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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柳宗元(1)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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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自鏗鏘鼓舞
前者書進退之力史事러니 奉答誠中吾病이라
竊自冠好遊邊上하여 問故老卒吏하여 得段太尉事最詳이요
하여 又具得太尉實跡하여 參校備具
太尉大節 古固無有
然人以爲偶一奮이라가 遂名無窮이라하니
今大不然이라
으로 其處心未嘗虧側하고 其莅事無一不可紀로되
會在下名未達하여 以故不聞하니 非直以一時取笏니라
史遷死하고 退之復以史道在職하니 宜不苟過日時
昔與退之期爲史 志甚壯이라가 今孤囚廢錮하고 連遭瘴癘羸頓하여 朝夕就死하니 無能爲也
第不能竟其業이라도 若太尉者 宜使勿墜
今孤囚賤辱하여 雖不及無且建等이나 然比畫工傳容貌尙差勝이라
雖孔子亦猶是也
竊自以爲信且著
其逸事有狀이라


02. 〈단태위일사장段太尉逸事狀〉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한유韓愈에게 보낸 편지
문장의 음조가 곱고 낭랑하여 절로 흥이 나게 한다.
퇴지退之 관하館下에 올립니다.
저번 편지에서 퇴지退之에게 역사歷史를 기술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말씀을 올렸는데, 답장을 받아보니 참으로 제 병통에 들어맞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확증을 얻지 못해 의심스러울 경우 곧바로 기록하지 못한다는 등의 여러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퇴지가 평소에 저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는 약관弱冠 무렵부터 변방 지역을 돌아다니길 좋아하였는데, 그때 나이 든 군졸이나 관리들에게 물어 단태위段太尉의 일에 관해 매우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영주자사永州刺史 최공崔公이 그 일에 관해 수시로 말해줘 또 태위太尉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어 충분히 참고하고 대조할 수 있었습니다.
태위太尉와 같은 큰 절개는 옛날에도 사실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연히 한 번 의분을 떨쳤다가 마침내 큰 명예名譽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태위太尉는 나라의 어려운 일로 인해 군중軍中에 있을 때부터 마음가짐이 조금도 흐트러진 적이 없고 정무를 처리한 것 또한 어느 것 하나 대서특필할 만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위가 낮아 영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았던 것이지, 한때 역적의 을 빼앗은 것만으로 나라에 대한 신의信義를 삼은 것은 아닙니다.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은 죽었고 퇴지退之가 다시 사관史官의 도를 잇고자 사관史官의 자리에 앉았으니,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예전에 퇴지退之사관史官이 되기로 기약할 때에는 의지가 매우 강했으나, 지금은 외로이 유폐되어 있고 연달아 장독瘴毒을 만나 야위고 지쳐서 머지않아 죽을 처지에 놓였으니,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기대하는 것은 퇴지退之가 역사를 기술하는〉 과업을 끝내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태위太尉의 사적과 같은 것은 절대 누락시키면 안 됩니다.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형가荊軻에 대해 말할 때는 하무차夏無且가 한 말에 의거하였고,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에 대해 말할 때는 소건蘇建이 한 말에 의거하였고, 유후留侯에 대해 말할 때는 그림에 그려진 용모를 참고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외로이 유폐되고 미천한 입장에 처해 있어 비록 하무차夏無且소건蘇建 등과 같은 역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화공畵工이 용모를 그려서 전하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 것입니다.
이는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이른바 “믿을 만한 것을 전하고 드러난 것을 전한다.”라고 한 말과 부합되는 것이니, 비록 공자孔子라도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태위太尉의 사적이〉 저는 내심 믿을 만하고 또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숨겨진 사적을 기록한 글을 따로 준비하였습니다.


역주
역주1 與韓愈致段太尉逸事書 : 앞의 편지와 같은 해인 元和 9년(814) 1월에 쓴 편지이다. 《柳河東集注》와 《御選唐宋文醇》에는 〈與史官韓愈致段秀實太尉逸事書〉로 되어 있다. 段太尉는 段秀實(719~783)을 말한다. 唐나라 隴州 汧陽 사람으로, 자는 成公이며, 시호는 忠烈이다. 6세 때 어머니가 병이 들자 7일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당시에 孝童으로 불렸다. 代宗 때 四鎭‧北庭行軍‧涇原‧鄭潁節度使를 지냈는데 그가 재직하는 수년 동안 吐蕃이 감히 변방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德宗 建中 원년(780)에 司農卿이 되었다. 朱泚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 段秀實이 명망이 있다 하여 그를 초빙하자, 거짓으로 응하여 함께 어울리다가 어느 날 朱泚가 거사를 모의하는 자리에서 朱泚를 나쁜 놈이라고 꾸짖고 상아홀로 그의 이마를 내리쳐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게 하였다. 결국 그 자리에서 朱泚의 무리에게 살해되었다. 작자가 段秀實에 관한 숨겨진 일화를 자세히 기록하여 史官에게 올린 뒤에 또 이 당시 史官으로 있던 韓愈에게도 보내 段秀實의 列傳을 쓸 적에 빠뜨리지 말고 반영할 것을 당부하였다.
역주2 〈館下〉 : 저본에는 없으나, 《柳河東集》 및 《全唐文》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館下는 史館의 아래인데, 여기에서는 상대방을 존경하는 뜻을 담은 존칭으로 사용하였다.
역주3 若疑不得實 未卽籍者 : 앞서 작자가 韓愈에게 편지를 보내 段秀實의 일대기를 歷史書에 기록해달라고 말한 것에 대한 韓愈의 답장 내용으로 사료된다. 이로 인해 작자가 段秀實에 관해 믿을 만한 정보를 널리 수집하여 韓愈가 참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역주4 退之平生不以不信見遇 : 韓愈가 작자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작자의 인품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段秀實의 사실에 대해 확신이 없어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 말이다.
역주5 今所趨走州刺史崔公 時賜言事 : 趨走는 바쁘게 다니며 부역을 한다는 뜻으로, 작자가 刺史의 관속인 司馬로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崔公은 崔能을 말한다. 淸河 武城 사람으로 자는 子才이다. 朱泚의 난이 일어났을 때 副元帥 渾瑊이 邠州와 蒲州 지방의 군사를 통솔하였는데, 이 당시 그의 幕府로 있었으므로 邠州에서 있었던 段秀實의 사적에 관해 들어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주6 太尉自有難在軍中 : 段秀實이 玄宗 때는 安西府別將으로 高仙芝를 따라 적을 정벌하였고, 代宗 때는 涇原‧鄭潁節度使가 되어 변방을 방어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역주7 爲諒也 : 《論語》 〈憲問〉에 “어찌 평범한 보통 사람이 信義를 위해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어 죽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과 같겠는가.[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문구이다. ‘諒’은 《論語注疏》에 신의[信]라고 풀이하였다.
역주8 太史遷言荊軻徵夏無且(저) : 司馬遷이 《史記》 〈刺客列傳〉에서 荊軻가 秦王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한 제반 과정을 기술한 뒤에 贊에서 “세상에서 荊軻가 秦王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말하지만 모두 잘못된 말이다. 처음에 公孫季功과 董仲舒가 夏無且와 교제하였으므로 그때의 일을 잘 알고 있는데,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라고 하였다. 夏無且는 秦王의 의원으로, 荊軻가 秦王을 비수로 찌르려고 덤벼들 적에 현장에서 약 자루로 荊軻를 때리며 저지한 사람이다.
역주9 : 저
역주10 言大將軍徵蘇建 : 大將軍은 衛靑(?~B.C. 106)을 가리킨다. 그가 匈奴를 정벌하러 출정할 때마다 蘇建이 그의 부하로 함께 따라갔으므로 司馬遷이 衛靑의 列傳을 쓸 적에 衛靑과 관련된 사적을 蘇建을 통해 알았다.
역주11 言留侯徵畫容貌 : 《史記》 〈留侯世家〉의 贊에 “나는 그 체구가 장대하고 특이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의 초상화를 보니 모습이 마치 곱게 생긴 부인 같았다.”라고 하였다.
역주12 春秋傳所謂傳信傳著 : 春秋傳은 《春秋穀梁傳》을 가리킨다. ‘傳信’은 桓公 5년의 기사에 나오고, ‘傳著’는 莊公 7년의 기사에 나온다.

당송팔대가문초 유종원(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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