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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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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其書似非對座主之言
然亦晃朗
四月五日 柳宗元 謹致書十郞하노라
凡號門生而不知恩之所自者 非人也
纓冠束袵而趨以進者 咸曰我知恩이라하나니
知恩則惡乎辨이리오
然而辨之亦非難也
大抵當隆赫柄用하여 而蜂附蟻合하여 喣喣趄趄하며 便僻匍匐하여 以非乎人而售乎己
若是者 一旦勢異 則電滅颷逝하여 不爲門下用矣
其或少知恥懼하여 恐世人之非己也 則矯於中以貌於外하나니 其實亦莫能至焉이라
然則當其時而確固自守하고 蓄力秉志하여 不爲嚮者之態 則於勢之異也固有望焉이라
執事試追狀其態 則果能效用者出矣리라
然而中間招衆口飛語하여 譁然譸張者 豈他人耶
夫固出自門下
遑遑惕憂하여 無日不在信臣之門하여 以務白大德이라
하여 揚于하고 敷于天下하여 以爲親戚門生光寵이러니
不意璅璅者 復以病執事하니 此誠私心痛之
堙鬱洶湧하여 不知所發일새 常以自憾이로라
在朝不能有奇節宏議하여 以立於當世하고 卒就廢逐하여 居窮厄 又不能著書하여 斷往古하고 明聖法하여 以致無窮之名하니 進退無以異於衆人하여 不克顯明門下得士之大
今抱德厚하고 蓄憤悱하여 思有以效於前者 則旣乖謬於時하여 離散擯抑하여 而無所施用하니 長爲孤囚하여 不能自明이라
恐執事終以不知其始偃蹇退匿者 將以有爲也하여 猶流於嚮時求進者之言하여 而下情無以通하고 盛德無以酬하여
用爲大恨이라
固常不欲言之라가
今懼老死瘴土로되 而他人無以辨其志 故爲執事一出之하노라
古之人恥躬之不逮하니
儻或萬萬有一可冀하여 復得處人間이면 則斯言幾乎踐矣리라
因言感激하여 浪然出涕하여 書不能旣


05. 고십랑顧十郞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는 좌주座主를 대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논리가 선명하고 명쾌하다.
4월 5일에 문생門生 수영주사마원외치동정원守永州司馬員外置同正員 유종원柳宗元은 삼가 십랑집사十郞執事께 글을 올립니다.
일반적으로 자칭 문생門生이라 하면서도 누가 은혜를 베풀어주었는지 모르는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갓끈을 매고 허리띠를 묶어 선비 차림을 하고 앞다투어 찾아온 자들은 모두 “나는 은혜를 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은혜를 안다고 하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가려내겠습니까.
하지만 가려내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상대방이 권력을 잡아 존귀尊貴할 적에 마치 벌떼와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아양 부리고 굽실대며 비위를 맞추고 순종하면서 남을 꼬집고 자기를 과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는 상대방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면 번갯불이 사라지고 폭풍이 지나가듯 자취를 감추어 문하門下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중에 간혹 약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할 줄을 알아 세상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자는 본심을 숨기고 겉으로 체면을 차리니, 사실 그들 또한 정상적인 사람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상대방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에도 확고하게 자신을 단속하여 힘을 축적하고 지조志操를 굳게 지켜 저들이 앞서 보인 아첨하는 행태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세력이 달라졌더라도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문장文章으로 문하門下에서 급제한 자가 79명입니다. 이들 가운데 하급관리를 거쳐 사도司徒까지 올라간 자가 있으니,
집사執事께서 한번 이들의 실태를 추적해보면 사실 능히 국가에 기여한 자가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유언비어를 만들어내고 시끄럽게 기만을 자행한 자 또한 어찌 다른 사람이었습니까.
이들도 사실 문하門下에서 급제하였습니다.
다행히 중산中山 유우석劉禹錫 등이 나라를 위해 안절부절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언제나 군주君主가 신임하는 신하臣下의 반열에 서서 스승의 큰 덕을 애써 드러내 밝혔습니다.
이로 인해 순종順宗증직贈職시호諡號를 받아 만조백관滿朝百官이 찬양하고 천하에 명예가 자자함으로써 친척이며 문생門生들에게 영광을 안겨줬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자질구레한 자들이 다시 집사執事를 병들게 하니, 이 때문에 참으로 제 마음이 아픕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소용돌이치는데 이것을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몰라 항상 유감스럽습니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절개와 탁월한 논의를 드러내어 당대에 우뚝 서지 못하였고, 마침내 축출되어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는 또 글을 저술하여 역사歷史를 평가하고 성인聖人의 법을 밝혀 먼 장래에 이름이 남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아가나 물러가나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어 문하門下에서 인재를 얻은 큰 공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집사執事의 후한 덕을 가슴에 지니고 뭔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이 쌓여 세상에 나가 역량을 펼쳐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지만, 제 이상이 이미 시국과 배치됨으로 인해 갈갈이 찢기고 배척을 당해 어떻게 시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앞으로 오랫동안 고독한 죄수가 되어 제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없겠습니다.
혹시 집사執事께서 제가 당초에 고고하게 뒤로 물러났던 이유가 장차 큰일을 이뤄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끝내 모르시고, 오히려 지난날 벼슬길에 진출하기를 구하던 자들이 모함했던 말에 휩쓸림으로 인해 제 진심이 막혀 통하지 않고 거룩하신 은덕을 보답해드리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 때문에 매우 한스러웠습니다.
이와 같은 심정을 평소에 사실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장독瘴毒이 만연한 지방에서 늙어죽게 되었는데도 다른 누구에게 제 뜻을 이야기할 곳이 없으므로 집사執事에게 한번 말을 꺼내었습니다.
옛사람은 말을 쉽게 하여 행동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혹시 만에 하나 소망이 이루어져 다시 세상 사람들 속에 끼어 들어가게 되면 제가 한 이 말을 어쩌면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드리노라니 감정이 사무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므로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종원宗元은 삼가 재배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역주
역주1 與顧十郞書 : 작자가 永州司馬로 폄직되어 있던 元和 4년(809)에 쓴 편지이다. 顧十郞은 작자가 進士에 급제할 때 禮部侍郞 知貢擧로 있으면서 시험을 주관했던 顧少連이라는 설과 그의 아들 顧師閔이라는 설이 있다. 본문에서 자신을 門生이라 칭하고 상대방이 인재를 선발한 것에 대해 거론한 것으로 보면 顧少連일 수 있으나, 顧少連은 작자가 監察御史裏行으로 있던 貞元 19년(803)에 이미 63세로 죽었는데, 본문에 順宗 때(805) 시호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 顧師閔은 元和 연간에 潭部從事(湖南觀察使從事의 별칭)로 재직하였는데, 관청소재지가 있는 潭州는 永州와 거리가 가까워 顧師閔일 가능성이 크다. 이 문장은 顧師閔이 작자를 進士로 뽑아준 座主의 아들이므로 座主를 대하는 자세로 서술한 것으로 사료된다. 표면상으로는 지대한 은혜를 갚지 못하는 이유를 진술하였으나, 내면의 뜻은 자신의 장대한 뜻을 펼치기 어려운 고민을 말하였다.
역주2 門生守永州司馬員外置同正員 : 門生은 門下生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사람이 銓衡을 주도한 시험관을 스승으로 존경하여 그를 座主 혹은 先生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자기의 호칭이다. 이 글에서의 ‘門生’은 엄격히 말하면 ‘당신 아버지의 門生’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상대방이 座主의 아들이므로 그의 아버지와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司馬는 각 州의 수령인 刺史 밑에 딸린 관직으로 품계는 6품이다. 員外置는 정식 관원 이외에 더 설치한 관원이라는 뜻으로 실무를 보지 않는 閑職을 말하고, 同正員은 녹봉을 정식 관원과 동일하게 지급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중앙 조정에서 죄를 지은 관리에 대한 문책성 인사를 행할 때 그 자리를 이용한다. 번역에서는 전체를 하나의 관직명으로 간주하였다.
역주3 〈執事〉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 등 기타 자료를 근거로 보충하였다. 執事는 본디 잡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편지에서는 상대방을 감히 직접 가리키지 못하고 상대방 밑에서 시중드는 아랫사람을 중간 매개체로 삼아 상대방을 존경하는 뜻을 담은 존칭으로 사용한다.
역주4 由庶士而登司徒者 七十有九人 : 庶士는 하급의 일반 관리이고, 司徒는 周나라 관제에서 六卿의 하나인 地官이다. 후대에 尙書戶部侍郞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본문대로 풀이하면 ‘하급관리를 거쳐 司徒에 올라간 자가 79명이다.’라고 하는 것이 옳으나, 이는 사실에 맞지 않으므로 본문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상 무리가 없도록 두 句의 위치를 바꾸어 번역하였으나 본문의 형태는 그대로 두고 懸吐도 보류하였다. 79명이란 貞元 9년(793)과 10년 두 해에 顧少連이 禮部侍郞知貢擧로 進士 60명과 雜科 19명을 합격시켰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5 中山劉禹錫 : 劉禹錫(772~842)은 자가 夢得으로, 詩人이자 文學家이다. 中山은 지금의 河北 定州로 劉禹錫의 출신지이다. 貞元 9년(793)에 작자와 進士에 同榜及第하였다. 永貞 원년(805)에 屯田員外郞으로 있으면서 王叔文을 주축으로 한 혁신집단에서 작자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주6 順宗時 顯贈榮諡 : 順宗이 貞元 21년(805) 1월에 즉위하여 顧少連에게 尙書右僕射를 추증하고 ‘敬’자 시호를 내렸다. ‘顯’자와 ‘榮’자는 贈職과 諡號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드러나는 증직과 영광스러운 시호라는 뜻이다. 번역에서 수식어는 불필요하여 생략하였다.
역주7 天官 : 일반적으로 吏部의 별칭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百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역주8 〈宗元謹再拜〉 : 이 다섯 자는 저본에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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