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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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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孔子沒而百家之言 各出其見하여 以相揣摩하니 而柳子厚爲之辯析하고 竝有指歸하니 可觀覽이라
劉向古稱博極群書
然其錄列子 獨曰이라하니라
穆公在孔子前幾百歲하고 列子書言鄭國 皆云하니 不知向何以言之如此
史記 鄭繻公 楚悼王四年이니 이라하니
是歲 이요 秦惠王韓列侯趙武侯二年이요 魏文侯二十七年이요 燕釐公五年이요 齊康公七年이요 宋悼公六年이요 魯穆公十年이라
不知向言魯穆公時 遂誤爲鄭耶
不然인댄 何乖錯至如是
然其書亦多增竄하여 非其實이라
要之컨대 莊周爲放依其辭하니 하고 不可盡紀
雖不槪於孔子道 然其虛泊寥闊하여 居亂世 遠於利하여 禍不得逮於身하고 而其心不窮하니
易之遁世無悶者 其近是歟인저
余故取焉이라
其文辭類莊子 而尤質厚하여 少爲作하니 好文者可廢耶
然觀其辭 亦足通知古之多異術也 讀焉者愼取之而已矣니라


09. 《열자列子》에 관한 논변論辯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난 뒤로 백가百家의 말이 저마다 그 견해를 드러내어 서로 옳으니 그르니 따졌는데, 유자후柳子厚가 그 시비를 가려 분석하고 아울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으니, 그 문장을 살펴볼 만하다.
유향劉向은 수많은 서적을 널리 섭렵한 것으로 옛날에 이름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쓴 〈열자목녹원서列子目錄原序〉에는 그답지 않게 열자列子 목공穆公 때 사람이라고 말했다.
목공穆公공자孔子보다 거의 100년 전에 살았고, 《열자列子》에 나라 일을 말할 때 모두 자산子産등석鄧析을 거론하였으니, 유향劉向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말했는지 모르겠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수공繻公 25년(B.C. 398)은 도왕悼王 4년인데 이때 나라를 포위하여 이기자, 나라가 자기 재상 사자양駟子陽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자양子陽은 곧 열자列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이해는 안왕安王 4년, 혜왕惠王 열후列侯 무후武侯 2년, 문후文侯 27년, 이공釐公 5년, 강공康公 7년, 도공悼公 6년, 목공穆公 10년이었다.
혹시 유향劉向 목공穆公 때라고 말해야 할 것을 실수로 목공穆公으로 잘못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어긋나겠는가.
나중에 《열자列子》를 주석한 장담張湛은 그저 《열자列子》의 내용이 목공穆公 이후의 일들이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 그가 살았던 시기를 추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열자列子》는 후세 사람이 추가하고 고친 부분이 많아 이미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아무튼 장주莊周가 《열자列子》의 어구語句를 모방하였으니, 그가 거론한 하극夏棘저공狙公기성자紀渻子계함季咸 등의 사적은 모두 《열자列子》로부터 나왔으며, 이와 같은 사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열자列子》의 내용이 비록 공자孔子와는 부합하지 않지만, 그 마음은 담박하고 원대하여 난세에 살면서도 사적인 이익을 멀리함으로써 재앙이 그 자신에게 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 마음이 고달프지 않았다.
이는 《주역周易》에서 말한 “세속을 피해 숨어 살아도 걱정하는 일이 없다.”라고 한 도리가 어쩌면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취할 만한 점이 있다고 본다.
문자文字어구語句는 대체로 《장자莊子》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질박하고 후중하여 고의로 꾸미고 조작한 흠이 적으니,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양주楊朱〉와 〈역명力命〉 두 편은 과연 양주楊朱의 설을 말한 글일까 의심되고, 그 안에 언급한 위공자모魏公子牟공천孔穿은 모두 열자列子 이후 인물이니, 이런 부분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의 문장을 살펴보면 충분히 옛날에 서로 다른 학술이 많았다는 것을 환히 알 것이니,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신중히 가려 취하면 될 것이다.


역주
역주1 : 제목은 辯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를 고증하여 바로잡는 학술적인 성격의 글이므로 실제로는 ‘考’에 가깝다.
《列子》는 春秋時代 鄭나라 列禦寇가 지었다는 道家書로, 8권 20편이다. 漢나라 劉向(B.C. 77~B.C. 6)이 그중 8편을 교정하였고, 이것을 西晉 때 어떤 사람이 재편집하여 현재까지 전해온다고 한다.
작자는 劉向이 쓴 〈列子目錄原序〉에 列禦寇가 생존한 시기를 잘못 말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여 고증하고, 아울러 후세 사람들이 추가한 내용이 뒤섞여 있어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문장이 질박하면서도 고상하여 취할 점이 있다고 하였다. 작자는 역사상 가장 먼저 列禦寇의 생존시기와 《列子》의 진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었다.
역주2 鄭穆公時人 : 鄭 穆公은 이름이 蘭이고 시호가 穆(繆으로도 씀)으로 鄭 文公의 아들이다. 魯 僖公 33년(B.C. 627)에 즉위하여 魯 宣公 3년(B.C. 606)에 죽어 22년 동안 재위하였다. 劉向의 〈列子目錄原序〉에 “列子라는 자는 鄭나라 사람으로 鄭 繆公과 같은 시대인데 대체로 도가 있는 사람이다.[列子者 鄭人也 與鄭繆公同時 蓋有道者也]”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시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작자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南宋 葉大慶의 《考古質疑》 권3에 “鄭 繆公은 鄭 繻公의 잘못이다. 繆자와 繻자에 다 糸가 붙어 있으므로 오류가 생긴 것이다.” 하였고, 明나라 胡應麟의 《少室山房筆叢》 권27에도 “劉向은 많은 서적을 섭렵한 사람이므로 이처럼 착오가 있을 리 없다. 분명히 劉向이 쓴 序文의 원본에는 繻公으로 되어 있었을 것인데, 후세 사람이 모르고 글자를 혼동하여 바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繻자가 繆ㆍ穆과 모양이 비슷하여 오류가 생겼다고 본 것이다.
鄭 繻公은 鄭 幽公의 아우로 이름은 駘인데, 列子 생존시의 군주이다. B.C. 421년에 晉 韓武子가 鄭나라를 정벌하여 幽公을 죽이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25년(B.C. 398)에 재상 駟子陽을 죽이고 나중에 駟子陽의 추종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역주3 子産鄧析 : 모두 鄭 簡公 때의 재상들이다. 子産은 公孫僑(?~B.C. 522)의 자이다. 鄧析(B.C. 545~B.C. 501)은 言辯에 능하였고 子産과 정치견해를 달리하여 서로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역주4 二十(四)[五]年 : 저본에는 ‘二十四年’으로 되어 있는데,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史記》 권42 〈鄭世家〉와 기타 역사연표에 모두 ‘二十五年’으로 되어 있다.
역주5 圍鄭 鄭殺其相駟子陽 : 이때 楚나라와 鄭나라가 교전한 끝에 鄭나라가 참패하자, 楚나라에 아첨하기 위해 자기 나라 재상 駟子陽을 죽였다.
역주6 子陽正與列子同時 : 《列子》 〈說符〉에 “列子가 곤궁하여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鄭나라 子陽에게 ‘列禦寇는 도를 지닌 인물인데 당신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 곤궁하니, 당신은 인물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하자, 子陽이 관리로 하여금 곡식을 보내주게 하였다. 列子가 밖에 나와 사자를 만나본 뒤에 사양하고 도로 돌려보냈다.”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하는 말이다.
역주7 周安王三年 : 역사연표에 의하면 ‘四年’의 잘못이므로 번역문에서는 바로잡았다.
역주8 其後張湛徒知怪列子書 言穆公後事 : 張湛은 東晉 高平 사람으로, 자는 處度이다. 그의 《列子注》는 분명하고 간결하여 王弼의 《老子注》, 郭象의 《莊子注》와 함께 유명하다. 《列子》 〈仲尼〉에 ‘中山公子牟’와 ‘趙人公孫龍’을 언급하였는데, 張湛의 주에 “公子牟와 公孫龍은 列子 이후 사람 같은데 지금 그를 언급하였으니, 아마도 뒷사람이 추가하여 글뜻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역주9 其稱夏棘狙公紀渻子季咸等 皆出列子 : 《列子》 〈湯問〉에 “湯이 夏革에게 물었다.[湯問於夏革]” 하였는데 《莊子》 〈逍遙遊〉에 “湯이 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湯之問棘也是已]” 하였고, 《列子》 〈黃帝〉에 “宋나라 사람 중에 狙公이란 자가 있었는데 돼지를 좋아하여 기르다 보니 한 무리가 이루어졌다.[宋人有狙公者 愛狙 養之成群]” 하였는데 《莊子》 〈齊物論〉에 “狙公이 감자를 줬다.[狙公賦芧]” 하였고, 《列子》 〈黃帝〉에 “紀渻子가 周 宣王을 위해 싸움닭을 길렀다.[紀渻子爲周宣王養鬪鷄]” 하였는데 《莊子》 〈達生〉에 “紀渻子가 王을 위해 싸움닭을 길렀다.[紀渻子爲王養鬪鷄]” 하였고, 《列子》 〈黃帝〉에 “神巫가 齊나라로부터 와서 鄭나라에 머물렀는데 그 이름을 季咸이라 했다.[有神巫自齊來處鄭 命曰季咸]” 하였는데 《莊子》 〈應帝王〉에 “鄭나라에 神巫가 있는데 季咸이라 부른다.[鄭有神巫曰季咸]” 하였다.
이상은 모두 같은 내용이 두 책에 함께 보이는 사례이다. 그리고 《列子》의 내용이 대부분 《莊子》보다 자세한 점으로 볼 때 사실은 《列子》가 《莊子》를 모방하고 조금 더 과장한 것이다. 革과 棘은 서로 통용하는 글자이다.
역주10 其楊朱力命 疑其楊子書 : 劉向의 〈列子目録原序〉에 “〈力命〉편은 오로지 정해진 분수와 운명을 추구하였고, 〈楊朱〉편은 오직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노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이 두 편은 취지가 서로 괴리되어 한 사람의 글 같지가 않다.”라고 하여, 이 부분도 列子의 글이 아닌 후세 사람의 위작일 것으로 추측하였는데, 작자가 이에 동의하는 말이다.
역주11 其言魏牟孔穿 皆出列子後 : 魏牟는 魏나라 中山公子牟의 약칭이고, 孔穿은 孔子의 7대손으로 公孫龍의 제자인데, 모두 《列子》 〈仲尼〉편에 보인다. 이들은 모두 列子의 후대 사람이므로 하는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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