 말이다. ≪莊子≫ 〈田子方〉에 “儒者 冠圓冠者 知天時 履句屨者 知地形(儒者가 둥근 갓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天時를 아는 것을 상징하고, 네모난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은 地形을 잘 아는 것을 상징한다.)”이라고 하였다.

동래박의(4)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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