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니 爲余言 邑有聞人濮陽吳君
하니 長鬣而廣顙
하고 好學而善文
이라
居鄕黨에 未嘗不以信義交於物하고 敎子弟에 未嘗不以忠孝端其本이라
會其子偘이 更名武陵하고 升進士라가 得罪來永州라
因奉其先人文集十卷하여 再拜請余以文冠其首하니 余得徧觀焉하니라
其爲辭賦에 有戒苟冒陵僭之志하고 其爲詩歌에 有交王公大人之義하고 其爲誄誌弔祭에 有孝恭慈仁之誠하되
故吳君之行不昭
하고 而其辭不薦
하니 雖
이나 而終伏其志
라
武陵又論次誌傳三卷繼于末
하니 其
及他才行甚具云
이라
박릉博陵의 최성무崔成務가 일찍이 신주자사信州刺史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복양濮陽 오군吳君이 있는데,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수염은 길고 이마는 넓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짓는다.
마을에서는 신의信義로써 남들과 교제하지 않은 적이 없고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충효忠孝로 그 근본을 바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재상과 훌륭한 선비들이 모두 그를 대등한 예의로 대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간偘이 무릉武陵으로 이름을 바꾸고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가 지금 마침 죄를 얻어 〈내가 있는 이곳〉 영주永州로 왔다.
그래서 그의 선친의 문집 10권을 받들고 나를 찾아와 절을 하며 나에게 머리글을 써달라고 청하였으므로 나는 〈비로소〉 그 문집을 두루 볼 수 있었다.
그의 사부辭賦에는 탐욕을 부리고 주제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고, 그의 시가詩歌에는 왕공王公 대인大人들과 교제하는 도리가 담겨 있으며, 만사輓詞‧묘지명墓誌銘‧제문祭文에는 효성스럽고 공손하고 자애롭고 후덕한 정성이 담겨 있었다.
대부분 육경六經 속 성인聖人의 요지를 끌어와 논리를 전개하고 문장을 이루어 읽어볼 만하였다.
옛날의 사도司徒는 반드시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향리를 거쳐 천관天官에 올려 보냈고, 옛날의 태사太史는 반드시 민간의 풍속을 알아보기 위해 그 지방의 시가詩歌를 채집하여 천자의 궁궐에 바쳤으니, 그렇게 하여야 인재人材가 버려지지 않고 백성들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의 집정자執政者는 혹 옛 방법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군吳君의 덕행이 드러나지 않고 그 문장이 바쳐지지 않았으니, 비록 왕에게서 말단의 관직을 얻었으나 끝내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오무릉吳武陵이 또 지誌‧전傳 3권을 편집하여 본집 끝에 첨부하였는데, 여기에 그 〈오군吳君의〉 종족種族 계통 및 기타 재능과 덕행에 관한 내용이 매우 자세히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