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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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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序詩一事相感欷 簡而韻折이라
元和五年十月日 范陽盧殷以故登封縣尉卒登封하니 年六十五
君能爲詩하야 自少至老詩可錄傳者 在紙凡千餘篇이라 無書不讀이나 然止用以資爲詩하니라
與諫議大夫孟簡協律孟郊監察御史馮宿好하야 期相推挽이나 卒以病不能爲官하니라
在登封盡寫所爲詩하야 扺故宰相東都留守鄭公餘慶하니라
留守數以帛米周其家하고 書薦宰相이나 宰相不能用하니 竟饑寒死登封하니라
將死 自爲書告留守與河南尹하야 乞葬己하고 又爲詩與常所來往河南令韓愈曰 爲我具棺하라
留守尹爲具凡葬事하고 韓愈與買棺하고 又爲作銘하니라 十一月某日 葬嵩下鄭夫人墓中하니라
君始娶滎陽鄭氏 後娶隴西李氏 生男輒死하야 卒無子하니라 女一人이나 學浮屠法하야 不嫁하고 爲比丘尼云이라


08. 登封縣尉 盧殷墓誌銘
〈죽을 때에〉 를 지어 보낸 일을 서술하면서 감격하고 탄식한 곳이 〈문장은〉 간략하지만 운치는 풍부하다.
元和 5년(810) 10월 아무 날에 范陽盧殷 登封縣尉登封에서 하였으니 나이가 65세였다.
盧君를 잘 지어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지은 중에 기록해 전할 만한 것으로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이 모두 천여 이다. 노군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다만 를 짓는 자료로만 사용하였을 뿐이다.
諫議大夫 孟簡, 協律郞 孟郊, 監察御史 馮宿과 사이가 좋아, 기대하며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었으나 끝내 질병으로 인해 벼슬아치가 되지 못하였다.
登封에 있을 때에 지은 를 모두 筆寫하여 전 宰相 東都留守 鄭公 餘慶에게 보냈다.
留守(鄭餘慶)는 자주 布帛米穀으로 노군의 집을 구제하고, 宰相에게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재상이 등용하지 않으니, 노군은 끝내 饑寒에 시달리다가 登封에서 죽었다.
죽으려 할 때에 직접 편지를 써서 東都留守河南尹에게 자기를 장사 지내달라고 고하고, 또 항상 왕래하던 벗인 河南縣令 韓愈에게 “나를 위해 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를 지어 보냈다.
동도유수와 하남윤은 장사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고, 한유는 관을 마련하는 일에 참여하고 또 그를 위해 墓誌銘을 지었다. 11월 아무 날에 嵩山 아래에 있는 鄭夫人의 무덤에 장사 지냈다.
盧君初娶夫人滎陽 鄭氏이고, 後娶夫人隴西 李氏이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번번이 죽어서 끝내 아들이 없었다. 딸이 하나 있었으나 佛法을 배워 시집가지 않고 比丘尼가 되었다고 한다.


역주
역주1 登封縣尉盧殷墓誌銘 : 이 墓誌銘은 元和 5년(810)에 盧殷(746~810)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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