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竊自冠好遊邊上
하여 問故老卒吏
하여 得段太尉事最詳
이요
會在下名未達
하여 以故不聞
하니 非直以一時取笏
니라
昔與退之期爲史에 志甚壯이라가 今孤囚廢錮하고 連遭瘴癘羸頓하여 朝夕就死하니 無能爲也라
今孤囚賤辱하여 雖不及無且建等이나 然比畫工傳容貌尙差勝이라
02. 〈단태위일사장段太尉逸事狀〉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한유韓愈에게 보낸 편지
문장의 음조가 곱고 낭랑하여 절로 흥이 나게 한다.
저번 편지에서 퇴지退之에게 역사歷史를 기술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말씀을 올렸는데, 답장을 받아보니 참으로 제 병통에 들어맞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확증을 얻지 못해 의심스러울 경우 곧바로 기록하지 못한다는 등의 여러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퇴지가 평소에 저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는 약관弱冠 무렵부터 변방 지역을 돌아다니길 좋아하였는데, 그때 나이 든 군졸이나 관리들에게 물어 단태위段太尉의 일에 관해 매우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영주자사永州刺史 최공崔公이 그 일에 관해 수시로 말해줘 또 태위太尉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 충분히 참고하고 대조할 수 있었습니다.
태위太尉와 같은 큰 절개는 옛날에도 사실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연히 한 번 의분을 떨쳤다가 마침내 큰 명예名譽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태위太尉는 나라의 어려운 일로 인해 군중軍中에 있을 때부터 마음가짐이 조금도 흐트러진 적이 없고 정무를 처리한 것 또한 어느 것 하나 대서특필할 만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위가 낮아 영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았던 것이지, 한때 역적의 홀笏을 빼앗은 것만으로 나라에 대한 신의信義를 삼은 것은 아닙니다.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은 죽었고 퇴지退之가 다시 사관史官의 도를 잇고자 사관史官의 자리에 앉았으니,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예전에 퇴지退之와 사관史官이 되기로 기약할 때에는 의지가 매우 강했으나, 지금은 외로이 유폐되어 있고 연달아 장독瘴毒을 만나 야위고 지쳐서 머지않아 죽을 처지에 놓였으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기대하는 것은 퇴지退之가 역사를 기술하는〉 과업을 끝내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태위太尉의 사적과 같은 것은 절대 누락시키면 안 됩니다.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이 형가荊軻에 대해 말할 때는 하무차夏無且가 한 말에 의거하였고,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에 대해 말할 때는 소건蘇建이 한 말에 의거하였고, 유후留侯에 대해 말할 때는 그림에 그려진 용모를 참고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외로이 유폐되고 미천한 입장에 처해 있어 비록 하무차夏無且나 소건蘇建 등과 같은 역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화공畵工이 용모를 그려서 전하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 것입니다.
이는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이른바 “믿을 만한 것을 전하고 드러난 것을 전한다.”라고 한 말과 부합되는 것이니, 비록 공자孔子라도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태위太尉의 사적이〉 저는 내심 믿을 만하고 또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숨겨진 사적을 기록한 글을 따로 준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