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月日
에 尙書都官員外郞 和州刺史 連州司馬 富春凌君諱準
이 卒於
佛寺
라
凡余之學孔氏
하여 爲忠孝禮信
이로되 而事
大謬
하여 卒不能有
乎世者
는 命也
라
下之得罪於人하여 以謫徙醜地하고 上之得罰於天하여 以降被罪疾하니 余無以禦也라
著漢後春秋二十餘萬言하고 又著六經解圍人文集未就라
有謀略하고 尙氣節하고 賙人之急하여 出貨力猶棄粃稗라
年二十에 以書干丞相에 丞相以聞하여 試其文하니 日萬言일새
擢爲崇文館校書郞하고 又以金吾兵曹爲邠寧節度掌書記하니라
涇之亂
에 以謀畫佐元戎
하여 常有大功
하고 累加大理評事御史
하여 賜緋魚袋
라
後遷侍御史
하고 하여 撫循罷人
하고 按驗汙吏
하니 吏人敬愛
라
君獨抗危詞하여 以語同列王伾하고 畫其不可者十六七하여 乃以旦日發喪하니 六師萬姓安其分이라
遂入爲尙書
하여 仍以文章侍從
하고 由本官參度支
하여 調發出納
하니 姦
衰止
라
居母喪에 不得歸하고 而二弟繼死하니 不食하고 哭泣이라가 遂喪其明以沒이라
執友河東柳宗元哀君有道而不明白於天下하여 離愍逢尤夭其生하고 且又同過라
09. 고故 연주원외사마連州員外司馬 능군凌君의 임시 무덤 묘지명墓誌銘
능씨凌氏는 유자후柳子厚와 함께 왕비王伾‧왕숙문王叔文 무리와 어울렸다가 죄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상서도관원외랑尙書都官員外郞‧화주자사和州刺史‧연주사마連州司馬‧부춘富春 능군凌君 휘諱 준準이 계양桂陽의 절간에서 죽었다.
그가 죽기 6개월 전에 연주자사連州刺史 박릉博陵 최군崔君에게 고하였다.
“내가 일찍이 황제黃帝의 글을 배운 적이 있어 맥을 짚고 병을 볼 줄 압니다.
지금 나는 간장의 맥은 가라앉고 순조롭지 않으며 신장의 맥은 들떠 있고 고르지 않으니, 연말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배워 충성과 효성, 예법과 신의를 중시하였으나 일이 크게 잘못되어 결국 세상에 큰일을 이루어내지 못했으니, 이는 운명입니다.
신하의 도리를 나라에서 밝히지 못하고 자식의 도리를 가정에서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래로는 주위 사람에게 죄를 얻어 변방 황무지로 유배되었고, 위로는 하늘로부터 벌을 받아 나쁜 병이 이 몸에 내려졌으니, 나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진辰’의 해에 태어났는데 지금 ‘술戌’의 해를 만났으니, ‘진辰’과 ‘술戌’은 상극입니다.
나의 운명과 나의 맥박이 서로 부합하니, 아마도 죽을 것입니다.
내 죄가 커서 관이 나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주州의 남쪽에 경작하지 않는 큰 언덕이 있는데, 나는 그곳을 매우 좋아합니다.
아들 이중夷仲과 구중求仲이 그의 선친께서 나와 사이가 좋았다는 이유로 나를 찾아와 지문誌文을 써달라고 청했다.
능군凌君의 자는 종일宗一인데 고향에서 효성과 우애로 이름났다.
항주자사杭州刺史가 평소에 능군凌君을 불러다가 아랫사람들을 가르치게 했다.
《한후춘추漢後春秋》 20여만 자를 저술했고, 또 《육경해위인문집六經解圍人文集》을 저술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계책을 내고 기개와 절의를 숭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잘 도와줘 마치 쭉정이를 버리듯이 재물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았다.
스무 살 때 승상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 자신을 소개하자, 승상이 그를 조정에 알려 그의 문장 솜씨를 시험하니 하루에 만 자를 써냈다.
그리하여 숭문관崇文館 교서랑校書郞으로 발탁했고, 또 금오병조金吾兵曹에서 자리를 옮겨 빈녕절도장서기邠寧節度掌書記가 되었다.
주체朱泚와 경원涇原의 난리 때 계책을 내 주장主將을 보좌하여 계속 큰 공을 세워 대리평사大理評事‧어사御史로 승진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옮긴 뒤에 다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가 막부幕府가 사망하자 파직되었다.
뒤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기고 절동렴사판관浙東廉使判官이 되어서는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탐관오리를 색출하니, 관리와 서민들이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그 업적이 크게 드러나 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명성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니, 불러들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덕종德宗이 서거하였을 때 근신들이 사흘 동안 비밀에 부친 뒤에 유조遺詔를 내리자고 의논하였다.
이때 능군凌君이 홀로 바른말로 반대하여 같은 반열에 있던 왕비王伾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를 16, 7가지를 들어 말해, 이튿날 아침에 서거 사실을 공표하니 육사六師와 만백성이 각자 위치에서 안정을 찾게 되었다.
마침내 〈황제의 측근으로〉 들어가 상서랑尙書郞이 되어 계속 문장으로 황제를 보필했고, 이후 본관本官으로 탁지度支에 참여하여 재물의 출납을 조절하고 관리하니, 간사한 관리가 사라졌다.
죄에 연루되어 화주자사和州刺史로 나가다가 강등되어 연주사마連州司馬가 되었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게다가 두 아우가 연이어 죽자, 식음을 폐하고 통곡하다가 결국 시력을 잃고 죽었다.
대체로 능군凌君의 행적이 위와 같은데도 그에 대한 보답은 이처럼 불행하였다.
아들은 넷인데 남중南仲과 은중殷仲은 부인이 있는 곳에 있어 아직 오직 않았다.
벗 하동河東 유종원柳宗元은 능군凌君이 도를 지니고서도 이 세상에 환히 드러내지 못하고 근심거리와 환난을 만나 일찍 생을 마감한 데다 또 나와 같은 죄에 연루된 것이 애달팠다.
그래서 곡을 하면서 이 지문誌文을 쓰노라니, 그 말들이 애처로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