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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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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子厚諸書中佳處 亦其生平所爲文大指處
二十一日 宗元白하노라
辱書云欲相師라하니 僕道不篤하고 業甚淺近하여 環顧其中 未見可師者
雖嘗好言論爲文章이나 甚不自是也러니 不意吾子自京師來하여 乃幸見取하니 僕自卜固無取하고 假令有取라도 亦不敢爲人師
爲衆人師且不敢이어든 況敢爲吾子師乎
孟子稱라하고 由魏晉氏以下 人益不事師하여 今之世 不聞有師하고 有輒譁笑之하여 以爲狂人이라하나니
獨韓愈奮不顧流俗하고 犯笑侮하여 收召後學하여하고 因抗顔而爲師하니 世果群怪聚罵하여 指目牽引하여 而增與爲言詞
愈以是得狂名하여 居長安 하고하여 如是者數矣
屈子賦曰 라하니
僕往聞之南 恒雨少日하여 日出則犬吠라하니 予以爲過言이러니
前六七年 僕來南二年冬 幸大雪 하니
數州之犬 皆蒼黃吠噬狂走者累日하야 至無雪乃已하니 然後始信前所聞者로라
今韓愈旣自以爲蜀之日이어늘 而吾子又欲使吾爲越之雪하니 不以病乎
非獨見病이라 亦以病吾子리라
然雪與日 豈有過哉
顧吠者犬耳
度今天下不吠者幾人
而誰敢衒怪於群目하여 以召鬧取怒乎
僕自謫過以來 益少志慮하고 居南中九年 增脚氣病하여 漸不喜鬧하니 豈可使呶呶者 早暮咈吾耳騷吾心이리오
則固僵仆煩憒하여 愈不可過矣리라
平居 望外遭齒舌不少 獨欠爲人師耳
是聖人所尤用心者也어늘 數百年來 人不復行이러니
近有者 獨發憤行之하고 旣成禮 明日造朝하여하여 薦笏言於卿士曰 某子冠畢이라하니
應之者咸憮然하고 怫然曳笏却立曰 何預我耶아하니 廷中皆大笑
天下不以非鄭尹而怪孫子 何哉
獨爲所不爲也
今之命師者大類此
吾子行厚而辭深하여 凡所作皆恢恢然有古人形貌하니 雖僕敢爲師라도 亦何所增加也리오
假而以僕年先吾子하여 聞道著書之日不後라하여 誠欲往來言所聞인댄 則僕固願悉陳中所得者하리니
吾子苟自擇之하여 取某事去某事 則可矣어니와 若定是非하여 以敎吾子 僕材不足하고 而又畏前所陳者하니 其爲不敢也決矣니라
吾子前所欲見吾文 旣悉以陳之하니 非以耀明於子 聊欲以觀子氣色誠好惡何如也러니
今書來 言者皆大過하니 吾子誠非侫譽誣諛之徒 直見愛甚故然耳
始吾幼且少하여 爲文章 以辭爲工이러니 及長 乃知文者以明道
是固不苟爲炳炳烺烺하여 務采色夸聲音하여 而以爲能也
凡吾所陳 皆自謂近道어니와 而不知道之果近乎 遠乎
吾子好道而可吾文하니 或者其於道不遠矣리라
故吾每爲文章 未嘗敢以輕心掉之하니 懼其剽而不留也 未嘗敢以怠心易之하니 懼其弛而不嚴也 未嘗敢以昏氣出之하니 懼其昧沒而雜也 未嘗敢以矜氣作之하니 懼其偃蹇而驕也
抑之 欲其奧 揚之 欲其明이요 疎之 欲其通이요 廉之 欲其節이요 激而發之 欲其淸이요 固而存之 欲其重이니 此吾所以羽翼夫道也니라
本之書하여 以求其質하고 本之詩하여 以求其恒하고 本之禮하여 以求其宜하고 本之春秋하여 以求其斷하고 本之易하여 以求其動하니 此吾所以取道之原也니라
參之穀梁氏하여 以厲其氣하고 參之孟荀하여 以暢其支하고 參之老莊하여 以肆其端하고 參之國語하여 以博其趣하고 參之離騷하여 以致其幽하고 參之太史하여 以著其潔하니 此吾所以旁推交通하여 而以爲之文也니라
凡若此者 果是耶 非耶
有取乎 抑其無取乎
吾子幸觀焉擇焉하여 有餘어든 以告焉하고
苟亟來以廣是道 子不有得焉이면 則我得矣리니 又何以師云爾哉
取其實而去其名하여 無招越蜀吠怪而爲外庭所笑 則幸矣
宗元復白하노라
子厚中所論文章之旨 未敢必其盡能如所云이나 要之亦本於鑱心硏神者
而後之爲文者 特路剽富者之金하여 而以誇於天下曰 吾且라하나니 何其不自量之甚也
予故奮袂曰 有志於文인댄 須本之하여 라하노라


06. 사도師道에 관해 논하는 내용으로 위중립韋中立에게 답한 편지
유자후柳子厚의 여러 편지 중 아름다운 편에 속하니, 그가 평소에 문장을 저술했던 대체적인 요지를 또한 엿볼 수 있다.
21일에 종원宗元은 고하네.
보내온 편지에 나를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도덕 수양이 독실하지 못하고 학업이 매우 천근淺近하여, 나의 내면을 둘러봄에 스승 삼을 만한 점을 볼 수가 없네.
내 비록 일찍이 논변하기를 좋아하고 문장을 짓기는 하였지만 매우 자신감이 없었는데, 뜻밖에 그대가 도성에서 만이蠻夷 지역인 영주永州로 와서 다행히 그대에게 인정을 받으니, 나는 스스로 헤아려볼 때 정말이지 취할 것이 없고, 설령 약간 취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없다네.
일반인의 스승이 되는 것도 감히 할 수 없는데, 더구나 감히 그대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결점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 하셨고, 이후로는 사람들이 더욱 스승을 섬기지 아니하여, 오늘날 세상에 스승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스승 삼는 사람이 있으면 곧 떠들고 비웃어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네.
그런데 홀로 한유韓愈가 용기를 내어 세태世態를 돌아보지 않고 비웃음과 업신여김을 무릅쓴 채 후학들을 불러들여 〈사설師說〉을 짓고 이어 얼굴을 들고 스승이 되자, 세상에서는 과연 많은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고 떼 지어 욕하면서 손가락질하고 없는 허물을 끌어다 붙여 비방거리를 더 만들었네.
한유韓愈는 이 때문에 미쳤다는 이름을 얻어 장안長安에 있을 때 짓는 밥이 익을 때까지 기다릴 경황도 없이 허둥지둥 또 황급하게 동쪽 낙양洛陽으로 떠나, 이렇게 한 적이 여러 번이었네.
굴원屈原에 “고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는 것은 괴이한 일로 여겨 짖는 것이다.” 하였네.
내가 전에 “의 남쪽에는 늘 비가 내리고 햇빛 나는 날이 드물어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고 들었는데, 나는 이 말을 과장된 말로 여겼었네.
그런데 내가 남쪽 지방으로 온 지 두 해째 되던 6, 7년 전 겨울에 때마침 큰 눈이 오령五嶺 너머까지 내려 남월南越의 여러 고을을 덮은 일이 있었네.
당시 여러 고을의 개들이 모두 놀라 어지럽게 짖어대고 물어뜯으며 미친 듯이 날뛰다가 눈이 녹아 없어진 뒤에야 잠잠해졌는데,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전에 들은 얘기를 믿게 되었네.
이제 한유韓愈가 이미 스스로 지방의 해가 되었거늘, 그대가 또 나로 하여금 지방의 눈이 되게 하고자 하니, 나에게 피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닌가?
나만 피해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대 또한 이 때문에 피해를 받을 것이네.
하지만 눈과 해가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짖는 것은 개일 뿐이라네.
헤아려보건대, 이제 천하에 짖지 않을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누가 감히 뭇사람들의 눈에 괴이함을 내보여 소란을 초래하고 노여움을 자초하겠는가.
나는 죄를 짓고 좌천된 뒤로 의욕이 더욱 떨어진데다, 9년 동안 남쪽에 거처하면서 각기병까지 심해져 점점 시끄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니, 내 어찌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내 귀에 거슬리고 내 마음을 소란하게 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나는 그야말로 쓰러지고 번민하여 더욱 지낼 수가 없을 것이네.
내 평소에 뜻하지 않게 구설수를 만난 일이 적지 않았으나, 남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만큼은 없었네.
그리고 들으니, 옛날에 관례冠禮를 소중히 여긴 것은 성인成人의 도리를 책임 지우려 해서라네.
이는 성인聖人이 특히 마음을 쓰신 일인데, 수백 년 이래로 아무도 다시 관례冠禮를 행하지 않았네.
그런데 근래에 손창윤孫昌胤이라는 자가 홀로 용기를 내어 이를 행하고는, 관례冠禮를 행한 다음날 조정朝廷에 나아가 외정外庭에 이르러 홀판笏版을 손에 들고 경사卿士들에게 “내 아들이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하자,
응대하던 자들은 영문을 몰라 멍하게 있었고, 경조윤京兆尹 정숙칙鄭叔則은 발끈 화를 내고 홀판笏版을 흔들면서 뒤로 물러나 서서 “이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하니, 조정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네.
천하 사람들이 경조윤京兆尹 정숙칙鄭叔則을 그르다 하지 않고 손창윤孫昌胤을 괴이하게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홀로 하였기 때문이네.
지금 세상에 스스로 스승이라 칭하는 경우도 대체로 이와 유사하네.
그대는 행실行實이 독실하고 문장文章의 조예가 깊어 저술한 문장이 모두 기백이 웅대하여 옛사람의 기풍을 갖추고 있으니, 내가 비록 감히 스승이 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가령 내가 그대보다 나이가 많아 도리를 듣고 글을 쓰기 시작한 날이 뒤지지 않는다 하여 진실로 나와 교제하며 견문을 말해주기를 원한다면, 내 진실로 가슴속에 얻은 것을 모두 말해주고 싶네.
그대가 만일 스스로 선택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면야 괜찮겠지만, 만일 시비是非를 결정하여 그대를 가르쳐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나는 재주가 부족한데다 앞서 말한 것도 두려우니,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네.
그대가 전에 보고자 하던 내 문장文章을 이미 모두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대에게 자랑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다만 참으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대의 기색이 어떤지를 살피고자 해서였네.
그런데 이제 보내 온 편지의 내용이 모두 너무 과분하니, 이는 그대가 진실로 아첨하여 칭찬하거나 거짓으로 아부하는 무리라서가 아니라, 단지 몹시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것이네.
과거 내가 어리고 또 젊었을 때에는 문장을 지을 적에 문사文辭를 잘 꾸미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문장이란 를 밝히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네.
따라서 진실로 구차히 화려하게 지어 채색彩色을 힘쓰고 운율韻律을 과시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네.
내가 보여준 글들은 모두 나 자신은 도에 가깝다고 여기지만, 정말로 도에 가까운지 먼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도를 좋아하는 그대가 내 글을 인정하니, 어쩌면 도에서 멀지 않을 법도 하네.
그러므로 나는 문장文章을 지을 때마다 감히 가벼운 마음으로 쓴 적이 없으니 이는 너무 가벼워 진중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이고, 감히 태만한 마음으로 쉽게 쓴 적이 없으니 이는 너무 느슨하여 엄밀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이고, 감히 혼미한 기운으로 써내려간 적이 없으니 이는 애매모호하여 혼란스러울까 두려워해서이고, 감히 뻐기는 기색으로 지은 적이 없으니 이는 건방져서 교만할까 두려워해서였네.
치닫는 감정을 억제한 것은 함축미含蓄美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충분히 드러내는 것은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자유분방한 것은 통창通暢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간결하게 하는 것은 절제節制 있게 하고자 해서이며, 혼탁한 것을 걸러버리는 것은 참신斬新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단단히 고집하여 지키는 것은 후중厚重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이 내가 를 돕기 위한 태도이네.
서경書經》의 필법筆法에 근거하여 언어言語가 질박함을 추구하고, 《시경詩經》에 근거하여 정취情趣가 무궁함을 추구하고, 《예기禮記》에 근거하여 예법禮法에 부합함을 추구하고, 《춘추春秋》에 근거하여 시비是非를 결단하는 것을 추구하고, 《주역周易》에 근거하여 변화變化를 추구하였으니, 이는 내가 도의 근원을 취하는 방법이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참고하여 기세氣勢를 가다듬고, 《맹자孟子》와 《순자荀子》를 참고하여 맥락脈絡을 통창하게 하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참고하여 단서端緖를 개척하고, 《국어國語》를 참고하여 의기義氣를 확대하고, 《이소離騷》를 참고하여 정서情緖를 깊게 하고, 《사기史記》를 참고하여 정갈함을 드러내었으니, 이는 내가 광범위하게 추구하고 다양하게 관통하여 문장을 짓는 방법이네.
대체로 이렇게 하는 것들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취할 점이 있는가, 아니면 취할 점이 없는가?
그대가 잘 살펴 선택하여 시간이 여유가 있거든 편지로 나에게 알려주기 바라네.
만약 그대가 빨리 편지를 보내 나와 함께 문장 쓰는 방법을 광범위하게 토론할 경우 자네에게 얻는 것이 있지 않다면 내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니, 또 어찌 스승이 되어달라는 등의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스승의 내실을 구하고 스승이란 허명을 버림으로써 남월南越 지방의 개들이 괴이함을 보고 짖어대는 일을 초래하거나 손창윤孫昌胤처럼 외정外庭의 벼슬아치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일이 없으면 다행일 것이네.
종원宗元은 답장을 쓰다.
유자후柳子厚가 편지 속에서 논한바, 문장을 짓는 취지는 그가 말한 내용이 모두 옳다고 감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요컨대 또한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몰두한 것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후세에 문장을 짓는 자는 그저 길을 가다가 부자의 돈을 겁탈해서는 천하에 과시하기를 “나 또한 의돈猗頓이다.”라고 하니, 어쩌면 그렇게도 자신의 역량을 모른단 말인가.
나는 이 때문에 분연히 일어나 “문장에 뜻이 있다면 반드시 육예六藝에 근간을 두어 성인聖人의 도를 구하는 것이 희망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역주
역주1 答韋中立論師道書 : 본문 속에 “나는 죄를 짓고 좌천된 뒤로 의욕이 더욱 떨어진데다 9년 동안 남쪽에 거처하면서 각기병까지 심해졌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元和 8년(813) 永州司馬로 있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 韋中立은 永州刺史와 唐州刺史를 지낸 韋彪의 손자로, 元和 14년에 進士에 급제하였다. 元和 7년에 韋中立의 할아버지 韋彪가 崔簡의 후임으로 永州刺史에 부임했는데 이때 長安에서 할아버지를 찾아뵙기 위해 永州에 온 韋中立이 작자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고, 다시 長安으로 돌아가 편지를 보내 자기의 스승이 되어 글 짓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였다. 이 편지는 그에 대한 답이다. 魏晉 이후 학풍이 날로 무너져 스승을 통해 도를 묻는 것을 하찮게 보는 풍조가 성행하는 것을 비판하고, 자기의 讀書와 著述의 경험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후세 사람은 마땅히 옛사람의 성취를 흡수한 바탕 위에 자기의 개성 있는 풍격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말하였다.
역주2 蠻夷間 : 永州를 말한다. 지금의 湖南 零陵縣이다.
역주3 人之患在好爲人師 : 《孟子》 〈離婁 上〉에 나온다.
역주4 師說 : 韓愈가 李蟠에게 지어준 작품이다.
역주5 炊不暇熟 : 孔子는 道를 펴기 위해 천하를 周遊하느라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여유가 없고, 墨子는 널리 遊說하러 다니느라 집의 굴뚝이 검어질 겨를이 없었다는 말과 같은 논법으로, 韓愈가 주위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해 다급하여 長安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는 뜻이다.
역주6 挈挈而東 : 韓愈가 元和 원년(806)에 國子博士로 東都, 곧 洛陽으로 가서 諸生들을 가르쳤다.
역주7 邑犬群吠 吠所怪也 : 《楚辭》 〈懷沙〉에 나온다.
역주8 庸蜀 : 庸은 周나라 侯國으로, 春秋 때 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지금의 湖北省 竹山縣 동남쪽에 있었다. 蜀은 지금의 四川省 成都 일대이다.
역주9 踰嶺被南越中數州 : 嶺은 大庾‧騎田‧都龐‧萌渚‧越城 등 五嶺을 가리키는데, 貴州‧廣西‧廣東‧湖南‧江西‧福建 등 省에 뻗어 있다. 南越은 漢 高祖가 南越王 趙佗를 五嶺 남쪽에 봉해준 지역으로, 唐나라 때는 嶺南道로 불렸으며 廣州‧韶州 등 지역을 관할하였다. 지금의 兩粵‧安南 지역이다.
역주10 古者……將以責成人之道 : 《禮記》 〈冠義〉에 “冠禮는 禮法의 시초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聖王이 관례를 중시하였다.[冠者禮之始也 是故古者聖王重冠]”라고 하였다. 옛날에 남자의 나이가 20세가 되면 加冠禮를 행하고 成人이라 하였다. 천자와 제후는 12세에 관례를 행하였다.
역주11 孫昌胤 : 唐 玄宗 天寶(742~755) 무렵에 進士에 급제하고, 德宗 貞元(785~ 804) 무렵에 조정에서 관리로 있었다. 貞元 6년(790)에 秘書少監을 지냈으며, 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역주12 外廷 : 卿大夫가 조회하는 곳이다.
역주13 京兆尹鄭叔則 : 京兆尹은 漢나라 때 처음 설치한 관직으로, 도성을 관리하는 장관이다. 鄭叔則(715~785)은 滎陽 사람으로, 明經科에 급제하여 御史‧屯田員外郞‧吏部員外郞‧天平節度副使‧東都留守 兼河南尹 등을 역임한 뒤에 尙書左丞과 太常卿이 되고, 貞元 3년(787)에 京兆尹으로 전보되었다.
역주14 〈書〉 : 저본에는 없으나, 《唐宋文醇》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5 猗頓 : 春秋 때 魯나라의 富商이다. 陶朱公 范蠡로부터 “그대가 빨리 부자가 되고 싶으면 소‧말‧돼지‧양‧당나귀 등 다섯 가지 암컷을 길러라.”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한 결과 王侯에 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孔叢子 陳士義》
역주16 六藝 : 儒家의 기본경전인 《詩經》‧《書經》‧《禮記》‧《樂記》‧《周易》‧《春秋》를 가리킨다.
역주17 子厚〈書〉中所論文章之旨……其庶焉耳 : 茅坤이 쓴 평론이다. 《御選唐宋文醇 권13 河東柳宗元文 三》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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