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氏之孤曰遵慶
이 奉其父命書九篇
과 善狀一篇
하여 來告曰 月日君薨
하여 月日將葬於某
니 敢請刻辭
라하니라
嗚呼
라 公自假左贊善大夫 桓王司馬 太常少卿
으로 하고 其帥魏國公耽爲宰相
에 命公左領軍衛將軍
하니라
居喪
에 하여 하여 居故官
하고 爲左神策行營先鋒兵馬使知牙
나 而趙兵罷
하여 不受祿
하니라
命安州刺史에 仍加侍御史 安州防遏兵馬使라가 貶柳州司馬하니라
魏公弘大恢奇하고 公能以任軍政하여 是以又爲衛將軍이라
法制明具하여 權力無能移하고 進不避患하며 退不敗禮하니라
明年
에 할새 朝廷諸公洎
咸以公爲請
이나 未及徵
에 氣乘肺
하여 溢爲水
하여 浮膚而卒
하니 年六十
이라
聞國難에 輒不寢食하고 謀度憤吒하니 以故病不可治라
07. 유주사마柳州司馬 맹공孟公의 묘지명墓誌銘
맹씨孟氏의 아들 준경遵慶이 그의 부친이 남긴 글 아홉 편과 행장 한 편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모월 모일 부군府君께서 세상을 떠나 모월 모일 모처에 안장하려 하니, 묘지석墓誌石에 새길 글을 지어주십시오.” 하였다.
아, 공은 가좌찬선대부假左贊善大夫‧환왕사마桓王司馬‧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부터 의성군중군병마사義成軍中軍兵馬使가 되었고, 그의 통수統帥 위국공魏國公 가탐賈耽이 재상이 되었을 때 공을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으로 명했다.
덕종德宗‧순종順宗과 금상今上을 섬기면서 9년 동안 벼슬살이를 한 끝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되었다.
복상服喪 기간 중에 마침 조주趙州에서 전투할 일이 생겨 공을 기복起復하게 하여 예전 관직에 앉히고 좌신책행영선봉병마사지아左神策行營先鋒兵馬使知牙로 삼았으나 조주趙州 군대가 해산되어 녹을 받지 않았다.
군복을 벗고 계속 상복을 입어 나머지 기간을 마쳤다.
안주자사安州刺史로 명했을 때 시어사侍御史‧안주방알병마사安州防遏兵馬使를 추가했다가 다시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시켰다.
공은 일찍이 위국공魏國公을 보좌하여 양양襄陽을 평정하고 양주梁州를 안정시켜 의성군義成軍의 치적을 이루었다.
위국공魏國公은 도량이 크고 넓은 데다 공이 군정軍政을 잘 수행했으므로 이로 인해 또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공은 진실하고 공손하며 청렴결백하여 행하는 일이 언제나 예절에 맞았다.
조주趙州를 정벌하는 임무를 수행할 때는 보루를 견고하게 세우고 장수의 휘하에서 죽기를 각오하였다.
국법을 분명하게 견지하여 권력으로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는 환난을 피하지 않고 물러날 때는 예법을 어기지 않았다.
안주安州는 반란이 일어난 지역과 가까워 전투하는 일이 많은데도 평범한 지방과 다름없이 정무를 처리하니 법관이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문책하였다.
이듬해에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진압할 군대를 출동할 적에 조정의 여러 대신과 지방의 방백들이 모두 공을 추천하였으나, 미처 부르기 전에 폐기종이 생겨 가슴에 물이 차서 부어올라 죽으니, 향년 60세였다.
공은 안으로는 의지가 확고하고 밖으로는 태도가 근엄하였다.
공이 일찍이 조정에 서 있는데 그 모습이 꿋꿋하여, 내가 바라보니 마치 그림 속의 사람 같기도 하고 조각상 같기도 했다.
국난의 소식을 듣고는 먹고 자는 것조차 잊고 계책을 생각하며 울분을 토했으니, 이 때문에 병이 생겨 끝내 치료하지 못했다.
증조부는 아무 관직을 지냈고 이름은 아무개이다.
조부는 아무 관직을 지냈고 이름은 아무개이다.
부친은 아무 관직을 지냈고 이름은 아무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