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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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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凌與子厚同以附和王伾叔文輩坐貶이라
年月日 尙書都官員外郞 和州刺史 連州司馬 富春凌君諱準 卒於佛寺
先是六月 告於州刺史博陵
余嘗學하여 切脈視病하니
今余하니 將不而死 審矣
凡余之學孔氏하여 爲忠孝禮信이로되 而事大謬하여 卒不能有乎世者 命也
臣道無以明乎國하고 子道無以成乎家
下之得罪於人하여 以謫徙醜地하고 上之得罰於天하여 以降被罪疾하니 余無以禦也
敢以鬼事爲累라하고
又告爲老氏者某曰
余生於辰이어늘 今而寓乎戌하니 辰戌衝也
吾罪大하여 懼不克歸柩於吾鄕이라
是州之南 有大岡하니 吾甚樂焉이라
子其以是葬吾하라하니라
及是 咸如其言云이라
孤夷仲求仲 以其先人之善余也 勤以誌爲請이라
嗚呼
君字宗一이니 以孝悌聞於其鄕이라
杭州刺史常召君以訓於下
讀書爲文章이라
著漢後春秋二十餘萬言하고 又著六經解圍人文集未就
有謀略하고 尙氣節하고 賙人之急하여 出貨力猶棄粃稗
年二十 以書干丞相 丞相以聞하여 試其文하니 日萬言일새
擢爲崇文館校書郞하고 又以金吾兵曹爲邠寧節度掌書記하니라
涇之亂 以謀畫佐元戎하여 常有大功하고 累加大理評事御史하여 賜緋魚袋
換節度判官하고 轉殿中侍御史라가 罷職이라
後遷侍御史하고 하여 撫循罷人하고 按驗汙吏하니 吏人敬愛
厥績以懋하여 粹然而光하니 聲聞於上하여
德宗崩 邇臣議祕三日乃下遺詔하니
君獨抗危詞하여 以語同列王伾하고 畫其不可者十六七하여 乃以旦日發喪하니 六師萬姓安其分이라
遂入爲尙書하여 仍以文章侍從하고 由本官參度支하여 調發出納하니衰止
居母喪 不得歸하고 而二弟繼死하니 不食하고 哭泣이라가 遂喪其明以沒이라
蓋君之行事如此로되 其報應如此
夫人高氏 在越하고
孤四人 南仲殷仲在夫人所하여 未至
執友河東柳宗元哀君有道而不明白於天下하여 離愍逢尤夭其生하고 且又同過
故哭以爲志하니 其辭哀焉이라
銘曰
噫凌君이여
生不淑이라
學孔氏하여
揚芬郁이라
好謀謨하여
富天祿이라
하고
하니
觀靈龜하고
獲貞卜이라
徙東越하여
하니
罷人蘇하고
汙吏覆이라
升侍從하여
躬啓沃하니
匡危疑하고
興大福이라
徒隷肅하고
佐經邦
財用足이라
道之躓
身則辱하니
이라
仍禍凶하여
遘玆酷이나
能知命하여
無怨毒이나
罪不泯하니
死猶僇이라
何以葬
南嶺曲이라
魂有靈이면
故鄕復이라
封玆壤하여
歸骨肉하니
爲之銘하여
이라


09. 연주원외사마連州員外司馬 능군凌君의 임시 무덤 묘지명墓誌銘
능씨凌氏유자후柳子厚와 함께 왕비王伾왕숙문王叔文 무리와 어울렸다가 죄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화주자사和州刺史연주사마連州司馬부춘富春 능군凌君 계양桂陽의 절간에서 죽었다.
그가 죽기 6개월 전에 연주자사連州刺史 박릉博陵 최군崔君에게 고하였다.
“내가 일찍이 황제黃帝의 글을 배운 적이 있어 맥을 짚고 병을 볼 줄 압니다.
지금 나는 간장의 맥은 가라앉고 순조롭지 않으며 신장의 맥은 들떠 있고 고르지 않으니, 연말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배워 충성과 효성, 예법과 신의를 중시하였으나 일이 크게 잘못되어 결국 세상에 큰일을 이루어내지 못했으니, 이는 운명입니다.
신하의 도리를 나라에서 밝히지 못하고 자식의 도리를 가정에서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래로는 주위 사람에게 죄를 얻어 변방 황무지로 유배되었고, 위로는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나쁜 병이 이 몸에 내려졌으니, 나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습니다.
감히 나의 장례를 부탁드립니다.”
도가道家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고하였다.
“나는 ‘’의 해에 태어났는데 지금 ‘’의 해를 만났으니, ‘’과 ‘’은 상극입니다.
나의 운명과 나의 맥박이 서로 부합하니, 아마도 죽을 것입니다.
내 죄가 커서 관이 나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의 남쪽에 경작하지 않는 큰 언덕이 있는데, 나는 그곳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대는 나를 그곳에 묻어주십시오.”
그때가 되자 모두 그의 말대로 되었다.
아들 이중夷仲구중求仲이 그의 선친께서 나와 사이가 좋았다는 이유로 나를 찾아와 지문誌文을 써달라고 청했다.
아, 슬프다.
능군凌君의 자는 종일宗一인데 고향에서 효성과 우애로 이름났다.
항주자사杭州刺史가 평소에 능군凌君을 불러다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게 했다.
글을 읽고 문장을 썼다.
한후춘추漢後春秋》 20여만 자를 저술했고, 또 《육경해위인문집六經解圍人文集》을 저술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계책을 내고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잘 도와줘 마치 쭉정이를 버리듯이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았다.
스무 살 때 승상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자신을 소개하자, 승상이 그를 조정에 알려 그의 문장 솜씨를 시험하니 하루에 만 자를 써냈다.
그리하여 숭문관崇文館 교서랑校書郞으로 발탁했고, 또 금오병조金吾兵曹에서 자리를 옮겨 빈녕절도장서기邠寧節度掌書記가 되었다.
주체朱泚경원涇原의 난리 때 계책을 내 주장主將을 보좌하여 계속 큰 공을 세워 대리평사大理評事어사御史로 승진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옮긴 뒤에 다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가 막부幕府가 사망하자 파직되었다.
뒤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기고 절동렴사판관浙東廉使判官이 되어서는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탐관오리를 색출하니, 관리와 서민들이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그 업적이 크게 드러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명성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니, 불러들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덕종德宗이 서거하였을 때 근신들이 사흘 동안 비밀에 부친 뒤에 유조遺詔를 내리자고 의논하였다.
이때 능군凌君이 홀로 바른말로 반대하여 같은 반열에 있던 왕비王伾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를 16, 7가지를 들어 말해, 이튿날 아침에 서거 사실을 공표하니 육사六師와 만백성이 각자 위치에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마침내 〈황제의 측근으로〉 들어가 상서랑尙書郞이 되어 계속 문장으로 황제를 보필했고, 이후 본관本官으로 탁지度支에 참여하여 재물의 출납을 조절하고 관리하니, 간사한 관리가 사라졌다.
죄에 연루되어 화주자사和州刺史로 나가다가 강등되어 연주사마連州司馬가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게다가 두 아우가 연이어 죽자, 식음을 폐하고 통곡하다가 결국 시력을 잃고 죽었다.
대체로 능군凌君의 행적이 위와 같은데도 그에 대한 보답은 이처럼 불행하였다.
부인은 고씨高氏로, 지금 지방에 있다.
아들은 넷인데 남중南仲은중殷仲은 부인이 있는 곳에 있어 아직 오직 않았다.
하동河東 유종원柳宗元능군凌君이 도를 지니고서도 이 세상에 환히 드러내지 못하고 근심거리와 환난을 만나 일찍 생을 마감한 데다 또 나와 같은 죄에 연루된 것이 애달팠다.
그래서 곡을 하면서 이 지문誌文을 쓰노라니, 그 말들이 애처로울 수밖에 없었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애처롭다 능군凌君이시여,
살아생전 불행하였네.
공자孔子 도를 배워 익혀서,
짙은 향기 널리 풍기고,
계책 계략 짜기 좋아해,
한때 복록 많이 누렸지.
궁중 서적 교감도 하고,
지방 장수 보좌할 적에,
영귀靈龜 같은 존재가 되어,
예측한 게 척척 맞았네.
절동浙東으로 자리를 옮겨,
어진 주목州牧 보좌할 때는,
지친 백성 소생시키고,
탐관오리 넘어뜨린 뒤,
승진해서 시종신 되자,
군주에게 바른말 올려,
나라 위험 제거했으며,
많은 복을 일으켰다네.
자리 옮겨 상서랑尙書郞 되자,
휘하 관리 숙연해졌고,
탁지度支 일을 맡았을 때는,
나라 재정 풍족해졌네.
그러다가 끝내 넘어져,
멀쩡한 몸 치욕을 당해,
오강烏江 가에 폄적이 되고,
구의산九疑山 밑 강등된 뒤에,
변고 재앙 꼬리를 물어,
이 참혹한 일을 만났네.
자기 운명 능히 알아서,
원한이야 없다고 해도,
죄목 아니 지워졌기에,
죽더라도 치욕은 여전,
무덤 자리 스스로 정해,
남쪽 언덕 좋다고 했네.
죽어 행여 영혼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소서.
여기 이곳 조성한 자리,
공의 골육 묻히었으니,
내 이 한 편 명문銘文을 지어,
산천 변화 대비한다네.


역주
역주1 : 元和 원년(806) 永州司馬로 있을 때 쓴 글이다. 凌君은 凌準으로, 자는 宗一이며 富春 사람이다. 작자 및 劉禹錫 등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고, 永貞革新의 주요 인물로 八司馬 가운데 한 사람이다. 尙書省都官員外郞으로 활동하던 중, 永貞革新이 실패하여 和州刺史로 폄직되었다가, 다시 連州司馬로 폄직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역주2 桂陽 : 지금의 廣東 連縣으로 唐나라 때 連州 관아의 소재지였다.
역주3 崔君 : 작자의 큰 자형 崔簡을 가리킨다. 崔簡이 이때 連州刺史로 있었는데, 凌準이 連州司馬로 폄직되어 온 것이다.
역주4 黃帝書 : 중국 고대의 의학서적으로, 《黃帝內經》을 가리킨다. 《內經》으로도 불리며, 素問과 靈樞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역주5 肝伏以濇 腎浮以代 : 伏‧濇‧浮‧代는 맥박 현상에 관한 한의학 용어이다. 伏은 맥박이 가라앉아 잡히지 않는 현상이고, 濇은 기혈이 막혀 맥박이 순조롭지 않은 현상이다. 浮는 맥박이 가볍게 뛰어 피부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외부의 찬 기운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현상이고, 代는 맥박이 급하게 뛰었다가 크게 뛰었다가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환자의 손목 안쪽 부분의 寸‧關‧尺 세 맥을 짚어 그 상태를 살펴보고 병이 생긴 원인을 알아낸다.
역주6 : 연말에 온갖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지내는 臘祭의 약칭이다. 상고 때는 10월에 지냈고, 漢나라 이후에는 동지 이후에 지냈다. 여기서는 연말을 의미한다.
역주7 (固)[故] : 저본에는 ‘固’로 되어 있는데, 明나라 何焯의 《義門讀書記》에 의하면 ‘故’자의 오자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故’로 바로잡았다.
역주8 (示)[立] : 저본에는 ‘示’로 되어 있는데,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余生於辰……其死矣乎 : 陰陽五行의 학설에서 12개의 地支를 방위에 따라 배합할 때, 子午‧丑未‧寅申‧卯酉‧辰戌‧己亥가 서로 정면으로 상충한다. 예를 들면 子는 북방, 午는 남방과 같은 식이다. 凌準이 태어난 해가 辰年이므로 戌年에는 불행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辰은 東東南方이고 戌은 西西北方이다.
역주10 不食 : 농사를 짓지 않는 황무지를 가리킨다. 《禮記》 〈檀弓〉에 子高가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경작하지 않는 곳을 골라 나를 묻으라.[我死 則擇不食之地而葬我焉]” 하였다.
역주11 〈泚〉涇之亂 以謀畫佐元戎 : 唐 德宗 建中 4년(783) 10월에 涇原節度使 姚令言이 朱泚를 끼고 반란을 일으켜, 長安을 수중에 넣은 다음 朱泚를 황제로 옹립하고 국호를 大秦이라 하였다. 元戎은 邠寧節度使 韓游瓌를 가리킨다. 이때 凌準이 그의 휘하에 있으면서 계책을 내어 반란군 토벌을 도왔다.
역주12 〈泚〉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3 府喪 : 府는 幕府로, 節度使를 가리킨다. 貞元 12년(796) 5월에 邠寧節度使 張獻甫가 죽었다.
역주14 爲浙東廉使判官 : 貞元 18년(802) 1월에 常州刺史 賈全을 浙東觀察使로 임명하고 凌準을 그의 휘하인 廉訪使判官으로 임명하였다.
역주15 召以爲翰林學士 : 貞元 21년(805) 1월에 凌準이 浙東에서 중앙으로 불려 들어와 翰林學士가 되었다.
역주16 〈郞〉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利)[吏] : 저본에는 ‘利’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吏’로 바로잡았다.
역주18 以連累出和州 降連州 : 永貞 원년(785) 9월에 凌準이 都官員外郞에서 폄직되어 和州刺史가 되었다가 다시 連州司馬員外置同正員으로 강등되었다.
역주19 讐禁書 : 讐는 서책을 교감한다는 뜻이고, 禁書는 황실 서고에 수장된 진귀한 책을 가리킨다. 凌準이 일찍이 崇文館校書郞으로 복무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0 贊推(퇴)轂 : 推轂은 군주가 장수를 지방에 파견할 때 꿇어앉아 장수가 탄 수레의 바퀴통을 밀면서 “궐문 안은 과인이 다스리고 궐문 밖은 장군이 다스리라.”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 단어인데, 여기서는 단순히 임금이 임명한 장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凌準이 일찍이 邠寧節度掌書記로 복무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1 翊明牧 : 明牧은 현명한 지방관이란 뜻으로, 浙東觀察使 賈全을 가리킨다. 凌準이 일찍이 浙東廉訪使判官이 되어 賈全을 보좌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2 吏尙書 : 凌準이 일찍이 尙書都官員外郞이 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3 烏江垂 : 烏江은 지금의 安徽 和縣 동북방에 있는 강 이름인데, 이 강이 和州 경내에 있기 때문에 和州를 가리킨다. 垂는 ‘陲’와 같이 쓰인 글자로, 주변이라는 뜻이다. 凌準이 和州刺史로 폄적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4 九疑麓 : 九疑는 지금의 湖南 寧遠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唐나라 때 連州 경내에 있었다. 凌準이 連州司馬로 강등되어 폄적되었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25 志陵谷 : 陵谷은 海桑陵谷의 준말이다. 큰 바다가 뽕밭으로 변하고 산언덕이 깊은 골짝으로 변했다는 말로, 흔히 세월이 오래되어 세상이 완전히 변했다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먼 후대에 높은 구릉이 낮아져 골짜기로 변하는 등 지형의 변화가 생겼을 때 지금 조성한 무덤이 보존되기 어려울 것이므로, 지금 墓誌銘을 써 무덤가에 묻음으로써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는 것이다. 志는 여기서는 ‘기억하다, 알아보다’는 뜻으로 쓰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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