爲尙書
하여 領行營節度使
하여 寓軍
하여 縱士卒無賴
라
邠人偸嗜暴惡者 卒以貨竄名軍伍中하여 則肆志하되 吏不得問이라
日群行丐取於市라가 不嗛이면 輒奮擊折人手足하고 椎釜鬲甕盎盈道上이라
天子以生人付公理어늘 公見人被暴害하되 因恬然하니 且大亂이면 若何오하니
某爲涇州甚適하여 少事하고 今不忍人無寇暴死하여 以亂天子邊事하니
旣
一月
에 晞軍士十七人入市取酒
하고 又以刃刺酒翁 壞釀器
하여 酒留溝中
하니
太尉列卒取十七人하여 皆斷頭注槊上하여 植市門外하니
今邠人惡子弟以貨竄名軍籍中하여 殺害人하니 如是不止면 幾日不大亂가
涇大將焦令諶取人田하여 自占數十頃하고 給與農하여 曰 且熟커든 歸我半하라하니라
農以告諶하니 諶曰 我知入數而已요 不知旱也라하고 督責益急이라
何敢言我오하고 取判鋪背上하고 以大杖擊二十하여 垂死라
輿來庭中하니 太尉大泣曰 乃我困汝로다하고 卽自取水洗去血하여 裂裳衣瘡하고 手注善藥하며 旦夕自哺農者하고 然後食이라
涇州野如赭하여 人且飢死어늘 而必得穀하고 又用大杖擊無罪者로다
今段公唯一馬로되 賤賣하여 市穀入汝어늘 汝又取하여 不恥라
凡爲人이 傲天災하고 犯大人擊無罪者하며 又取仁者穀하여 使主人出無馬하니
諶雖暴抗이나 然聞言則大愧流汗하여 不能食하고 曰 吾終不可以見段公이로다하고 一夕自恨死하니라
에 戒其族
하되 過
라가 朱泚幸致貨幣
어든 愼勿納
하라하니라
太尉曰 然終不以在吾第
라하고 하여 棲之梁木上
이라
今之稱太尉大節者
는 以爲武人一時奮不慮死
하여 以取名天下
라하고 不知太尉之
如是
라
太尉爲人姁姁하여 常低首拱手行步하고 言氣卑弱하여 未嘗以色待物하니 人視之儒者也라
07. 단태위段太尉의 숨겨진 사실을 적은 행장行狀
태위太尉가 이제 막 경주자사涇州刺史를 맡았을 때 분양왕汾陽王이 부원수副元帥 신분으로 포주蒲州에 있었다.
분양왕汾陽王의 아들 곽희郭晞가 상서尙書로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를 겸임하여 빈주邠州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사병들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을 방치하였다.
그래서 빈주邠州 사람 중에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강포하고 흉악한 자들이 모두 뇌물을 써서 군대의 명부를 조작해 자기 이름자를 몰래 올려놓고 행패를 부렸지만 관리가 전혀 따져 묻지를 못했다.
그들은 날마다 무리를 지어 다니며 시장에서 재물을 강탈하였는데, 혹시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매번 사람들을 때려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몽둥이로 솥이며 항아리 등을 내리쳐서 깨진 조각들이 길바닥에 가득하였다.
그런 다음 팔을 걷어 붙이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떠나는데, 심지어 임신한 부녀를 때려죽이기까지 하였다.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 백효덕白孝德은 곽희郭晞가 분양왕汾陽王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걱정스럽고 속이 상했지만 감히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못했다.
태위太尉는 경주涇州에서 문서로 절도사節度使 관청에 보고하여 이 일에 대해 만나서 대책을 세우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힌 뒤에 백효덕白孝德을 찾아가 말했다.
“천자께서 공에게 백성을 맡기고 다스릴 것을 당부하셨는데, 공께서는 백성들이 잔혹하게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계시니, 장차 큰 난리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제가 경주자사涇州刺史를 맡고 있는데 매우 한가하여 사무가 많지 않고, 현재 백성들이 외부의 적이 침공한 일도 없는데 참혹하게 살해를 당함으로써 천자의 변방 방어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공께서 저를 도우후都虞候로 임명해주신다면 공을 대신해 난폭한 짓을 제지하여 공의 백성들이 더 이상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백효덕白孝德은 “매우 좋습니다.” 하고, 태위太尉의 요구를 따랐다.
태위太尉가 도우후都虞候의 직무를 대행한 지 한 달이 지나 곽희郭晞의 부하 17명이 저자거리에 들어가 술을 빼앗고, 또 칼로 술을 빚는 노인의 머리를 찌르고 술항아리를 깨버려 술이 흘러 도랑으로 들어갔다.
태위太尉는 사병을 배치하여 이들 17명을 사로잡아 모두 목을 잘라서는 그들의 머리를 긴 창끝에 꽂아 저자의 문밖에 세워두었다.
그러자 곽희郭晞의 전 군영에 온통 소란이 일어나 모두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였다.
백효덕白孝德은 놀라서 어찌할 줄 몰라 태위太尉를 불러 물었다.
제가 곽희郭晞의 진영으로 가서 해명하겠습니다.”
백효덕白孝德은 사병 수십 명에게 태위太尉를 따라 함께 가게 하였는데, 태위太尉는 모두 사절하여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놓고 늙고 다리를 저는 사병 하나를 골라 말을 끌게 하고 곽희郭晞의 군문에 도착했다.
무장한 사병이 뛰어나오자, 태위太尉는 웃으면서 들어가 말했다.
“늙은 군졸 하나 죽이는 데 무슨 갑옷을 다 입었느냐?
어찌 소란을 피워서 곽씨郭氏 집안을 망치려고 하느냐?
상서尙書께 말씀드려 나오셔서 내 말을 들어보시게 해라.”
곽희郭晞가 나와서 태위太尉를 만나니, 태위太尉가 말했다.
“부원수副元帥의 공이 천지에 충만하니 마땅히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서尙書께서 사병들이 나쁜 짓을 일삼도록 놓아두시니, 이러다가는 장차 변란이 일어나 천자의 변방 지역을 소란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지금 빈주邠州 지방의 못된 자제들이 뇌물을 써서 군대의 명부에 몰래 자기 이름자를 올리고는 백성들을 살해하고 있는데, 이런 일을 제지하지 않으면 며칠 못 가 큰 난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큰 난리가 상서尙書로부터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상서尙書께서 부원수副元帥의 세력을 믿고 부하들을 단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랬을 때 곽씨郭氏 집안의 공명功名은 과연 얼마나 보존되겠습니까.”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곽희郭晞는 재배하고 말했다.
“공께서 다행히도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니 그 은혜가 매우 큽니다.
“모두 무장을 풀고 해산하여 각자의 대오로 돌아가라.
감히 소란을 피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가 몸이 좀 불편하니 공의 진영에서 유숙했으면 합니다.”
말을 끌던 군졸에게 다음날 아침에 오라 명하고 군중에 누워 잤다.
곽희郭晞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야경을 도는 사병에게 딱따기를 치며 태위太尉를 호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곽희郭晞는 태위太尉와 함께 백효덕白孝德의 처소에 와서 자기가 사실 무능했다는 것을 사과하고 앞으로 잘못을 고치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태위太尉가 경주涇州에서 영전관營田官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경주涇州의 대장 초령심焦令諶이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가 수십 경頃을 차지하고 그것을 농부에게 소작으로 주며 “곡식이 익거든 나에게 반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해에 큰 가뭄이 들어 들판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농부가 이 사실을 초령심焦令諶에게 알리자, 초령심焦令諶은 “나는 거두어들일 수량만 알 뿐, 가뭄이 들고 안 들고는 모른다.”라고 하면서 더욱 다급하게 독촉했다.
농부는 굶어죽을 처지에 놓여 상환할 곡식이 없었으므로 태위太尉에게 호소하였다.
태위太尉는 매우 겸손한 어조로 판결문을 작성하여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지고 초령심焦令諶을 찾아가 달래도록 했다.
초령심焦令諶은 몹시 화가 나 농부를 불러 “내가 단수실段秀實을 겁낼 줄 아느냐.
네놈이 어찌 감히 나를 고발했단 말이냐?” 하고, 판결문을 농부의 등 위에 깔아놓고는 큰 곤장으로 20대를 때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가 들것에 실려 태위太尉의 관아로 들어오자, 태위太尉는 목을 놓아 울면서 “결국 내가 너를 곤경에 처하게 했구나.” 하고, 즉시 손수 물을 가져와 농부의 몸에 흘린 피를 씻어낸 뒤에 자기 옷을 찢어 상처를 감싸고 손수 좋은 약을 발라줬으며, 아침저녁으로 손수 농부에게 밥을 먹여준 뒤에야 밥을 먹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 그 돈으로 곡식을 바꿔 대신 상환하게 하면서, 초령심焦令諶에게는 이 사실을 모르게 하라고 농부에게 당부하였다.
빈주邠州에 주둔해 있던 회서淮西 군대의 장수 윤소영尹少榮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경주涇州 들판에 온통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을 지경인데 너는 기어코 곡식을 받아내려고 했고, 게다가 큰 곤장으로 죄 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기까지 했다.
단공段公은 인자하고 진실한 대인大人인데 너는 존경할 줄도 모른다.
지금 단공段公은 오직 한 마리 있는 말을 헐값에 팔아 곡식으로 바꾸어 너한테 주었는데, 너는 또 태연하게 거두어들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대체 사람이 되어서 천재天災를 우습게 알고 대인大人을 능멸하고 죄 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며, 또 인자한 사람의 곡식을 취하여 자기가 모시는 주인을 문밖에 나갈 때 타고 나갈 말조차 없게 만들었다.
네가 장차 무슨 낯으로 저 하늘 땅을 보려 하느냐.
초령심焦令諶이 비록 흉포하였으나 그 말을 듣자, 너무 부끄러워 땀을 흘리고 밥도 먹지 못하면서 “나는 끝내 단공段公을 볼 수 없다.” 하고, 어느 날 저녁 스스로 원망하다가 자살했다.
태위太尉가 경주涇州에서 사농경司農卿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출발하기 전에 그의 친족들에게, 기주岐州를 지나갈 때 주체朱泚가 혹시 돈이나 재물을 주면 절대로 받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곳을 지날 적에 주체朱泚가 한사코 대릉大綾 300필을 보내왔다.
태위太尉의 사위 위오韋晤가 굳이 거절했지만 주체朱泚의 양해를 받지 못했다.
그러자 태위太尉는 “그러나 절대로 내 집에 둘 수는 없다.” 하고, 그것을 사농경司農卿의 대청으로 가지고 가서 대들보 위에 올려놓았다.
주체朱泚가 반란을 일으키고 태위太尉가 죽었을 때, 관리가 이 사실을 주체朱泚에게 보고하였다.
주체朱泚가 가져와서 살펴보니 이전의 봉함과 표식이 모두 그대로 있었다.
원화元和 9년(814) 모월 모일에 영주사마永州司馬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 유종원柳宗元은 삼가 사관史館에 올립니다.
지금 단태위段太尉의 큰 절의를 칭찬하는 사람은 대체로 그가 무인武人으로서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죽음을 돌아보지 않아서 이로 인해 천하의 명성을 얻었다고만 여길 뿐, 태위太尉의 사람 됨됨이와 처사가 이처럼 특별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종원宗元은 일찍이 기주岐周ㆍ빈邠ㆍ태斄 지역을 돌아다닐 때 진정眞定을 경유하여 북으로 마령馬嶺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과정에 초소와 보루 등을 지나면서 늙은 군교軍校나 퇴역 군졸들에게 물어보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들 모두 단태위段太尉의 사적에 대해 잘 말해줬습니다.
단태위段太尉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항상 고개를 낮추고 두 손을 맞잡은 자세로 걸음을 걸었고, 말소리는 미약하여 일찍이 거만한 기색으로 남을 대한 적이 없었으므로, 남들이 그를 보면 완전히 한 사람의 유자儒者였습니다.
그러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켰으니,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영주자사永州刺史 최공崔公이 부임해 왔는데, 그는 말이 진실하고 행실이 곧은 사람으로서 태위太尉의 유사遺事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재차 확인해보았더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단태위段太尉의 사적이 혹시 누락되어 사관史官에게 모이지 못할까 염려되었기에 감히 단태위段太尉의 숨겨진 사실을 적은 행장을 집사께 개인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