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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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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予覽子厚之文컨대 其議論處多鑱畫하고 其記山水處多幽邃夷曠이라
至於墓誌碑碣하여는 其爲御史及禮部員外時所作 多沿六朝之遺일새 予不錄하고 錄其貶永州司馬以後稍屬雋永者凡若干首하여 以見其風槪云이라
然不如昌黎多矣
惟柳州古爲南夷 椎髻卉裳으로 攻劫鬪暴하여 雖唐虞之仁不能柔하고 秦漢之勇不能威라가
至於有國하여 始循法度
置吏奉貢하고 하니 冠帶憲令으로
學者道堯舜孔子하여 執經書하고 引仁義하여 旋辟唯諾하여 中州之士 하니
然後知唐之德大以遐하고 孔氏之道尊而明하니라
元和十年八月 州之廟屋壞하여 幾毁神位하니
刺史柳宗元始至 大懼不任하여 以墜敎基 奠薦法齊時事 禮不克施하여
하고 洎於贏財하여 取土木金石하며 徵工僦功하여 完舊益新하니
十月 이라 乃安神棲하고 乃正法庭하여 祗會群吏하고
卜日之吉하여 虔告於
今夫子代千有餘載 其敎始行하여 至於是邦이라
人去其陋하여 而本於儒하며 孝父忠君하고 言及禮義어든
又況巍然炳然하여 리오
惟夫子以하시니 我今罔敢知
欽若玆敎하여 以寧其神하리이다
追思告誨하니 如在於前이라
苟神之在리니 曷敢不虔이리오
居而無陋 罔貳昔言이라
申陳嚴祀하여 永永是尊이라
麗牲有碑하니 刻在廟門이라


01. 새롭게 중수한 유주柳州 문선왕묘文宣王廟의 비문
내가 유자후柳子厚의 문장을 열람해보니, 논변論辯을 전개한 부분은 핵심을 찌르는 작품이 많고, 산수山水를 기록한 부분은 깊숙하고 고요하며 평탄하고 광활한 경물에 관한 것들이 많다.
묘지墓誌비갈碑碣에 관한 작품은, 감찰어사監察御史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으로 재직할 때 쓴 것들은 육조六朝 때의 유풍을 답습한 경향이 많았으므로 초록하지 않았고, 영주사마永州司馬로 폄직된 이후에 쓴 것으로 비교적 준수하다고 분류할 만한 작품 약간 편을 초록하여 그 풍모와 기개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보다 못한 작품이 많다.
중니仲尼의 도는 제왕이 천하를 교화하는 덕과 그 부침浮沈성쇠盛衰를 함께하였다.
그러나 유독 유주柳州는 옛날부터 남이南夷라고 하여 몽치 모양의 상투머리에다 풀잎으로 얽어 만든 옷차림으로 서로 공격하여 약탈하고 난폭하게 싸워댔으므로, 의 인자한 덕으로도 교화시킬 수 없었고 의 용맹한 군대로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가 들어선 뒤에야 비로소 올바른 법도를 따랐다.
그래서 관리를 배치하여 공물을 바치고 채복采服위복衛服이 모두 교화되자, 관을 쓰고 띠를 둘러 〈유자儒者의 복장으로〉 국법을 준수하고 문인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글을 배우는 사람은 공자孔子의 도를 말하여 〈학문수양의 원천을〉 좌우에서 취하듯 〈도처에서 자연스럽게 얻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서를 손에 쥐고 인의仁義를 인용하면서 행동거지를 예법禮法에 맞게 겸손하게 함으로써 중원中原의 선비들 사이에서도 간혹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고 자책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된 뒤에야 비로소 나라의 덕이 크고 또 멀리까지 미쳤으며, 공자孔子의 도가 높고 또 환히 밝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화元和 10년 8월에 유주柳州공자孔子 사당 건물이 허물어져 신위神位가 거의 훼손되었다.
자사刺史 유종원柳宗元이 처음 부임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교화의 기초가 무너지게 함으로써 정미일에 제물을 올리고 재계하는 계절제사에 관한 예를 진행할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싶어 크게 두려웠다.
이에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 등 세 제관祭官제복祭服 대금을 수합하고 그 경비를 더 충분히 확보한 뒤에 그것으로 흙‧목재‧쇠붙이‧돌 등 자재를 준비하고 인부들을 고용해 공사를 진행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여 새롭게 만들었다.
10월 을축일에 왕궁王宮정실正室이 완성되자, 마침내 위패를 봉안하고 정전正殿 마당을 정리한 뒤에 삼가 관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길일을 잡아 문선왕文宣王의 영전에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옛날 부자夫子께서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어 하시자, 그 당시 문인들도 성인聖人의 말씀에 의아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夫子의 세대가 지나간 지 천여 년이 된 지금 그 가르침이 비로소 행해지고 이 고장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루함을 버리고 유학儒學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면서 예절과 의리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영령께서 거룩하고 찬란하게 이곳에 임하시어 후생들이 교화를 받게 되었으니, 〈그 다행스러움을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부자夫子께서는 신묘한 도로 교화를 행하셨으니, 저희가 지금 그 묘리를 감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삼가 그 교화에 순응하여 부자夫子의 넋을 편안하게 해드리렵니다.
일러주시고 가르쳐주신 말씀을 떠올리면 마치 바로 눈앞에 계신 듯합니다.
진정 영혼이 계실 터이니, 어찌 감히 경건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주하면 누추하지 않을 것이라 하신 옛날의 그 말씀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삼가 제사를 엄숙하게 올리면서 길이길이 존경하렵니다.
희생을 매어두는 비석을 마련하고 이 글을 새겨 넣어 사당 앞에 세웁니다.”


역주
역주1 : 元和 10년(815) 10월에 쓴 작품이다. 작자의 나이 43세인 이해 1월에 永州司馬로 폄직된 지 10년 만에 풀려나 長安으로 돌아갔으나 완전한 사면을 받지 못하고, 3월에 다시 柳州刺史로 제수되어 永州보다 더 먼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8월에 柳州의 文宣王廟가 허물어져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10월까지 2개월 동안에 사당을 대규모로 중수하고, 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웠다. 이 문장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추앙받는 孔子의 영향이 미개한 변방지역인 柳州에까지 미쳐 仁義와 禮法을 추구하는 풍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서술한 다음, 孔子의 영령에게 새로 중수한 사당에서 앞으로 제사를 잘 받들겠다는 뜻을 다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文宣王은 唐 玄宗 開元 27년(739)에 孔子에게 봉한 시호이다. 이때부터 孔子의 사당을 文宣王廟라 불렀으며 文廟라고 약칭하였다.
역주2 仲尼之道 與王化遠邇 : 仲尼는 孔子의 자이고, 遠邇는 부침과 성쇠의 뜻으로 쓴 것이다.
역주3 咸若采衛 : 咸若은 모두 교화되어 순응한다는 뜻이다. 采衛는 采服과 衛服의 약칭이다. 周나라 제도에 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1,000리는 王畿라 하고 그 밖은 사방 500리마다 차례로 구역을 정하여 侯服, 甸服, 男服, 采服, 衛服, 蠻服, 夷服, 鎭服, 藩服의 아홉 구역으로 나누었다. 《周禮 夏官 職方氏》
역주4 進用文(事)[士] : 저본에는 ‘事’자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 주석에 ‘士’자로 된 곳도 있다 하였고, 문세로 보더라도 ‘士’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므로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5 如取諸左右 : 《孟子》 〈離婁 下〉에 “〈학문을〉 쌓기를 많이 하면 좌우에서 취할 적에 그 근원을 만난다.[資之深 則取之左右 逢其原]”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학문의 수준이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좌우에서 접촉하는 사물이 모두 학문수양의 원천이 된다는 뜻이다.
역주6 時或病焉 : 《廣西通志》 〈柳州府〉에 “時或遜焉”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病’자는 자신을 책망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여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7 丁未 : 음력 을미년, 곧 815년 8월 9일이다. 唐나라 때부터 매년 2월과 8월 첫 번째 丁日을 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로 정했다.
역주8 乃合初亞終獻三官衣布 : 《新唐書》 권15 〈禮樂志〉에 “國學에서 釋奠을 행할 때는 祭酒‧司業‧博士를 三獻으로 하고, 州學은 刺史‧上佐‧博士를 三獻으로 한다.” 하였다.
國學은 國子監으로 조선시대의 成均館과 같고, 州學은 조선시대의 鄕校와 같다.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孔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初獻은 제사 때 술잔을 첫 번째 올리는 사람이고, 亞獻은 두 번째 올리는 사람이고, 終獻은 세 번째 올리는 사람을 말하는데, 初獻은 일반적으로 그 제사를 진행하는 사람 중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 맡는다. 三官은 제사에 술잔을 올리는 初獻‧亞獻‧終獻 세 사람이 모두 관리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들이 제사를 지낼 적에 입을 제복을 관아에서 지어 제공하였는데, 이때 柳州의 文宣王廟가 허물어져 秋享을 행할 수 없게 되자, 건물을 중수하는 데에 들어갈 비용에 보태기 위해 제복 제작비로 예정되었던 돈을 수합한 것이다. 布는 錢과 통용되는 글자로, 돈을 말한다.
역주9 乙丑 : 815년 10월 28일이다.
역주10 王宮正室 : 文聖王廟의 본채인 正殿을 가리킨다.
역주11 王靈 : 文聖王의 영령, 곧 孔子의 영령이란 뜻이다.
역주12 夫子嘗欲居九夷 其時門人猶有惑聖言 : 상고 때 九夷‧八狄‧七戎‧六蠻을 四海라고 했는데, 九夷는 동방 소수민족에 대한 칭호이다. 《論語》 〈子罕〉에 “孔子가 九夷 지방으로 옮겨가 거주했으면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곳은 누추한 곳인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니, 孔子가 ‘군자가 가서 거주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라고 했다.” 하였다. 孔子의 대답은, 문화가 뒤떨어져 미개한 지역이라 해도 학문과 지혜가 뛰어난 군자가 머물러 있으면서 문화와 지식을 전파하여 깨우친다면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뜻이다.
역주13 臨而炙之乎 : 《柳河東集》에 의하면 이 구절 끝에 빠진 부분이 있다고 되어 있다.
역주14 神道設敎 : 《周易》 觀卦에 “聖人이 신묘한 도로 교화를 펴니 이로 인해 천하 백성들이 감복하였다.[聖人以神道設敎而天下服矣]”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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