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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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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崔公旣搜奇抉勝하고 而子厚之文亦如此
崔公來莅永州하여 閒日 登城北墉라가 臨于荒野藂翳之隙하여 見怪石特出하고 度其下必有殊勝이라하여
步自西門하여 以求其墟하니라
伐竹披奧하고 欹仄以入하니
綿谷跨谿 皆大石林立이라
渙若奔雲하고 錯若置碁하니
怒者虎鬪하고 企者鳥厲
抉其穴則鼻口相呀하고 搜其根則蹄股交峙하니
環行卒愕하여 疑若搏噬
於是刳闢朽壤하고 剪焚榛薉하며 決澮溝하고 導伏流하여 散爲疎林하고 洄爲淸池
寥廓泓渟하여 若造物者始判淸濁하여 效奇於玆地하고
非人力也 乃立游亭하여 以宅厥中하니라
直亭之西 石若掖分하여 可以眺望이요 其上靑壁斗絶 沈於淵源하여 莫究其極이라
自下而望이면 則合乎攢巒하여 與山無窮이라
明日 州邑耋老 雜然而至하여 曰 吾儕生是州하고 藝是野하여 眉尨齒鯢 未嘗知此하니
豈天墜地出하여 設玆神物以彰我公之德歟아하고 旣賀而請名하니
公曰 是石之數 不可知也
以其多而命之曰萬石亭이라하라하니라
耋老又言曰 懿夫
公之名亭也
豈專狀物而已哉리오
公嘗六爲二千石하니 旣盈其數
然而有道之士 咸恨公之嘉績未洽於人하니 敢頌休聲하여 祝公于明神하노이다
漢之三公 秩號萬石하니
我公之德 宜受玆錫이라
我公之化 始于閨門이라
道合于古하여 祐之自天이라
野夫獻辭하오니 公壽萬年하소서하니라
宗元嘗以牋奏隷尙書 敢專筆削하여 以附零陵故事로라
時元和十年正月五日記


11. 영주永州 만석정萬石亭에 관한 기문
최공崔公이 이미 아름다운 경관을 찾아내었고, 자후子厚의 문장이 또 이처럼 아름답다.
어사중승御史中丞청하남淸河男 최공崔公께서 영주永州에 부임하여 〈정무를 수행하던 중〉 어느 한가한 날 영주성永州城 북쪽 성벽에 올라 황폐한 들판 더부룩한 잡초 사이를 바라보다가 특이하게 드러난 괴석怪石을 발견하고, 그 아래에 필시 특별한 볼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걸어서 서문西門을 나가 그 위치를 찾아 나섰다.
대나무를 베어내고 우거진 풀을 헤치면서 몸을 기울이거나 허리를 굽혀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어진 계곡에 온통 거대한 바위가 숲처럼 빽빽하게 서 있었다.
널리 흩어진 모양은 구름이 내달리는 것 같고, 여기저기 뒤섞여 있는 모양은 바둑돌을 놓아둔 것 같았다.
성난 호랑이가 싸우는 것 같은 것도 있고, 발돋움한 맹금猛禽이 세차게 날아오르는 것 같은 것도 있었다.
바위틈 구멍은 콧구멍과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것 같고, 바위들의 아랫부분은 짐승의 발굽과 정강이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이것들의 주위를 돌아다니는데 이것들이 금방 앞발로 후려치거나 물어뜯을 것만 같아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이에 썩은 흙을 파내고 또 잡목과 잡초를 잘라내고 태우며, 도랑을 파 숨은 물길이 트이게 함으로써, 수목樹木은 적당히 흩어져서 서 있고 샘물은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 맑은 못이 되게 하였다.
그러자 시야가 확 트이고 물은 깊고 맑아져서, 인력人力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라 조물주造物主가 이제 막 맑고 탁한 두 기운을 구분하여 이곳에 기이한 경관을 드러내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가운데에 터를 잡아 유람하는 정자를 세웠다.
정자 서쪽에는 바위가 마치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바라볼 만하고, 그 위로는 깎아지른 푸른 절벽이 깊은 못의 상류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그 꼭대기가 어디까지인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여러 산봉우리와 어우러져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높다.
그 이튿날 영주성永州城의 노인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 땅에 태어나 들에 작물을 심으면서 눈썹이 희어지고 이가 다 빠지도록 살았는데도 이곳을 몰랐습니다.
어찌 하늘이 떨어뜨리고 땅이 솟구쳐 오르게 하여 이 신통한 곳을 만듦으로써 우리 의 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축하를 한 뒤에, 정자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이들 바위의 수를 알 수가 없다.
바위의 수가 많으니 만석정萬石亭이라 하자.” 하였다.
노인들이 다시 말하기를 “아름답습니다.
공의 작명作名이여.
〈이 이름은〉 어찌 경물을 의미한 것으로만 그치고 말 수 있겠습니까.
공께서는 여섯 번이나 이천석二千石의 녹봉을 받는 직위에 계셨으니 이미 그 수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도리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공의 훌륭한 치적이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니, 감히 아름다운 명예를 찬송하여 영명한 신령에게 빌고자 합니다.
나라 때의 삼공三公은 그들의 등급을 만석萬石이라 불렀습니다.
우리 공의 덕으로는 마땅히 이와 같은 상을 받아야 합니다.
나라 때에 예우를 받는 신하가 있었으니 그는 오직 만석군萬石君뿐입니다.
우리 공의 교화敎化도 가정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는 고대의 전통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장차 하늘로부터 보살핌을 받으실 것입니다.
산야의 백성들이 축사祝辭를 드리오니 공이시여 만수萬壽를 누리소서.” 하였다.
유종원柳宗元은 일찍이 상서성尙書省에서 문서를 담당하였으므로 감히 기문을 짓는 일을 도맡아 이 아름다운 일을 영릉零陵의 역사에 추가하였다.
원화元和 10년(815) 정월 5일에 기록한다.


역주
역주1 : 《柳河東集》에는 〈永州崔中丞萬石亭記〉로 되어 있다. 崔中丞은 元和 9년(814)에 참소를 당해 永州刺史로 폄직된 崔能이다. 萬石亭은 崔能이 永州 관아의 소재지인 零陵縣城의 북쪽에 세운 정자이다. 이 작품은 작자가 元和 9년 겨울에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그 이듬해 정월 永州를 떠나기 직전에 쓴 것이다.
역주2 御史中丞淸河男 : 御史中丞은 관직명이다. 법령과 제도를 관장하여 百官을 감찰하고 朝廷의 기강을 바로잡는 직무를 수행한다. 淸河男은 崔能의 封爵 이름이다. 淸河는 옛 지명으로, 지금의 河北 淸河 부근이다. 崔能의 조상의 고향이 淸河이므로 淸河男에 봉해진 것이다.
역주3 漢有禮臣 惟萬石君 : 漢 景帝 때 石奮이 諸侯相이 되어 二千石의 녹봉을 받았고, 그의 네 아들인 建ㆍ甲ㆍ乙ㆍ慶 등이 모두 관직이 二千石에 이르렀다. 그러자 景帝가 “石君과 그의 네 아들이 모두 二千石이니 신하로서 존귀한 복이 모두 그의 가문에 모였다.”라고 하고, 그를 萬石君이라 불렀다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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