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和七年四月
에 東鄙
에 雜擾
하여 하며 南鉤
하고 外誘
하여 立帥
하며 殺牲盟誓
하고 洞窟林麓
하여 嘯呼成群
이라
이 練立將校
하고 提卒五百
하여 屯於武岡
할새 不震
하여 이라
視公之師如百萬하고 視公之令如風雷하여 怨號呻吟이라가 喜有攸訴하여 投刃頓伏하여 願完父子라
卒爲忠信
하여 奉職輸賦
하니 進比華人
하여 無敢不
이라
母弟生壻 繼來於潭하여 咸致天廷하니 皇帝休嘉하여 式新厥命이라
兇渠同惡이 革面向化하여 如醉之醒하고 如狂之寧하니
詔書顯異
하고 하여 益兵三倍
하여 爲時碩臣
하여 하니
於是夷人始
이러니 聞公之去
하고 相與高蹈涕呼
하여 若寒去裘
라
昔公不夸首級爲己能力하고 專務敎誨하여 俾邦斯平하니
我老洎幼 由公之仁하여 小不爲虺蜮하고 大不爲鯨鯢라
願銘武岡首하여 以慰我思하고 以昭我類하여 以示我子孫이라
彌億萬年토록 俾我奉國을 如今之誠하고 鄰之我懷를 如公之勤하라하니라
여러 명문銘文 중에 이 편이 우수한 것 같다.
원화元和 7년(812) 4월에 검중黔中과 무수巫水의 동쪽 고을에서 만료蠻獠가 소요를 일으켜 무기고를 털고 지방 장수를 해치며 남쪽으로는 장가牂牁를 끌어들이고 밖으로는 서원西原을 유인한 다음, 우두머리를 두고 장수를 세우는가 하면 희생을 죽여 그 피로 결속을 다지는 맹세를 하고 동굴과 산기슭을 소굴로 삼아 불순한 무리들을 여기저기서 불러들여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러자 황제께서 동호부銅虎符를 내려 용庸‧촉蜀‧형荊‧한漢‧남월南越‧동구東甌의 군대를 출동시켜 사방에서 토벌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형벌이 두려워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도망쳤으므로 즉시 죽이지는 못하였다.
이때 담주潭州 군대의 통솔자인 어사중승御史中丞 유공작柳公綽이 군관을 훈련시킨 뒤에 병졸 500명을 거느리고 무강현武岡縣에 주둔하면서 흔들리지도 않고 위축되지도 않아 마치 높은 산과 무성한 숲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천자의 엄명을 널리 고하되 분명하고 미덥게 하자,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의 군대가 백만 대군 같고 공의 명령이 폭풍과 천둥 같은 것을 보고 그동안 원한에 차 소리치고 신음하던 도적들이 호소할 곳이 생긴 것을 기뻐하여, 칼을 던지고 땅에 엎드려 부자간과 같은 관계를 보존하길 원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충성하고 믿을 만한 백성이 되어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고 세금을 바치니, 그 바쳐 올리는 세금이 중원中原 지역과 대등하였고 감히 누락하는 일이 없었다.
도적의 어미‧아우‧자식‧사위들이 줄지어 담주潭州로 들어와 이들을 모두 조정으로 송치하자, 황제께서는 이를 상서롭게 여겨 용서하는 명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도적의 수령과 그 일당이 회개하여 귀화했는데, 마치 술에 취했다가 깨어나고 미쳤다가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였다.
이는 유공柳公이 약이 되고 침이 되어 그들의 본성을 회복시켜준 것이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유공柳公의 뛰어난 재능을 표창하고 강한江漢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주고 거느리는 군사를 이전보다 세 배나 늘려주어 당시의 대신으로서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유공柳公은 부드럽고 온화한 문사文士임에도 이와 같은 무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소수민족이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대우를 받았는데, 유공柳公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추위에 갖옷을 잃은 듯이 아쉬워했다. 〈그리하여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 유공柳公은 적의 머리를 베는 것을 자신의 능사로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바른 도리로 가르치는 데에 힘써 한 지방을 평온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노인부터 아이들까지 공의 어진 정사로 인해 작게는 살무사나 물여우 같은 간사한 짓을 하지 않고, 크게는 약한 것들을 한 입에 삼키는 고래 같은 흉악한 짓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크고 정사가 각별하여 먼 곳의 사람이나 가까운 곳의 사람을 막론하고 공을 기리는 마음을 자제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무강산武岡山의 꼭대기에 명문銘文을 새겨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알리며, 먼 훗날 우리 자손에게 보여줬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억만년이 지나도록 나라를 받들기를 지금처럼 정성스럽게 하고, 이웃 고을 수령도 우리 같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유공柳公처럼 깊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