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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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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祀事作案하야 摹寫神采燁然이라
海於天地間 爲物最鉅하니 自三代聖王으로 莫不祀事하니라
컨대 而南海神最貴하야 在北東西三神河伯之上하니 號爲祝融이라
天寶中 天子以爲古爵莫貴於公侯 故海嶽之祝 犧幣之數 하니 所以致崇極於大神하니라
今王亦爵也어늘 而禮海嶽尙循公侯之事하고 虛王儀而不用하니 非致崇極之意也
由是冊尊南海神爲廣利王하고 祭式 與次俱昇하니라 因其故廟하야 易而新之하니
在今廣州治之東南海道八十里 扶胥之口 黃水之灣하니라
常以立夏氣至 命廣州刺史行事祠下하고 事訖驛聞하라하시니라
而刺史常節度五嶺諸軍하고 仍觀察其郡邑하니 於南方事無所不統이라
地大以遠이라 故常選用重人하니 旣貴而富하야 且不習海事니라
又當祀時하야는 海常多大風일새 將往하고 旣進 觀顧怖悸
故常以疾爲解하고 而委事於其副하니라 其來已久 上雨旁風이로되 無所蓋障하며
牲酒瘠酸 取具臨時하며 水陸之品 狼籍籩豆하며 薦裸興俯 不中儀式이라
吏滋不供하니 神不顧享이라 盲風怪雨 發作無節하야 人蒙其害하니라
元和十二年 始詔用前尙書右丞國子祭酒魯國爲廣州刺史兼御史大夫하야 以殿南服하니라
公正直方嚴하고 中心樂易하니라 祇愼所職하야 治人以明하고 事神以誠하야 內外單盡호되 不爲하니라
至州之明年將夏 自京師至하니 吏以時告하니라 公乃하고
誓群有司曰 冊有皇帝名하니 乃上所自署 其文曰 嗣天子某 謹遣官某敬祭하노라
其恭且嚴如是하시니 敢有不承 明日 吾將宿廟下하야 以供晨事하리라
明日吏以風雨白이나 不聽하다 於是州府文武吏士凡百數 交謁更諫이나 皆揖而退하니라
公遂陞舟 風雨少弛하야 櫂夫奏功하고 雲陰解駁하야 日光穿漏하고 波伏不興하니라
載暘載陰이러니 天地開除하야 月星明穊하니라
五鼓旣作하고 牽牛正中 公乃盛服執笏하고 以入하니 文武賓屬 俯首聽位하야 各執其職하니라
牲肥酒香하고 罇爵淨潔하며 降登有數하니 神其醉飽하고 海之百靈秘怪 畢出하야 하야 來享飮食이라
闔廟旋艫하니 祥飊送颿하고 旗纛旄麾 飛揚晻藹하니라
鐃鼓嘲轟하고 高管噭譟하며 武夫奮櫂하고 工師唱和하니
穹龜長魚 踊躍後先하고 乾端坤倪 軒豁呈露 祀之之歲 風災熄滅하야 人厭魚蟹하고 五穀胥熟이라
明年祀歸 又廣廟宮而大之하야 治其庭壇하고 改作東西兩序 齋庖之房하고 百用具修
明年其時 公又固往하야 不懈益虔하니 歲仍大和하야 耋艾歌詠하니라
始公之至 盡除他名之稅하고 하며 四方之使 不以資交하여 以身爲帥하니라
燕享有時하고 賞與以節하니 公藏私畜하야 上下與足하니라
於是免屬州負逋之緡錢卄有四萬 米三萬二千斛하며 賦金之州 耗金一歲八百이라 困不能償 皆以丐之하고
加西南守長之俸하고 誅其尤無良不聽令者하니 由是皆愼法하니라
人士之落南不能歸者 與流徙之冑百卄八族 用其才良하고 而廩其無告者하며
其女子可嫁 與之錢財하야 令無失時하니 하야 地方數千里 不識盜賊하야
山行海宿 不擇處所하니라 事神治人 其可謂備至耳矣로다
咸願刻廟石以著厥美하고 而繫以詩일새 乃作詩하노라
南海
祝融之宅이라
卽祀于旁
帝命南伯이라
吏惰不躬이러니
正自今公이라
明用享錫하야
右我家邦이라
惟明天子
惟愼厥使로다
我公在官하니
神人致喜로다
海嶺之陬
旣足旣濡하니
胡不均弘하야
俾執事樞
公行勿遲하며
公無遽歸어다
匪我私公이라
神人具依니라


02. 南海神廟
제사 지내는 일로 文案을 만들어 묘사한 神采(고상한 풍채)가 찬란하다.
바다는 천지 사이에서 가장 거대한 物體이니 三代聖王으로부터 제사 지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傳記를 상고하건대, 南海神의 지위가 가장 尊貴하여, 西河伯의 위에 있으니, 祝融이라 호칭한다.
天寶 연간에 天子께서 “옛날의 爵位에는 보다 존귀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四海五嶽祝文과 희생과 폐백의 를 〈를〉 모방해 따랐으니, 이는 大神에게 지극한 존경을 바치기 위함이었다.
지금의 爵位인데, 四海五嶽을 예우함에 있어 오히려 []를 따르고 의 의식은 비워두고 쓰지 않으니, 지극한 존경을 바치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로 인해 南海神을 책봉해 높여 廣利王으로 삼고, 와 제사의 의식을 의 지위와 함께 올렸다. 南海神舊廟를 고쳐 새롭게 지었는데,
南海神祠圖(≪三才圖會≫)南海神祠圖(≪三才圖會≫)
지금의 廣州 治所에서 동남쪽 뱃길로 80리의 〈지점인〉 扶胥口黃水灣에 있다.
항상 立夏 절기가 오면 廣州刺史에게 명하여 〈직접 가서〉 사당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치고는 驛馬를 달려 보고하게 하였다.
刺史는 항상 五嶺諸軍節度(통솔)하고, 또 각 의 관리들을 관찰하니, 남방의 일에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다.
嶺南은 땅이 광대하고 〈도성과의〉 거리가 멀므로 항상 〈조정의〉 重臣 중에서 뽑아 〈刺史로 보냈으니,〉 이미 신분이 고귀하고 녹봉이 풍부하여 바다에 관한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또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항상 바다에 큰 바람이 많기 때문에 제사 지내러 가려 할 때에는 모두 근심하고 번민하며 이미 出發[]한 뒤에는 앞뒤를 돌아보며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역대의 자사들은〉 항상 병을 핑계로 제사 지내는 일을 副官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온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明宮(神廟)과 齋廬(齋室)가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어오는데도 지붕을 덮지도 벽을 가리지도 않았으며,
희생은 비쩍 마르고 술은 시어 터졌는데, 그마저도 제사 때가 되어서야 마련하며, 水産品과 토산품이 담긴 籩豆가 어지러이 놓여 있으며, 祭物을 올리고 降神할 때에 몸을 일으키고 굽히는 것이 儀式에 맞지 않았다.
官吏가 갈수록 더욱 제사를 올리지 않으니[不供], 이 제사를 흠향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찬 바람과 사나운 비가 무시로 발작하여 백성들이 그 해를 입었다.
元和 12년에 비로소 詔書를 내려 전 尙書右丞 國子祭酒 魯國 孔公(孔戣)을 廣州刺史 兼御史大夫에 임명하여, 南方鎭守[殿]하게 하였다.
孔公은 사람됨이 正直하고 엄숙하며 마음이 화열하고 平易하였다. 오직 맡은 바의 職務에만 謹愼하여, 백성을 嚴明하게 다스리고 신을 정성으로 섬겨, 內外(治人事神)에 정성을 다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廣州에 부임한 이듬해 여름 무렵에 京師로부터 祝冊이 내려오니 관리가 〈立夏〉 때가 되었다고 아뢰었다. 孔公은 이에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祝冊을 살피고서,
모든 有司들에게 맹세하기를 “祝冊皇帝의 이름자가 있으니, 이는 바로 황제께서 직접 쓰신 것이다. 그 祝文에 ‘先皇의 뒤를 이은 天子 아무개는 삼가 某官 를 보내어 공경히 제사를 올린다.’라고 하셨다.
황제께서 공경하고 엄숙하심이 이와 같으니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일 나는 장차 神廟 아래에서 유숙하고서 새벽에 제사를 올리겠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관리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고 아뢰었으나, 孔公은 듣지 않았다. 이에 廣州府文武官 수백 인이 번갈아 謁見하고서 간하였으나, 모두 하고서 물러나왔다.
孔公이 마침내 배에 오르니 비바람이 조금 누그러져서 사공이 힘을 다해 배를 젓고, 검은 구름이 군데군데 벗겨져 그 사이로 햇빛이 새어나왔으며, 파도도 일지 않고 잠잠하였다.
犧牲을 살피던 저녁에는 개었다 흐렸다 하더니 제삿날 밤에는 천지가 활짝 개어 달과 별이 밝고 촘촘하였다.
5을 알리는 북이 울리고 牽牛星이 하늘 한가운데에 뜨자, 이에 공공이 禮服을 갖추어 입고 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제사를 지내니, 文武官員賓屬(幕僚)들이 고개 숙여 명을 듣고는 자기들의 자리로 가서 각각 맡은 직무를 봉행하였다.
희생은 살지고 술은 향기로우며, 동이와 술잔이 정결하며, 오르내림이 禮數(儀節)가 있으니, 도 아마 술에 취하고 음식에 배불렀을 것이고, 바다의 온갖 靈物怪物도 순식간[慌惚]에 모두 나와서 꿈틀대며 와서 음식을 흠향했을 것이다.
〈제사를 마치고서〉 廟門을 닫고 배를 돌리자, 상서로운 바람이 돛에 불어 배를 보내고 각종 깃발이 펄럭이며 하늘을 가려 컴컴하였다.
징과 북, 그리고 高音管樂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武夫들은 힘차게 배를 젓고, 樂工들은 서로 노래를 주고받았다.
큰 거북과 긴 물고기가 앞뒤에서 뛰어오르고, 하늘 끝과 땅 끝이 탁 트여 훤하게 드러났다. 제사를 지낸 해에는 風災가 없어 백성들이 고기와 게를 실컷 먹고 오곡이 모두 잘 여물었다.
이듬해 제사철이 돌아오면 또 廟宮(神廟)을 넓혀 키우고서 廟庭祭壇을 수축하고, 西의 두 齋舍[]와 齋室廚房[]을 改築하고, 모든 用品을 모두 修理하였다.
이듬해 그때가 돌아오자, 공공은 또 굳이 가서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정성을 다하니, 歲事(농사)가 연거푸[] 大豐[大和]이 들어서 늙은이들이 〈태평의〉 노래를 불렀다.
처음 공이 이곳에 부임했을 적에 다른 名目賦稅를 모두 없애고, 에서 주는 俸祿으로 생활[衣食]하는 자 중에 없어도 될 만한 자는 罷職하였으며, 사방에서 온 使者들을 재물로 사귀지 않는 것을 몸소 실천해 모범을 보였다.
燕享(빈객을 접대하는 연회)에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을 주는 데 절제를 두니, 公家私家에 재물[]이 쌓여 上下(公私)가 함께 풍족해졌다.
이에 屬州에서 오랫동안 내지 못한 稅金 24만 (千文)과 쌀 3만2천 을 면제해주고, 돈으로 를 바치는 고을의 耗金이 1년에 800냥인데 곤궁하여 償還하지 못한 것을 모두 면제[]해주었으며,
西南地方 守長들의 俸祿을 올려주고, 더욱 불량하여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니, 이로 말미암아 守長들이 모두 스스로 체통을 소중히 여겨 법을 신중히 遵守하였다.
남방에 떨어져서 돌아가지 못한 士人流配人의 후손 128家族 중에 재능이 있거나 선량한 자를 등용하고, 호소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양식을 지급하고,
출가시킬 때가 된 딸이 있는 집에는 돈과 재물을 주어 婚期를 잃지 않게 하였다. 이에 형벌과 은덕이 동시에 거행되어 수천 리 지역이 도적을 모르게 되어,
산길을 가거나 바다에서 묵거나 처소를 가리지 않았으니, 〈孔公은〉 을 섬기고 사람을 다스린 것이 모두 지극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廟庭에 비석을 세워 그 아름다운 공적을 드러내고, 를 지어 붙이기를 원하기에 다음과 같이 시를 짓는다.
남해의 陰墟
祝融邸宅이지
그 곁에서 제사 올릴 적에
황제께서 南伯에게 명하셨네
관리들 게을러 몸소 거행치 않더니
지금 공으로부터 바로잡혔네
神明이 황제가 내린 물건 흠향하고서
우리나라 도우셨네
영명하신 천자께서
사자를 신중히 선발하셨네
우리 공께서 관직에 계시니
신명과 백성들 크게 기뻐하였네
海嶺 모퉁이의 궁벽한 곳이
이미 풍족해 은택 입었으니
어찌 그 은택 고루 널리 펼치도록
공에게 권한 맡기지 않으시리오
공의 걸음 지체하지 마소
그렇다고 서둘러 돌아가지도 마소
내 사사로이 공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신명과 백성이 함께 의지하기 때문이라오


역주
역주1 南海神廟碑 : 이 碑文은 元和 15년(820)에 지은 것이다. ≪五百家注昌黎文集≫에 의하면 이 비의 앞면에 “使持節 袁州諸軍事 守袁州刺史 韓愈가 짓다.[使持節袁州諸軍事守袁州刺史韓愈撰]”라 하고, 그 뒷면에 “元和 15년 10월 1일 세우다.[元和十五年十月一日建]”라 하였다.
역주2 考於傳記 : ≪太平御覽≫ 〈鬼神部〉에 “맨 앞이 南海神, 다음이 東海神, 다음이 西海神, 다음이 北海神, 다음이 河伯雨師이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3 : 地位이다.
역주4 放而依之 : 모방해 따름이다.
역주5 祝號 : 祝은 六祝이니, 곧 제사 지낼 때에 神에게 올리는 여섯 종류의 祈禱文이고, 號는 六號이니 곧 세 종류의 神과 세 종류의 祭品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역주6 憂慼 : 근심하고 괴로워함이다.
역주7 明宮齋廬 : 明宮은 廟宇를 이르고, 齋廬는 재계하는 廬舍이다.
역주8 孔公 : 이름이 戣(규)이고 字가 君嚴으로 孔子의 38대손이다.
역주9 表襮 : 자기의 장점을 드러냄이다.
역주10 祝冊 : 祝板이니, 곧 天子가 署名한 祝文을 이른다.
역주11 齋祓視冊 : 齋祓은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함이고, 視冊은 祝板을 살핌이다.
역주12 省牲之夕 : 古代에 天地神祇에 제사할 때는 제사 지내기 하루 전날 저녁에 執事官이 제사에 쓸 희생 및 祭器 등의 준비상황을 시찰하였다. ≪周禮 春官 宗伯≫
역주13 將事之夜 : 將事는 일을 거행함이니, 곧 제삿날 밤을 이른다.
역주14 卽事 : 일을 함이니, 여기서는 제사를 지내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15 慌惚 : 瞬息間이다.
역주16 蜿蜿蛇蛇(이이) : 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양이다.
역주17 罷衣食於官之可去者 : 俸祿으로 생활하는 자들을 減員하여 예산을 절약하였다는 말이다.
역주18 自重 : 언행을 삼가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존중함이다.
역주19 刑德竝流 : 형벌과 은덕이 함께 거행됨이다.
역주20 陰墟 : 海中의 水城이다. 고대에는 陰陽으로 만물의 化生을 해석하였다. 水는 陰이고, 墟는 古城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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