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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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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中多虛語點綴精神이라
國子司業竇公諱牟 六代祖敬遠 嘗封西河公일새 大父同昌司馬 四代仍襲爵名하니라
同昌諱胤 生皇考諱叔向하니 官至左拾遺溧水令하고 贈工部尙書하니라
尙書於大曆初名能爲詩文하니라 及公爲文 亦最長於詩 孝謹厚重하니라
進士登第 佐六府五公하고 八遷至檢校虞部郞中하니라
元和五年 眞拜尙書虞部郞中하고 轉洛陽令都官郞中澤州刺史하야 以至司業하니라
年七十四 長慶二年二月丙寅以疾卒하니라 其年八月某日 葬河南偃師先公尙書之兆次하니라
公善事繼母하야 家居未出하고 學問於江東하니라 尙幼也로되 名聲詞章 行于京師하니其至하니라
及公就進士且試 其輩皆曰 莫先竇生이라하니라 于時公舅袁高爲給事中하야 方有重名이러니 愛且賢公이나
然實未嘗以干有司하니라 公一擧成名而東이나 遇其黨必曰 非我之才 維吾舅之私라하니라
其佐昭義軍也 遇其하야하야 以定其危하니라 後將盧從史 重公不遣하고 奏進官職하니라
公視從史益驕不遜하고 僞疾經年이라가 轝歸東都하니라 從史卒敗死로되 公不以覺微避去爲賢告人하니라
公始佐崔大夫縱留守東都하고 後佐留守司徒餘慶하니라 歷六府五公한대 文武細麤不同이나
自始及終 於公無所有彼此言者하니라 六府從事幾且百人이라 有愿姦易險賢不肖不同이로되
公一接以和與信하니 卒莫與公有怨嫌者하니라 其爲郞官令守 愼法寬惠不刻하니라
敎誨於國學也 嚴以有禮하고 扶善遏過하며 益明上下之分하야 以躬先之하니 恂恂愷悌하야 得師之道하니라
公一兄三弟 常群庠鞏이라 進士 水部員外郞하고 朗䕫江撫四州刺史하니라
以處士徵하야 自吏部郞中拜御史中丞하야 出帥黔容以卒하니라
三佐大府하고 自奉先令爲登州刺史하니라 鞏亦進士 以御史佐淄靑府하야 皆有材名하니라
公子三人 長曰周餘 好善學文하고 能謹謹致孝하야 述父之志 曲而不黷하니라
次曰某 曰某 皆以進士貢이라 女子三人이라 愈少公十九歲 以童子得見이러니 於今四十年이라
始以師視公하고 而終以兄事焉이라 公待我一以朋友하고 不以幼壯先後致異하니 公可謂篤厚文行君子矣로다 其銘曰
後去觀津하야
而家平陵이라
遙遙厥緖
夫子是承이라
我敬其人하고
我懷其德이라
作詩孔哀
質于幽刻하라


05. 國子司業 竇公墓誌銘
중간에 빈말을 많이 하여 精神(문장)을 點綴(더욱 아름답게 꾸밈)하였다.
國子司業 竇公이고 가 아무개이다. 6대조 竇敬遠이 일찍이 西河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同昌郡司馬를 지낸 祖父에 이르기까지 연속 4 동안 西河公이란 爵名承襲하였다.
동창군사마 이 두공의 父親 叔向을 낳았는데, 官職左拾遺 溧水縣令에 이르고, 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
공부상서는 大曆(代宗의 연호) 초년에 詩文에 능하다는 명성이 났는데, 두공이 문장을 지음에 미쳐서도 가 가장 뛰어났다. 두공은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공손하며 인정이 많고 언행에 무게가 있었다.
進士試에 참가해 급제한 뒤에 6에서 다섯 (節度使)을 보좌하였고, 여덟 차례 승진하여 檢校虞部郞中에 이르렀다.
元和 5년(810)에 정식으로 尙書虞部郞中에 제수되었고, 洛陽令都官郞中澤州刺史를 거쳐 國子司業에 이르렀다.
74세인 長慶 2년(822) 2월 丙寅日에 병으로 하였다. 그해 8월 아무 날에 河南府 偃師縣에 있는 先親 尙書公墓域에 장사 지냈다.
당초에 竇公繼母를 잘 섬겨 집안에만 기거하고 出仕를 구하지 않았으나, 學問江東에 소문났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명성과 문장이 京師에 파다하니 사람들은 그가 경사로 오기를 기다렸다.
두공이 경사로 와서 進士試에 응시하려 하자 그 同輩들은 모두 “누구도 竇生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두공의 外叔 袁高給事中으로 있으면서 바야흐로 성대한 명성이 있었는데, 두공을 사랑하고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나 실로 일찍이 有司(考官)에게 청탁한 일이 없었다. 두공은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벗들을[] 만나면 반드시 “〈내가 급제한 것은〉 나의 재능이 아니라 외숙의 사사로운 교분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昭義軍節度使를 보좌할 때에 그 主將이 사망하는 일을 당하자, 두공은 잠시 節度使의 직무를 代理하여 위험한 국면을 안정시켰다. 후임으로 온 主將 盧從史는 두공을 重視하여 떠나보내지 않고 上奏하여 官職을 올려주었다.
두공은 노종사가 점점 교만하고 불손한 것을 보고는 1년이 넘도록 병이 난 체하다가 수레에 몸을 싣고 東都로 돌아왔다. 노종사가 마침내 실패해 죽었으되 두공은 자신이 노종사가 반역할 기미를 깨닫고서 미리 피해 간 것이 賢明하였다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竇公은 처음에 東都留守大夫 崔縱을 보좌하고 뒤에 東都留守司徒 鄭餘慶을 보좌하였다. 6에서 다섯 從事(幕僚)를 역임하였는데, 〈다섯 분의 節度使 중에는〉 文人도 있고 武士도 있어서 세밀함과 거칢이 같지 않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두공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의견을 달리한 분이 없었다. 6從事(幕僚)가 거의 백여 인이어서, 〈그중에〉 질박[]한 자도 있고 간사한 자도 있으며, 평이한 자도 있고 陰險한 자도 있어서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같지 않았으나,
두공은 똑같이[] 화목함과 진심으로 대하니 끝내 두공을 怨恨하는 자가 없었다. 그가 郞官縣令郡守가 되었을 때는 法令을 삼가 지키고, 백성을 너그럽고 자애롭게 대하고 각박하게 하지 않았다.
國學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엄격하여 가 있었고, 을 부추기고 과오를 막았으며, 더욱 상하의 분수를 밝혀 솔선수범하니, 성실하고 和樂하여 스승의 도리에 맞았다.
竇公에게는 형님 한 분과 아우 셋이 있으니, 竇常竇群竇庠竇鞏이다. 竇常進士에 급제하고서 水部員外郞을 거쳐 朗州䕫州江州撫州 등 네 刺史를 지냈다.
竇群處士로서 부름을 받고 나가 吏部郞中으로 御史中丞에 제수되어, 黔中觀察使容管經略使로 나갔다가 하였다.
竇庠은 세 차례 節度使[大府]를 보좌하였고, 奉先縣令으로 登州刺史가 되었다. 竇鞏進士에 급제하고서 御史로서 淄靑節度使를 보좌하였다. 형제가 모두 賢才라는 명성이 있었다.
竇公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長子 竇周餘는 학문과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부지런히 효도를 다하여 父親의 뜻을 계승함에 정성을 다해 부친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次子 아무와 아무는 모두 鄕貢進士이다. 딸도 셋을 두었다. 나는 두공보다 열아홉 살이 적다. 내가 童子 때에 을 뵌 적이 있는데, 이제 이미 40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공을 스승으로 뵈었고 뒤에는 공을 으로 섬겼다. 은 나를 한결같이 朋友로 대하였고, 내가 어리거나 장성하거나 전후로 지위에 변화가 있다 하여 달리 대하지 않았으니, 문장과 德行深厚한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 은 다음과 같다.
后緡이 구멍으로 도망쳐 나와서 가련한 유복자 낳았는데
夏王이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워 로 삼았네
성인께서 놀라 황하에서 발길을 돌린 것은 竇鳴犢을 동류로 引證한 것이고
재상 竇嬰漢家黃老術을 제거하고 儒家의 궤도로 들게 하였네
뒤에 觀津을 떠나
平陵으로 가서 살았네
아득히 이어온 世系
竇公께서 이으셨네
내 그분의 사람됨 공경하고
그분의 은덕 그리네
시를 지을 때에 매우 슬펐던 것을
誌銘에서 증명하소서


역주
역주1 國子司業竇公墓誌銘 : 이 墓誌銘은 長慶 2년(822)에 지은 것이다. 竇公은 竇牟(749~822)를 가리킨다.
역주2 字某 : ≪舊唐書≫ 〈竇牟傳〉에 “牟의 字는 貽周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 : 연속이다.
역주4 : 州縣의 推薦으로 禮部에서 실시하는 考試에 참가함이다.
역주5 : 기다림이다.
역주6 將死 : 昭義軍의 主將이 죽은 것이다.
역주7 權代領 : 잠시 직무를 代理함이다.
역주8 悔望 : 怨望함이다.
역주9 后緡竇逃閔腹子 夏以再家竇爲氏 : 옛날에 過國의 澆가 斟灌을 죽이고서 斟鄩을 공격하여 夏后(夏나라 임금) 相을 멸망시켰다. 이때 夏后 相의 아내 后緡이 임신 중이었는데 수챗구멍으로 도망쳐 나와 仍나라로 가서 少康을 낳았다. 少康이 두 아들 杼와 龍을 낳았는데, 龍이 그대로 仍國에 살면서 竇를 姓으로 삼았다고 한다.(≪春秋左氏傳≫ 哀公 元年, ≪新唐書≫ 〈宰相世系表〉)
역주10 聖愕旋河犢引比 : 孔子께서 趙簡子를 만나기 위해 晉나라로 가시다가 黃河에 이르러 簡子가 竇鳴犢을 살해했다는 말을 듣고 돌아오신 일을 이른다. 두명독은 竇龍의 69세손이다.(≪史記≫ 〈孔子世家〉) 引比는 引類와 같은 말로, 同類로 引證한다는 뜻이다.
역주11 相嬰撥漢納孔軌 : 竇嬰은 竇鳴犢의 7대손으로 漢 武帝 때의 宰相이다. 黃老로 기울어진 漢家를 바로잡아 儒學의 궤도로 들어가게 한 것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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