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之歿也에 諸弟子以有子爲似夫子라하여 立而師之라가 其後不能對諸子之問일새
天之曆數在爾躬하나니 四海困窮하면 天祿永終하리라하고
或問之曰 論語書記問對之辭爾어늘 今卒篇之首에 章然有是는 何也오 柳先生曰
上之堯舜之不遭
하여 而禪不及己
하고 下之無湯之勢
하여 而己不得爲
라
生人無以澤其德하여 日視聞其勞死怨呼하되 而己之德涸焉無所依而施라
이와 같은 유의 분석은 천 년 이후 보기 드문 사례이다.
혹인이 묻기를 “유가儒家에서 《논어論語》는 공자孔子의 제자가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는가?”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증삼曾參의 나이가 가장 어려 공자孔子보다 46세나 적었다.
증삼曾參이 늘그막까지 살다가 죽었는데, 이 책 안에 증자曾子가 임종시에 한 말이 실린 것으로 보면 이 책이 이루어진 시기는 공자孔子의 연대와 거리가 멀 것이다.
증자曾子가 죽을 때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생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 이 책은 증자曾子의 제자가 편찬했을 것으로 본다.
우선 이 책에서 공자의 제자를 기재할 때 모두 반드시 그들의 자字를 썼고 유독 증자曾子와 유자有子에 대해서만 자字를 쓰지 않았다.
이것으로 말하면 이들의 제자가 자기의 선생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혹인이 또 말하기를〉 “그렇다면 유자有子는 무엇 때문에 자子라고 불렀는가?” 하기에, 나는 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사모한 나머지 유자有子의 모습이 공자孔子와 비슷하다 하여 그를 추대해 스승으로 삼았으나, 그 뒤에 여러 제자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의 질책을 받고 스승의 자리를 피해 물러났으니, 사실 그는 일찍이 스승의 호칭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논어論語》에 기재된 것을 보면 증자曾子 한 사람만 그가 마지막 죽은 뒤에까지 스승의 호칭을 사용하였다.
나는 이 점을 근거로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이 《논어論語》는 대체로 증자曾子의 제자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 등이 함께 엮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공자孔子의 제자가 일찍이 그 스승이 하신 말씀을 각자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최후에 그것을 정리하여 책을 완성한 사람은 역시 증자曾子의 문도門徒였다.”
요堯가 〈순舜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며〉 말하기를 “허, 너 순舜아.
하늘의 거룩한 명이 이미 네 몸에 떨어졌나니, 만약 천하의 백성이 고통과 가난으로 빠져들면 하늘이 네게 준 녹위祿位 또한 영원히 끝날 것이다.” 하였다.
순舜이 우禹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줄 때도 그와 같이 하였다.
〈탕湯이 걸桀을 정벌할 때〉 말하기를 “저 소자 이履는 감히 검정 수소를 희생으로 바치면서 감히 천제天帝와 지신地神께 분명히 고합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감히 제 마음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천하 만방萬方이 죄가 있을 때는 그 죄를 저 한 사람이 감당할 것이고 제가 만약 죄가 있을 때는 〈그 책임을〉 천하 만방과 연관 짓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혹인이 이에 대해 묻기를 “《논어論語》에 쓴 내용은 묻고 대답하는 말을 기록한 것일 뿐인데, 지금 마지막 편 첫 장章에 분명히 이와 같은 말이 있으니 무슨 이유인가?” 하기에, 나 유종원柳宗元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논어論語》에서 중요한 부분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 문단의 말은 공자孔子가 평소에 왕도王道를 생각하고 외우던 내용이다.
저 공자孔子는 곧 천하 백성을 보살피고 길러줄 인재이다.
다만 위로는 요堯ㆍ순舜 같은 성군을 만나지 못해 자신이 군왕의 지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또 탕왕湯王 같은 역량을 갖추지 못해 자신이 천명天命을 받들어 행할 사람이 되지 못했다.
천하 백성이 그의 은덕을 누릴 방법이 없어 매일 백성들이 고생하다 죽어가고 원통하여 하늘에 호소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자신의 은덕이 막혀 그 어떤 것도 베풀어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평소에 항상 〈요堯ㆍ순舜ㆍ탕湯이 왕도王道를 행했다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고 외울 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인聖人의 큰 뜻이었으니, 그 사이에 묻고 대답하는 내용이 존재할 수 없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그 의미를 아는 사람도 있고, 혹은 잘 몰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모두 서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논어論語》를 편집할 때 마지막 한 편의 첫머리에 정중하게 그 이야기를 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