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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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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諸銘中此篇似優
元和七年四月 東鄙 雜擾하여 하며 南鉤하고 外誘하여 立帥하며 殺牲盟誓하고 洞窟林麓하여 嘯呼成群이라
皇帝下하여之師하여 四面討問하니
畏罪憑阻하여 逃遁不卽誅하니라
練立將校하고 提卒五百하여 屯於武岡할새 不震하여 이라
告天子威命하여 明白信順하니 亂人大恐이라
視公之師如百萬하고 視公之令如風雷하여 怨號呻吟이라가 喜有攸訴하여 投刃頓伏하여 願完父子
卒爲忠信하여 奉職輸賦하니 進比華人하여 無敢不이라
母弟生壻 繼來於潭하여 咸致天廷하니 皇帝休嘉하여 式新厥命이라
兇渠同惡 革面向化하여 如醉之醒하고 如狂之寧하니
公爲藥石하여 俾復其性이라
詔書顯異하고 하여 益兵三倍하여 爲時碩臣하여 하니
文儒申申이로되 有此武功이라
於是夷人始이러니 聞公之去하고 相與高蹈涕呼하여 若寒去裘
昔公不夸首級爲己能力하고 專務敎誨하여 俾邦斯平하니
我老洎幼 由公之仁하여 小不爲虺蜮하고 大不爲鯨鯢
恩重事特하여 不邇而遠하고 莫可追已
願銘武岡首하여 以慰我思하고 以昭我類하여 以示我子孫이라
彌億萬年토록 俾我奉國 如今之誠하고 鄰之我懷 如公之勤하라하니라
其辭曰
之巑
巫水之磻
魚駭而離하고
戶恐하고
披攘仍亂하니
王師來誅
期死以緩이라
公明不疑하고
公信不欺하니
〈怨號呻吟
援師定命하여
俾邦克正하고
皇仁天施하니
我反其性이라
我塗四闔하니
公示之門하고
我愚抵死하니
公示之恩이라
旣亡而存이라
奉公之訓하여
貽我子孫이라
我始蝥賊이나
由公而仁하고
我始寇讐
由公而親이라
山畋澤䱷하여
輸賦於都하고
陶穴刊木하여
室我姻族이라
烹牲是祀하니
公受介福하고
揲蓍以占하니
公宜百祿이라
皇懋公功하여
陟於大邦이라
遠哉去我하니
誰嗣其良
하고
이나
匪曰余固
公不可賂니라
祝鄰之德하여
恒遵公則하고
勖余之世하여
永謹邦制하라
南夷作詩하여
刻示來裔


03. 무강산武岡山비명碑銘 서문 포함
여러 명문銘文 중에 이 편이 우수한 것 같다.
원화元和 7년(812) 4월에 검중黔中무수巫水의 동쪽 고을에서 만료蠻獠가 소요를 일으켜 무기고를 털고 지방 장수를 해치며 남쪽으로는 장가牂牁를 끌어들이고 밖으로는 서원西原을 유인한 다음, 우두머리를 두고 장수를 세우는가 하면 희생을 죽여 그 피로 결속을 다지는 맹세를 하고 동굴과 산기슭을 소굴로 삼아 불순한 무리들을 여기저기서 불러들여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러자 황제께서 동호부銅虎符를 내려 남월南越동구東甌의 군대를 출동시켜 사방에서 토벌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형벌이 두려워 험난한 지형을 이용해 도망쳤으므로 즉시 죽이지는 못하였다.
이때 담주潭州 군대의 통솔자인 어사중승御史中丞 유공작柳公綽이 군관을 훈련시킨 뒤에 병졸 500명을 거느리고 무강현武岡縣에 주둔하면서 흔들리지도 않고 위축되지도 않아 마치 높은 산과 무성한 숲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천자의 엄명을 널리 고하되 분명하고 미덥게 하자, 난을 일으킨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의 군대가 백만 대군 같고 공의 명령이 폭풍과 천둥 같은 것을 보고 그동안 원한에 차 소리치고 신음하던 도적들이 호소할 곳이 생긴 것을 기뻐하여, 칼을 던지고 땅에 엎드려 부자간과 같은 관계를 보존하길 원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충성하고 믿을 만한 백성이 되어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고 세금을 바치니, 그 바쳐 올리는 세금이 중원中原 지역과 대등하였고 감히 누락하는 일이 없었다.
도적의 어미‧아우‧자식‧사위들이 줄지어 담주潭州로 들어와 이들을 모두 조정으로 송치하자, 황제께서는 이를 상서롭게 여겨 용서하는 명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도적의 수령과 그 일당이 회개하여 귀화했는데, 마치 술에 취했다가 깨어나고 미쳤다가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였다.
이는 유공柳公이 약이 되고 침이 되어 그들의 본성을 회복시켜준 것이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유공柳公의 뛰어난 재능을 표창하고 강한江漢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주고 거느리는 군사를 이전보다 세 배나 늘려주어 당시의 대신으로서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유공柳公은 부드럽고 온화한 문사文士임에도 이와 같은 무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소수민족이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대우를 받았는데, 유공柳公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추위에 갖옷을 잃은 듯이 아쉬워했다. 〈그리하여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에 유공柳公은 적의 머리를 베는 것을 자신의 능사로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바른 도리로 가르치는 데에 힘써 한 지방을 평온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노인부터 아이들까지 공의 어진 정사로 인해 작게는 살무사나 물여우 같은 간사한 짓을 하지 않고, 크게는 약한 것들을 한 입에 삼키는 고래 같은 흉악한 짓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크고 정사가 각별하여 먼 곳의 사람이나 가까운 곳의 사람을 막론하고 공을 기리는 마음을 자제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무강산武岡山의 꼭대기에 명문銘文을 새겨 그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알리며, 먼 훗날 우리 자손에게 보여줬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억만년이 지나도록 나라를 받들기를 지금처럼 정성스럽게 하고, 이웃 고을 수령도 우리 같은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유공柳公처럼 깊었으면 합니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산黔山이 아스라이 높기도 하고,
무수巫水가 구불구불 감아도는 곳,
물고기들 놀라서 흩어져 숨고,
짐승들 침범당해 상처받았네.
백성들이 두려워 골짝에 숨고,
도적떼의 약탈이 연이어지자,
천자 군대 나와서 토벌 감행해,
죽여서 사태 해결하려고 했네.
공께서 지혜 밝아 아니 의심코,
공께서 진실하여 아니 속이니,
원망해 부르짖고 신음을 하던,
불쌍한 백성들이 호소하였네.
군사를 이끌고서 명령을 내려,
이 고장을 올바로 돌려놓았고,
황제께서 어진 덕 베푸셨기에,
우리는 선한 본성 되찾았다네.
우리 갈 길 사방이 가로막히자,
공께서 나갈 문을 알려주셨고,
어리석어 죽을 죄 범하였는데,
공께서 큰 은혜를 보여주셨네.
이미 마른 백골에 새살이 돋고,
이미 죽은 목숨이 살아났으니,
공이 내린 가르침 삼가 받들어,
먼 훗날 우리 자손 물려주리라.
우리 처음 해충과 비슷했으나,
공에 의해 다시금 어질어졌고,
우리 처음 서로가 원수였으나,
공에 의해 다시금 친해졌다네.
산에서 사냥하고 물고기 잡아,
도성으로 세금을 바쳐 올리며,
토굴 파서 다듬고 나무를 베어,
우리네 사돈 친척 집을 지었네.
희생 삶아 조상께 제사 지내니,
공께서는 큰 복을 받고 말고요.
시초蓍草 잡아 세어서 점을 쳐보니,
공께서는 만복을 누리시리라.
황제가 공의 업적 표창하시어,
큰 지방 장관으로 올려주시자,
이제 멀리 우리를 떠나가시니,
훌륭하신 공의 뒤 누가 이을꼬.
이 고장의 토산품 단사丹砂가 있고,
보배로운 무소의 뿔도 있지만,
우리가 인색한 게 아니고 말고,
공에게는 뇌물로 줄 수 없었네.
비는 건 우리 이웃 좋은 덕 지녀,
언제나 공의 법칙 준수하기를.
힘쓸 건 우리 자손 대대로 이어,
영원히 나라의 법 지켜가는 일.
나는야 남방에서 이 시를 지어,
돌에 새겨 후대에 보여준다네.


역주
역주1 : 元和 8년(813) 永州司馬로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작자의 從父 柳公綽(765~ 832)이 潭州刺史로 있으면서 黔中觀察使 崔能‧荊南節度使 嚴綬와 함께 도적의 수령 張伯靖을 투항하게 하여 경내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얻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을 찬양하였다. 武岡山은 지금의 湖南省 서남부와 資水 상류인 武岡州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산 이름이다. 柳公綽이 이 산에서 도적들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역주2 黔巫 : 黔은 黔中으로, 옛 성이 지금의 湖南 沅陵縣 서쪽에 있다. 唐나라 때 黔中觀察使를 두었는데 이때 崔能이 그 직을 맡고 있었다. 巫는 巫水로, 雄溪‧樠溪‧無溪‧酉溪‧辰溪 등 五溪를 가리킨다. 지금의 湖南 서부와 貴州 동부 지역이다.
역주3 蠻獠 : 중국 서남방 소수민족을 얕잡아 부르는 호칭이다.
역주4 盜弄庫兵 賊脅守帥 : 元和 6년(811)에 辰州와 溆州 등지의 소수민족 우두머리인 張伯靖이 黔中觀察使 竇群의 학정에 유감을 품고 군중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수령을 죽이고 辰州와 錦州 등 고을을 점령하여 무기고를 접수하였다. 이해 9월에 蜀州刺史 崔能이 黔中觀察使가 되고 竇群은 開州刺史로 폄직되었다. 《舊唐書 권14 憲宗紀, 권159 竇群列傳》
역주5 牂牁 : 西漢 때 서남방의 소수민족을 평정하고 牂牁郡을 두었는데, 郡 관아의 소재지는 지금의 貴州 貴陽 부근에 있었다. 牁는 ‘柯’로 표기하기도 한다.
역주6 西原 : 서남방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역주7 置魁 : 魁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張伯靖을 가리킨다.
역주8 銅獸符 : 銅虎符와 같다. ‘虎’를 ‘獸’로 바꾼 것은 唐 高祖 李淵의 조부의 이름자가 虎였기 때문이다. 唐나라 때 漢나라의 제도에 따라 지방군수가 있는 곳에 銅虎符를 두었다. 이 兵符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도성에 남겨두고 나머지 반쪽은 郡縣에 두고 있다가, 조정에서 군대를 출동할 일이 생기면 사신의 편에 兵符를 들려 보내 맞춰보게 하고 그것이 일치하면 군대를 출동시키게 하였다.
역주9 庸蜀荊漢南越東甌 : 庸은 上庸縣이다. 庸‧蜀은 劍南東‧西節度使, 荊은 荊南節度使, 漢은 山南東道節度使, 南越은 廣州節度使, 東甌는 福建觀察使를 말한다.
역주10 時惟潭部戎帥御史中丞柳公綽 : 戎帥는 元帥로, 군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이다. 御史中丞 柳公綽이 元和 6년(811)에 지방관으로 나와 潭州刺史 兼 湖南觀察使가 되었다.
역주11 不騫 : 《詩經》 〈小雅 天保〉의 “남산처럼 장수하여 이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네.[如南山之壽 不騫不崩]”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번역에서는 편의상 위축되지 않았다고 풀이하였다.
역주12 如山如林 : 《尉繚子》 〈兵談 第二〉에 “많은 병력으로 진격할 때는 높은 산과 무성한 숲처럼 안정감이 있다.[重者如山如林]”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역주13 : ‘供’의 본디 글자로, 바친다는 뜻이다.
역주14 進臨江漢 : 柳公綽이 黔中의 반란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원화 8년(813)에 鄂州刺史 兼 鄂岳觀察使로 전보된 것을 가리킨다. 江漢은 長江과 漢水의 합칭으로, 지금의 湖北省 경내에 있는 鄂州가 이 두 강의 부근에 있으므로 하는 말이다.
역주15 殿於大邦 : 《詩經》 〈小雅 采菽〉의 “예악 즐기는 군자여, 천자 나라를 지킨다네.[樂只君子 殿天子之邦]”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殿은 ‘鎭’과 통용하는 글자로 지킨다는 뜻이고, 邦은 나라의 한 지방이란 뜻이다.
역주16 : 백성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인 대우로, 부역을 면제해주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역주17 黔山 : 지금의 湖南 保靖縣인 武陵郡에 있는 산 이름이다.
역주18 魚駭而離 獸犯而殘 : 張伯靖이 이끄는 도적떼가 소요를 일으킴으로 인해 巫水의 물고기와 黔山의 짐승들까지도 놀라고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역주19 (合)[谷] : 저본에는 ‘合’으로 되어 있는데,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谷’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0 怨號呻吟 鰥寡有辭 : 저본에는 없으나, 《明一統志》 〈長沙府 武岡山〉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보충하였다.
역주21 旣骨而完 : 《春秋左氏傳》 襄公 22년에 “내가 申叔夫子를 만나보니 이른바,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새살이 돋아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吾見申叔夫子 所謂生死而肉骨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完은 ‘肉’의 오자로 보인다.
역주22 穴之丹 : 辰州에 丹砂가 나오는 굴이 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3 犀之顚 : 무소의 이마, 곧 무소의 이마에 달린 뿔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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