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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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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風神似可掬이라
博陵崔君 由進士入山南西道節度府하여
凡五徙職하고 六增官하여 至刑部員外郞하고 出刺連永兩州
未至永 而連之人愬君하니 御史按章具獄하여 坐流驩州
幼弟訟諸朝하니 天子黜하고 罷御史하며 小吏咸(減)死하여 投之荒外로되 而君不克復하고 元和七年正月二十六日卒이라
孤處道洎守訥 奉君之喪하여 踰海水라가 不幸遇暴風하여 二孤溺死
七月某日 柩至於永州하고
藁葬於社壝之北四百步하니라
崔氏世嗣文章하니 君又益工하고 博知古今事하여 給數敏辯이라
善謀畫하여 하고 西遏하니 其慮皆君之自出이라
後餌하여 病瘍且亂이라 故不承於初
今尙有五丈夫子
夫人河東柳氏 德碩行淑하니 先崔君十年卒이라
其葬在長安東南少陵北이라
君以竄沒하고 家又有海禍하여 力不克祔
三年 將復故葬也
徒志其一二大者云이라
鯢爲祖
曄爲父
世文儒
積彌厚
簡其名이요
子敬字
年五十
增以二
葬湘澨
非其地
後三年
辭當備하리라


08. 영주자사永州刺史 최군崔君의 임시 무덤 묘지명墓誌銘
문채와 운치가 생동하여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박릉博陵 최군崔君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 막부幕府로 들어가 장서기掌書記부터 시작하여 절도유후節度留後에 이르렀다.
대체로 다섯 번 관직을 옮기고 여섯 번 승진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에 이르렀으며, 지방으로 나가 연주連州영주永州자사刺史가 되었다.
영주永州에 당도하기 전에 연주連州 사람이 최군崔君을 고소하자, 어사御史가 법률에 따라 죄안을 꾸몄고 이로 인해 환주驩州로 유배되었다.
그의 어린 아우가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니, 천자가 연수連帥를 쫓아내고 어사御史를 파직하였으며, 하급관리들이 사형을 감하여 변방으로 유배시켰으나 최군崔君은 결국 복직되지 못했고, 원화元和 7년 정월 26일에 죽었다.
아들 처도處道수눌守訥최군崔君의 유해를 받들고 바다를 건너오다가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두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7월 모일에 영구가 영주永州에 이르렀다.
8월 갑자일에 토지신 제단에서 북쪽으로 400보 지점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최씨崔氏는 대대로 문장 솜씨를 계승했는데 최군崔君은 그중에서도 더욱 뛰어났으며, 고금의 역사사실을 두루 알아 민첩하고 언변이 뛰어났다.
전략과 계책에 뛰어나, 남쪽으로 의 반군을 패퇴시키고 서쪽으로 융족戎族의 군대를 방어할 당시 그 계책이 모두 최군崔君에게서 나왔다.
뒤에 오석五石을 복용하여 몸에 종양이 생기고 정신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처음에 지녔던 재주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지금 다섯 아들이 남아 있다.
부인 하동류씨河東柳氏는 덕이 크고 행실이 정숙했는데, 최군崔君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장안長安 동남쪽 소릉少陵 북쪽이다.
최군崔君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이 또한 바다에서 익사하는 화를 당해 합장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3년 뒤에 고향의 장지로 이장하려 한다.
지금은 그저 한두 가지 큰 사항만 기록하였다.
는 곧 조부의 이름자이고,
은 곧 부친의 이름자인데,
대대로 이어온 문장과 유학,
쌓여서 더욱 더 훌륭해졌네.
은 곧 최군崔君의 이름이라면,
자경子敬인 곧 그의 자로 불렸네.
누렸던 나이는 오십에다가,
거기에 또 둘을 보태었다네.
소상강瀟湘江 물가에 안장하지만,
이곳은 그 땅이 아니고 말고.
앞으로 3년이 지난 뒤에는,
지문誌文 또 자세히 기록하리라.


역주
역주1 : 元和 7년(812) 8월에 永州司馬로 있으면서 쓴 것이다. 작자의 이때 나이는 40세였다. 崔君은 작자의 큰 자형 崔簡을 가리킨다. 崔簡이 한 해 전 4월에 永州刺史로 부임하던 도중, 앞서 連州刺史로 재임할 적에 贓罪를 범했다는 누명을 쓰고 곤장 백 대를 맞은 다음 지금의 월남인 安城의 驩州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이해 1월에 그곳에서 52세로 죽었다. 그의 두 아들인 崔處道와 崔守訥이 운구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폭풍을 만나 모두 익사하고 7월에 그의 관이 작자가 머물고 있는 永州에 도착하자, 작자가 그곳에 임시로 매장하고 이 誌文을 썼다.
역주2 始掌書記 至府留後 : 掌書記는 唐 中宗 景龍 원년(707)에 설치한 지방관의 하나로, 觀察使나 節度使에 소속되어 각종 공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 留後는 節度留後의 약칭으로, 관직명이다. 唐나라 중엽 이후 節度使나 觀察使가 갑자기 사고가 생길 경우, 조정에서 그 후임자를 정식으로 임명하기 전에 그의 자식이나 조카, 혹은 믿을 만한 휘하 관리가 그 자리에 앉아 직무를 대행하였다.
역주3 連帥 : 여기서는 湖南觀察使를 가리킨다.
역주4 八月甲(子)[午] : 저본에는 ‘午’가 ‘子’로 되어 있으나, 이해 8월 1일의 간지는 정해이고, 8월에는 갑자일이 없다. 8일이 갑오인 것으로 보아 ‘甲子’는 ‘甲午’의 잘못으로 보인다. ‘子’자와 ‘午’자의 모양이 비슷하여 생긴 오류가 아닌가 한다.
역주5 南敗蜀虜 : 永貞 원년(805)에 西川節度使 韋皋가 죽어 그의 막료로 있던 劉闢이 스스로 節度留後가 된 뒤에 劍南西川節度使로 임명되자 반란을 일으켜 梓州를 공격해 점거하였다. 그 이듬해에 高崇文과 節度使 嚴礪 등이 神策行營兵을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이때 崔簡이 嚴礪에게 계책을 제시하였다. 蜀은 劍南‧西川 지역인 成都를 가리킨다.
역주6 戎師 : 姜族과 髳族 등 서쪽 소수민족의 군대를 가리킨다.
역주7 五石 : 丹砂의 일종으로, 오래 복용하면 장생불사한다는 설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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