辱復書에 敎以報張生書及答衢州書言春秋하니 此誠世所希聞이라
聞兄與
言
一義
하여 嘗諷習之
하고 又聞
輩言他義
하여 知春秋之道久隱
이라가 而近乃出焉
하니라
京中於
處
에 하고 和叔處始見集註
하여 恒願掃於陸先生之門
이라가
時聞要論
하고 嘗以易敎誨見寵
이러니 하여 乃大乖謬
하여 不克卒業
하니라
復於亡友
處
에 盡得宗指辨疑集註等一通
하여 伏而讀之
하니라
於
에 見聖人之道 與堯舜合
하여 不唯文王周公之志 獨取其法耳
라
於
하고 에 見聖人褒貶予奪
을 唯當之所在
하여 所謂瑕瑜不掩也
라
頃嘗怪荀息奉君之邪心以立嬖子
하여 不務正義
하고 棄重耳於外而專其寵
을 러니
微指中明
은 量力而退
하고 告而後絶
하니 固先同後異者也
로되
今檢此前無與鄭同之文하고 後無與鄭異之據하니 獨疑此一義는 理甚精而事有不合이라
往年又聞和叔言
하니 兄論
一義
는 雖
라도 皆所未及
이라하니 請具錄
하라
若贊焉
이면 必同於孔
優劣之說
이라 故直擧其一二
하노라
04. 《춘추春秋》에 관해 논하는 내용으로 원요주元饒州에게 답한 편지
보내신 답장을 받았는데, 〈보장생서報張生書〉와 〈답구주서答衢州書〉에서 《춘추春秋》에 관해 토론한 내용으로 가르침을 주시니, 이는 실로 세상에서 듣기 어려운 소식입니다.
형의 학문이 공씨孔氏(孔子)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배봉숙裴封叔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형과 배태상裴太常이 “진晉나라 사람이 강융姜戎과 함께 진秦나라를 효殽 지방에서 싸워 이기다.”라는 한 대목의 뜻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서 외우고 익혔으며, 또 한선영韓宣英과 죽은 벗 여화숙呂和叔의 무리가 다른 뜻을 말하는 것을 듣고 《춘추春秋》의 도가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나타나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도성에 있을 때 한안평韓安平을 통해 처음으로 《춘추미지春秋微指》를 구하고, 여화숙呂和叔을 통해 처음으로 《춘추집주春秋集註》를 보고 나서, 육선생陸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항상 원했습니다.
육선생陸先生께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셨을 때 종원宗元이 같은 날 상서성尙書省에 들어갔고, 살고 있는 곳이 또한 선생先生과 같은 마을이라 비로소 제자의 예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강론을 하기 전에 마침 선생先生께서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수시로 중요한 말씀을 들었고 일찍이 《주역周易》을 가르쳐주시어 은총을 입었었는데, 불행히도 선생先生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종원宗元 또한 소주邵州로 나가게 됨으로써 마침내 크게 잘못되어 학업을 마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또 죽은 벗 능생凌生을 통해 《춘추종지春秋宗指》‧《춘추변의春秋辨疑》‧《춘추집주春秋集註》 등을 한 질 구하여 삼가 읽어보았습니다.
“기후紀侯가 그의 나라를 완전히 떠나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성인聖人의 도는 요堯‧순舜과 어울리는 것으로 단지 문왕文王‧주공周公의 마음에서만 법을 취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부인夫人 강씨姜氏가 작禚에서 제후齊侯를 만나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성인聖人이 《효경孝經》의 대원칙을 세운 것은 그 직분을 밝히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고,
“초楚나라 사람이 진陳나라의 하징서夏徵舒를 죽이다.”와 “정해일에 초자楚子가 진陳나라로 쳐들어가서 공손녕公孫寧‧의행보儀行父를 진陳나라로 들여보내다.”라고 한 대목에서는 성인이 포폄褒貶과 여탈予奪을 오직 법도에 맞게 하여 이른바 결점도 장점도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보다 수십 년 앞서 태어났더라면 이 학문을 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침 늦게 태어났으니 잘 만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이 편지에서 말한 것은 모두 공자孔子의 대의大義로 이를 뛰어넘을 자가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순식荀息에 대해 기록한 것은 탁卓을 세운 것을 폄하하는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순식荀息이 군주의 사악한 마음을 받들어 애첩의 아들을 세우는가 하면 정의에 힘쓰지 않고 중이重耳를 밖으로 내쫓아 총애를 독차지한 것을 공자孔子가 구목仇牧‧공보孔父의 내용과 같은 형식으로 말한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형께서 순식荀息을 폄하한 것이라고 말했으니, 이 견해는 매우 좋습니다.
그렇다면 《춘추春秋》에서 구목仇牧‧공보孔父에 대한 필법筆法도 다르지 않았으니, 구목仇牧‧공보孔父 역시 폄하합니까?
종원宗元이 일찍이 〈비국어非國語〉 60여 편을 저술했는데, 그중 한 편은 순식荀息 때문에 쓴 것입니다.
이제 적어서 보내드리니 제가 말한 것과 어떤지 보시기 바랍니다.
《춘추미지春秋微指》에 “정鄭나라 사람이 와서 우호관계를 단절하자고 요구하였다.”라고 한 대목의 뜻을 설명하기를 “〈정鄭나라가〉 힘을 헤아려 물러가고 먼저 알린 뒤에 절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보면 정鄭나라와 노魯나라의 마음이〉 실로 전에는 서로 합치되었다가 나중에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보면 이전에 정鄭나라와 마음이 합치되었다는 글귀가 없고, 나중에 정鄭나라와 달라졌다는 근거가 없으니, 이 한 대목의 뜻은 이치는 매우 정밀하지만 사실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의심됩니다.
형이 이 또한 지적하여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또 여화숙呂和叔이 하는 말을 듣자 하니, 형이 논한 ‘초楚나라 상신商臣’ 한 대목의 뜻은 담씨啖氏‧조씨趙氏‧육씨陸氏도 모두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 내용을 기록하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춘추미지春秋微指》의 밑에 주석으로 넣어 후학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소蕭‧장張 두 사람에게 보낸 이전 편지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도착하는 그날 당장 한 권으로 엮어 후세에 전하겠습니다.
종원宗元이 이 주州에 처음 왔을 때 〈육선생묘표陸先生墓表〉를 지었습니다.
지금 이것을 받들어 올리니, 선영宣英과 함께 읽으십시오.
《춘추春秋》의 도리는 해나 달과 같아서 함부로 찬양할 수 없습니다.
만약 찬양한다면 필시 공자孔子와 도척盜跖의 우열을 논하는 설과 같을 것이므로 그중 한두 가지만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