惟路氏遠有
하니라 自隋尙書兵部侍郞諱
으로 四代而至冀公
하니라
冀公諱嗣恭
이니 以小邑蕭關令
하니라 開元
하고 書于太史
하니라
官至兵部尙書하고 封冀國公하니라 薨에 贈尙書右僕射司空하니라
公諱應이요 字從衆이니 冀公之嫡子라 用大臣子謹飭일새 擢至侍御史著作郞하니라
選刺虔州하야 割餘雩都하야 作縣安遠하야 以利人屬하고 鑿敗灘石하야 以平贛梗하고
陶甓而城
하야 罷人屢築
하니라 詔嗣冀封
하고 又加尙書屯田郞中
하고 하니라
遂臨于溫하야 築隄岳城橫陽界中하니 二邑得上田하고 除水害하니라
拜尙書兵部郞中兼御史中丞淮南軍司馬라가 改刺廬州하야 又甓其城하니 人不歲苦하니라
使江東有功으로 用半歲歷常州遷至宣歙池觀察使하고 進封襄陽郡王하니라
至則出倉米
하야 下其估半
하여 以廩餓人
하니라 蜀
에 行軍千五百人於蜀
하니라
將反
하니 以聞
하고 置鄕兵萬二千
하니라 李錡反
에 命將期以卒救湖常
하고 坐牢江東心
하니 錡以無助敗縛
하니라
作響山亭하야 營軍于左右하니 權丞相善之하야 鑱其說響山石하니라
居宣五年에 以疾去位하니라 校其倉하니 得石者五十萬餘요 府得錢千者八十萬이라
公之爲州에 逢水旱이면 喜賤出與人하고 歲熟이면 以其得收ㄹ새 常有贏利하니라 故在所人不病饑하고 而官府畜積하니라
元和六年에 天子憫公疾하야 不可煩以職이라하고 卽其處拜左散騎常侍하야 以其祿居하니라
其歲九月望에 薨于東都正平里第하니 年六十七이라 明年에 葬京兆萬年少陵原하고 夫人滎陽鄭氏祔하니라
旣
에 其子臨漢
貫
이 與其弟賞貞謀曰 宜有刻也
라하고 告於叔父御史大夫鄜坊丹延觀察使恕
하고
曰
冀公之封
은 維艱就功
이라 襄陽繼大
하야 啓慶自躬
이라 于虔洎溫
히 厥
旣作
이라
以及職方
하고 遂
이라 朝夕人事
하니 이라 師于其鄕
하니 隣寇逼屈
이라
營軍響山
하고 로다 褒功刻表
하니 丞相之辭
라 而家
에 러니
病不能廷
하고 食祿卒齒
로다 大家
는 維難其保
하니 旣顯旣
은 戒于終咎
니라
伊我襄陽
은 하야 延畀
하니 莫不率守
리라 有墓于原
하고 하니 以告無期
하야 博士是銘
하노라
07. 唐나라 銀靑光祿大夫 守左散騎常侍로 致仕한 上柱國 襄陽郡王 平陽 路公의 神道碑
路氏는 가문의 世系가 오래되었다. 隋나라 尙書兵部侍郞 諱 袞으로부터 4代를 전해 冀公에 이르렀다.
冀公은 諱가 嗣恭이니 작은 고을인 蕭關의 縣令으로 명성이 드러났다. 開元 연간에 玄宗이 그의 이름을 嗣恭으로 고쳐주고서 太史(國史)에 기록하였다.
그의 治績은 靈州에 있을 때에 〈가장 두드러졌고,〉 마지막엔 남방에서 功을 세워 大福을 누려 先世를 계승하고 後承의 家業을 열어주었다.
관직이 兵部尙書에 이르고 冀國公에 봉해졌다. 사후에 尙書右僕射 司空에 추증되었다.
公은 諱가 應이고 字가 從衆이니 冀公의 嫡子이다. 公은 大臣의 자제로서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였기 때문에 발탁되어 侍御史 著作郞에 이르렀다.
虔州刺史에 選任되어서는 雩都縣을 분할하여 그 분할하고 남은 땅으로 安遠縣을 설치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여울의 바위를 뚫어 막힌 贛水의 물을 평탄하게 흐르게 하고,
벽돌을 구워 城을 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을 수축하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公에게 冀國公의 封號를 승계시키고, 또 尙書屯田郞中으로 올리고, 官服의 색깔도 官階에 따라 올려 〈金紫服을 입게 하였다.〉
드디어 溫州刺史로 부임해 岳城과 橫陽 사이에 제방을 쌓으니, 두 고을이 상등 田地를 얻고 水害를 면하였다.
이에 尙書兵部郞中‧兼御史中丞‧淮南軍司馬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廬州刺史가 되어 또 廬州의 城을 벽돌로 쌓으니, 사람들이 해마다 성을 쌓는 고역을 면하였다.
이에 조정으로 들어가 尙書職方郞中‧兼御史中丞이 되어 鹽鐵使를 보좌하였다.
江東에 刺史로 나가서 공을 세웠으므로 반년 만에 常州刺史를 거쳐 宣歙池觀察使에 이르고, 襄陽郡王에 進封되었다.
公은 부임한 곳마다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그 값을 절반으로 낮추어 주린 백성들에게 공급하였다.
蜀의 劉闢을 誅殺하고서 군대 1,500명을 蜀으로 보냈다.
李錡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公은〉 조정에 보고하고서 鄕兵 12,000명을 배치하였다. 李錡가 반란을 일으키자 將卒들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해 급히 가서 湖州와 常州를 구원하게 하고, 자신은 앉아서 江東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니, 李錡는 援軍이 없었기 때문에 패전해 체포되었다.
公은 響山亭을 세우고서 그 주위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權丞相(權德輿)이 이 일을 훌륭하게 여겨, 그 이야기를 響山의 돌에 새겼다.
宣州觀察使로 있은 지 5년째 되던 해에 질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이 물러난 뒤에〉 조사해보니 창고에 양곡이 50만 석이고, 府庫에 千錢씩 꿴 돈꿰미가 80만 개였다.
公은 고을을 다스릴 적에 水害나 旱災를 만나면 양곡을 싼값으로 백성들에게 내어주고, 풍년이 들면 양곡을 사들이기를 좋아하였기에 항상 양곡이 넉넉하였다. 그러므로 公이 다스린 곳마다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지 않았고 官府에는 畜積이 있었다.
元和 6년(811)에 天子께서 公의 병을 가엾게 여겨 직무로 公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공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左散騎常侍에 제수하여 그 祿으로 편히 살게 하셨다.
그해 9월 15일에 東都 正平里 第宅에서 薨逝하니 향년이 67세였다. 이듬해에 京兆府 萬年縣 少陵原에 장사 지내고, 夫人 滎陽 鄭氏를 合祔하였다.
이윽고 公의 아들 臨漢縣男 路貫이 그 아우 賞貞과 함께 상의하기를 “응당 碑刻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고서, 그 叔父 御史大夫 鄜‧坊‧丹‧延州觀察使 路恕에게 告하고,
그 族弟 進士 路群에게 부탁[因]해 와서 碑銘을 청하기에 드디어 路公의 사적에 의거해 銘을 지었다.
銘은 다음과 같다.
冀國公으로 봉해진 것은
위난 중에 공적 이루어서이네
襄陽郡王이 대업을 계승하시어
몸소 큰 복을 개척하셨네
虔州에서 溫州에 이르기까지
선인이 이루지 못한 공업 이루셨네
尙書職方郞中에 미치시고
마침내 방백의 자리에 앉으셨네
조석으로 백성 위해 일처리하니
백성들 부유하고 국고 충실하였네
그곳에 鄕兵 설치하니
이웃의 반적들 겁먹고 굴복했지
響山에 군영 설치하고
정자 아름답게 꾸몄네
공적 기려 드러내니
승상의 문장이네
직무를 교대하고 집에 계실 때엔
서용된 관직 멀어도 가까이 가서 받으셨는데
병이 들자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고
녹을 먹으며 일생을 마치셨네
인간 세상의 명문대가들
그 부귀 보전하기 어려웠으니
이미 혁혁하고 풍성한 집안들은
최후에 닥칠 재앙을 경계해야지
우리 襄陽郡王께서는
삼감으로써 부귀 얻으시어
후손에게 길이 전해주시니
잘 지키지 않는 후손 없으리
무덤은 언덕에 있고
세운 비석은 길가에 서 있으니
끝없이 이어질 후손에게 일러주려고
박사가 이 비명 짓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