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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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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氣岸鑱畫하고 句亦陶洗
孟氏之孤曰遵慶 奉其父命書九篇 善狀一篇하여 來告曰 月日君薨하여 月日將葬於某 敢請刻辭라하니라
嗚呼 公自假左贊善大夫 桓王司馬 太常少卿으로 하고 其帥魏國公耽爲宰相 命公左領軍衛將軍하니라
事德宗順宗하여 立朝九年 加朝議大夫
居喪 하여 하여 居故官하고 爲左神策行營先鋒兵馬使知牙 而趙兵罷하여 不受祿하니라
去金革하고 服喪終期하니라
命安州刺史 仍加侍御史 安州防遏兵馬使라가 貶柳州司馬하니라
魏公弘大恢奇하고 公能以任軍政하여 是以又爲衛將軍이라
虔恭潔廉하여 動得禮節이라
伐趙之役 堅立堡壘하고 誓死麾下
法制明具하여 權力無能移하고 進不避患하며 退不敗禮하니라
多戎事어늘 政出一切러니 吏以文持之
故貶이라
明年 할새 朝廷諸公洎 咸以公爲請이나 未及徵 氣乘肺하여 溢爲水하여 浮膚而卒하니 年六十이라
惟公志專於中하고 貌嚴於外
嘗立庭中毅然하여 望之若圖形刻像이러라
聞國難 輒不寢食하고 謀度憤吒하니 以故病不可治
曾祖某官이요 諱某이며
祖某官이요 諱某이며
父某官이요 諱某
公之諱曰常謙이라
子遵慶이요
弟曰某
銘曰
其世爲孟이라
公傳師法하여
以訓戎政하고
以庸하여
咸致厥命이라
濟濟於朝하여
冕服以光하고
終役復喪하여
忠孝孔明하니
君子攸彰이라
昔者雲中
公刺於安
法亦可議라하여
豪士歔欷
聞難以激하여
去食廢寐
神乖氣離하여
莫遂
廷臣進言하고
侯伯拜章하여
帝命將施러니
代山하니
植柏與松이라
其名惟何
忠孝孟公이라


07. 유주사마柳州司馬 맹공孟公묘지명墓誌銘
기개가 꿋꿋하고 문구도 깔끔하다.
맹씨孟氏의 아들 준경遵慶이 그의 부친이 남긴 글 아홉 편과 행장 한 편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모월 모일 부군府君께서 세상을 떠나 모월 모일 모처에 안장하려 하니, 묘지석墓誌石에 새길 글을 지어주십시오.” 하였다.
아, 공은 가좌찬선대부假左贊善大夫환왕사마桓王司馬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부터 의성군중군병마사義成軍中軍兵馬使가 되었고, 그의 통수統帥 위국공魏國公 가탐賈耽이 재상이 되었을 때 공을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으로 명했다.
덕종德宗순종順宗금상今上을 섬기면서 9년 동안 벼슬살이를 한 끝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되었다.
복상服喪 기간 중에 마침 조주趙州에서 전투할 일이 생겨 공을 기복起復하게 하여 예전 관직에 앉히고 좌신책행영선봉병마사지아左神策行營先鋒兵馬使知牙로 삼았으나 조주趙州 군대가 해산되어 녹을 받지 않았다.
군복을 벗고 계속 상복을 입어 나머지 기간을 마쳤다.
안주자사安州刺史로 명했을 때 시어사侍御史안주방알병마사安州防遏兵馬使를 추가했다가 다시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시켰다.
공은 일찍이 위국공魏國公을 보좌하여 양양襄陽을 평정하고 양주梁州를 안정시켜 의성군義成軍의 치적을 이루었다.
위국공魏國公은 도량이 크고 넓은 데다 공이 군정軍政을 잘 수행했으므로 이로 인해 또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공은 진실하고 공손하며 청렴결백하여 행하는 일이 언제나 예절에 맞았다.
조주趙州를 정벌하는 임무를 수행할 때는 보루를 견고하게 세우고 장수의 휘하에서 죽기를 각오하였다.
국법을 분명하게 견지하여 권력으로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는 환난을 피하지 않고 물러날 때는 예법을 어기지 않았다.
안주安州는 반란이 일어난 지역과 가까워 전투하는 일이 많은데도 평범한 지방과 다름없이 정무를 처리하니 법관이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문책하였다.
이로 인해 좌천되었다.
이듬해에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출동할 적에 조정의 여러 대신과 지방의 방백들이 모두 공을 추천하였으나, 미처 부르기 전에 폐기종이 생겨 가슴에 물이 차서 부어올라 죽으니, 향년 60세였다.
공은 안으로는 의지가 확고하고 밖으로는 태도가 근엄하였다.
공이 일찍이 조정에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꿋꿋하여, 내가 바라보니 마치 그림 속의 사람 같기도 하고 조각상 같기도 했다.
국난의 소식을 듣고는 먹고 자는 것조차 잊고 계책을 생각하며 울분을 토했으니, 이 때문에 병이 생겨 끝내 치료하지 못했다.
증조부는 아무 관직을 지냈고 이름은 아무개이다.
조부는 아무 관직을 지냈고 이름은 아무개이다.
부친은 아무 관직을 지냈고 이름은 아무개이다.
공의 이름은 상겸常謙이다.
아들은 준경遵慶이다.
아우는 아무개이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나라 대부 중에 중손씨仲孫氏 있어,
그 후손이 성씨를 맹씨孟氏라 했지.
맹분孟賁진무왕秦武王 때 용맹 빛났고,
맹가孟軻공자孔子의 도 계승했는데,
공께서는 그 법도 물려받아서,
군정軍政의 준칙으로 굳게 지키고,
무기며 군사 검열 담당하고서,
사명을 유감없이 완수하였네.
조정에선 그 모습 위엄이 있어,
늠름한 관복차림 빛이 났었고,
상중에 출정한 건 사욕 아니라,
전역戰役 뒤에 다시금 상복을 입어,
충효가 온 누리에 드러났으니,
식견 있는 군자가 찬양했다네.
옛날 운중雲中 노획한 적군의 수급首級,
여섯 탓에 법관에 회부됐는데,
안주자사安州刺史 재직 중 사소한 잘못,
국법으로 논함이 옳다고 하여,
머나먼 남쪽으로 좌천시키니,
호걸들 한숨 쉬며 탄식하였네.
국난의 소식 듣고 크게 노하여,
먹거나 자는 것도 잊어버리다,
정신이 혼미하고 기력이 쇠해,
숨 막혀 가슴까지 답답하였네.
조정의 대신들이 추천을 하고,
지방의 방백들도 건의해 올려,
황제 명이 장차 곧 내리려는데,
갑자기 걱정 속에 쓰러졌다네.
대산代山 위의 나무들 높기도 하니,
소나무며 잣나무 심겨져 있네.
이 무덤 주인 이름 누군가 하니,
충효 도리 다하신 맹공孟公이라네.


역주
역주1 : 《柳河東集》에는 제목이 〈唐故安州刺史兼侍御史貶柳州司馬孟公墓誌銘〉으로 되어 있고, 그 주석에 “墓誌銘에 ‘九年’이라 한 것은 元和 9년(814)이다. 명년에 蔡州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元和 10년에 吳元濟를 토벌한 것을 말한다. 9년에 孟氏가 죽었고 이 墓誌銘은 분명히 11년(816)에 지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는 작자의 나이 42세로 永州司馬로 있을 때였다.
역주2 (爲)[與] : 저본에는 ‘爲’로 되어 있으나, 《柳文指要》에 “‘爲’자는 ‘與’자의 오자인 듯하다. 초서에서 ‘與’자와 ‘爲’자의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였다. 문세로 볼 때 그 설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에 근거하여 ‘與’로 바로잡았다.
역주3 爲義成軍中軍兵馬使 : 義成軍은 義成軍節度使의 약칭이다. 貞元 2년(786)에 賈耽(730~805)이 義成軍節度使가 되었을 때 孟常謙을 中軍兵馬使로 앉혀 자기를 보좌하게 하였다.
역주4 今上 : 唐 憲宗을 가리킨다.
역주5 會用兵於趙 : 元和 4년(809) 3월에 成德軍節度使 王士眞이 죽자, 그의 맏아들 副大使 王承宗이 스스로 節度留後가 되어서는 조정의 지시를 거역하였다. 憲宗이 환관인 吐突承璀를 統帥로 임명하여 左‧右神策軍을 거느리고 각 도의 장수들과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수들이 환관의 지휘를 받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여 관망만 하고 전력투구하지 않은 결과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리하여 憲宗은 어쩔 수 없이 王承宗을 成德軍節度使로 임명하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역주6 起復 : 관리가 부모상을 당하면 일반적으로 휴직하고 자택에서 삼년상을 마치는데, 상기를 마치기 전에 그를 기용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7 公嘗佐魏公平襄陽 靖梁州 : 賈耽이 大曆 14년(779) 11월에 梁州刺史‧山南西道節度使가 되었고, 建中 3년(782) 11월에 襄州刺史‧山南東道節度使가 되었는데, 孟常謙이 그때마다 賈耽의 휘하에서 그를 보좌하였다. 平襄陽은 梁崇義를 토벌한 것을 가리키고, 靖梁州는 梁州의 소요를 진압한 것을 말한다.
역주8 安州迫寇攘 : 安州는 淮西와 인접한 지역인데, 이 당시 淮西節度使 吳少陽이 군사를 양성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한 말이다. 迫은 가깝다는 뜻이다.
역주9 用兵於蔡 : 元和 9년에 淮西節度使 吳少陽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吳元濟가 자기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각 고을을 공격함으로써 關東 지방이 크게 흔들렸다. 憲宗이 裴度를 統帥로 임명하여 토벌을 진행하였고, 元和 12년(817)에 李愬가 정예기병으로 눈이 내리는 밤중에 蔡州를 습격하여 마침내 평정되었다.
역주10 外諸侯 : 지방의 여러 節度使를 가리킨다.
역주11 魯仲孫氏 : 仲孫氏는 春秋 때 魯나라 대부로, 三桓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름은 慶父이다. 三桓은 桓公의 세 아들인 孟孫‧叔孫‧季孫을 말하는데, 孟孫이 곧 仲孫이다. 이들이 三軍을 나누어 통솔하면서 魯나라 정권을 장악하였다.
역주12 賁勇光武 : 賁은 戰國 때 齊나라 용사인 孟賁을 가리키는데, 맨손으로 소의 생뿔을 뽑았다고 한다. 秦武王이 힘센 장사를 좋아했는데, 孟賁이 그에게 돌아가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武는 秦武王을 가리킨다.
역주13 軻儒紹聖 : 軻는 孟子의 이름이다. 聖은 孔子를 가리킨다.
역주14 執稽 : 執은 담당한다는 뜻이다. 稽는 《周禮》 〈天官 冢宰 上〉에 “군대와 사냥에 관한 일을 살펴보는 것으로, 무기를 검열하고 인원수를 헤아린다.[聽師田以簡稽]”라고 한 데서 나온 글자이다. 孟常謙이 賈耽의 휘하 막료로 있으면서 무기를 관리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등 제반 직무를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역주15 墨非從利 : 墨은 墨衰絰의 약칭으로, 검은 상복을 가리킨다. 춘추시대 晉 襄公이 그의 아버지 文公의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 秦 穆公의 군대와 싸워 물리친 뒤에 도성에 돌아와서 장례를 치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孔子가 “옛날 魯公 伯禽이 卒哭 뒤에 군대를 일으켜 정벌에 나선 것은 특수한 상황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지금 부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사적인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내가 그 까닭을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곧 이 두 어원을 합성한 문구로, 孟常謙이 부모의 상중에 출정한 것은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난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서였다는 뜻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33년》 《禮記 曾子問》
역주16 昔者雲中 六級下吏 : 雲中은 漢 文帝 때 雲中郡守를 지낸 魏尙을 가리킨다. 진영의 상인들로부터 거둔 세금을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개인 녹봉으로 소를 잡아 병사들과 관리들을 먹여 인심을 얻음으로써 그들이 각자 소임을 다해 匈奴가 감히 雲中을 침범하지 못했다. 나중에 노획한 적군의 首級 숫자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여섯 명이 차이 나자, 文帝가 그를 법관에게 회부하여 관작을 삭탈하게 하였다. 《漢書 권50 馮唐列傳》
역주17 黜伏南荒 : 安州刺史로 있던 孟常謙이 벌을 받아 柳州司馬로 좌천된 것을 말한다.
역주18 支膈 : 의학용어로, 가슴이 막혀 답답한 증세를 말한다.
역주19 俄仆於京 : 孟常謙이 국난을 걱정하다 병이 들어 죽은 것을 말한다. 京은 《詩經》 〈小雅 正月〉에 “생각하면 나는야 고독한 사람, 마음에 근심걱정 한이 없어라.[念我獨兮 憂心京京]”라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큰 근심을 뜻한다.
역주20 丸丸 : 《詩經》 〈商頌 殷武〉에 “저기 저 景山 위에 올라가볼까, 소나무며 잣나무 높기도 하다.[陟彼景山 松柏丸丸]”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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