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唐仁人獨孤君之墓를 祔於其父太子舍人諱助之墓之後라
自其祖贈太子少保諱問俗而上
은 其墓皆在
나 이라 故再世在此
라
嗚呼라 獨孤君之道和而純하고 其用端而明하여 內之爲孝하고 外之爲仁하여 黙而智하고 言而信이라
其爲文深而厚하되 尤慕古雅하고 善賦頌하니 其要咸歸於道라
昔孔子之世
에 有
者
하여 能得於孔子
하니 後之仰其賢者 譬之如日月而莫有議者焉
이라
嗚呼라 獨孤君之明且仁으로 如遭孔子면 是有兩顔氏也니
使夫人也夭而不嗣어늘 世之惑者는 猶曰尙有天道하니 噫乎甚邪라
年二十二擧進士하고 又二年에 用博學宏詞爲校書郞하며
又三年
에 居父喪
이라가 未
而沒
하니 蓋貞元十八年四月五日也
라
嗚呼라 君短命하고 行道之日未久라 故其道信於其友나 而未信於天下라
蓋以子厚爲御史及禮部員外時所作이 大都未免爲唐以來四六綺麗之遺라
故其所爲遊山記與士大夫書幷他雜著는 皆與韓昌黎相頡頏者也라
03. 죽은 벗 고故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독고군獨孤君의 묘갈문墓碣文
당唐나라의 어진 사람 독고군獨孤君의 무덤을 그의 부친 태자사인太子舍人 독고조獨孤助의 무덤 뒤쪽에 부장祔葬하였다.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된 그의 조부 독고문속獨孤問俗부터 그 윗대 조상들은 무덤이 모두 파수灞水 좌측에 있으나, 지금 왕후의 능을 그 곁에 조성하였기 때문에 두 대의 무덤이 이곳에 있게 된 것이다.
아, 독고군獨孤君의 도는 조화롭고 순수하며, 그 운용은 바르고 밝아서 안으로는 부모를 섬기는 효孝가 되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인仁이 되어, 침묵하더라도 지혜롭고 말을 하면 믿음이 있었다.
그는 곤궁해도 근심하지 않았고 즐거워도 방탕하지 않았다.
옛글을 읽을 때는 공자孔子의 도를 추구하되 반드시 자기의 마음으로 체득할 것을 구했다.
글을 지을 때는 깊이 있고 중후하게 짓되 무엇보다 고상하고 우아한 문체를 좋아했으며 부賦와 송頌을 잘 지었는데, 그 핵심은 모두 도에 귀착되었다.
옛날 공자孔子 당시에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있어 공자孔子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후대에 그의 거룩함을 흠앙하는 자들이 그를 해와 달에 비유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 만약 독고군獨孤君과 같은 밝은 지혜와 어진 덕으로 공자孔子를 만났더라면 두 안씨顔氏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에 이 점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가 그것을 믿게 할 수 있는가?
하늘이 이와 같은 사람을 요절하게 하고 자식조차 두지 못하게 했는데도 세상에 정신 나간 사람은 그래도 천도天道가 있다고 말하니, 아, 이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군君의 이름은 신숙申叔이며 자는 자중子重이다.
22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또 2년 뒤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
또 3년이 지나 부친이 죽어 상중에 있다가 소상小祥을 치르지 못하고 죽으니, 정원貞元 18년(802) 4월 5일이었다.
이해 7월 10일 장례를 지냈는데, 그 향鄕은 아무 향鄕이고 원原은 아무 원原이다.
아, 군君은 명이 짧고 도를 행한 날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도가 벗들에게는 믿음을 받았지만 온 세상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받지 못했다.
한태韓泰는 자가 안평安平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그의 아우 이행민李行敏은 자가 중명中明이며 조군趙郡 찬황贊皇 사람이다.
한유韓愈는 자가 퇴지退之이며 창려昌黎 사람이다.
왕애王涯는 자가 광진廣津이며 태원太原 사람이다.
여온呂溫은 자가 화숙和叔이며 동평東平 사람이다.
최군崔群은 자가 돈시敦詩이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유우석劉禹錫은 자가 몽득夢得이며 중산中山 사람이다.
이경검李景儉은 자가 치용致用이며 농서隴西 사람이다.
엄휴복嚴休復은 자가 현석玄錫이며 풍익馮翊 사람이다.
위사韋詞는 자가 치용致用이며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유자후柳子厚의 지문誌文에 관해서는 선택한 작품 수가 매우 적다.
그 이유는 유자후柳子厚가 어사御史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재직할 때 지은 것들이 대부분 당唐나라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사륙문四六文 문체의 화려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주사마永州司馬로 폄적된 이후에는 그 문체가 서한西漢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가 지은 산수유람기와 사대부에게 보낸 편지 및 기타 잡저는 모두 한창려韓昌黎와 서로 어깨를 겨룰 만한 것들이다.
너희 내 조카들은 글을 읽을 때 마땅히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 알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