辱書云欲相師라하니 僕道不篤하고 業甚淺近하여 環顧其中에 未見可師者라
雖嘗好言論爲文章
이나 甚不自是也
러니 不意吾子自京師來
하여 乃幸見取
하니 僕自卜固無取
하고 假令有取
라도 亦不敢爲人師
니
孟子稱
라하고 由魏晉氏以下
로 人益不事師
하여 今之世
에 不聞有師
하고 有輒譁笑之
하여 以爲狂人
이라하나니
獨韓愈奮不顧流俗
하고 犯笑侮
하여 收召後學
하여 作
하고 因抗顔而爲師
하니 世果群怪聚罵
하여 指目牽引
하여 而增與爲言詞
라
愈以是得狂名
하여 居長安
에 하고 又
하여 如是者數矣
라
僕往聞
之南
은 恒雨少日
하여 日出則犬吠
라하니 予以爲過言
이러니
數州之犬이 皆蒼黃吠噬狂走者累日하야 至無雪乃已하니 然後始信前所聞者로라
今韓愈旣自以爲蜀之日이어늘 而吾子又欲使吾爲越之雪하니 不以病乎아
僕自謫過以來로 益少志慮하고 居南中九年에 增脚氣病하여 漸不喜鬧하니 豈可使呶呶者로 早暮咈吾耳騷吾心이리오
是聖人所尤用心者也어늘 數百年來에 人不復行이러니
近有
者 獨發憤行之
하고 旣成禮
에 明日造朝
하여 至
하여 薦笏言於卿士曰 某子冠畢
이라하니
應之者咸憮然
하고 은 怫然曳笏却立曰 何預我耶
아하니 廷中皆大笑
라
吾子行厚而辭深하여 凡所作皆恢恢然有古人形貌하니 雖僕敢爲師라도 亦何所增加也리오
假而以僕年先吾子하여 聞道著書之日不後라하여 誠欲往來言所聞인댄 則僕固願悉陳中所得者하리니
吾子苟自擇之하여 取某事去某事면 則可矣어니와 若定是非하여 以敎吾子는 僕材不足하고 而又畏前所陳者하니 其爲不敢也決矣니라
吾子前所欲見吾文을 旣悉以陳之하니 非以耀明於子요 聊欲以觀子氣色誠好惡何如也러니
今書來에 言者皆大過하니 吾子誠非侫譽誣諛之徒요 直見愛甚故然耳라
始吾幼且少하여 爲文章에 以辭爲工이러니 及長에 乃知文者以明道니
是固不苟爲炳炳烺烺하여 務采色夸聲音하여 而以爲能也라
凡吾所陳은 皆自謂近道어니와 而不知道之果近乎아 遠乎아
故吾每爲文章에 未嘗敢以輕心掉之하니 懼其剽而不留也요 未嘗敢以怠心易之하니 懼其弛而不嚴也요 未嘗敢以昏氣出之하니 懼其昧沒而雜也요 未嘗敢以矜氣作之하니 懼其偃蹇而驕也라
抑之는 欲其奧요 揚之는 欲其明이요 疎之는 欲其通이요 廉之는 欲其節이요 激而發之는 欲其淸이요 固而存之는 欲其重이니 此吾所以羽翼夫道也니라
本之書하여 以求其質하고 本之詩하여 以求其恒하고 本之禮하여 以求其宜하고 本之春秋하여 以求其斷하고 本之易하여 以求其動하니 此吾所以取道之原也니라
參之穀梁氏하여 以厲其氣하고 參之孟荀하여 以暢其支하고 參之老莊하여 以肆其端하고 參之國語하여 以博其趣하고 參之離騷하여 以致其幽하고 參之太史하여 以著其潔하니 此吾所以旁推交通하여 而以爲之文也니라
苟亟來以廣是道면 子不有得焉이면 則我得矣리니 又何以師云爾哉아
取其實而去其名하여 無招越蜀吠怪而爲外庭所笑면 則幸矣라
子厚
中所論文章之旨
는 未敢必其盡能如所云
이나 要之亦本於鑱心硏神者
라
而後之爲文者
는 特路剽富者之金
하여 而以誇於天下曰 吾且
矣
라하나니 何其不自量之甚也
오
06. 사도師道에 관해 논하는 내용으로 위중립韋中立에게 답한 편지
유자후柳子厚의 여러 편지 중 아름다운 편에 속하니, 그가 평소에 문장을 저술했던 대체적인 요지를 또한 엿볼 수 있다.
보내온 편지에 나를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도덕 수양이 독실하지 못하고 학업이 매우 천근淺近하여, 나의 내면을 둘러봄에 스승 삼을 만한 점을 볼 수가 없네.
내 비록 일찍이 논변하기를 좋아하고 문장을 짓기는 하였지만 매우 자신감이 없었는데, 뜻밖에 그대가 도성에서 만이蠻夷 지역인 영주永州로 와서 다행히 그대에게 인정을 받으니, 나는 스스로 헤아려볼 때 정말이지 취할 것이 없고, 설령 약간 취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없다네.
일반인의 스승이 되는 것도 감히 할 수 없는데, 더구나 감히 그대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결점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 하셨고, 위魏‧진晉 이후로는 사람들이 더욱 스승을 섬기지 아니하여, 오늘날 세상에 스승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스승 삼는 사람이 있으면 곧 떠들고 비웃어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네.
그런데 홀로 한유韓愈가 용기를 내어 세태世態를 돌아보지 않고 비웃음과 업신여김을 무릅쓴 채 후학들을 불러들여 〈사설師說〉을 짓고 이어 얼굴을 들고 스승이 되자, 세상에서는 과연 많은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고 떼 지어 욕하면서 손가락질하고 없는 허물을 끌어다 붙여 비방거리를 더 만들었네.
한유韓愈는 이 때문에 미쳤다는 이름을 얻어 장안長安에 있을 때 짓는 밥이 익을 때까지 기다릴 경황도 없이 허둥지둥 또 황급하게 동쪽 낙양洛陽으로 떠나, 이렇게 한 적이 여러 번이었네.
굴원屈原의 부賦에 “고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일로 여겨 짖는 것이다.” 하였네.
내가 전에 “용庸‧촉蜀의 남쪽에는 늘 비가 내리고 햇빛 나는 날이 드물어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고 들었는데, 나는 이 말을 과장된 말로 여겼었네.
그런데 내가 남쪽 지방으로 온 지 두 해째 되던 6, 7년 전 겨울에 때마침 큰 눈이 오령五嶺 너머까지 내려 남월南越의 여러 고을을 덮은 일이 있었네.
당시 여러 고을의 개들이 모두 놀라 어지럽게 짖어대고 물어뜯으며 미친 듯이 날뛰다가 눈이 녹아 없어진 뒤에야 잠잠해졌는데,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전에 들은 얘기를 믿게 되었네.
이제 한유韓愈가 이미 스스로 촉蜀 지방의 해가 되었거늘, 그대가 또 나로 하여금 월越 지방의 눈이 되게 하고자 하니, 나에게 피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닌가?
나만 피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대 또한 이 때문에 피해를 받을 것이네.
헤아려보건대, 이제 천하에 짖지 않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누가 감히 뭇사람들의 눈에 괴이함을 내보여 소란을 초래하고 노여움을 자초하겠는가.
나는 죄를 짓고 좌천된 뒤로 의욕이 더욱 떨어진데다, 9년 동안 남쪽에 거처하면서 각기병까지 심해져 점점 시끄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니, 내 어찌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내 귀에 거슬리고 내 마음을 소란하게 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나는 그야말로 쓰러지고 번민하여 더욱 지낼 수가 없을 것이네.
내 평소에 뜻하지 않게 구설수를 만난 일이 적지 않았으나, 남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만큼은 없었네.
그리고 들으니, 옛날에 관례冠禮를 소중히 여긴 것은 성인成人의 도리를 책임 지우려 해서라네.
이는 성인聖人이 특히 마음을 쓰신 일인데, 수백 년 이래로 아무도 다시 관례冠禮를 행하지 않았네.
그런데 근래에 손창윤孫昌胤이라는 자가 홀로 용기를 내어 이를 행하고는, 관례冠禮를 행한 다음날 조정朝廷에 나아가 외정外庭에 이르러 홀판笏版을 손에 들고 경사卿士들에게 “내 아들이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하자,
응대하던 자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게 있었고, 경조윤京兆尹 정숙칙鄭叔則은 발끈 화를 내고 홀판笏版을 흔들면서 뒤로 물러나 서서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하니, 조정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네.
천하 사람들이 경조윤京兆尹 정숙칙鄭叔則을 그르다 하지 않고 손창윤孫昌胤을 괴이하게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홀로 하였기 때문이네.
지금 세상에 스스로 스승이라 칭하는 경우도 대체로 이와 유사하네.
그대는 행실行實이 독실하고 문장文章의 조예가 깊어 저술한 문장이 모두 기백이 웅대하여 옛사람의 기풍을 갖추고 있으니, 내가 비록 감히 스승이 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가령 내가 그대보다 나이가 많아 도리를 듣고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이 뒤지지 않는다 하여 진실로 나와 교제하며 견문을 말해주기를 원한다면, 내 진실로 가슴속에 얻은 것을 모두 말해주고 싶네.
그대가 만일 스스로 선택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면야 괜찮겠지만, 만일 시비是非를 결정하여 그대를 가르쳐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나는 재주가 부족한데다 앞서 말한 것도 두려우니,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네.
그대가 전에 보고자 하던 내 문장文章을 이미 모두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대에게 자랑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다만 참으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대의 기색이 어떤지를 살피고자 해서였네.
그런데 이제 보내 온 편지의 내용이 모두 너무 과분하니, 이는 그대가 진실로 아첨하여 칭찬하거나 거짓으로 아부하는 무리라서가 아니라, 단지 몹시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것이네.
과거 내가 어리고 또 젊었을 때에는 문장을 지을 적에 문사文辭를 잘 꾸미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문장이란 도道를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네.
따라서 진실로 구차히 화려하게 지어 채색彩色을 힘쓰고 운율韻律을 과시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네.
내가 보여준 글들은 모두 나 자신은 도에 가깝다고 여기지만, 정말로 도에 가까운지 먼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도를 좋아하는 그대가 내 글을 인정하니, 어쩌면 도에서 멀지 않을 법도 하네.
그러므로 나는 문장文章을 지을 때마다 감히 가벼운 마음으로 쓴 적이 없으니 이는 너무 가벼워 진중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이고, 감히 태만한 마음으로 쉽게 쓴 적이 없으니 이는 너무 느슨하여 엄밀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이고, 감히 혼미한 기운으로 써내려간 적이 없으니 이는 애매모호하여 혼란스러울까 두려워해서이고, 감히 뻐기는 기색으로 지은 적이 없으니 이는 건방져서 교만할까 두려워해서였네.
치닫는 감정을 억제한 것은 함축미含蓄美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충분히 드러내는 것은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자유분방한 것은 통창通暢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간결하게 하는 것은 절제節制 있게 하고자 해서이며, 혼탁한 것을 걸러버리는 것은 참신斬新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단단히 고집하여 지키는 것은 후중厚重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이 내가 도道를 돕기 위한 태도이네.
《서경書經》의 필법筆法에 근거하여 언어言語가 질박함을 추구하고, 《시경詩經》에 근거하여 정취情趣가 무궁함을 추구하고, 《예기禮記》에 근거하여 예법禮法에 부합함을 추구하고, 《춘추春秋》에 근거하여 시비是非를 결단하는 것을 추구하고, 《주역周易》에 근거하여 변화變化를 추구하였으니, 이는 내가 도의 근원을 취하는 방법이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참고하여 기세氣勢를 가다듬고, 《맹자孟子》와 《순자荀子》를 참고하여 맥락脈絡을 통창하게 하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참고하여 단서端緖를 개척하고, 《국어國語》를 참고하여 의기義氣를 확대하고, 《이소離騷》를 참고하여 정서情緖를 깊게 하고, 《사기史記》를 참고하여 정갈함을 드러내었으니, 이는 내가 광범위하게 추구하고 다양하게 관통하여 문장을 짓는 방법이네.
대체로 이렇게 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취할 점이 있는가, 아니면 취할 점이 없는가?
그대가 잘 살펴 선택하여 시간이 여유가 있거든 편지로 나에게 알려주기 바라네.
만약 그대가 빨리 편지를 보내 나와 함께 문장 쓰는 방법을 광범위하게 토론할 경우 자네에게 얻는 것이 있지 않다면 내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니, 또 어찌 스승이 되어달라는 등의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스승의 내실을 구하고 스승이란 허명을 버림으로써 남월南越과 촉蜀 지방의 개들이 괴이함을 보고 짖어대는 일을 초래하거나 손창윤孫昌胤처럼 외정外庭의 벼슬아치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일이 없으면 다행일 것이네.
유자후柳子厚가 편지 속에서 논한바, 문장을 짓는 취지는 그가 말한 내용이 모두 옳다고 감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요컨대 또한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몰두한 것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후세에 문장을 짓는 자는 그저 길을 가다가 부자의 돈을 겁탈해서는 천하에 과시하기를 “나 또한 의돈猗頓이다.”라고 하니,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역량을 모른단 말인가.
나는 이 때문에 분연히 일어나 “문장에 뜻이 있다면 반드시 육예六藝에 근간을 두어 성인聖人의 도를 구하는 것이 희망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