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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2)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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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鑱刻情事
太尉始爲涇州刺史時
爲尙書하여 領行營節度使하여 寓軍하여 縱士卒無賴
邠人偸嗜暴惡者 卒以貨竄名軍伍中하여 則肆志하되 吏不得問이라
日群行丐取於市라가 不嗛이면 輒奮擊折人手足하고 椎釜鬲甕盎盈道上이라
臂徐去하고 至撞殺孕婦人하되
以王故 戚不敢言이러라
太尉自州以狀白府하여 願計事하고 至則曰
天子以生人付公理어늘 公見人被暴害하되 因恬然하니 且大亂이면 若何오하니
孝德曰
願奉敎하노라
太尉曰
某爲涇州甚適하여 少事하고 今不忍人無寇暴死하여 以亂天子邊事하니
公誠 能爲公已亂하여 使公之人不得害하리라하니
孝德曰 幸甚이라하고 如太尉請하니라
一月 晞軍士十七人入市取酒하고 又以刃刺酒翁 壞釀器하여 酒留溝中하니
太尉列卒取十七人하여 皆斷頭注槊上하여 植市門外하니
晞一營大譟하여 盡甲이라
孝德震恐하여 召太尉曰
將奈何오하니
太尉曰
無傷也
請辭於軍하리라하다
孝德使數十人從太尉하니 太尉盡辭去
解佩刃하고 選老躄者一人持馬하여 至晞門下
甲者出커늘 太尉笑且入曰
殺一老卒 何甲也
吾戴吾頭來矣라하니
甲者愕이라
因諭曰
尙書固負若屬耶
副元帥固負若屬耶
奈何欲以亂敗郭氏오하니
爲白尙書하니 出聽我言하라하니라
晞出하여 見太尉하니 太尉曰
副元帥勳塞天地하니 當務爲始終이라
今尙書恣卒爲暴하니 暴且亂이면 亂天子邊이라
欲誰歸罪
罪且及副元帥하리라
今邠人惡子弟以貨竄名軍籍中하여 殺害人하니 如是不止 幾日不大亂
大亂由尙書出이면 人皆曰尙書倚副元帥不戢士하리니
然則郭氏功名其與存者幾何오하니
言未畢 晞再拜曰
公幸敎晞以道하니 恩甚大
願奉軍以從이라하고
顧叱左右曰
皆解甲하고 散還하라
敢譁者死리라
太尉曰
吾未하니
請假設草具
旣食
吾疾作하야 願留宿門下라하고
命持馬者去라가 旦日來하라하고 遂臥軍中이라
晞不解衣하고 戒候卒擊柝衛太尉하니라
俱至孝德所하여 謝不能하고 請改過
邠州由是無禍하니라
先是太尉在涇州하여
涇大將焦令諶取人田하여 自占數十頃하고 給與農하여 曰 且熟커든 歸我半하라하니라
是歲大旱하여 野無草
農以告諶하니 諶曰 我知入數而已 不知旱也라하고 督責益急이라
且饑死 無以償일새太尉
太尉 辭甚巽하여 使人來諭諶하니
諶盛怒하여 召農者曰 吾畏段某耶
何敢言我오하고 取判鋪背上하고 以大杖擊二十하여 垂死
輿來庭中하니 太尉大泣曰 乃我困汝로다하고 卽自取水洗去血하여 裂裳衣瘡하고 手注善藥하며 旦夕自哺農者하고 然後食이라
取騎馬賣하여 市穀代償하고 使勿知하니라
淮西寓軍帥尹少榮 剛直士也
入見諶하고 大罵曰
汝誠人耶
涇州野如赭하여 人且飢死어늘 而必得穀하고 又用大杖擊無罪者로다
段公 仁信大人也어늘 而汝不知敬이라
今段公唯一馬로되 賤賣하여 市穀入汝어늘 汝又取하여 不恥
凡爲人 傲天災하고 犯大人擊無罪者하며 又取仁者穀하여 使主人出無馬하니
汝將何以視天地
尙不愧奴隷耶아하니
諶雖暴抗이나 然聞言則大愧流汗하여 不能食하고 曰 吾終不可以見段公이로다하고 一夕自恨死하니라
戒其族하되라가 朱泚幸致貨幣어든 愼勿納하라하니라
及過 泚固致三百疋하니
太尉壻韋晤堅拒라가 不得命이라
至都하니 太尉怒曰
果不用吾言이로다
晤謝曰
處賤하여 無以拒也로이다
太尉曰 然終不以在吾第라하고 하여 棲之梁木上이라
吏以告泚하여
泚取視하니 其故封識具存하니라
今之稱太尉大節者 以爲武人一時奮不慮死하여 以取名天下라하고 不知太尉之如是
宗元嘗出入하여 北上이라
歷亭鄣堡戍하여 竊好問老校退卒하니 能言其事
太尉爲人姁姁하여 常低首拱手行步하고 言氣卑弱하여 未嘗以色待物하니 人視之儒者也
遇不可 必達其志하니 決非偶然者
하니 言信行直하고 備得太尉遺事
覆校無疑
或恐尙逸墜하여 未集일새 敢以狀私於하노라


07. 단태위段太尉의 숨겨진 사실을 적은 행장行狀
사실에 관한 묘사가 핍진하다.
태위太尉가 이제 막 경주자사涇州刺史를 맡았을 때 분양왕汾陽王부원수副元帥 신분으로 포주蒲州에 있었다.
분양왕汾陽王의 아들 곽희郭晞상서尙書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를 겸임하여 빈주邠州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사병들이 불법을 자행하는 것을 방치하였다.
그래서 빈주邠州 사람 중에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강포하고 흉악한 자들이 모두 뇌물을 써서 군대의 명부를 조작해 자기 이름자를 몰래 올려놓고 행패를 부렸지만 관리가 전혀 따져 묻지를 못했다.
그들은 날마다 무리를 지어 다니며 시장에서 재물을 강탈하였는데, 혹시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매번 사람들을 때려 팔다리를 부러뜨리거나 몽둥이로 솥이며 항아리 등을 내리쳐서 깨진 조각들이 길바닥에 가득하였다.
그런 다음 팔을 걷어 붙이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떠나는데, 심지어 임신한 부녀를 때려죽이기까지 하였다.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 백효덕白孝德곽희郭晞분양왕汾陽王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걱정스럽고 속이 상했지만 감히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 못했다.
태위太尉경주涇州에서 문서로 절도사節度使 관청에 보고하여 이 일에 대해 만나서 대책을 세우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힌 뒤에 백효덕白孝德을 찾아가 말했다.
“천자께서 공에게 백성을 맡기고 다스릴 것을 당부하셨는데, 공께서는 백성들이 잔혹하게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태연하게 계시니, 장차 큰 난리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백효덕白孝德이 말했다.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태위太尉가 말했다.
“제가 경주자사涇州刺史를 맡고 있는데 매우 한가하여 사무가 많지 않고, 현재 백성들이 외부의 적이 침공한 일도 없는데 참혹하게 살해를 당함으로써 천자의 변방 방어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공께서 저를 도우후都虞候로 임명해주신다면 공을 대신해 난폭한 짓을 제지하여 공의 백성들이 더 이상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백효덕白孝德은 “매우 좋습니다.” 하고, 태위太尉의 요구를 따랐다.
태위太尉도우후都虞候의 직무를 대행한 지 한 달이 지나 곽희郭晞의 부하 17명이 저자거리에 들어가 술을 빼앗고, 또 칼로 술을 빚는 노인의 머리를 찌르고 술항아리를 깨버려 술이 흘러 도랑으로 들어갔다.
태위太尉는 사병을 배치하여 이들 17명을 사로잡아 모두 목을 잘라서는 그들의 머리를 긴 창끝에 꽂아 저자의 문밖에 세워두었다.
그러자 곽희郭晞의 전 군영에 온통 소란이 일어나 모두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였다.
백효덕白孝德은 놀라서 어찌할 줄 몰라 태위太尉를 불러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태위太尉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곽희郭晞의 진영으로 가서 해명하겠습니다.”
백효덕白孝德은 사병 수십 명에게 태위太尉를 따라 함께 가게 하였는데, 태위太尉는 모두 사절하여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놓고 늙고 다리를 저는 사병 하나를 골라 말을 끌게 하고 곽희郭晞의 군문에 도착했다.
무장한 사병이 뛰어나오자, 태위太尉는 웃으면서 들어가 말했다.
“늙은 군졸 하나 죽이는 데 무슨 갑옷을 다 입었느냐?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다.”
그러자 무장한 사병이 크게 놀랐다.
태위太尉는 이어 그를 훈계했다.
곽상서郭尙書가 일찍이 너희를 저버렸느냐?
부원수副元帥가 일찍이 너희를 저버렸느냐?
어찌 소란을 피워서 곽씨郭氏 집안을 망치려고 하느냐?
상서尙書께 말씀드려 나오셔서 내 말을 들어보시게 해라.”
곽희郭晞가 나와서 태위太尉를 만나니, 태위太尉가 말했다.
부원수副元帥의 공이 천지에 충만하니 마땅히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서尙書께서 사병들이 나쁜 짓을 일삼도록 놓아두시니, 이러다가는 장차 변란이 일어나 천자의 변방 지역을 소란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죄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그 죄는 부원수副元帥께 미칠 것입니다.
지금 빈주邠州 지방의 못된 자제들이 뇌물을 써서 군대의 명부에 몰래 자기 이름자를 올리고는 백성들을 살해하고 있는데, 이런 일을 제지하지 않으면 며칠 못 가 큰 난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큰 난리가 상서尙書로부터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상서尙書께서 부원수副元帥의 세력을 믿고 부하들을 단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랬을 때 곽씨郭氏 집안의 공명功名은 과연 얼마나 보존되겠습니까.”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곽희郭晞는 재배하고 말했다.
“공께서 다행히도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니 그 은혜가 매우 큽니다.
부하를 거느리고 공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수하의 사병을 꾸짖으며 말했다.
“모두 무장을 풀고 해산하여 각자의 대오로 돌아가라.
감히 소란을 피우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태위太尉가 말했다.
“제가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습니다.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주셨으면 합니다.”
식사를 마친 뒤에 또 말했다.
“제가 몸이 좀 불편하니 공의 진영에서 유숙했으면 합니다.”
말을 끌던 군졸에게 다음날 아침에 오라 명하고 군중에 누워 잤다.
곽희郭晞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야경을 도는 사병에게 딱따기를 치며 태위太尉를 호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곽희郭晞태위太尉와 함께 백효덕白孝德의 처소에 와서 자기가 사실 무능했다는 것을 사과하고 앞으로 잘못을 고치겠다고 다짐했다.
빈주邠州는 이때부터 화란禍亂이 없었다.
앞서 태위太尉경주涇州에서 영전관營田官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경주涇州의 대장 초령심焦令諶이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가 수십 을 차지하고 그것을 농부에게 소작으로 주며 “곡식이 익거든 나에게 반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해에 큰 가뭄이 들어 들판에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농부가 이 사실을 초령심焦令諶에게 알리자, 초령심焦令諶은 “나는 거두어들일 수량만 알 뿐, 가뭄이 들고 안 들고는 모른다.”라고 하면서 더욱 다급하게 독촉했다.
농부는 굶어죽을 처지에 놓여 상환할 곡식이 없었으므로 태위太尉에게 호소하였다.
태위太尉는 매우 겸손한 어조로 판결문을 작성하여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지고 초령심焦令諶을 찾아가 달래도록 했다.
초령심焦令諶은 몹시 화가 나 농부를 불러 “내가 단수실段秀實을 겁낼 줄 아느냐.
네놈이 어찌 감히 나를 고발했단 말이냐?” 하고, 판결문을 농부의 등 위에 깔아놓고는 큰 곤장으로 20대를 때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가 들것에 실려 태위太尉의 관아로 들어오자, 태위太尉는 목을 놓아 울면서 “결국 내가 너를 곤경에 처하게 했구나.” 하고, 즉시 손수 물을 가져와 농부의 몸에 흘린 피를 씻어낸 뒤에 자기 옷을 찢어 상처를 감싸고 손수 좋은 약을 발라줬으며, 아침저녁으로 손수 농부에게 밥을 먹여준 뒤에야 밥을 먹었다.
그리고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 그 돈으로 곡식을 바꿔 대신 상환하게 하면서, 초령심焦令諶에게는 이 사실을 모르게 하라고 농부에게 당부하였다.
빈주邠州에 주둔해 있던 회서淮西 군대의 장수 윤소영尹少榮은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가 초령심焦令諶을 찾아가 크게 꾸짖었다.
“네가 진정 사람이냐.
경주涇州 들판에 온통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을 지경인데 너는 기어코 곡식을 받아내려고 했고, 게다가 큰 곤장으로 죄 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기까지 했다.
단공段公은 인자하고 진실한 대인大人인데 너는 존경할 줄도 모른다.
지금 단공段公은 오직 한 마리 있는 말을 헐값에 팔아 곡식으로 바꾸어 너한테 주었는데, 너는 또 태연하게 거두어들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대체 사람이 되어서 천재天災를 우습게 알고 대인大人을 능멸하고 죄 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며, 또 인자한 사람의 곡식을 취하여 자기가 모시는 주인을 문밖에 나갈 때 타고 나갈 말조차 없게 만들었다.
네가 장차 무슨 낯으로 저 하늘 땅을 보려 하느냐.
그래도 하인들에게 부끄럽지 않느냐?”
초령심焦令諶이 비록 흉포하였으나 그 말을 듣자, 너무 부끄러워 땀을 흘리고 밥도 먹지 못하면서 “나는 끝내 단공段公을 볼 수 없다.” 하고, 어느 날 저녁 스스로 원망하다가 자살했다.
태위太尉경주涇州에서 사농경司農卿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출발하기 전에 그의 친족들에게, 기주岐州를 지나갈 때 주체朱泚가 혹시 돈이나 재물을 주면 절대로 받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그곳을 지날 적에 주체朱泚가 한사코 대릉大綾 300필을 보내왔다.
태위太尉의 사위 위오韋晤가 굳이 거절했지만 주체朱泚의 양해를 받지 못했다.
도성에 이르러 태위太尉가 노하여 말했다.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구나.”
위오韋晤가 사죄하여 말했다.
“제가 지위가 낮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태위太尉는 “그러나 절대로 내 집에 둘 수는 없다.” 하고, 그것을 사농경司農卿의 대청으로 가지고 가서 대들보 위에 올려놓았다.
주체朱泚가 반란을 일으키고 태위太尉가 죽었을 때, 관리가 이 사실을 주체朱泚에게 보고하였다.
주체朱泚가 가져와서 살펴보니 이전의 봉함과 표식이 모두 그대로 있었다.
태위太尉의 숨겨진 사적은 위와 같다.
원화元和 9년(814) 모월 모일에 영주사마永州司馬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 유종원柳宗元은 삼가 사관史館에 올립니다.
지금 단태위段太尉의 큰 절의를 칭찬하는 사람은 대체로 그가 무인武人으로서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죽음을 돌아보지 않아서 이로 인해 천하의 명성을 얻었다고만 여길 뿐, 태위太尉의 사람 됨됨이와 처사가 이처럼 특별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종원宗元은 일찍이 기주岐周 지역을 돌아다닐 때 진정眞定을 경유하여 북으로 마령馬嶺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과정에 초소와 보루 등을 지나면서 늙은 군교軍校나 퇴역 군졸들에게 물어보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들 모두 단태위段太尉의 사적에 대해 잘 말해줬습니다.
단태위段太尉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온화하여 항상 고개를 낮추고 두 손을 맞잡은 자세로 걸음을 걸었고, 말소리는 미약하여 일찍이 거만한 기색으로 남을 대한 적이 없었으므로, 남들이 그를 보면 완전히 한 사람의 유자儒者였습니다.
그러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켰으니,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영주자사永州刺史 최공崔公이 부임해 왔는데, 그는 말이 진실하고 행실이 곧은 사람으로서 태위太尉유사遺事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재차 확인해보았더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단태위段太尉의 사적이 혹시 누락되어 사관史官에게 모이지 못할까 염려되었기에 감히 단태위段太尉의 숨겨진 사실을 적은 행장을 집사께 개인적으로 올립니다.
삼가 서술합니다.


역주
역주1 : 永州司馬로 있던 때인 元和 9년(814) 1월에 韓愈(768~824)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段太尉에 관한 참고자료이다. 앞부분은 모두 자료이고, 맨 뒤의 한 단락은 당시에 史官으로 있던 韓愈 앞으로 쓴 글이다. 韓愈에게 같은 주제로 쓴 편지가 따로 또 있다.
段太尉는 段秀實(719~783)을 말한다. 唐나라 隴州 汧陽 사람으로, 자는 成公이며 시호는 忠烈이다. 代宗 廣德 2년(764)에 涇州刺史에 임용되었고, 德宗 建中 원년(780)에 조정으로 들어가 司農卿이 되었다. 建中 4년(783)에 朱泚가 모반하여 황제를 칭하면서 자기 밑에서 벼슬할 것을 강요하였는데, 그는 기회를 틈타 笏板으로 朱泚의 이마를 내리쳤다가 마침내 살해되었다. 德宗 興元 원년(784)에 太尉로 추증되었기 때문에 그를 太尉라 부른다.
작자는 段秀實의 사실에 대해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나이 22세 때인 貞元 10년(794)에 지금의 陝西省 岐山縣ㆍ彬縣ㆍ武功縣 등 지역인 邠州와 馬嶺까지 돌아다니면서 나이 많은 軍校와 옛 병사들을 통해 段秀實의 인품과 행적에 대해 알았다. 그 후 20년이 지나 또 永州刺史 崔能의 입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역사서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段秀實의 일생 행적 중에서 郭晞를 굴복시킨 용기와 焦令諶을 부끄럽게 한 인자함과 朱泚가 준 뇌물을 거들떠보지 않은 절개 등 세 가지 숨은 사실을 주제로 삼아, 그의 外柔內剛한 인품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용기와 강인함이 드러난 개성을 다각도로 표현하였다. 전체 문장에서 한 구절도 자의적인 평론을 한 것이 없고 오로지 냉정하게 사실을 기술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狀은 인물의 평생 행적을 기술한 行狀을 말한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자기 의견이나 사실을 진술하는 문서, 예를 들면 奏狀‧訴狀‧供狀 등을 말하기도 한다.
역주2 汾陽王以副元帥居蒲 : 汾陽王은 곧 郭子儀(697~781)이다. 華州 鄭縣 사람이다. 安祿山ㆍ史思明의 난리 때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上元 3년(762)에 河中 군대가 난동을 부리자, 肅宗이 또 郭子儀를 朔方ㆍ河中ㆍ北庭等州節度行營 兼興平ㆍ定國副元帥로 임명하고 汾陽郡王으로 봉해 絳州에 주둔해 있게 하였다. 代宗 廣德 2년(764)에 또 郭子儀를 關內副元帥 兼河東副元帥와 河中節度使로 임명하여 河中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때를 말한다. 蒲는 옛 蒲州로, 唐나라 때 河中府로 이름을 바꿨다. 관아 소재지는 지금의 山西 永濟縣이었다.
역주3 王子晞 : 汾陽王 郭子儀의 셋째 아들 郭晞(?~794)를 가리킨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고 兩京을 수복하는 전투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 鴻臚卿으로 승진했다. 뒤에 御史中丞을 지냈으며 趙國公에 봉해졌다.
역주4 邠州 : 지금의 陝西 彬縣이다.
역주5 (把)[袒] : 저본에는 ‘把’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袒’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邠寧節度使白孝德 : 白孝德(715~780)은 지금의 新疆 庫車인 安西 사람이다. 용감하고 담력이 있었다. 史思明이 河陽을 공격할 때 史思明의 部將 劉龍仙을 죽이고 여러 번 전공을 세워 安西北庭行營節度使까지 지냈다. 永泰 초 吐藩ㆍ回紇이 涇陽을 포위했을 때 郭子儀의 명에 따라 吐蕃과 赤沙烽에서 크게 싸워 승리한 뒤에 昌化郡王에 봉해졌다. 그가 邠寧節度使로 있을 때인 代宗 廣德 2년에는 段秀實을 천거하여 涇州刺史가 되게 하기도 했다.
역주7 以都虞候命某者 : 都虞候는 軍中에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이고, 某는 段秀實을 가리킨다.
역주8 : 署理의 약칭으로, 직무를 대행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段秀實이 白孝德이 지닌 都虞候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9 火伍 : 隊伍와 같다. 唐나라 제도에, 병사 5인을 ‘伍’라 하고 10인을 ‘火’라 하였다.
역주10 晡食 : 저녁밥을 가리킨다. 晡는 申時로, 지금의 오후 3시부터 5시까지에 해당한다. 옛사람은 하루에 두 끼를 먹었는데 이것은 그날 두 번째 먹는 밥을 가리킨다.
역주11 營田官 : 군대의 屯田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段秀實이 涇州刺史로 임명되기 전에 白孝德의 휘하에서 度支營田副使를 맡고 있었다.
역주12 (言)[告] : 저본에는 ‘言’으로 되어 있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告’로 바로잡았다.
역주13 判狀 : 判은 판결이고, 狀은 농부가 올린 소장이다. 곧 소장에 대해 판결한다는 뜻이다. 번역에서는 편의상 판결문으로 풀이하였다.
역주14 及太尉自涇州以司農徵 : 段秀實이 建中 원년(780) 2월에 涇原節度使에서 도성으로 불려 들어가 司農卿이 되었다. 司農卿은 司農寺의 장관으로 품계는 從4品上이며, 창고의 곡물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역주15 : 岐州이다. 관아 소재지는 지금의 陝西 鳳翔縣에 있었다. 이 당시 朱泚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지방이다.
역주16 大綾 : 고급 비단으로, 얇고 광택이 좋으며 표면이 매끄러운 絹布의 일종이다.
역주17 以如司農治事堂 : 如는 往과 뜻이 같다. 治事堂은 관리가 공무를 처리하는 대청이다. 여기서는 司農卿의 집무실을 가리킨다.
역주18 泚反 太尉終 : 朱泚(742~784)는 幽州 昌平 사람이다. 본디 盧龍節度使 朱希彩의 部將으로 있다가 朱希彩가 피살된 뒤에 스스로 節度使의 직을 대리하였다. 德宗 建中 4년(783) 太尉 직함으로 長安에 머물러 있을 때 涇原節度使 姚令言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와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德宗이 奉天으로 달아나자 반란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때 段秀實이 도성으로 불려 들어가 司農卿으로 있었으므로 朱泚는 段秀實이 오랫동안 병권을 잃어 분명히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불러 황제를 칭하는 문제를 상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段秀實이 갑자기 일어나 상아홀을 빼앗아 朱泚의 이마를 내리치자 피가 터져 땅바닥에 흩뿌려졌는데, 朱泚는 기어서 탈출해 도망갔고 段秀實도 이때 피살되었다. 《資治通鑑 권228 唐紀》
역주19 〈太尉逸事如右〉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0 〈元和九年月日……柳宗元謹上史館〉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員外置同正員은 定員 이외에 별도로 배치되었으나 녹봉은 정원과 동일한 관원이라는 뜻이다. 柳宗元이 永州司馬가 된 것은 벌칙으로 좌천된 것이므로 부여된 임무나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역주21 出入 :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다. 번역에서는 ‘대체로’로 풀이하였다.
역주22 所立 : 所作所爲의 약어로, 사람답게 처세한다는 뜻의 立身處世와 비슷한 말이다.
역주23 岐周邠斄間 : 岐周는 岐山縣을 말하고 邠은 彬縣이며, 斄는 ‘駘’, ‘邰’와 같은 글자로, 始平 武功縣에 있는 지명이다.
역주24 眞定 : ‘眞寧’의 잘못으로 보인다. 眞寧은 지금의 甘肅 正寧縣으로, 唐나라 때의 寧州 眞寧縣이다. 寧州는 涇州에서 동쪽으로 150리, 慶州에서 남쪽으로 130리, 邠州에서 북쪽으로 140리 지점에 있으며, 邠寧節度使 관할구역에 들어 있다.
역주25 馬嶺 : 산 이름이다. 지금의 甘肅 慶陽縣 서북방에 있다.
역주26 會州刺史崔公來 : 會는 適자와 같다. 崔公은 崔能으로, 자는 子才이다. 元和 6년(811) 黔中觀察使로 있을 때 郡邑이 도적에게 함락되어 벌을 받았다. 元和 9년에 御史中丞에서 永州刺史로 임명되었다.
역주27 太史氏 : 史官을 가리킨다.
역주28 執事 : 편지글에서 상대방을 존경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존칭이다. 여기서는 史官으로 있는 韓愈를 가리킨다.
역주29 〈謹狀〉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行狀이나 書簡文의 말미에 쓰는 투식어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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