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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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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等辯析 千年以來罕見者
或問曰 儒者稱論語 弟子所記라하니 信乎
未然也니라
孔子弟子 最少하여 少孔子四十六歲
曾子老而死어늘 하니 則去孔子也遠矣
曾子之死 孔子弟子略無存者矣리라
吾意曾子弟子之爲之也라하노니
何哉
且是書載弟子 必以字하고 獨曾子不然하니
由是言之컨대 弟子之號之也니라
然則有子 何以稱子
孔子之歿也 諸弟子以有子爲似夫子라하여 立而師之라가 其後不能對諸子之問일새
乃叱避而退하니 則固嘗有師之號矣리라
今所記 獨曾子最後死
余是以知之로니 蓋樂正子春子思之徒與爲之爾
或曰 孔子弟子嘗雜記其言이라하나
然而卒成其書者 曾氏之徒也니라
堯曰 咨홉다 爾舜
天之曆數在爾躬하나니 四海困窮하면 天祿永終하리라하고
舜亦以命禹하시니라
敢用하여 敢昭告于하노니
或問之曰 論語書記問對之辭爾어늘 今卒篇之首 章然有是 何也 柳先生曰
論語之大 莫大乎是也
是乃孔子常常諷道之辭云爾
彼孔子者 覆生人之器也로되
上之堯舜之不遭하여 而禪不及己하고 下之無湯之勢하여 而己不得爲
生人無以澤其德하여 日視聞其勞死怨呼하되 而己之德涸焉無所依而施
故於常常諷道云爾而止也
此聖人之大志也 無容問對於其間이라
弟子或知之하고 或疑之不能明이나 相與傳之
故於其爲書也 卒篇之首 嚴而立之하니라


08. 《논어論語》에 관한 논변論辯 두 편
이와 같은 유의 분석은 천 년 이후 보기 드문 사례이다.
상편
혹인이 묻기를 “유가儒家에서 《논어論語》는 공자孔子의 제자가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는가?”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증삼曾參의 나이가 가장 어려 공자孔子보다 46세나 적었다.
증삼曾參이 늘그막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이 책 안에 증자曾子가 임종시에 한 말이 실린 것으로 보면 이 책이 이루어진 시기는 공자孔子의 연대와 거리가 멀 것이다.
증자曾子가 죽을 때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생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 이 책은 증자曾子의 제자가 편찬했을 것으로 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우선 이 책에서 공자의 제자를 기재할 때 모두 반드시 그들의 를 썼고 유독 증자曾子유자有子에 대해서만 를 쓰지 않았다.
이것으로 말하면 이들의 제자가 자기의 선생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혹인이 또 말하기를〉 “그렇다면 유자有子는 무엇 때문에 라고 불렀는가?” 하기에, 나는 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사모한 나머지 유자有子의 모습이 공자孔子와 비슷하다 하여 그를 추대해 스승으로 삼았으나, 그 뒤에 여러 제자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의 질책을 받고 스승의 자리를 피해 물러났으니, 사실 그는 일찍이 스승의 호칭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논어論語》에 기재된 것을 보면 증자曾子 한 사람만 그가 마지막 죽은 뒤에까지 스승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나는 이 점을 근거로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이 《논어論語》는 대체로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자사子思 등이 함께 엮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자孔子의 제자가 일찍이 그 스승이 하신 말씀을 각자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최후에 그것을 정리하여 책을 완성한 사람은 역시 증자曾子문도門徒였다.”
하편
가 〈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며〉 말하기를 “허, 너 아.
하늘의 거룩한 명이 이미 네 몸에 떨어졌나니, 만약 천하의 백성이 고통과 가난으로 빠져들면 하늘이 네게 준 녹위祿位 또한 영원히 끝날 것이다.” 하였다.
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줄 때도 그와 같이 하였다.
을 정벌할 때〉 말하기를 “저 소자 는 감히 검정 수소를 희생으로 바치면서 감히 천제天帝지신地神께 분명히 고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감히 제 마음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천하 만방萬方이 죄가 있을 때는 그 죄를 저 한 사람이 감당할 것이고 제가 만약 죄가 있을 때는 〈그 책임을〉 천하 만방과 연관 짓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혹인이 이에 대해 묻기를 “《논어論語》에 쓴 내용은 묻고 대답하는 말을 기록한 것일 뿐인데, 지금 마지막 편 첫 에 분명히 이와 같은 말이 있으니 무슨 이유인가?” 하기에, 나 유종원柳宗元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논어論語》에서 중요한 부분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 문단의 말은 공자孔子가 평소에 왕도王道를 생각하고 외우던 내용이다.
공자孔子는 곧 천하 백성을 보살피고 길러줄 인재이다.
다만 위로는 같은 성군을 만나지 못해 자신이 군왕의 지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또 탕왕湯王 같은 역량을 갖추지 못해 자신이 천명天命을 받들어 행할 사람이 되지 못했다.
천하 백성이 그의 은덕을 누릴 방법이 없어 매일 백성들이 고생하다 죽어가고 원통하여 하늘에 호소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자신의 은덕이 막혀 그 어떤 것도 베풀어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평소에 항상 〈왕도王道를 행했다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고 외울 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인聖人의 큰 뜻이었으니, 그 사이에 묻고 대답하는 내용이 존재할 수 없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그 의미를 아는 사람도 있고, 혹은 잘 몰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모두 서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논어論語》를 편집할 때 마지막 한 편의 첫머리에 정중하게 그 이야기를 썼던 것이다.”


역주
역주1 : 上篇은 《論語》를 누가 편집했는가에 대해 혹자와 문답하는 형식으로 자기의 견해를 서술하였다. 孔子의 제자 중에 曾子가 가장 오래 살았고 그가 임종시에 한 말이 기재되어 있으며, 孔子의 기타 제자들을 언급할 때에는 모두 字를 썼으나, 曾子는 스승의 호칭인 子를 쓴 것으로 보아 曾子의 문인들이 편집했을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下篇은 《論語》 제20편 〈堯曰〉 제1장의 전반부 내용이 《論語》의 체제와 부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는 孔子가 평소에 늘 거론했던 말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역주2 : 저본에는 소제목인 上篇ㆍ下篇이 없으나, 《柳下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 孔子 : B.C. 551~B.C. 479. 이름은 丘이고 자는 仲尼이다. 짧은 기간 魯나라 司寇 등의 벼슬을 지낸 것 이외에는 대부분의 인생을 교육에 종사하였다. 제자가 3천 명이었고 六經이라 불리는 《詩經》ㆍ《書經》 등 옛 문헌을 정리하였다. 역사적으로 학술 사상의 통치 지위에 있어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받는다.
역주4 曾參 : B.C. 505~B.C. 435. 魯나라 南武城 사람으로, 자는 子輿이다. 孔子의 제자로 뜻이 효도에 있기 때문에 孔子가 그에게 《孝經》을 저술하게 하였다.
역주5 是書記曾子之死 : 《論語》 〈泰伯〉의 첫머리에 曾子가 임종시에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역주6 有子 : 孔子의 제자 有若의 존칭이다. 有는 성이고 若은 이름이다.
역주7 : 크게 두 문단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은 《論語》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중간에 일부 생략되거나 순서가 바뀌는 등 원문과 다른 부분이 있다. 뒷부분은 《論語》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수록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역주8 余小子履 : 余小子는 고대 제왕의 자칭이고, 履는 商湯의 이름이다.
역주9 玄牡 : 검은 수소이다. 제사의 희생으로 쓴다.
역주10 皇天后土 : 《論語》 〈堯曰〉에는 ‘皇皇后帝’로 되어 있다.
역주11 有罪不敢赦 : 《論語》 〈堯曰〉에는 이 구절 뒤에 “上帝 신하의 능력을 제가 덮어버리지 않겠으니 上帝의 마음대로 가려 선택하소서.[帝臣不蔽 簡在帝心]”라는 두 구가 있다.
역주12 萬方有罪……無以爾萬方 : 《論語》 〈堯曰〉에는 이 구절이 도치되어 “朕躬有罪 無以萬方 萬方有罪 罪在朕躬”으로 되어 있다.
역주13 天吏 : 하늘을 대신해 天命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는 관리라는 뜻으로, 天子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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