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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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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惟路氏遠有하니라 自隋尙書兵部侍郞諱으로 四代而至冀公하니라
冀公諱嗣恭이니 以小邑蕭關令하니라 開元하고 書于太史하니라
하고 終功南邦하야 享有하야 紹開厥家하니라
官至兵部尙書하고 封冀國公하니라 贈尙書右僕射司空하니라
公諱應이요 字從衆이니 冀公之嫡子 用大臣子謹飭일새 擢至侍御史著作郞하니라
選刺虔州하야 割餘雩都하야 作縣安遠하야 以利人屬하고 鑿敗灘石하야 以平贛梗하고
陶甓而城하야 罷人屢築하니라 詔嗣冀封하고 又加尙書屯田郞中하고 하니라
遂臨于溫하야 築隄岳城橫陽界中하니 二邑得上田하고 除水害하니라
拜尙書兵部郞中兼御史中丞淮南軍司馬라가 改刺廬州하야 又甓其城하니 人不歲苦하니라
入爲尙書職方郞中兼御史中丞하야하니라
使江東有功으로 用半歲歷常州遷至宣歙池觀察使하고 進封襄陽郡王하니라
至則出倉米하야 下其估半하여 以廩餓人하니라 行軍千五百人於蜀하니라
將反하니 以聞하고 置鄕兵萬二千하니라 李錡反 命將期以卒救湖常하고 坐牢江東心하니 錡以無助敗縛하니라
作響山亭하야 營軍于左右하니 權丞相善之하야 鑱其說響山石하니라
居宣五年 以疾去位하니라 校其倉하니 得石者五十萬餘 府得錢千者八十萬이라
公之爲州 逢水旱이면 喜賤出與人하고 歲熟이면 以其得收ㄹ새 常有贏利하니라 故在所人不病饑하고 而官府畜積하니라
元和六年 天子憫公疾하야 不可煩以職이라하고 卽其處拜左散騎常侍하야 以其祿居하니라
其歲九月望 薨于東都正平里第하니 年六十七이라 明年 葬京兆萬年少陵原하고 夫人滎陽鄭氏祔하니라
其子臨漢 與其弟賞貞謀曰 宜有刻也라하고 告於叔父御史大夫鄜坊丹延觀察使恕하고
其族弟進士群以來請銘이어늘 遂以其事銘하노라

冀公之封
維艱就功이라
襄陽繼大하야
啓慶自躬이라
于虔洎溫
旣作이라
以及職方하고
이라
朝夕人事하니
이라
師于其鄕하니
隣寇逼屈이라
營軍響山하고
로다
褒功刻表하니
丞相之辭
而家
러니
病不能廷하고
食祿卒齒로다
大家
維難其保하니
旣顯旣
戒于終咎니라
伊我襄陽
하야
延畀하니
莫不率守리라
有墓于原하고
하니
以告無期하야
博士是銘하노라


07. 나라 銀靑光祿大夫 守左散騎常侍致仕上柱國 襄陽郡王 平陽 路公神道碑
路氏는 가문의 世系가 오래되었다. 나라 尙書兵部侍郞 으로부터 4를 전해 冀公에 이르렀다.
冀公嗣恭이니 작은 고을인 蕭關縣令으로 명성이 드러났다. 開元 연간에 玄宗이 그의 이름을 嗣恭으로 고쳐주고서 太史(國史)에 기록하였다.
그의 治績靈州에 있을 때에 〈가장 두드러졌고,〉 마지막엔 남방에서 을 세워 大福을 누려 先世를 계승하고 後承家業을 열어주었다.
관직이 兵部尙書에 이르고 冀國公에 봉해졌다. 사후에 尙書右僕射 司空에 추증되었다.
이고 從衆이니 冀公嫡子이다. 大臣의 자제로서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였기 때문에 발탁되어 侍御史 著作郞에 이르렀다.
虔州刺史選任되어서는 雩都縣을 분할하여 그 분할하고 남은 땅으로 安遠縣을 설치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여울의 바위를 뚫어 막힌 贛水의 물을 평탄하게 흐르게 하고,
벽돌을 구워 을 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을 수축하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에게 冀國公封號를 승계시키고, 또 尙書屯田郞中으로 올리고, 官服의 색깔도 官階에 따라 올려 〈金紫服을 입게 하였다.〉
드디어 溫州刺史로 부임해 岳城橫陽 사이에 제방을 쌓으니, 두 고을이 상등 田地를 얻고 水害를 면하였다.
이에 尙書兵部郞中兼御史中丞淮南軍司馬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廬州刺史가 되어 또 廬州을 벽돌로 쌓으니, 사람들이 해마다 성을 쌓는 고역을 면하였다.
이에 조정으로 들어가 尙書職方郞中兼御史中丞이 되어 鹽鐵使를 보좌하였다.
江東刺史로 나가서 공을 세웠으므로 반년 만에 常州刺史를 거쳐 宣歙池觀察使에 이르고, 襄陽郡王進封되었다.
은 부임한 곳마다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그 값을 절반으로 낮추어 주린 백성들에게 공급하였다.
劉闢誅殺하고서 군대 1,500명을 으로 보냈다.
李錡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은〉 조정에 보고하고서 鄕兵 12,000명을 배치하였다. 李錡가 반란을 일으키자 將卒들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해 급히 가서 湖州常州를 구원하게 하고, 자신은 앉아서 江東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니, 李錡援軍이 없었기 때문에 패전해 체포되었다.
響山亭을 세우고서 그 주위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權丞相(權德輿)이 이 일을 훌륭하게 여겨, 그 이야기를 響山의 돌에 새겼다.
宣州觀察使로 있은 지 5년째 되던 해에 질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이 물러난 뒤에〉 조사해보니 창고에 양곡이 50만 석이고, 府庫千錢씩 꿴 돈꿰미가 80만 개였다.
은 고을을 다스릴 적에 水害旱災를 만나면 양곡을 싼값으로 백성들에게 내어주고, 풍년이 들면 양곡을 사들이기를 좋아하였기에 항상 양곡이 넉넉하였다. 그러므로 이 다스린 곳마다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지 않았고 官府에는 畜積이 있었다.
元和 6년(811)에 天子께서 의 병을 가엾게 여겨 직무로 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서 공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左散騎常侍에 제수하여 그 祿으로 편히 살게 하셨다.
그해 9월 15일에 東都 正平里 第宅에서 薨逝하니 향년이 67세였다. 이듬해에 京兆府 萬年縣 少陵原에 장사 지내고, 夫人 滎陽 鄭氏合祔하였다.
이윽고 의 아들 臨漢縣男 路貫이 그 아우 賞貞과 함께 상의하기를 “응당 碑刻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고서, 그 叔父 御史大夫 延州觀察使 路恕에게 하고,
族弟 進士 路群에게 부탁[]해 와서 碑銘을 청하기에 드디어 路公의 사적에 의거해 을 지었다.
은 다음과 같다.
冀國公으로 봉해진 것은
위난 중에 공적 이루어서이네
襄陽郡王이 대업을 계승하시어
몸소 큰 복을 개척하셨네
虔州에서 溫州에 이르기까지
선인이 이루지 못한 공업 이루셨네
尙書職方郞中에 미치시고
마침내 방백의 자리에 앉으셨네
조석으로 백성 위해 일처리하니
백성들 부유하고 국고 충실하였네
그곳에 鄕兵 설치하니
이웃의 반적들 겁먹고 굴복했지
響山에 군영 설치하고
정자 아름답게 꾸몄네
공적 기려 드러내니
승상의 문장이네
직무를 교대하고 집에 계실 때엔
서용된 관직 멀어도 가까이 가서 받으셨는데
병이 들자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고
녹을 먹으며 일생을 마치셨네
인간 세상의 명문대가들
그 부귀 보전하기 어려웠으니
이미 혁혁하고 풍성한 집안들은
최후에 닥칠 재앙을 경계해야지
우리 襄陽郡王께서는
삼감으로써 부귀 얻으시어
후손에게 길이 전해주시니
잘 지키지 않는 후손 없으리
무덤은 언덕에 있고
세운 비석은 길가에 서 있으니
끝없이 이어질 후손에게 일러주려고
박사가 이 비명 짓노라


역주
역주1 唐銀靑光祿大夫守左散騎常侍致仕上柱國襄陽郡王平陽路公神道碑 : 이 비문은 元和 7년(812)에 지은 것이다. 一本에는 篇末에 “元和七年歲次壬辰十月丙子朔十五日庚寅建”이라는 글자가 있다고 하였다.
역주2 代序 : 世系를 이른다.
역주3 (袁)[袞] : 저본에는 ‘袁’으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袞’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發聞 : 명성이 드러남이다.
역주5 受賜更名 : ≪新唐書≫ 〈路嗣恭傳〉에 “路嗣恭은 처음 이름이 劍客인데, 世蔭으로 鄴尉(鄴縣의 縣尉)가 되었다. 席豫가 河朔黜陟使가 되어 表文을 올려 路嗣恭을 蕭關令으로 삼았다. 연이어 神鳥와 姑臧 두 縣으로 옮겼는데, 考績이 천하에서 제일이었다. 이에 玄宗은 漢나라의 賢臣 魯恭을 이을 만하다고 하고서 嗣恭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는 말이 보인다.
역주6 治行靈州 : 治績이 朔方節度使로 있을 때에 드러났다는 말이다. 靈州는 朔方節度使의 官署가 있는 곳이다. ≪舊唐書≫ 〈代宗紀〉에 “永泰 元年 10월 戊申에 형부시랑 路嗣恭을 檢校工部尙書 兼御史大夫 靈州大都督府長史로 삼아 關內副元帥 兼知朔方節度使에 충원하였다.”란 기록이 보인다.
역주7 丕祉 : 丕는 大이고, 祉는 福이다.
역주8 進服色 : 고대에는 官階에 따라 관복의 색깔이 달랐다. 唐代에는 3品 이상은 紫袍를, 4‧5품은 紅袍를, 6‧7품은 綠袍를, 8‧9품은 靑袍를 입었다.
역주9 鹽鐵使 : 唐代에 설치한 소금과 鐵의 생산 및 專賣를 담당하던 官員이다.
역주10 闢誅 : ≪舊唐書≫ 〈憲宗紀〉에 의하면, “順宗 永貞 원년(805) 8월에 劍南西川節度使 韋皐가 卒하자, 劉闢이 스스로 留後가 되었고, 또 三川 지역을 모두 統轄하고자 군대를 일으켜 梓州를 포위하였다. 元和 원년(806) 정월에 憲宗이 高崇文과 李元奕에게 명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9월에 유벽을 사로잡아 바치니, 戊子日에 버드나무 밑에서 斬首하였다.”고 하였다. 留後는 官名이다. 唐나라 중엽 이후로 藩鎭의 節度使가 사고를 당하면 종종 아들이나 조카, 또는 믿는 部將이나 관리에게 그 임무를 代行하게 하고서, ‘節度留後’ 또는 ‘觀察留後’라 칭하였다.
역주11 李錡 : 唐王室의 宗支(同宗의 支派)이다. 憲宗이 즉위한 2년에 諸道의 倔強者(세력이 강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던 자)들이 모두 入朝(조정에 와서 天子를 알현함)하니, 당시에 浙西節度使였던 李錡가 불안하여 드디어 入朝하는 체하고서, 병사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켜 留後 王澹과 大將 趙琦를 살해하게 하고, 蘇‧常‧杭‧湖‧睦 등 다섯 州의 戍將들로 하여금 刺史를 죽이고서 潤州를 점거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역주12 縣男 : 爵名이다. ≪金史≫ 〈百官志〉에 “正5品을 縣子라 하고, 從5品을 縣男이라 한다.”고 하였다.
역주13 : 부탁함이니, ≪孟子≫ 〈公孫丑 下〉 10章의 “時子因陳子而以告孟子(時子가 陳子에게 부탁[因]하여 그 말을[以] 孟子에게 고하게 하였다.)”의 ‘因’자와 용례가 같다.
역주14 : 前人이 이루지 못한 功業을 이른다.
역주15 都邦伯 : 都는 居이고, 邦伯은 한 지방의 長을 이르니, 곧 觀察使가 된 것을 이른다.
역주16 下完上實 : 下完은 백성들의 생활이 부유함이고, 上實은 國庫가 充實함이다.
역주17 墻屋修施 : 墻屋은 房屋이니, 響山亭을 이른다. 修施는 修飾의 뜻이니, 곧 정자를 아름답게 꾸몄다는 말인 듯하다.
역주18 受代 : 官吏의 任期가 만료되어 後任者가 와서 교대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19 敍疏及邇 : 敍는 敍用(임용됨)이니, 곧 임용되면 任所가 아무리 멀어도 조정 가까이 가서 임명장을 받았다는 말인 듯하다.
역주20 凡代 : 一本에는 凡世로 되어 있다. 이 또한 唐 太宗의 이름자를 避諱하기 위해 ‘世’자 대신 ‘代’자를 쓴 것이다.
역주21 (願)[碩] : 저본에는 ‘願’으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碩’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2 克愼以有 : 능히 勤愼함으로써 爵祿과 富貴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역주23 後承 : 後孫을 이른다.
역주24 維樹在經 : 樹는 세운 碑石을 이르고, 經은 남북으로 향한 道路를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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